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로 환생한 9서클 대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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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8.10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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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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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 내가 호빠에서 일하는 이유

DUMMY

"마셔."


S급 헌터 김지현이 500ml 맥주잔에 양주를 가득 채워서 건넸다.


도수가 꽤나 높은 술이었다.


나는 망설이는 척 잔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약간의 연기는 필수다.


약한 척을 해서 팁을 이끌어내는 것, 호스트의 기본 스킬 중 하나니까.


"저... 이거 마시면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요...."


의도대로 김지현은 내 가랑이 사이에 100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꽂았다.


"F급이긴 해도 나름 헌터라며. 이 정도는 마셔야 되는 거 아니야?"


S급 헌터답게 이 누님 통도 크시네.


'돈을 주면 또 말이 달라지지.'


5억 원의 빚 때문에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돈의 노예,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오늘 하루 이 한 몸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그렇게 독한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갔고, 김지현과 나는 어느새 터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근데 왜 헌터면서 호빠에서 일하고 있는거야?"


"그게... 좀 억울한 일을 당했거든요."


"억울한 일?"


"네... 그 일로 큰 빚도 지게 됐고, 던전에도 못 들어가게 돼서...."


김지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뭔데 그래? 말해봐."


나는 취기를 빌려 힘겹게 입을 뗐다.



***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나와 지겹도록 한 선배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준영.


과동기이자 내 여자친구였던 다혜에게 집요하게 작업을 걸고 고백을 해대던, 그야말로 미친 새끼였다.


나와 다혜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선배님, 왜 자꾸 제 여자친구한테 집적거리는 겁니까?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그에게 여러 번 항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너 따위가 무슨 상관인데?"


이준영은 나를 개무시하고 계속해서 다혜에게 접근했다.


"준영 선배, 전 관심 없으니까 제발 그만하세요!"


다혜가 아무리 뿌리쳐내도 소용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과 선배들은 이준영을 감싸고돌았다.


"야 우현, 쪼잔하게 왜 그러냐?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고백을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선배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준영이 한국 1위 길드인 검무를 이끄는 S급 헌터 이재성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


이재성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인간이었다.


한국의 S급 헌터 3분의 1이 그의 검무 길드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런 이재성을 아버지로 둔 이준영은 갖고 싶은 건 뭐든 손에 넣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아마도 이준영에게는 다혜가 그런 '갖고 싶은 물건' 같은 존재였으리라.


하지만 다혜에 대한 그의 집착은 단순한 소유욕 이상으로 보였다.


캠퍼스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다혜는 이준영의 죽은 첫사랑과 놀랍도록 닮았다고 한다.


'이준영이 다혜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게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몰라.'


이런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은 2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준영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이준영을 잊고 지냈다.


그 새끼의 소식을 기사로 접하기 전까진.


「이재성의 아들 이준영, 뒤늦게 헌터로 각성... 클래스는 근접계 블러드 나이트.」


「이준영, 빠른 속도로 헌터 등급 상승 중... 숨길 수 없는 S급의 혈통.」


헌터, 그들은 지구를 침공 중인 마족들과 맞서 싸우는 인류의 수호자들이었다.


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방패였다.


하지만 그 자격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헌터로 각성할 확률은 1%가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하필 이준영 같은 새끼가 각성을 하다니, 신은 죽었다 생각했다. ​​​​​​​​​​​​​​​​


'나도... 헌터가 되고 싶다.'


이런 내 바람은 단순히 부와 명예를 위한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나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까.


10년 전, 서울 25구역에서 발생한 S급 던전 브레이크.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마족들은 내 인생을 산산조각 냈다.


아버지는 나를 지키려다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으셨고, 어머니는 마족의 공격으로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되셨다.


그로부터 1년 뒤.


- 현아, 엄마는 아빠 곁으로 갈게. 엄마가 미안해. 너는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그렇게 짧은 유서만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그 후로 줄곧 가슴 한편에 마족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대부분 성인이 될때쯤 각성하지만,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될때까지 각성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모두 나를 비각성자로 단정 지었다.


