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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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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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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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진흙 속에 피는 꽃 10

DUMMY

노랗게 물든 세상 속에서도 떨어지는 핏물은 선명하게 보였다. 정확히 목을 관통한 부근에서 새빨간 선혈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리안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나무조각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한 가느다란 손아귀에 짙은 자주색 빛무리가 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기사 데릭과의 만남. 마지막 날 리안에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었던 푸른 불꽃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매일 밤마다 어렴풋이 잡히던 마나의 파편이 지금만큼은 그 어느때보다 또렷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끅... 끄윽....”


리안의 목을 옥죄던 팔뚝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두어번 피를 토한 남자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꺼지더니 그대로 리안 위로 쓰러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리안은 간신히 자신을 깔아뭉갠 남자를 옆으로 밀어냈다. 여전히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기분나쁜 감각과 함께 극심한 탈력감이 몸을 잠식했다.


첫 살인과 그간 겪어보지 못했던 지독한 악의.


떠올릴 때마다 손끝이 떨려오는 죽음의 감촉과 아직도 오두막에 진동하는 피비린내.


“마리....”


방황하던 사고가 멈춘 건 부엌에 쓰러진 마리를 상기했을 때였다.


“마리, 마리...!”


비틀거리는 발을 억지로 일으켰다.


발 끝으로 식어가는 시체와 피웅덩이가 찰박거렸다. 리안은 자꾸만 무너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붙잡았다. 전신에 감도는 마나의 고양감도, 사그라드는 빛의 파편도. 그때만큼은 저 멀리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몇걸음 나아가자 부엌 한켠에 그토록 갈망하던 마리가 숨죽인 채 늘어져 있었다. 리안은 뭐라 할 새도 없이 마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이제는 창백하기까지 한 마리의 안색에 가슴이 철렁해졌을 즈음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한순간 소녀의 검은 눈동자가 리안의 얼굴을 담았다.


“리안...?”


리안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응, 마리 누나. 나야. 나 여기 있어.”


리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마리를 제지했다. 그리고 주위에 널브러져있던 마리의 옷가지를 주워 그녀의 위에 덮어주었다.


“리안....”


“응....”


“괜찮아...? 다친 데는...?”


마리는 리안을 걱정하고 있었다. 리안은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응,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누나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도, 병사들도. 이제는 없어. 그러니까 괜찮아.”


“다행이다....”


“많이 춥지? 조금만 기다려 줄래? 일단 옷을 좀 입고, 불이라도....”


“...리안.”


막 일어서는 리안의 귓가에 마리의 흐릿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리안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애써 뜬 채, 한결같이 이쪽을 주시하면서.


파랗게 질린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가.”


“어...?”


리안이 반사적으로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어서 가, 리안. 너라도 도망쳐. 시간이 없으니까....”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리안의 뇌가 듣기를 거부했다.


가라고?


나 혼자서?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나. 누나 상태가 이런데 내가 혼자 어떻게 가. 아, 그렇지. 혹시 걱정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분명 조금만 쉬면 열이 내릴 거야. 그때 출발해도....”


리안이 천천히 다리를 굽혔다. 이마에 손을 가져가자 살갗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늦었다.


현실을 맞닥뜨린 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불에 데운 듯 달아오른 열감이 아까보다 더 심했다. 닿은 손바닥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 단순히 쉬는 걸로 나을 상태가 아니었다.


불씨 하나 없는 어둑한 오두막. 그 안을 휘감는 서늘한 봄날의 밤바람까지.


평소라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서 버틸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리의 고열은 이미 단순히 아픈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에 리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해열제. 해열제가 있다면.


그러나 그 가정은 손쉽게 부정되었다. 이런 버려진 오두막에 해열제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밖에 나가서 해열제의 원재료인 약초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리안은 여관일뿐 아니라 종종 도시의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약초는 이런 야심한 밤에 어린 아이가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포기하면 마리가 죽는다. 리안은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그렇게 마리에게 가벼운 옷가지를 덮어주고 밖을 나서려는 때였다.


푹.


뭔가 찔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쓰러진 마리의 옆으로 죽은 병사들과 같이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누나...?”


아주 잠시간 리안은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선 채로 얼어붙었다.


배 위로 작은 칼날 하나가 박혀 있었다. 다름아닌 병사들이 사용하는 단검이었다. 그 단검은 다름아닌 마리의 손에 들려 있었다. 리안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 스스로 근처 병사의 단검을 뽑아 그대로 배를 찌른 것이었다.


박힌 칼날 사이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당혹감은 찰나였다. 리안은 재빠르게 주저앉아 단검이 찔린 부위를 손으로 지혈했다. 억지로 짓눌렀다.


“왜, 왜, 왜...!”


