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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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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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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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궁창 왕자 4

DUMMY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어난 리안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은 8시하고도 10분. 집결 시간인 10시까지는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서 내려온 리안은 방 구석에 걸려있는 옷을 갈아입었다. 잭의 여관은 길드와 가까운 도시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 시세보다 비싼 숙박비만큼 좋은 시설과 조용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곳저곳 근처의 여관을 순회하던 리안이 꽤나 큰 고정금액을 지출하며 눌러앉을 정도로.


창가로 다가가 활짝 문을 여니 서늘한 바람이 전신을 쓸어내렸다. 2층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새햐앴다. 한동안 그 풍경을 응시하던 리안은 다시 창을 닫고서 몸을 돌렸다.


시선 끝에 고이 기대놓은 검이 있었다.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도 함구해준 노인의 마지막 선물.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알고 있어요, 제프.”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안이 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퉁명스러운 태도로 던지듯 건넨 검이었지만 소년은 알고 있었다. 이 검은 오직 리안을 위해 노인이 제련해낸 검이었다. 사비로 구하기 힘든 강재를 사용해 만든 늙은 대장장이의 걸작.


어쩌면 리안이 떠날 것을 짐작하고 미리 준비해둔 걸지도 몰랐다. 노인은 생긴것과는 다르게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복잡한 감정과 함께 쓰게 웃은 리안은 정든 도시를 떠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검은 준비됐다.


그간 모아왔던 돈도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금화로 환전했다.


정신도 더없이 맑았다.


그리고 복수.


“......”


슬며시 감은 캄캄한 시야 너머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흘렀다. 아버지의 죽음. 불타오르는 저택. 어머니의 최후와 그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황금빛 갑주의 기사.


우연과도 같은 기사 데릭과의 만남과 헤어짐. 도시에 쳐들어온 제국군과 마리의 죽음. 점령당한 러스틴 왕국과 최후까지 전선을 지키다 괴멸된 레인 백작가와 그 휘하 기사단의 해산까지.


모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브라알라스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실을 자각했을 때도 그랬다. 마음을 약해지게 만드는 자잘한 미련들은 진창 속 피웅덩이에 쳐박은지 오래였지만, 타오르는 증오만큼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아라. 마리는 그런 말을 남겼다. 처음에는 그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긴 리안이었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다짐처럼 새긴 마리의 유언도 흐릿해졌다.


내가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런 내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리안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다시 세상이 돌아왔을 때, 소년의 자줏빛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의 편린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삭막한 방안의 풍경을 뒤로하고 짐을 챙겨 여관을 나왔다. 시간은 남았지만 미리 가서 나쁠 건 없었다.


자의건, 타의건 임시로 분대장을 맡았으니 주어진 일을 한다.


리안은 동쪽 야산의 초입을 향했다.


***


“전부 모인건가?”


“총원 47명. 결원 없습니다.”


“좋다.”


차프 대위는 눈앞에 정렬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른 시각부터 야산의 초입에 모인 용병들.


일전에 한번 봤던 면면이었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몇몇은 기대와 호기심, 또는 걱정 섞인 낮빛이었으나 대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한 의뢰가 아닌 17가문과 엮여있는 일이다. 각 분대장들이 분대원들을 인솔해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만 봐도 이번 일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만했다.


등 뒤에 맨 배낭이 먼 길을 가는 여행자처럼 불룩했는데, 다들 사전에 고지한대로 야영 준비를 단단히 한 듯했다. 차프 대위는 리안이 있는 쪽을 흘겼다. 어린 소년이 맡은 분대에서 약간의 잡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그의 분대였다.


소년의 등 뒤로 늘어진 용병들의 얼굴에서도 불만의 빛은 찾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였기에 그는 속으로 납득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실력이 확실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근처에 시립하던 소대장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대위님, 슬슬.”


“음.”


차프 대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묻겠다.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뀌거나 의뢰에서 빠지고 싶다면 손을 들어라. 실적에 흠은 가겠지만 치명적이진 않을 것이다.”


용병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지부장은 의뢰의 내용을 들으면 발을 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어차피 의뢰가 끝나면 브레일 백작가가 겨울 사냥을 실패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떠돌 터였다.