- 현아, 너도 나처럼 포기해. 우린 이미 늦었어. 그만 버티고 나랑 동반 입대나 하자.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 기도하던 어느 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성기사로 각성하였습니다!]


[상태창을 열어 상세 정보를 확인하세요.]


늦었지만 나도 각성을 하게 된 것이다.


'늦은 만큼 던전을 빡세게 돌아야 겠어.'


그렇게 각성 이후 두 번째로 게이트에 갔던 날이었다.


장비를 점검하던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어라? 우현 아니야? 꼴에 각성은 했나 보네."


고개를 들어보니 이준영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 선배님이 왜 여기 있으십니까?"


소문으로 듣기에 이준영은 C급 헌터였다.


원래 자신의 헌터 등급보다 두 단계 이상 낮은 던전에는 1년에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바.


이준영이 F급 던전에 왔다는 것은 그 한 번 뿐인 기회를 오늘 사용했다는 걸 뜻했다.


"알 거 없잖아? F급 주제에."


그는 그렇게 자신의 할 말만 하고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후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준영의 뒤통수를 후려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때가 아니었다.


"5분 뒤, 게이트 입장이 시작됩니다! 모든 헌터분들은 게이트 앞으로 모여주세요!"


던전에 입장해야만 했으니까.


"성기사님! 여기로 와주세요!"


나는 미리 구해뒀던 파티에 합류했고, 우리 파티는 5분 뒤 게이트로 들어갔다.


"다들 잘하시는데요?"


던전 공략은 수월했다.


파티원들은 모두 오늘 처음 본 사이였지만 다들 손발이 척척 잘 맞았고, 고블린의 시체가 쌓여가는 만큼 내 레벨도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발생했다.


"인간을 죽여라!"


갑자기 등장한 고블린 20마리.


파티원들과 나는 재빨리 대형을 갖추고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내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한 고블린이 들고 있는 검이 유난히 특이했던 것이다.


던전에서 보던 고블린들이 보통 사용하는 녹슬고 투박한 무기가 아니었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헌터들이 사용할 법한 검이었다.


'고블린이 왜 저런 검을 들고 있는 거지?'


그러나 전투 중 잡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위협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성기사님, 지금이에요!"


한 파티원이 외침에, 나는 곧바로 성기사 스킬을 시전했다.


[성스러운 일격]


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휘두르자,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황금빛 신성력이 일렁였다.


그런데 내 검과 고블린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쨍강-!


고블린이 들고 있던 검이 내 검에 맞고 그대로 부서져버린 것이다.


'이게... 뭐야?'


그 고급스럽게 생긴 검이 이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블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와 파티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고블린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었다.


"이제 끝났나 보네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한 파티원이 기쁘게 외쳤다.


"이제 고블린의 부산물을 좀 챙겨 볼까요?"


막 고블린의 사체를 파밍 하려던 그때.


풀숲을 헤치고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바로 이준영이었다.


'저 새끼가 여긴 왜?'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고블린이 들고 있던 검, 못 보셨습니까?"


이준영의 물음에 파티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그 검이라면... 여기 성기사 분께서 부셨는데요. 저기 바닥을 보세요."


이준영의 시선이 부서진 검으로 향했다.


"야, 우현. 네가... 이 검을 부쉈다고?"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예. 그런데요."


"이 검은 내 거야, 새끼야."


"선배님의 검이라고요? 분명 고블린이 들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검이 없어졌었거든. 그 검을 훔쳐 간 게 고블린이었던 거고. 이제 이해됐어?"


"아... 그렇습니까? 검을 부순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게 다야?"


"선배님이 간수를 제대로 못하셔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저보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검을 부순 게 누구지? 그것만 딱 말해, 새끼야. 너잖아. 내가 부쉈어?"


"아니, 제가 부순 건 맞지만-"


"맞지? 그러니까 당연히 배상을 해야겠지?"