알 수 없는 의문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작은 손바닥이 완전히 붉게 물들어도 피는 멎을 기미가 없었다.


“리안.”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안....”


다만 계속해서 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아, 그런가.


리안은 상처를 짓누르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지혈하기를 멈추었다.


마리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리안과 마찬가지로.


오두막에 들어온 기병은 총 세명이다. 기사급은 아니지만 제국군의 기병이라면 일반 병사들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정예병이다. 그런 기병 셋에게 추적 임무를 맡겼는데 한명도 돌아오지 않는다. 단순한 도시 약탈을 목적으로 한 제국군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변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적인 병력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과 같은 기병 셋.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을.


그런 마당에 아픈 마리를 업다시피해 도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안 혼자 도망쳐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판국이다. 무조건 뒤를 잡혀 둘다 죽을 게 뻔했다.


마리가 말한 도망쳐의 의미는 그런 뜻이었다. 자신은 이미 늦었다.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너라도 살 수 있다면.


“미...안해....”


억지로 내뱉는 목소리에 기침 소리가 섞였다.


“나, 사실... 리안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마리가 리안을 올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아였다는 거... 전부 거짓말이야. 부모님은 없지만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


“.......”


“원래 살던 마을에... 제국군이 밀려들어와서... 비겁하게 도망쳤어. 죽는게 무서워서... 혼자 모두를 등지고... 소중한 남동생을 내버려두고....”


마리의 눈이 빈 허공을 부유했다. 몽롱한 눈빛이 꼭 현실에 없는 무언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리안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보이는 건 어슴푸레한 부엌의 천장과 적막 섞인 희미한 달빛 뿐이었다.


“그때 나 혼자 도망치지 않았다면... 죽더라도 그 아이를 살렸었더라면... 그래서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리안 너와 비슷한 나이였을 텐데....”


네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어쩌면 리안 네게서 그 아이를 겹쳐보고 있어서일지도 몰라.


그래서 미안해. 미안해, 리안.


참회하듯 중얼거린 마리가 눈을 감았다. 리안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몇번이고 흘린 눈물이 또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나간 과거 속에서 헤엄치던 마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리안.”


어느새 리안의 두 뺨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지금... 우는 거야?”


“...안 울어. 누가 운다고 그래.”


“그러네. 리안은 멋진 기사님이니까... 울면 안 돼....”


리안은 눈가를 거칠게 닦았다.


“헛간을 나오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해?”


“헛간을 나오기 전에?”


“칼로스 왕국으로 함께 떠나자고 했던 거... 정말 기뻤어.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랬었지.


마리에게 단 둘이 떠나자고 했었다. 전쟁의 불길이 닿지 않는 곳, 아침마다 평화로운 햇살이 내려앉는 곳으로.


“지금이라도 가자. 얼마든지 데려다 줄게. 몇번이고, 몇번이고 계속. 마리 누나가 원할 때마다.”


리안은 눈물을 삼켰다. 흐르는 감정을 주워담기 벅찼다. 찢어진 마음을 가리기 바빴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웃었다. 리안은 일그러진 얼굴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럴까...? 우리 같이 칼로스 왕국으로 가서... 그래서....”


말이 뜨문뜨문 길어졌다. 끝을 직감한 리안이 마리의 손을 잡았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응.”


“집을 하나 짓고서....”


“응....”


빛바랜 추억. 만에 하나 존재할 수 있었던 미래. 마리는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삶의 끝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마리의 손을 잡은 채 리안은 그 모든 이야기를 경청했다.


남은 시간이 서서히 깎여나가고 있었다. 흐릿한 숨소리가 점점 길게 늘어졌다.


“리안.”


평소에 그토록 듣기 좋았던 마리의 목소리가, 이제는 슬프게만 느껴졌다.


“리안.”


마리가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이 리안의 뺨을 매만졌다.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내 꿈은 네가 행복하게 사는 거야....”


“.......”


“내 마지막 소원, 들어줄래?”


마리는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무시했다. 흐릿한 세상에서 비치는 리안의 얼굴은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망친 곳에서 만난 자신과 같은 외톨이 아이.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라서 저도 모르게 정을 붙였다. 신경써 돌봐주었다.


아이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연약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또 미련할 정도로 정이 많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안고 같이 죽을 게 뻔히 그려질 만큼이나.


그래서 이번만큼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바랐다. 두 번 다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죽은 남동생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응.”


리안은 우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해. 기사의 긍지를 걸고 맹세할게. 꼭 살아서 행복해 지겠다고. 그러니까....”


불현듯 마리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최후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그 안에 있었다.


“역시.”


가녀린 손가락이 리안의 뺨에 닿았다.


“리안은 웃는 게 더 예쁘네....”


“아, 아아....”


