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이 좋은 사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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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w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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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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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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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8화

DUMMY

북부인, 제국인에게는 야만인으로 불리우는 이들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북부장벽을 중심으로 두 부류로 나눠진다.


문명을 거부하고 옛 방식을 고집하는 장벽 너머 설원의 이들과, 장벽 안쪽 제국에 동화된 이들.


예브겐은 전자였고, 데릭손은 후자면서 전자에 동조하는 현지 협력자였다.


이들이 제국을 떠돌고 있는 이유는 평범하지 않았다.


“우리가 장벽 너머 여기까지 몰래 내려온 이유를 잊은 건 아니지?”

“알지. 전쟁을 대비해 향후 우리에게 칼 겨눌 제국 놈들을 죽이려고 온 거.”


그렇게 답한 데릭손의 눈길이 세브나에게 향했다.


“그러려고 이 ‘도구’도 가져왔다며.”

“잘 아네. 그러니까 외부인을 끼고 다닐 순 없어. 왜 굳이 내가 자네들에게 북부인 티 나게 수염을 길러 땋게 시켰겠나.”


혐오는 오히려 접근을 방지하는 좋은 방패가 되어 주니까.


“마빈도 제국인이란 걸 잊지 말게.”

“하지만 재능이 아까운데......”


데릭손의 눈에서는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내가 그냥 평범한 북부인 출신 용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안 돼.”

“에이 예브게에에엔.”


데릭손은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달라 칭얼대는 아이처럼 바짝 붙었다.


“미쳤어? 징그럽게 왜 이래. 안 떨어져?”

“아 그래. 이거한테 물어보면 안 되나?”

“이거한테?”


예브겐의 시선이 세브나에게 향했다.

여전히 소녀를 아끼는 눈빛이었으나, 사람보다는 귀한 물건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 혹시라도 마빈이 나중에 전쟁터에서 우리를 적대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럴 바에는 그냥 우리가 데려가서 키우자고.”


“고작해야 그냥 길에서 만난 녀석이잖아. 아무리 맘에 들어도 대계에 쓸 도구를 이런 데에 쓰는 건......”


“예브겐. 그 대계에는 강한 전사가 많이 필요하잖아. 마빈 저 녀석,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이니까 적당히 구슬려서 북부의 방식으로 가르치면 훌륭한 설원의 전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딱 한번만. 응?”


“......”


“이 도구도 어렵게 사정해서 불출해왔다며? 그런 만큼 최대한 써먹어 봐야지? 뭐 쓴다고 닳나? 어?”


“거 참. 알았어. 해보면 될 거 아냐.”


예브겐이 소녀의 두 어깨를 잡았다.


소녀는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없이 고개가 흔들리고 입이 슬쩍 벌어졌다.


“다섯 개의 부족을 집어삼켜 만들어진, 위대한 사명을 짊어진 주술의 아이여. 온 북부 설원의 가족을 위해서, 네 힘이 필요하단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어린 제국인 녀석이, 우리의 대의에 방해가 될 미래를, 갖고 있느냐?”


마치 시를 읊는 것만 같은 독특한 억양의 말이 예브겐에게서 흘러나오자, 게슴츠레하던 세브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광활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초점 없는 시선이 섬뜩하게 꿈틀거렸다.


“......”


왜 대답이 없지? 원래 이렇게 답이 느렸나?

두 남자가 귀를 쫑긋 세우고 답을 기다렸다.


한참 있다가 소녀가 뱉은 말은 짧았다.


“대......”


두 남자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대? 뭐야 이게? 무슨 말이야?”

“데릭손, 아무래도 데려가는 건 포기해야 할 거 같은데.”


마빈이 미래에 크게 성장해 장벽 너머의 동족을 위협할 운명을 갖고 있다면 이런 어눌한 대답 하나로 끝날 리 없다.


“고장 난 건 아니지?”

“주술이 무슨 기계인 줄 아나?”