그러니 당장 마음이 바뀌어 의뢰를 포기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억지로 참가해 겁에 질려 도망치는 쪽이 치명적이었다. 단순히 한명의 전력이 사라진 걸 넘어 지휘체계 자체에 혼란을 야기할 테니까.


“나가고 싶은 사람 없나?”


보상 때문인지 브레일 백작가의 명성 때문인지 용병들의 의지는 굳건했다.


“없습니다!”


“좋군. 예정대로 자세한 작전을 설명하겠다.”


차프 대위가 언제 꺼냈는지 모를 문서를 손에 들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이곳 그린힐은 브레일 백작령에서도 제일 끝에 있는 변방의 마을이다. 마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동쪽 야산에는 브레일 백작가와 이어지는 주요 경로가 몇군데 있었는데, 몬스터가 어느 쪽으로 올지 알 수가 없으니 인원을 나누어 기다린다.


대기하는 경로는 총 4군데. 각각 리안, 게일, 로건의 용병 분대와 차프 대위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가 한곳씩 맡는 계획이었다. 몬스터와 조우하고 나서 나머지 병력이 합류할때까지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절묘한 전력 배분이었다.


“보다시피 이건 조명탄이다. 신호탄으로도 사용하는 군용 마도구지. 마나가 없어도 사용 가능하니, 몬스터와 조우 즉시 안전장치를 부숴 하늘로 쏘아올려라.”


차프 대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세명의 분대장들에게 원통 형태의 작은 막대를 나눠주었다. 리안은 손안의 조명탄을 이리저리 굴렸다. 엄지손가락이 닿는 부근에 튀어나온 무언가가 있었다. 마나 회로와 연결되어 있어 대기중의 마나를 저장했다가 부수는 즉시 격발되는 형태였다.


“신호를 확인하는 즉시 합류한다. 야밤에 신호탄을 쏘아올릴 수도 있으니 두명 정도는 불침번을 세우도록.”


차프 대위가 쥐고있던 문서를 접었다. 화르륵.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사라져가는 종이 위로 새카만 재를 뿌렸다.


“혹시 질문있나?”


그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좋네. 작전에 들어가서 딴 소리를 하면 곤란하니까.”


“그... 몬스터는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손을 든 건 제 키만한 대검을 등에 걸친 남자였다. 그는 차프 대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확답할 순 없다만 이변이 없다면 오늘 밤이나 내일 정오 전까지다. 변종 몬스터가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엘도르 기사단이 아니면 추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다더군.”


“그 정도입니까?”


“변종이라 해도 무적은 아니다. 어쩌면 도주에 특화된 녀석일 수도 있지. 최후의 발악이나 다름없으니 의외로 합류하기 전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프 대위의 말에 용병들의 눈동자에서 화색이 돌았다. 브레일 백작가의 엘도르 기사단도 토벌에 실패한 몬스터의 처치.


성공한다면 엄청난 명예가 될 것이 분명했다. 뒤에 따라올 엄청난 액수의 보상도 용병들의 욕망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운이 좋다면 기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백작가의 사병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도 질문 있습니다!”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다른 용병이 손을 들었다.


“말하게.”


차프 대위가 용병을 향해 턱짓했다.


“그... 정확한 보수은 얼마나 됩니까? 아, 그게 벌써부터 돈 생각을 하는 건 아니고, 단순히 궁금해서....”


용병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근엄하게 서있던 병사 일부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차프 대위는 질책하지 않고 용병의 물음에 답했다.


“하긴 용병들이니 그럴 수 있겠지. 걱정하지는 말게. 제군들을 위해 몰래 언질을 주자면, 못해도 인당 금화 3개는 챙겨갈 수 있을 테니까. 특별히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그 이상도 가능할거고.”


“진짜입니까?”


“그러니 제군들의 분투를 기대하겠다.”


어디선가 기합 소리가 들렸다. 저마다의 무기를 들어올린 용병들이 화답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를 잠시 지켜보던 차프 대위는 곧장 명령을 내렸다.


“잡담은 여기까지다. 각자 위치로 이동하라.”


***


새하얀 눈밭 위로 냉기가 감도는 저녁이었다.


리안은 검을 품에 안고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가져왔는지 숯덩이에 올려둔 냄비가 팔팔 끓고 있었다. 코끝에 감도는 음식 냄새가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몸을 데우기 위해 불길 옆에 모여앉은 용병들은 쉬지 않고 스푼을 놀렸다.


