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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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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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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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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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종로경찰서

DUMMY

유신은 아침이 밝자마자 호텔을 홀로 나와 인력거에 몸을 실었다. 재호가 오늘 아침 기차로 온다면 경성역 도착은 오전 11시 전후일 것이다.


그 전에 유신은 메데이아의 동향을 살필 생각이었다.

오전 8시가 되지 않은 시각에도 2층으로 우뚝 선 종로경찰서 앞은 출근하는 경찰들로 붐볐다.


‘아직 메데이아는 오지 않은 건가?’


유신은 경찰서 앞 큰길을 지나가는 인파에 섞여 천천히 움직였다.

이윽고 검은 차 한 대가 경찰서 앞에 섰다.


그 차를 본 경비대들은 절도있게 경례를 하고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유신이 기다리던 메데이아. 그는 경비대들의 경례를 받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가 삼엄한데. 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간다···.’


유신은 밖에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러나 큰 키에 외국인 같은 차림새의 유신은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이 집중될 게 뻔했다.


그때 죄수들을 실은 호송차가 경찰서 앞에 섰다.

6명가량의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둥근 통 같은 기구)를 쓴 죄수들이 차례로 내리자 순사로 보이는 몇몇 경찰들이 나와 몽둥이로 그들을 인정 없이 내리쳤다.


쓰고 있던 용수가 벗겨지고 죄수들은 수갑이 채워진 채 고통을 호소하며 땅바닥을 굴렀고 그 소리에 지나가던 조선인들은 경찰서 앞으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쯧쯧···. 저 어린것들이···.”

“독립운동하다 잡혀 온 사람들이래요.”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나···.”

“저런 나쁜 놈들! 저러다 사람 죽이겠어!!”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신도 그 틈을 타 경찰서 앞으로 다가갔다.

일본 경찰들은 한참을 맞고 있던 죄수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아! 재호···.”


경찰서 앞 죄수들을 본 유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용수가 벗겨진 죄수들 사이로 재호가 있었다.

분명 재호의 얼굴이 맞았다.

입술이 터지고 상투가 흐트러져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지만 틀림없는 재호였다.


“······”


경찰서로 죄수들이 들어간 뒤에도 유신은 한참을 멍하니 재호의 빈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로 온 지 만 하루 사이에 재호가 죄수로 끌려오다니!


유신의 예상 밖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 벌어졌다.


‘움직여! 생각을 해, 유신!’


유신은 곧장 다시 인력거를 타고 바삐 호텔로 향했다.



*

간밤에 푹 잔 엘런이 눈을 떴다.

침대 옆 협탁 위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언제 침대로 왔지?’


푹신한 솜이불 안에서 나온 엘런은 소파에서 모포를 덮고 얌전히 자고 있는 지수에게 다가갔다.

고른 숨을 색색거리며 마치 슬픈 꿈을 꾸는 듯한 지수를 보니 엘런은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소파에서 잔다니까···.’


엘런이 지수의 헝클어진 갈색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그녀의 뽀얀 피부가 더욱더 돋보였다.


하루 사이 더 야위어진 지수가 안쓰러워진 엘런은 그녀가 어제 일본 낭인들에게 홀로 감당했었을 수모에 마음이 저릿했다.


가까이 다가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려던 순간, 지수가 눈을 떴다.


“엘런···?”


엘런은 목이 잠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지수를 보고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일어났어? 야! 넌 애가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냐?”


아! 이게 아닌데.

왜 마음이랑 입이랑은 따로 노는 건지.


“내가? 지금 몇 시야···?”


“10시 넘었어. 기차 도착 시간이 11시야. 30분 뒤에 나가야 해.”


지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가 덮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리자 엘런은 자신의 셔츠를 입은 작은 체구의 그녀와 마주했다.


‘내 셔츠!’


셔츠를 입은 지수라니!

남자들의 판타지, 셔츠··· 를 입은 여자가 지수라니!

그것도 내가 입었던 셔츠를···.


이미 붉어져 있던 엘런의 얼굴에 채도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미안, 어제 입고 잘 옷이 없어서···. 엘런 네가 자고 있어서 허락을 미처 못 받았네. 벗어서 다려 줄게.”


벗는다고?


“아니! 벗지 마, 아니, 아니! 다리지 말라고···. 그냥 줘···.”


엘런은 한 손으로 자신의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어제부터 왜 이상한 생각만 드는 건지.


편하다고만 생각했던 지수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내려온 엘런과 지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현우와 만났다.


“유신이 방에 없어, 아침 일찍 나가는 걸 호텔 직원이 봤대.”


현우의 말에 지수는 걱정이 되었다.

슬퍼 보이던 유신의 눈빛이 계속 신경 쓰였다.