지나치는 마을이나 도시마다 ‘여기에 설원의 가족을 해할 미래를 가진 이가 있느냐’라고 물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당장 한 달 전에도 ‘북쪽을 향해 많은 칼을 앞세울 용맹한 깃발이 있다’라는 답을 듣고 늙은이 하나를 독살했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갑자기 기능이 이상해질 린 없고.


“재능에 비해 운명은 보잘것없는 모양이지.”

“끙...... 어쩔 수 없지.”


데릭손은 마지못해 미련을 집어넣어야 했다.

한편 예브겐의 눈동자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니라고 즉답을 하지 않다니.’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왠지는 알 수 없었다. 예브겐은 주술사가 아니었으니까.


찝찝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후에 주술사들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저 요상한 대답이 나왔다 정도로만 기록해둘 일이었다.




***




일행의 바퀴자국은 무사히 도시로까지 이어졌다.


“와아......”


마빈은 높은 성벽과 큼직한 성문을 보고 입을 헤 벌렸다.


이보다 훨씬 고고하고 웅장한 회색 강철의 밀림이 아직 머릿속에 선명하지만, 성벽의 웅장함은 지구의 건축물과는 다른 영역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영락없는 촌놈이구나.”


감탄하는 마빈을 본 데릭손이 피식 웃었다.


“이런 큰 벽은 처음 봐서요.”


물론 영상 매체를 통해 유럽의 여러 성을 본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크린 너머. 이렇게 실제로 직접 올려다본 건 처음이다.


데릭손은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제국 도시의 구조와 특성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다.

제법 시시콜콜한 것까지 꿰고 있는 것을 볼 때, 도시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게 틀림없었다.


“아저씨는 정말 똑똑하네요. 용병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그런가?”

“흐흐흐. 나는 큰 꿈을 품고 있거든. 그러려면 많이 알아야 하지.”

“무슨 꿈인데요?”

“그건 비밀. 나중에는 알게 될 거란다.”


데릭손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왠지 모르게 짐승처럼 사나웠다.


마빈의 눈이 다시 도시를 향했다.


‘멋지다.’


모든 게 대단해 보였다.


높은 벽, 큼직한 문, 앞을 지킨 병사, 쭉 이어진 행렬, 문 안쪽으로 보이는 큼직한 시가지, 도시민들의 복식 등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전생보다 낙후된 문명이란 점은 상관없었다.


놀랍도록 발전한 지구의 한 귀퉁이보다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이곳이 더 소중했으므로.


마빈의 고개는 좌우로 목이 돌아가는 기능밖에 없는 인형처럼 계속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이 세상의 도시......!’


사방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숲 속의 나뭇잎 스치는 소리보다도 요란했고, 고개를 아무리 돌려도 시야에는 헛간의 병아리들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닐었다.


반듯한 석재 건물과 잘 닦인 돌길은, 마치 중세 초기에서 근세 초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 것 같았다.


제대로 된 문명의 모습이 가슴 속 깊숙한 곳을 계속해서 두드리며 말했다.

고작 여기서 끝낼 거냐고, 빨리 돌아다니며 어서 나를 네 눈에 담으라고.


초점이 풀렸던 마빈의 눈이 힘을 되찾았다.


‘정신 차리자. 이보다 더한 걸 앞으로 볼 텐데 이 정도에 넋이 나가면 어떡해.’


너무나 여행을 갈망하던 전생 때문일까, 마빈은 새로운 것에 감동을 느끼는 역치가 참 낮았다.


양 뺨을 주물럭거려 정신을 차린 마빈이 하늘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천사님.’


마빈의 감사한 마음에 대답하듯 푸른 하늘 가운데를 떠다니는 작은 구름이 한 차례 천천히 일렁였다.




***




도시로 들어온 상인 무리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마빈은 친분을 쌓은 상인들과 짤막한 인사들을 나누고 그들을 떠나보냈다.


마빈이 잠시 속했던 북부인 일행도 그러했지만,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떠난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마빈에게 제의했다.