“이야, 이거 진짜 맛있네.”


“어제 꼬맹이한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길래 뭔 미친놈인줄 알았는데, 이 이방인 새끼 꽤나 쓸만한 놈이었구만?”


“대장도 먹을래? 날씨가 이러니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지.”


리안 다음으로 나이가 어린 용병이 물었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리안에게 스튜가 가득 든 그릇을 내밀었다. 가볍게 감사인사를 건넨 리안이 첫 입을 떴다. 따듯한 온기가 온몸에 퍼져나갔다.


괜찮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야숙을 하면서 먹는 음식치고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용병들을 구경했다.


검을 쓰는 용병 여섯, 창이 셋.


방패를 겸하는 용병이 넷, 활을 쏘는 궁수가 둘.


리안을 포함하면 전위 열에 후위 둘이었다. 나쁘지 않은 구성이었다. 궁수는 확실히 멀리서 타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어지간히 합이 좋은 용병단이 아니라면 많을수록 운용하기 까다로웠다.


전투에서 전위를 서는 용병들과 사선이 겹치는 탓이다. 군대가 아닌 이상 장점을 살리기 어려웠다. 길잡이를 겸하는 레인저들도 중대급 규모가 아니고서야 한둘이면 충분한 이유도 있었다.


“새끼, 스튜 하나는 기가막히게 끓이는구만. 너 이제부터 내 동료 해라.”


리안이 몬스터와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사이 방패를 깔고앉은 용병이 말했다. 어제 리안을 보고 애새끼라며 악다구니를 쓰던 이방인 남자를 향해서였다.


“뭐요? 지금 뭐라고 했소?”


“원래 용병들이 언제 뒤질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라지만, 그렇기에 더 오늘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어? 돈과 명예, 그리고 여자. 여기에 난 하나를 더 추가하겠어. 바로 식사.”


“그러니까, 앞으로 당신이랑 같이 다니면서 식모 노릇이나 하라고?”


“잘 아네.”


“미안하지만 그린힐에는 여정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들린 거요. 때마침 소집령이 떨어졌다기에 시기 좋게 의뢰에 참가한 거고. 나는 혼자 활동하는게 편해서, 누구랑 일할 생각 없소.”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 이거지?”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다못한 리안 분대의 나머지 용병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또 시작이네 저거.”


“싸울거면 저기 가서 싸우쇼. 나는 잘거니까.”


“당장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쯤 하지 그래.”


“아니? 이렇게는 못 넘어가.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이 철벽의 니콜로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주마.”


“어, 어?”


이방인 남자가 당황했다. 장난기 가득한 사내의 얼굴에 용병들은 또 시작이라는 눈빛으로 끌끌 혀를 찼다. 오직 리안에게 스튜를 건네주었던 어린 용병만이 전전긍긍하며 리안과 둘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죽어! 이 돼지놈아!”


근처까지 다가간 사내가 발길질을 시작했다.


“끄아악!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요!”


“뭐긴 뭐야, 신고식이지! 밖에서 온 놈이라 그린힐의 유서깊은 전통을 모르나? 밥은 핑계고, 전부터 니 그 좆같은 뱃살좀 누르고 싶었다!”


“끄어억! 누가, 누가 이 미친놈좀 떼어 주시오!”


“대장, 아무래도 말려야....”


당황한 어린 용병이 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리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안을 쳐다보자 그는 두 용병이 아니라 그 너머의 어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대장?”


어린 용병의 음성에 의아함이 서렸다.


“온다.”


리안이 짧게 말했다.


아우우우우.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달빛조차 희미한 숲속에서 풀 스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변을 감지한 용병들이 각자 제 무기를 쥐었다.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다며 이방인 남자를 신나게 걷어차던 사내도 그때만큼은 정신을 차리고 리안과 같은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 뭐야 시발?”


“늑대?”


“설마...!”


흔들리는 수풀 건너 흐릿한 그림자가 늘어졌다. 땅을 박차는 소음과 거친 들짐승의 날숨이 그 뒤를 따랐다.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용병들의 표정에 숨막힐듯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궁수들이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이윽고 여러 마리의 들짐승들이 튀어나왔다. 개중에는 사람을 사냥하는 맹수도 여럿 있었다. 짐승들은 너나 할것없이 한 곳을 향해 두서없이 내달리는 중이었다.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무언가에 내쫓기는 것처럼.