아마도 우리를 지켜주겠다던 그의 다짐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하는 것 같았다.


지수는 알고 있었다,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유신의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단 걸.


“종로경찰서에 다시 가지 않았을까? 유신이 별다른 말 없었으니 먼저 경성역에 가서 재호를 기다리자. 우리가 없으면 그쪽으로 유신도 올 거야.”


현우가 말하자, 엘런과 지수는 로비에서 일어났다.


호텔을 나서려는 찰나, 그들을 부르는 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력거에서 급하게 내리며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무척 초조해 보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유신?”


지수가 물었다.


“종로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다급한 유신은 말을 이어나갔다.


“메데이아를 감시하다가 죄수들이 호송차에 내리는 걸 봤는데 재호 씨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네? 재호가요?”


엘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네. 사람들 말로는 독립군들이 잡혀 온 거라던데 그중에 재호 씨도 포함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재호가 왜 거기···.”


현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재호 씨를 빨리 구출해서 다시 4차원 세계로 가야 합니다.”


“이럴 수가···. 왜 하필 종로경찰서에···.”


지수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에 흔하디 흔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곳.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에서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아왔고 자유와 조선의 독립을 억압하는 상징적인 종로경찰서.


왜 하필이면 그곳에 끌려간 걸까.


“어떻게든 재호 씨를 구출해내야 합니다. 메데이아는 나중 문제에요.”


지금은 메데이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재호가 그곳에서 협박이나 고문이라도 받는다면?

유신의 말대로 재호를 빼내서 우리가 다시 모일 수만 있다면.


“내가 재호를 빼내 볼게.”


잠시 생각하던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엘런이 물었다.


“내 옷을 봐. 뭘 입고 있니?”


그렇다.

현우는 지금 일본 순사 코스프레 중이다.


「나더러 일본 앞잡이나 하란 거야? 내가 왜?」


「그게 눈에 제일 안 띄어. 그리고 혹시 알아? 우리가 위험에 빠지면 네가 나서야지」


재호와의 대화가 생각난 현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식, 너를 구하란 말이었군.


*

네 명은 종로경찰서 앞으로 갔다. 경비가 여전히 살벌한 그곳에 들어가기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현우, 괜찮겠어?”


엘런이 물었다.


“뭐, 기차에서도 사람들이 다 속았잖아? 재호가 어디 있는지만 알면 좋을 텐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냥 나와요, 현우 씨까지 위험해지면 그건 정말 곤란합니다.”


유신이 현우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재호를 만나서 여기까지 뛰어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유신은 우리가 나오면 최대한 가까운 문으로 열어주기만 해요.”


현우는 종로경찰서로 당당히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경비대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현우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그들도 목례를 한 뒤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경찰서 안은 시끌벅적했다.


세금을 안 내서 잡혀 온 조선인, 독립군들을 도와줬다는 혐의를 조사받고 있는 조선인, 좁은 경찰서 안에서 왔다 갔다 바삐 움직이는 일본 경찰들은 현우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내부가 크지 않지만, 은근 복잡한 구조라 어디로 가야 재호를 만날 수 있을지 현우는 막막했다.


그때.


지하에서 고문을 받고 경찰에게 질질 끌려나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본 현우는 직감적으로 그를 따라갔다. 고문을 받은 남자는 경찰서 구석 자리에 위치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유치장은 너무 어두워 사람들의 앓는 소리와 울음소리만 무성할 뿐.

빽빽이 앉아있는 사람 중 재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재호가 독립군으로 끌려왔다면 여기 있을 것 같은데.’


큰소리를 내지 않고 재호를 재빨리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둘만 아는 암호 같은 말이 없을까···?


“어쩔티비.”


현우의 헛소리가 유치장 사람들의 눈을 집중시켰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없는 건가? 못 들었나?’


“쿠쿠루삥뽕.”


현우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소리로 다시 100년 전 사람들에게 외계어를 뱉어냈다.


“현우!”


유치장의 철창 앞에 있던 재호가 마치 오래 못 보고 지냈던 가족을 만난 듯, 현우를 보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현우는 재호가 다가오자 허리를 숙여 신고 있던 구두끈을 얼른 풀어 다시 묶는 척하며 재호에게 속삭였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미쳤어? 현우 너야말로 어떻게 들어온 거야. 여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아?”


“재호, 날 보지 말고···. 조용히 들어. 밖에서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난 널 구출해서 나갈 거야.”


“현우···.”


나를 위해 이런 곳까지 오다니, 재호는 그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졸창간, 구두끈을 묶고 있는 현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넌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종로경찰서의 경부가 현우를 보며 말했다


“너 어디 소속이야? 소속을 대.”


현우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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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P16: 스위트룸 24.09.02 5 0 10쪽
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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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P12: 모갈 1호 24.08.28 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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