"잠깐만요, 제가 왜 그걸 배상해야 합니까?"


"야 이 새끼야, 이 검이 어떤 검인 줄 알아? 검무 길드의 공용 장비라고. 길드의 재산에 손해를 입혀놓고 책임도 안 지려고 했어? 이 검의 구매가는 10억 원. 내 과실도 있으니 절반만 네가 물어라. 5억 원만 내."


'검무'라는 이름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검이 이준영의 개인 물건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검무의 공용 장비었다면 말이 달라진다.


검무 길드와 엮인 문제라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번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니까. ​​​​​​​​​​​​​​​​


내 주변에 있던 파티원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검무 길드의 장비라면... 이건 어쩔 수가 없겠는데요, 성기사님?"


"5억 원이 좀 큰돈이긴 하지만, 그냥 배상하세요. 눈 딱 감고 죽어라 던전을 돌면 못 벌 돈도 아니잖아요."


"10억 중에 5억은 자기가 낸다잖아요. 똥 밟은 셈 치고 그냥 돈 내세요."


"검무한테 잘못 찍히면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다던데... 그래도 돈보단 사람 목숨이죠."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나도 검무와 관련된 안 좋은 소문들을 익히 들어왔으니까.


이건 단순히 돈을 배상하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하... 이딴 억지스러운 일로 5억 원을 갚으라고? 실화야?'


이준영은 내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안 갚으면 뒷일은 어떻 게 될지, 너도 잘 알겠지? 넌 오늘부터 검무 길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사유는 길드 공용 장비 훼손. 5억 원 배상하기 전까지는 블랙리스트 안 풀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검무 길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되면 어떤 길드에도 가입할 수도 없고, 던전에서 함께 활동할 파티원도 구할 수 없다.


모두들 국내 1위 길드인 검무 길드의 눈치를 봤으니까.


하지만 초보들에게 파티는 선택이 아닌 필수.


고작 8레벨인 내가 파티원 없이 혼자 던전에 들어가 봤자 죽을 게 뻔했다.


"잠깐만요! 이건 사실상 던전 출입 금지 아닙니까? 방금전까진 배상을 하라더니, 블랙리스트에 제 이름을 넣는 건 무슨 모순입니까?! 배상을 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오 이 무능한 새끼야. 장기를 팔든 몸을 팔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떠먹여 줘야 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닥쳐!"


이준영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대학 다닐 때도 이해가 안 갔다니까. 다혜 같은 애가 왜 너같은 놈이랑 사귀는지. 엄마도 없어, 아빠도 없어, 돈도 없어, 가진 건 얼굴뿐인 놈이랑 말이야. 너 같은 새끼는 다혜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다혜를 위하는 거야. 알아?"


울분을 토해내는 이준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집착, 질투, 열등감, 그리고... 증오.


'잠깐, 이 새끼... 설마 아직도 다혜를...?'


그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 모든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준영은 처음부터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고블린이 자신의 검을 가져가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교묘하게 몰아넣어, 결국 내가 거액의 배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검무라는 이름이 언급된 순간,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내 최고 길드의 위세 앞에서, 신입 헌터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당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에 핏발이 서는 게 느껴졌다.


그런 나를 본 이준영이 비웃으며 말했다.


"어쭈? 내 앞에서 화를 내네. 야 이 새끼야. 너 내가 만만하냐? 이다혜한테 맨날 차이기만 하니까 내가 우스워? 여긴 대학이 아니야. 헌터 세계에서 내가 왕족이면 넌 노예라고."


"......."


"에휴, 됐다. 하찮은 네가 뭘 알겠냐. 잘 들어, 이자는 연 12%고 5년 안에 갚아. 5년 내로 못 갚으면 이자율이 더 오를 테니까 최대한 빨리 갚는 게 좋을 거야."


"이자요? 제가 돈을 빌린 것도 아닌데 왜 이자를 물어야 합니까!?"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길드에 5억 원을 채워 넣어야 하잖냐. 너 내일까지 어디 가서 5억 원 구해 올 수 있어? 없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자 12%는...!"


