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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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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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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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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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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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P1: 우리는 영원한 스무 살

DUMMY

「기다려! 꼭 기다려···. 내가 갈게! 내가 꼭 널 찾아낼게!」


희미한 바람이 불었다.

속이 답답한 거 같았고 메슥거렸지만 눈 앞에서 멀어지는 아련한 그 눈을 기억해야 했다.

꼭 그래야만 했다.


「지수야, 가지 마···. 제발···.」


아득한 메아리 같은 그 목소리···.

달려가고 싶었지만 손끝조차 닿을 수 없는.

소리치고 싶지만 심장이 짓눌려 목만 메어오는.

어쩐지 평생 그리운 것 같은 그 음성···.



“··· 헉!”


지수는 번뜩 눈을 떴지만 이내 두통이 밀려와 두 눈을 꼭 감았다.


“아, 머리야···. 어제 나 얼마나 마신 거야···.”


흠뻑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에서 어제 얼마나 많은 술과 안주를 흡입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머리카락을 술독에 아예 담근듯한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으니.


'씻지도 않고 뻗었군···.'


날은 새벽이라기보단 아침에 가까운 햇살이었다.

분명 시간을 확인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뭔가 누워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 누굴까.'


아직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하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가슴 한켠은 시리고 아팠다.

로맨스를 꿈꾸기엔 너무 늦은 나이인 거 아닐까.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스레 울리자 눈을 뜨기 싫은 지수는 충전기 쪽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없다.

씻지도 않고 그 정신에 침대에서 잔 것도 용한데, 핸드폰이 제대로 충전이 되어 있을 리가.

대충 소리 나는 섹션을 휘적휘적 팔을 저었더니 묵직한 핸드폰이 잡혔다.


“응, 미애야.”


[야! 강지수!! 어제 언제 간 거야? 집엔 어떻게 들어갔어? 내가 얼마나 전화 많이 한 줄 알아?]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미애 목소리에 그녀는 대답하기 전에 어제 일을 회상했다.

분명 미애와 포차에서 술을 마셨고 2차로 가던 길부터 그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술도 못 마시는 년이 폭탄주 마실 때부터 알아봤어. 너 이번에도 전화 안 받았음 실종신고 하려고 했다고!! ]


“힝, 미안해···.”


[됐어.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됐고. 근데 너 오늘 출근 안 하냐? 비번 바꿨다고 하지 않았어?]


“응···. 응?”


미, 미친.

통화를 할게 아니라 시간부터 봤어야 했다.

7시 45분.


“미애야! 나중에 통화해! 끊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화장실로 냅다 뛰었다. 눈앞이 휘청거렸다.

술이 덜 깼나.

안 그래도 직장에 아니꼬운 시선도 많은데 지각이라니!


지수의 직장은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뛰어가면 20분,

걸어가면 30분,

택시를 탄다면···. 러시아워 시간이니 15분.


그래, 뛰어가자.

머리는 이미 떡 져 있지만 시간이 없다.

그래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피부화장은 그래도 해야겠다.


아직 직장에 쌩얼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그녀의 직장은 꽤 큰 병원이었다.

어느 정도 인지도 있고 평판 좋은 의사들과 시설도 꽤 신식이었다.

늦깎이로 간호학원을 다니며 간호조무사로 일한 지 어느덧 3년 차.

제법 혈관 주사도 잘 놓고 환자들에게도 친절해서 [이달의 친절 직원]에도 몇 번 뽑혀본 그녀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병원 앞에서 꼼짝을 안 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뛰어왔지만 지수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목 뒷덜미와 속옷은 땀으로 흥건하지만 절대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지수 쌤, 오늘 비번 착각하신 거 아녜요? 지각 안 하시던 분이 20분씩이나 늦게 오고. 환자 밀렸으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오세요.”


하필 병원 팀장님이 다른 간호사들과 있을 때 들어온 꼴이라니.

대놓고 욕 듣고 싶다고 말한 거랑 뭐가 다른가.


“네 팀장님. 주의하겠습니다.”


탈의실에 들어간 지수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빈속에 뛰었더니 더욱 힘들었다. 어제 먹은 안주가 트림이 되어 올라왔다.


“팀장님, 강지수 씨 비번 바꾼 거 기분 나빠서 일부러 늦게 온 거 아니에요? 팀장님도 참, 사람이 착해서 문제예요. 월요일은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20분이나 늦는 게 말이 돼요?“


동료 간호사가 팀장에게 항의했다.


병원 프런트와 탈의실은 작은 소리도 기가 막히게 잘 들리게끔 얇은 벽으로 가려져 있다.

아마 병원 공사 때 프런트를 너무 크게 지어 칸막이만 설치한 것일지도.


'하···. 대놓고 말을 하던가.'


곱게 접어놓은 간호복을 탈탈 털어 입은 그녀는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탈의실에서 나왔다.


“지수 쌤, 드레싱 카 끌고 2층부터 여기 체크 된 환자들 바이탈 체크랑 드레싱 좀 하세요.”


병원에 근무한 지 2년 차 된 동료가 차트를 내밀며 지수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그녀는 얼른 그 자리를 떴다.

드레싱이나 바이탈은 후임인 그들이 할 일이었지만 이미 라인이 만들어진 그들에게 대항할 자신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만 비참해질 뿐이었으니.


“204호 김점순 할머니, 좋은 아침! 드레싱 좀 할게요.”


“안 그래도 여기가 간질간질 혀···. 기분도 영 안 좋아···.”


