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이 좋은 사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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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w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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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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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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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DUMMY

마법과 초인과 신성력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손짓 한 번으로 불과 얼음을 일으켜 부대를 몰살시킬 수 있고, 검 한 자루로 땅을 가르고 성문을 박살낼 수 있으며, 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병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신비가 존재하는 세계.


그러나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재능과 체질이라는 이름의 신의 축복을 받은 극소수뿐이다.

축복을 받는다 한들 절대다수는 그저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마력을 각성했건 안 했건, ‘평범한 이’들은 자신들만의 싸움법을 발전시켜야 했다.


긴 창을 내세워 방진을 만들거나, 갑옷 틈새를 노리든가, 둔기로 어떻게든 충격을 주려 시도하는 등이었다.


하지만 개인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싸움법은 의외로 박투였다.


난장판 속에서 싸우다 보면 무기를 놓치는 일이 부지기수이며,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의 무기를 자주 노리기 때문이었다.


무기를 놓치기 쉬운 초짜부터 시작해 노련한 베테랑까지, 근접전에서의 싸움은 바닥을 뒹굴며 아무렇게나 서로를 구타하는 레슬링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마빈과 북부인의 싸움이 북부인의 승리로 끝날 거라 지레짐작했다.


북부인 쪽이 갑옷을 제대로 갖추고 있고 덩치도 더 컸으며 딱 봐도 경험도 더 많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마빈은 공성추처럼 불리한 조건들을 모조리 박살냈다.


날렵한 몸놀림은 어떻게든 몸싸움으로 나아가려는 데릭손의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고, 깔끔한 손놀림은 승기를 잡자마자 상대가 대처하기도 전에 목숨을 앗아갔다.


“괴, 물......”


데릭손에게서 유언과도 같은 신음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그의 투구 속 눈빛이 떨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만약 그가 욕심을 부려 주술도구에게 미래를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저 마음에 드는 꼬마 하나를 만난 좋은 추억으로만 남았을까?


‘전사 신이시여...... 부디, 동족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도 버리지 못한 설원의 신앙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데릭손의 마지막이었다.


마빈은 검을 비틀어 뽑았다. 피가 바닥에 주르륵 흘러내려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데릭손이 쓰러지는 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을 천둥처럼 울렸다.


“이 새끼, 죽여 버리겠다!”


데릭손의 두 부하가 탁자를 들어 상대하던 용병들에게 내던지곤 마빈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대충 알겠어.’


사람 베는 맛을 익힌 마빈의 검이 번쩍였다. 도끼를 내려치는 북부인 하나의 오른팔이 거칠게 잘려나갔다.


짐승 써는 법만 알던 촌구석 사냥꾼 마빈은 데릭손과의 진검 대련과 지금의 실전을 거치며 사람 써는 법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놈!”


다른 북부인이 손도끼를 던졌다.


마빈의 손아귀가 팔이 잘려 멈칫한 북부인의 훤히 드러난 목을 움켜쥐었다. 생각지도 못한 괴력에 북부인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케헥!”


팔 잘린 북부인의 목 뒤에 손도끼가 박히고, 동시에 마빈의 칼끝이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죽어라아아!”


마지막 북부인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그 부릅뜬 눈이 데릭손과 같았다.

내가 죽더라도 너만은 데리고 가겠다!


덩치 큰 전사의 살의 가득한 돌진에도 마빈은 겁먹지 않았다.


머릿속에 경험 하나가 떠올랐다.


아이들과의 칼싸움 놀이를 받아주는 중에서 저렇게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아이들이 자주 있었다. 그럴 경우, 시야가 좁아져 밑 경계를 소홀히 하곤 했다.


마빈은 몸을 살짝 수그리고 검을 몸 정중앙에 위치시킨 채 앞을 향해 슬쩍 기울였다.

살짝 움츠린 몸은 몸을 조금만 틀어도 올려 베기에 특화된 자세가 되었다.


파각!