손이 떨어졌다. 호흡이 멈췄다. 닫혀버린 눈꺼풀 사이로 리안은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규가 아이 혼자 남은 오두막에서 하염없이 메아리쳤다.


“마리, 마리....”


리안은 마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채 가시지 않은 미미한 온기가 끔찍하리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듯 마리가 일어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만 같았다. 웃으면서 오늘도 힘내자며 환한 미소를 지어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올린 리안이 마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영원한 안식에 빠진 소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 웃자. 마음속으로 결심한 리안은 아까와 비슷한, 그러나 조금 더 편안하고 애처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잘 자, 마리....”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사랑해.”


***


어둑한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렸다. 작은 불씨로 시작한 불길은 날이 밝아올수록 점점 그 크기를 키웠다. 뒤늦게 달려온 제국의 병사들이 나무에 매여있는 세필의 말을 발견할 즈음 불길은 걷잡을 수 없는 화재가 되어 있었다. 시체 한구조차 제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큰 불이었다.


세명씩 다섯 쌍으로 이루어진 열다섯의 제국 기병들은 범인의 흔적을 쫓았다. 숲속 근처를 샅샅이 뒤져 어떻게든 단서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찾을 수 없었다.


일부러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손을 쓰기라도 한듯 뚝 끊어진 발자국이 소득의 전부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산을 올랐던 흔적이 선명했으므로 의문은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기병 셋을 죽이고, 완전하게 종적을 감춘 실력 있는 마법사.


그렇게 결론을 내린 제국군은 삼일째가 되어서야 사건의 범인을 포기했다.


그즈음 리안은 러스틴 왕국의 북쪽을 넘어서 남동쪽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물자 보급을 위해 작은 마을을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중에 돈은 많지 않았으나 대충 끼니를 떼울 정도는 되었다. 이따금 공복으로 인해 배가 울릴떄도 있었으나 그것이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


도리어 정신이 기이할 정도로 맑았다. 제국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나서는 더 거리낄 게 없었다. 리안은 쉬지않고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하던 마나의 흐름과 사용법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또 같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사흘이 되었다.


나흘이 흘렀다.


끊임없이 동쪽을 향해 걷던 리안은 일주일 째가 되자 러스틴 왕국 끝자락에 도착했다. 성인 남성도 힘든 거리를 아이의 몸으로 일주일만에 주파한 것이다.


눈앞에 그토록 고대하던 산맥이 펼쳐졌다. 러스틴 왕국과 칼로스 왕국을 가르는 국경지대인 노른 산맥이었다.


리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리를 두고 떠난 시점부터 그랬다. 돌아본 순간 두고 온게 너무 많아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마리의 임종을 지켜본 리안은 집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네 구의 시체를 모두 태워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장례를 치르고 싶었으나 가혹한 현실은 리안이 마리를 추억할 약간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리의 시신에 누군가 손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도록 불살라버린다면.


산을 오르면서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죽어간 사람들과 끝내 혼자 남은 자신. 비탄에 잠길 수록 메마른 눈물만이 아려왔다. 어깨에 더해진 또 한 사람의 무게가 숨막힐 듯 가슴을 짓눌렀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남은 건 누군가의 목숨을 방패삼아 살아남은 비루한 몸뚱이 뿐이다. 그럼에도 리안은 꿋꿋이 앞을 향했다. 평소보다 무거운 두 다리도, 어쩌다 유품이 되어버린 마리의 빛바랜 리본도. 전부 속에 묻었다.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을 나아갈 원동력으로 삼았다.


살아라.


죽어간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라.


부끄럽지 않게.


훗날 다시 만났을 때 웃을 수 있도록.


“......”


어느덧 산 중턱에 선 리안은 멀어진 최동단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올라갈 때만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던 산이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간 지나왔던 길들이 까마득히 작아 보였다.


잠시간 그 풍경을 응시하던 리안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마리.”


마리의 리본을 두 손으로 받쳐 바람에 흘려보냈다.


“나, 기사가 될게. 반드시 기사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게.”


불러온 바람이 리안의 검은 머리칼을 헝클였다. 한낮의 햇빛 아래 자줏빛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데릭이 말하는 정의로운 기사는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 마리의 몫까지, 마리 동생의 몫까지 열심히 살게. 그게 내 원죄이자 사명이니까. 그러니까....”


풀려난 리본이 푸른 하늘 너머로 춤추듯 사라졌다.


“안녕, 마리.”


전해지지 않을 작별 인사와 함께 남아있는 회한을 모조리 털어냈다. 가슴속 깊은 곳에 결의를 새겼다. 나아갈 용기를 다졌다.


“가볼게.”


희미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리안은 몸을 돌렸다.


영원히 부러지지 않을 이정표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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