“할머니, 제가 소독 깨끗하게 하고 튜브도 확인해 볼게요. 유동식도 잘 드셔야 해요~. 그래야 기분이 좋아지죠!”


지수는 앙상한 점순 할머니를 살짝 안아 옆으로 뉘고 관 주위를 살살 드레싱 했다.

이내 지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이 일이 좋았다.

노인들의 욕창 치료가 거의 주된 업무이지만 그녀는 이 일에 보람을 느꼈다.


“늙은이들도 잘 돌보고, 지수 간호사는 참 힘도 좋아···. 늙은이들 뒤치다꺼리한다고 힘들지?”


“무슨 소리세요, 절대 아니거든요~!”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하는데 이런 꼴이나 보이고···.”


“점순 할머니! 그런 소리 마세요. 아직도 이쁘세요.”


“지수 간호사 볼 때마다 예전 내 젊었을 적이 많이 생각나. 그, 올해 몇 살이라고 그랬지?“


“할머니도 참~! 몇 번을 물어보셔요, 나 서른아홉이라니까.”


“그래, 그랬지, 아직 한창이구먼.”


“에이! 점순 할머니 알죠? 몸은 이래도 우리 마음은 영원히 스무 살!!”


204호의 여섯 명의 할머니들과 지수는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한참이나 떠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잠시나마 행복했다.


*

폭풍 같은 오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지수는 병원 밖 공원에 앉아 오전에 마시지 못했던 커피와 함께 여유를 되찾았다.


항상 혼자인 그녀는 이 시간이 가장 편했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자연에서 비타민D를 온몸으로 받는 이 느낌을 사랑했으니.


지수는 요즘 꽂힌 아이돌 동영상을 보기 위해 자연스레 핸드폰을 꺼냈다.


나름 MZ세대의 M에 속하는 그녀는 시대에 뒤처져 보이는 노처녀로 보이기 싫었다.

지나가는 MZ의 Z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를 다 알고 싶었고 카페에 나오는 노래도 입 모양을 같이 하여 다 아는듯한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처음엔 병원의 아이돌에 열광하는 어린 간호사들과 어울리기 위함의 일종의 공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 많은 지수를 배척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작한 아이돌 공부(?)지만 지금은 온전히 그녀의 취미가 되었다.


“어머, PMB(pretty much boys)에서 미니앨범 나왔어? 대박.”


그녀는 새로 나온 앨범을 들을 생각에 살짝 흥분되었다.


요양 병원 앞은 휠체어로 산책 삼아 다닐 수 있는 공원이 있지만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은 보호자나 간병인이 없으면 오기 힘든 곳이다.

지수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소리를 조금 키우고 가사를 보며 흥얼거렸다.


♪ I can paint a picture of you in my mind, love all my life······.♪♪


한창 가사에 열띤 집중을 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지수야, 뭐하니?”


“아, 최 원장님! 안녕하세요! 하하···. 식사하셨어요?”


“지수는 또 밥도 안 먹고 여기 나온 모양이네, 허허.”


자신을 이 큰 병원에 일하게 해준 일등공신인 최 원장은 지수에겐 특별한 사람이었다.

면접을 보던 날에도 인사과 직원들은 그녀를 크게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최 원장은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어린 동생을 대하듯 지수야 라고 상냥하게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


「힘이 세게 생겼구먼! 인상도 좋아서 환자들이 좋아하겠어!」

라며 지수를 굳이 이 병원에 취직시켰다.

지수에겐 최 원장은 이 병원에 하나밖에 없는 그녀의 편이었다.


“이런 노래는 팝송인 거야?”


“아니에요~ 요즘 제일 핫한 아이돌 노래인데요, PMB라고 5인조 그룹이에요.”


“나도 알지, 이 사람은 연기도 한다지? 요즘 내가 애청하는 드라마에도 나오고 있더군.”


최 원장은 지수의 핸드폰에 나오고 있는 PMB 그룹 중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맞아요! 최 원장님 눈썰미 대박 좋으시다~ 얘는 엘런인데요, 제일 인기 많은 멤버인데 가수 겸 연기도 같이해요.”


“응, 나도 이 사람 노래도 부르는 거 몇 번 본적이 있지···. 지수는 이 사람이 최애 멤버인가?”


“아뇨, 저는 이 옆에 서 있는 이토 라는 멤버를 좋아해요, 귀엽잖아요.”


“아, 그렇군······.”


“엘런이 잘생겨서 인기가 제일 많긴 한데요, 그 싸가지가 바가지라는 소문이 많아서! 사생팬들조차 쉴드를 못 친대요! 이토가 일본에서 온 멤버거든요? 넘 착해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좋게요?”


지수는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내 최 원장의 얼굴에서 딱히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읽었다.

어쩌면 슬퍼 보이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지수가 일한 몇 년 사이 반백 발의 할아버지가 된 최 원장은 이 병원에서 알아주는 명의이다.

젊었을 적 일하던 큰 상급병원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용한 요양 병원 의사로 옮겼을 당시만 해도 이 병원에서 큰 화젯거리였다고 들었을 만큼 유능한 외과 의사라고 했다.


“이만 들어가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밥만 먹으면 영 졸리니, 원.”


하품을 하며 눈물을 찔끔 흘리는 최 원장을 따라 지수도 오후 업무를 위해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도 못한 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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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13 EP13: 지킬 수 있는 남자 24.08.29 6 0 10쪽
12 EP12: 모갈 1호 24.08.28 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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