마빈이 허리를 틀며 칼을 올려 베자, 흥분하여 도끼를 높이 들어 내려치려던 북부인의 팔꿈치 어림이 반쯤 잘려나갔다.


손목을 자르는 것보다 억센 팔뼈의 느낌.

그 뻣뻣한 감촉을 마빈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기억했다. 다음번에 더 잘 자를 수 있도록.


팔이 베였지만 끝끝내 도끼를 내려치는 북부인. 그러나 당연하게도 도끼가 만들어내는 선은 마빈을 스치지도 못했다.


마빈의 손이 그대로 곡선을 그렸다. 그 선은 도끼와는 달리 상대의 목 언저리를 스쳤다.


“끄윽!”


목을 베고 지나가 핏물을 한 겹 더 바른 마빈의 칼날은 죽음이 예정된 북부인의 눈앞에 다시 세워졌다.


퍽!


용병과의 싸움 중에 투구가 벗겨져 무방비하게 된 북부인의 머리에 마빈의 내려치기가 작렬했다.


한때 마빈과 웃으며 소담을 나누던 북부인 용병은 눈이 풀려 바닥에 엎어졌다.


홀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네.’


첫 살인에 연속 세 명.

그것도 며칠 동안 자신과 웃고 떠들던 이들.


하지만 충격을 받기는커녕, 머릿속은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이나 고요한 연못의 풍광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몸을 달구던 열기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금방 사라졌다. 무슨 기계를 켰다가 끄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완전히 다른 몸을 가지고 새로이 태어났다는 게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근데. 이거 뒷수습을 어떡한담?’


여관 주인을 비롯한 모든 손님의 시선이 마빈에게 향해 있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이야아아아!”

“하하하! 제법인데?”


그들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며 소년의 분투에 환호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건 크나큰 대리만족을 주는 법.


안 그래도 북부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 얼굴도 앳된 한낱 종업원이 자기보다 덩치 큰 강도들을 훌륭히 쓰러뜨렸다.


“어이, 여기서 일하는 거 보면 돈이 궁한 모양인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떨어져, 이 녀석들아. 내 종업원이야!”

“아, 그래도 실력이 아까운데.”

“네놈들 용병업계 똥군기에 애 잡고 싶은 게 아니면 꺼져! 이리 와. 얼른 피부터 씻자.”


용병들이 슬그머니 접근해 꼬시려 드는 걸 차단한 여관 주인이 손짓했다. 마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당방위로 취급당할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환영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그건 이 도시를 몰라서 하는 생각.


카트라그는 대재앙 시기 동안 수많은 난민들을 받아왔고 범죄와 폭력이 들끓는 아수라장을 겪었으며 현재도 성벽 밖에 넓은 빈민가 무법지대를 갖고 있다.


이 자리의 손님들 중 죽은 시체 안 본 사람이 드물고 주먹질하는 광경 안 본 사람이 없었다.


“이봐들, 치우는 것 좀 도와줘!”

“그래. 대신 오늘 술값은 안 낸다.”

“지랄 마.”

“큭큭큭.”


여관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손님들이 나서서 청소와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나동그라졌던 탁상과 의자가 바로 섰고 시체들이 붉은 선을 그리며 질질 밖으로 끌려 나갔다.


“처음 보는 녀석인데 누구지?”

“가죽 걸친 거 보면 사냥꾼 같은데. 이번에 새로 도시에 들어왔나 봐.”

“정말 사냥꾼 맞아? 칼 쓰는 솜씨가 괜찮은데?”


언제 싸움이 있었냐는 것처럼, 여관은 손속에 가차 없는 소년 사냥꾼에 대한 얘기로 다시금 시끌거리기 시작했다.


덜컹!


“경비대요. 여기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를 받았는데.”

“늦어도 한참 늦었어 이 친구들아!”

“뭔 일인데?”

“야야 브리타,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알아? 사냥꾼 녀석이......”


한 발 늦은 경비대가 여관으로 들어와 시체를 끌어내고 목격담을 청취했다.