“우린 저기 선착장에서 강을 타고 더 북쪽으로 올라갈 거야. 혹시 우리와 같이 가지 않겠니?”

“전 여기서 할 일이 있어서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 일? 여기 친지라도 있나?”

“아, 그게요.”


마빈은 여기서 무얼 할 건지 솔직히 얘기했다.

돈을 벌어서 무기를 살 거예요!


참으로 소박한 목적에 데릭손이 피식 웃었다.


“검이라면 우리가 마련해 줄 수 있는데.”

“정말요?”

“그럼. 북부는 질 좋은 철의 산지지.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검보다도 훨씬 좋은 물건이 많아.”


마빈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데릭손이 유혹했다.


“넌 사냥도 잘하고 칼도 잘 쓰잖니? 한 명의 당당한 전사로 대접될 거야. 저번에 설명해줬지? 북부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아주 인기가 많을 걸?”


“으음...... 아쉽지만 나중에 들를게요.”

“나중에?”

“네. 저는 여러 곳을 구경할 거거든요.”


마빈이 여행하고 싶은 곳은 많았다.


바다와 맞닿은 제국 서부, 드워프가 산다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산맥, 산맥 너머 여러 왕국들, 엘프가 산다고 하는 대수림, 삭막한 모래만이 가득한 대륙 남부의 사막......


보고 싶은 건 많지만 이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건 산더미 같았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한 계획을 말하는 마빈의 눈동자에서는 긴 시간 동안 다져진 빙하처럼 굳센 의지가 엿보였다.


데릭손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저런 눈을 한 사람은 설득이 먹히지 않지.


“그래? 아쉽구나. 참으로 아쉬워. 참으로...... 그럼 우리 만남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진한 아쉬움 가득한 한숨과 함께 일행이 등을 돌렸다.


“잘 가요! 나중에 북부에서 만나요! 세브나도 안녕!”


마빈이 해맑게 웃으며 배웅했다.


‘헤헤. 좋은 사람들이었어.’


멀어져가는 저들의 등을 보며 마빈이 기분 좋게 웃었다. 마을을 나와서 처음 만난 이들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라니!


제법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자 그럼. 어디부터 가볼까?’


이별의 아쉬움은 고이 접어 추억의 책장 속에 넣어 놓고, 마빈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구심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곳에서는 뭘 볼 수 있을까, 뭘 배울 수 있을까, 누굴 만날 수 있을까.


마빈은 힘차게 걸어 인파 사이로 스며들었다.




***




“그런데 예브겐. 어제부터 왜 이리 죽상이야?”

“......”


데릭손은 아무 말이 없는 예브겐을 채근했다.


“이상해서.”

“뭐가?”

“어제 새벽에 도구가 말을 했어.”

“혼자서?”

“그래.”


명령이 없으면 가만히만 있는 게?


“뭐라고 했는데?”

“단.”

“단 뭐?”

“단이라고 말했어. 그게 다야.”


데릭손은 예브겐이 안고 있는 세브나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제대로 문장도 못 만든다고? 설마 주술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때.


“......해.”


소녀가 중얼거렸다.


데릭손의 말고삐를 잡은 손이 굳고 예브겐의 경직된 시선이 품에 안은 소녀에게 향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건만, 또 말을 한다고?


주술의 부작용으로 정신이 파괴되어 한낱 인형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스스로 말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단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주술이 잘못 됐나?”

“잠깐만 예브겐. 이게 말한 걸 다 합쳐 봐봐.”

“합쳐......?”


데릭손이 졸라서 물어봤을 때 말한 ‘대’

어제 새벽 예브겐이 들은 ‘단’

그리고 지금.


“대단, 해?”


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예브겐. 혹시 말이야. 마빈 저 녀석의 자질이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엄청나서......”

“......”

“대답에 시간이 걸린 거라면......”


두 친우가 서로를 보았다.


둘의 눈은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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