"너 법정 최고 금리 몰라? 12% 면 내가 싸게 해준 거야 인마. 꼬우면 소송 걸든가."


싸게 해준 거란다.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내일 사람 보낼 테니까 계약서에 도장 찍어라. 5년이다, 명심해. 시간이 너한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걸 잊지 마."


그렇게 일방적인 통보를 날린 이준영은 자리를 떴다.


"이런 씨발...! 으아아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애꿎은 고블린들의 사체를 난도질 해댔다.


푹!


서걱!


고블린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내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이준영 이 미친 새끼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난도질을 해댔지만, 그런 화풀이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 돈을 안 갚을 방법은 없는 건가?"


나는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이준영이 10억 원이라고 주장하는 그 검에 대해서 찾아봤다.


다행히 인터넷에 기사가 남아있었다.


「신생 길드 검무, 헌터 경매장에서 환희의 검 10억 원에 낙찰받아.」


그 검을 검무에서 10억에 산 건 맞았다.


게이트가 지구에 생겨난지 얼마 안 됐던 30여 년 전에 말이다.


어쩐지 10억 원짜리 검이 너무 쉽게 부서진다 했더니, 역시나였다.


'내구도가 얼마 남지도 않은 검을 나에게 넘긴 거야.'


어디 창고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쌓여 있었을 이딴 골동품 하나 부서졌다고 돈을 물어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검무 길드라면 말이 됐다.


그들은 대한민국 법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까.


검무 길드는 막강한 자본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법적 분쟁에서 늘 승리해왔다.


심지어 그들과 맞서려는 사람들은 종종 갑자기 사라지거나 비극적인 사고를 당하곤 했다.


'하... 소송을 거는 건 포기해야겠지.'


결국 나에게는 5억을 갚는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안 갚으면 진짜로 어딘가에 끌려가서 죽을지도 모른다.


'억울하지만... 일단 갚자. 그리고 이준영, 이 치욕은 꼭 되돌려줄게.'


다음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게이트를 찾았다.


"검무 길드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있으시네요. 죄송합니다. 검무 길드는 좀 무서워서."


예상대로 아무도 나와 파티를 해주지 않았다.


결국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 봤지만, 레벨업은커녕 죽을뻔한 위기만 간신히 넘긴 채 던전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헌터일로 돈을 버는 건 힘들겠다. 이러다 죽겠어.'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단 3시간만 잠을 자며 쓰리잡을 뛰기 시작했다.


노가다, 배달, 상하차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휴일 없이 365일 내내 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헌터라서 일반인보다는 체력이 좋았기에 그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게 무색하게 나는 원금을 거의 깎지 못했다.


"우현 씨, 오늘로 1년이 되셨네요. 남은 빚은 4억 9,137만 원입니다."


담당자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1년 동안 매달 500만 원이 넘는 돈을 갚았지만, 천문학적인 이자 때문에 원금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든 수입을 늘려야 하는데.'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취업 시장은 얼어붙어 있었고, 이자가 낮은 대출로 갈아타는 '대출 돌려 막기'도 불가능했다.


던전 브레이크 이후 게이트 밖으로 나온 마족들로 인해 대출자들의 사망률이 급증하면서, 담보 없이는 대출을 받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기관에서 담보 없는 대출을 해주긴 했지만, 그마저도 12%를 훨씬 웃도는 살인적인 이자율을 감당해야 했다.


'이제 4년밖에 안 남았어.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돈을 마련하지....'


그냥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지만, 어머니의 유서가 떠올라 차마 죽을 수도 없었다.


- 너는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아... 엄마,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렇게 희망 없이 단순 노동일만 전전하던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대학 시절 함께 알바를 했던 상우 형이었다.


- 현아, 요즘 힘들다는 소문은 들었다. 아는 형 중에 1구역 유흥가에서 술집 하는 사람 있는데 거기서 한 번 일해볼래? 시급도 최저시급의 3배래.