리안은 한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왼손으로 검집을 잡고 칼자루에 가볍게 오른손을 얹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용병들이 혼자 달려나가는 소년의 기행에 기겁했다.


등 뒤로 경악어린 고성이 들렸다.


듣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늑대가 있었다.


촤아악!


리안은 주저없이 칼자루를 뽑아올렸다. 발검과 동시에 튀어나간 은빛 칼날이 늑대의 가슴부터 턱 밑까지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늑대가 리안을 보고 점프하는 순간 몸을 낮춰 반응한 것이다. 쏟아진 피가 해진 망토를 적셨다.


손끝을 비틀어 검 끝을 늑대의 턱에서 뽑아냈다. 리안의 머리 위를 날던 늑대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발 밑으로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우선 하나.


리안은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자세 그대로 몸을 더 낮추어 속도를 높였다. 스쳐 지나가는 짐승들 사이로 이쪽을 직시하는 곰의 붉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쫓기듯 도망치던 곰은 리안을 발견하고선 두 발로 몸을 세웠다. 서로의 공격이 닿는 지척에서 곰이 거대한 앞발을 리안의 머리를 찢어발길 기세로 휘둘렀다.


맞으면 죽는다. 리안이 평범한 용병이라면 그럴 터였다. 소년은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하기를 선택했다.


카가가가각!


소년의 검과 곰의 앞발이 쨍한 금속성을 자아냈다. 흩날리는 새빨간 불티가 허공에 녹아내린다. 리안은 칼자루를 쥔 손의 손목을 비스듬히 뉘였다.


날카로운 발톱 사이로 리안의 검이 파고들었다. 피륙을 가르는 익숙한 감촉이 손끝에서부터 선명하게 전해졌다. 곰이 뒷걸음질 치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사이, 세 걸음으로 추격한 리안이 공중에서 몸을 한바퀴 돌았다.


푸확!


피가 터져나왔다. 마나조차 실려있지 않은 리안의 검격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곰의 목을 베어냈다. 주인 잃은 머리가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리안이 다음 목표를 향해 남은 걸음을 옮겼다.


검광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맹수 한 마리가 쓰러졌다. 이따금 일격에 죽지 않는 놈들도 있었으나 예외없이 두번째 검격에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놓치지 않고 베어낸 리안이 들뜬 호흡을 갈무리했다.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짐승들도 없었다. 리안의 손에 절명하지 않은 들짐승들은 어느새 저 멀리 산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검날을 타고 한줄기 핏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달빛에 비친 은색 검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핏물을 털어낸 리안이 돌아서서 처음에 죽인 늑대를 포함한 맹수들의 사체를 뒤적거렸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용병들이 중얼거렸다.


“워....”


“미친. 이게 말이 돼?”


“말로만 들었지, 싸우는 걸 직접 본건 처음인데... 왜 마법사라는 소문이 나돌았는지 알 것 같군.”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대장?”


어린 용병이 물었다.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늑대입니까? 혹시....”


아까와 달리 매우 공손해진 사내가 방패를 왼손에 든 채 질문했다. 얻어맞은 허리를 문지르며 이방인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오.”


“아니라고? 저렇게 큰데?”


“저건 그레이울프요. 타 개체보다 크긴 하지만 그게 다야. 의뢰대로라면 변종 다이어울프는 몸길이만 오미터에 높이가 이미터니까 이놈의 두배는 될 텐데....”


“도망친 거다.”


리안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반문한 건 다른 용병이었다.


“도망쳤다. 본능에 따라서. 자신보다 까마득히 높은 존재에게.”


“......”


“맹수들이 들짐승을 사냥한 게 아니야. 같이 쫓긴 거다. 불가해한 재해에 살기 위해서.”


소년의 자줏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전에 없었던 리안의 진중한 분위기에 자리의 모든 용병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발밑의 그림자가 또렷해지고 있었다. 때마침 환한 불꽃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일전에 분대장들에게 나눠준, 신호탄이자 조명탄.


발원지는 차프 대위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길목이었다.


“준비해, 당장 이동한다.”


일대가 환해졌다. 재빠르게 납검한 리안이 명령했다. 멍하니 두리번거리던 용병들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대낮처럼 밝아진 숲속에서 열 명의 용병이 소년을 따라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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