사람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술안주 삼아 한동안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것이다.


도시 생활 첫날.


마빈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새겼다.




***




골목의 안쪽. 여관 밖에 볼품없이 널브러진 시체들을 지켜보는 스산한 시선이 있었다.


‘데릭손. 이 친구야.......’


예브겐이 친우의 죽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데릭손이 조금 나이가 들었긴 하지만 만만한 전사가 아니거늘, 이렇게 처참히 실패할 줄이야.


예브겐은 이마를 싸쥐었다.

제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좋은 현지 조력자를 이리 허무하게 잃다니.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너무 무모한 짓이었을까? 습격 말고 독살 같은 걸로 해야 했나? 하지만 저 꼬맹이가 하도 싸돌아다닌 탓에 찾느라 시간을 허비한 데다 배 시간도 맞춰야 해서 어쩔 수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미 벌어진 일. 아무리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도구’를 사용하고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이 소녀는 윗선을 수십 번이나 간곡히 설득한 끝에 겨우 허락받은 중요한 물건. 여기서 예지 외의 일로 남용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꼬였구나.’


어쩌면 모든 게 오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마빈이 미래에 대단한 인물이 된다면 응당 제국의 적인 북부인에게 칼날을 겨눌 테니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은, 예브겐이 일종의 참모라서 내린 것이다.


만약 그가 주술사였다면 도구의 수상쩍은 대답을 분석해 다른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북부의 부흥에 방해가 되느냐란 물음에 예나 아니오가 아니라 대단하다는, 의도를 벗어난 대답이었으니까.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되돌리기는 늦었지만.’


자신의 오판 때문에 편견 없던 녀석에게 북부인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버린 건 아닐까. 정말로 저 녀석이 대단한 인물이 된 뒤, 북부인을 적대한다면......


예브겐은 쓰디쓴 입맛과 함께 조용히 골목길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




한밤중의 선착장은 조용했다.


떠나는 배도 들어오는 배도 없이 그저 고즈넉한 나무 끼익거리는 소리와 잔잔한 물결뿐인 곳.


그곳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세 명이 있었다.

북부에서 온 첩자 예브겐과 세브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북부인 용병.


“미안하네. 괜히 죽이겠다고 설쳐서 동료를 잃게 했으니.”

“아니우. 설원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설원의 자식답게 살다 갔으니 불만은 없수. 어차피 전사 신께서 모두 받아주지 않겠수?”


용병이라는 언제 죽을지 모를 직업을 선택한 이상 언젠가는 찾아왔을 결말이었다. 다만 그 끝을 장식한 인물이 의외여서 그렇지.


“잘 헤어진 녀석을 왜 갑자기 죽이려 했는진 모르지만 나는 댁하고 대장의 선택을 믿수. 둘 다 설원의 동족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짓 하는 거 아니우? 그러니까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겠수.”

“......고맙네. 믿어줘서.”

“고마우면 얼렁 배나 찾으슈. 껌껌해서 뭐가 퍼런 깃발인질 모르겠구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둘을 멍하니 뒤따라가던 세브나의 발이 멈추었다. 세브나의 고개가 대충 만들어진 목각인형처럼 천천히,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회색빛 석회수에 푹 담근 것처럼 죽어있던 소녀의 눈이 잠시나마 반짝 빛났다.


‘대단, 해......’


살아있는 주술도구라는 슬픈 운명의 아이.


소녀의 눈에는 도시 저편에서부터 그 무엇보다 찬란한 빛의 기둥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이 보였다.


‘고, 마......’


차가운 눈과 얼음으로 정신이 둘러싸인 이후 처음으로, 벽을 녹여 손을 내밀어준 대단하고 따스한 무언가.


“어서 따라와라.”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예브겐의 말에 소녀의 눈에서 짧은 시간 동안 감돌았던 미약한 빛은 도로 사라졌다.


허나 이미 운명은 엮였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


미래를 예지하는 꼭두각시 소녀는 기약 없는 훗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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