"... 진짜요? 그런 알바가 있어요?"


- 어. 웨이터 일인데 싹싹하게 잘 하면 팁도 많이 준다더라. 너 키도 크고 얼굴도 나름 잘생겼으니까 면접 한 번 봐봐. 밤에만 출근하면 돼.


최저시급의 3배?


의심부터 들 만큼 조건이 너무 좋았다.


이준영에게 통수를 맞은 뒤로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럼 가서 면접 볼게요. 만약 붙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야간 알바만 그만두면 되겠네요."


그렇게 웨이터 일인 줄 알고 시작했던 그 일은 알고 보니 호스트바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호스트 일이었다.


'하... 이건 단순한 웨이터 일이 아니잖아. 그냥 야간 상하차나 다시 하자.'


하지만 일을 그만두려던 나를 담당 실장이 붙잡았다.


"우현 씨,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듣자 하니 빚도 많다면서. 딱 며칠만 일해 봐. 그래도 그만두고 싶으면 안 붙잡을게."


실장의 설득에 넘어간 나는 며칠만 호스트 일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처음으로 날 초이스 했던 손님은 다른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그녀는 진상 짓도 하지 않고 이상한 것도 시키지 않으면서 팁을 70만 원이나 줬다.


'이야기 들어주고 술만 따라줬는데 뭐지?'


아직 때묻지 않은 내가 귀엽단다.


'며칠은 일해야 벌었을 돈을 하룻밤 사이에 벌어버렸네.'


그렇게 돈맛을 봐버린 나는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아니면 돈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몰라.'


돈 앞에 무릎을 꿇어 버린 것이다.


물론 나는 불법적인 건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허용된 테두리 안에서만 돈을 벌었을 뿐.


우리 가게도 나름 정식적으로 등록된 합법 업소였으니까.


다만, 팁을 많이 받으려면 손님들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했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괜찮았지만, 가끔 정말 참기 힘든 요구를 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짖어봐! 개처럼 짖으면서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면 팁 줄게."


처음에는 이런 요구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결국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왈! 왈!"


그렇게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현타가 올 때가 많았다.


'하아....'


하지만 줄어가는 빚을 보며 꾹 참았다.


'자존심이 내 빚을 갚아주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자존심까지 팔아가며 호빠 일을 시작한 지 네 달쯤 됐을 때였다.


다혜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현아... 너 너무 피곤해 보여.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그냥 일이 좀 바빠서 그래. 나 헌터인 거 몰라? 문제없어."


"현아 내가 준영 선배한테 잘 말해볼게, 응? 너 빚 없애달라고 말해볼게. 너 그러다 몸 진짜 상해...."


"미쳤어? 그 새끼한테 절대 연락하지 말라니까!"


이준영의 이름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다혜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다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럼 어쩌려고 그래!"


"갚을 거야."


"그 큰돈을 네가 무슨 수로 갚을 건데!"


그녀는 내가 호스트바에서 일을 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내가 야간 상하차를 하러 가는 줄 알고 있다.


다혜에게 차마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나는 거짓말을 해오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거짓말이 쌓여갈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


침묵 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돈을 벌기 위해 그녀와 보내는 시간을 포기했고, 매일 거짓말로 그녀의 마음을 배신했다.


그녀는 나 때문에 걱정하고 슬퍼하는데, 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다혜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지?'


그녀의 삶에 독이 되어가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그녀를 속이며 살 수는 없었다.


'다혜를 놓아줘야 해.'


나는 결국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다혜야. 우리 그냥 헤어지자."


"... 뭐라고?"


다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지만 나는 더욱더 매몰차게 나갔다.


그녀가 나에게 정을 뗄 수 있도록.


"헤어지자고. 이다혜, 너도 내 신경 그만 쓰고 그만 네 인생 살아."


"현아...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헤어지자니... 내가 이준영 이야기 꺼내서 그런 거야? 응? 말해 봐."


갑작스러운 내 통보에 이다혜가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흐으윽... 현아... 그럼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울고 있는 다혜를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 어쩌면 이준영 그 새끼 말처럼 내가 사라져주는 게 너를 위하는 거일지도 몰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고, 행복해라 다혜야. 5년간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등을 돌려 이다혜로부터 멀어졌다.


그게 이다혜와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한 채, 밤낮없이 일만 했다.


돈의 노예가 되어, 빚을 갚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



"이렇게 됐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김지현의 눈에 동정의 빛이 스쳤다.


"힘들었겠다...."


"네, 누님...."


"정말 사연은 너무 안타깝지만... 검무 길드가 얽힌 일이라면 나도 도와줄 수가 없을 것 같네. 내가 아무리 S급이라도 그 정도 힘은 없으니까."


혹시나 S급 헌터라면 도와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안 되나 보다.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신 자주 와서 지명해 줄게."


"진짜요?"


"단, 조건이 있어. 나는 대가 없이는 값을 치르지 않아."


"조건이라면...?"


"나랑 같이 나가자. 호텔도 잡아놨어. 거기서 술도 한 잔씩 더 하고... 어때?"


김지현의 눈빛이 끈적하게 변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 눈빛에는 욕망과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모든 손님이 이런 건 아니었지만, 종종 잠자리를 원하는 손님들이 있었다.


'하... 하필....'


손님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술 친구가 필요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혹은 이성의 온기가 그리워서.


김지현은 마지막 케이스에 해당됐다.


S급 헌터인 김지현은 자식이 두 명이나 있는 40대 유부녀였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외로움은 달래고 싶은데 유명한 만큼 보는 눈이 많았을 테고, 그래서 은밀한 호빠까지 흘러들어온 거겠지.


"... 죄송합니다. 저, 2차는 안 가요."


"2차는 안 간다고?"


마지막 자존심이라느니 그런 건 아니었다.


이 마당에 내게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겠는가.


'2차를 나갔다면 단골을 더 늘렸을 테고, 그랬다면 돈은 더 빨리 갚았겠지만....'


내가 2차를 거부하는 건 다혜 때문이었다.


해어진지 6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전 여친에 대한 예의랄까요...."


예전에 나에게 2차를 거절당했던 한 손님의 말이 떠올랐다.


- 참나, 화류계에서 일하는 쓰레기 새끼가 무슨 사랑 타령이야?


맞다. 난 쓰레기다.


하지만 쓰레기에도 급이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쓰레기의 순정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 아직 못 잊었구나. 억지로 가자고 할 생각은 없어. 다만 앞으로는 널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네."


그렇게 김지현은 자리를 떠났다.


'나름 매너도 있고 돈도 많은 누나였는데 아쉽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긴장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술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아무래도 도수 높은 양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그냥 여기서 잠깐만 잘까....'


그렇게 나는 그 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한 남자의 인생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9서클 대마법사였던 그 남자의 모든 순간을.


마치... 내가 그 남자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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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로 환생한 9서클 대마법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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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헌터 능력 검정 시험 (1) +6 24.08.19 13,866 238 15쪽
11 솔플러 +5 24.08.18 13,899 239 14쪽
10 F급 던전 (5) +9 24.08.17 14,195 250 16쪽
9 F급 던전 (4) +2 24.08.16 14,484 243 17쪽
8 F급 던전 (3) +2 24.08.15 15,029 243 15쪽
7 F급 던전 (2) +3 24.08.14 15,417 255 12쪽
6 F급 던전 (1) +3 24.08.13 16,139 246 12쪽
5 듀얼 클래스 +4 24.08.12 17,283 254 13쪽
4 마나 서클 생성 +6 24.08.11 18,772 279 15쪽
3 마법사가 되는 법 +7 24.08.11 19,345 292 17쪽
2 되찾은 전생의 기억 +10 24.08.10 20,486 314 16쪽
» 헌터인 내가 호빠에서 일하는 이유 +15 24.08.10 24,528 307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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