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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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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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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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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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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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EP12: 모갈 1호

DUMMY

다음날 이른 새벽, 지수는 일찍 눈을 떴다.


어제 재호에게 받은 한복을 입어보기 위해서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한복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한복을 처음 입게 될 줄이야.


대충 속바지를 입고 속치마와 겉치마, 저고리까진 입었지만 고름이 문제였다.


‘리본 말곤 묶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는 대충 리본 묶듯이 고름을 묶어버렸다.


옥으로 된 노리개와 비녀는 또 어떻게 하냐고.

지수는 하나부터 열까지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힝, 핸드폰···!”


검색하면 다 나올 텐데.

오늘따라 핸드폰의 존재가 절실했다.


대충 드라마에서 본 대로 따라 한 그녀는 비단 쓰개치마를 얼굴에 둘러보았다.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네. 보름달 같아. 얼굴도 커 보이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한 그녀는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두루마기를 입은 엘런과 일본 순사 차림의 현우, 평민 옷을 입은 재호는 이미 내려와서 유신과 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풉! 켁켁! 푸하하하!”


물을 마시고 있던 엘런은 지수를 보자마자 물을 뿜으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아 왜! 뭐가 웃기는데!”


지수는 살짝 화가 났다.


“보름달인 줄! 아침에 달이 다시 뜬 줄!”


역시 엘런 너는 소문대로 싸가지가 바가지구나.


“야! 너는 누가 봐도 아저씨인 줄! 두루마기 색이 회색이 뭐냐? 스님이야? 회색의 간달프?”


지수도 질세라 엘런을 향해 아무 말이나 내던졌다.


“어쩔티비!”


“저쩔티비!”


“쿠쿠루삥!!”


“하! 그 유행어 지난 지가 언젠데!”


지수와 엘런의 유치한 싸움을 옆에서 보고 있던 재호가 현우에게 속삭였다.


“미래엔 우리 말이 많이 바뀌는 것 같네···. 어쩔티비?”


“글쎄···. 나 때는 저런 말은 없었는데···. 쿠쿠루삥뽕은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내 시대로 다시 돌아가면 바른 우리말을 가르쳐야 할 것 같네. 미래인들을 위해서.”


곧 유신이 내려왔다.

그는 평소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은빛 머리를 중절모로 깔끔하게 가린 모던 보이 느낌의 유신은 턱시도 안에 조끼를 입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모습이 흡사 결혼할 때 입는 예복 같았다.

거기다가 동그란 안경까지 쓴 모습이라니.

마치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주인공처럼 보였다.


“와···. 불공평해.”


엘런은 자신의 두루마기 옷을 들춰보며 불만을 표시했다.


“자, 모두 준비되셨나요?”


유신이 말했다.


“어디로 갈 겁니까?”


재호가 물었다,


“제물포역으로 가야 합니다. 기차표를 사서 타야 하니까. 일단 역에 도착해서 메데이아의 위치를 보고 계획을 짜도록 하죠.”


유신은 오두막집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지수와 엘런, 재호와 현우도 그 뒤를 따랐다.


“지수, 이리와 봐.”


지수의 뒤에 있던 재호가 그녀를 불렀다.


“한복 고름은···. 이렇게 묶어야 해.”


그는 지수의 한복 고름을 고쳐 매어 주었다.

상투를 틀었음에도 재호는 여전히 미남이었다.

100년 전 사람이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할까.

그녀의 저고리에 재호의 손길이 닿자 지수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유신은 회중시계를 턱시도 안에서 꺼냈다.

시간을 맞추는 듯하더니 이내 ‘딸깍’ 소리가 났다.

유신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세요, 그대들은 제가 지킬 테니.”


유신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대문을 힘껏 열었다.



*

제물포역 정문으로 나온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제물포역은 생각보다 아담했지만 정말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열차를 타러 온 사람들, 근처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사는 사람들, 인천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까지 모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로 모르는 척은 하되, 최대한 가까이서 행동해야 합니다.”


유신은 모두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기차표를 살 돈입니다, 필요할 때 쓰세요.”


“아니, 유신! 1000원이라니요!”


재호는 봉투를 열어보더니 너무 많은 액수에 놀라 차마 받지 못하고 손을 떨었다.


“1000원이 많은 돈이야?”


현우가 재호에게 물었다.


“많지···. 한 번도 이렇게 많은 돈은 만져본 적도 없어. 열차 일등석을 900번은 탈 수 있는 돈이야. 이 돈이면 우리 독립군들이 1년을 먹고 버틸 수 있어···.”


“그 돈이 필요할 겁니다. 모자란다면 더 드릴 테니.”


유신이 재호를 보고 웃었다.


저 많은 돈이 어디서 났을까.

유신이 일해서 번 돈은 아닌 것 같고···.

훔친 건가?

지수는 쓸데없이 궁금해졌다.


“이제 여기서부턴 따로 행동합니다. 서로 신분이 달라서 모여있으면 역무원들이 의심할지도 몰라요. 기차가 출발하면 기차의 제일 뒤, 화물칸에서 만납시다.”


그들은 표를 사기 위해 따로 줄을 섰다.


조선인들은 외국인과 일본인과는 서는 줄이 달랐다.

일본인과 외국인들과는 달리 삼등석에만 앉을 수 있으므로 좌석이 한정적이었다.

그들은 기차표를 사기 위해 서로 경쟁이었다.

매표소 뒤에서 서로 밀고 싸우고. 난장판이었다.


“지수, 잘 보고 따라와!”


엘런은 표를 사기 위해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지수도 열심히 엘런의 뒤를 따랐다.


“앗, 내 쓰개치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따라가다 쓰개치마가 벗겨진 지수는 땅에 떨어진 치마를 주워 다시 머리에 얼른 썼다.


“엘런!”


잠시 한눈판 사이에 엘런은 사라지고 없었다.


“엘런!!”


시끄러운 난장판 속에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엘런은 없었다.


지수는 표를 사려는 수많은 인파에 밀려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숨이 막혔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점점 뒤로 밀리는 것 같다.


“야!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잘 따라오라고 했잖아!”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엘런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안 되겠다···. 강지수, 내 손 꼭 잡아.”


지수는 엘런의 손을 꼭 잡았다, 엘런과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 여긴 핸드폰도 없으니까.


“아니! 그렇게 말고.”


엘런은 지수의 손을 깍지 손으로 다시 꽉 잡았다.


엘런은 넓은 어깨로 어깨빵을 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두루마기를 입은 엘런의 뒷모습이 웃기면서도 제법 늠름해 보이기도.


다행히 지수와 엘런은 무사히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그사이 이미 유신은 외국인 전용칸 일등석을 받았고

현우도 일본 순사 자격으로 이등석 칸으로 표를 샀다.

전쟁 같은 표 사기에 성공한 엘런과 지수도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헉헉···. 벌써 지쳐.”


지수는 정신없이 엘런에게 끌려오느라 숨이 찼다.


“체력이 이렇게 약해서 쓰냐? 벌써 지치면 어떡해? 나중에 기차에 타면 자리에 앉아서 좀 쉬어.”


“엘런.”


“왜.”


“손 좀 놔줘. 손가락 아파···.”


“어? 아.”


당황한 엘런은 여태껏 잡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던 지수의 깍지 손을 뿌리치듯이 빼버렸다.

그동안 어찌나 꽉 잡고 있었던지 손가락이 얼얼했다.



「뿌우! 뿌뿌ㅡ」


곧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엘런과 지수는 너무 큰 기차 소리에 귀를 막았다.

증기기관차의 요란한 소리와 엄청나게 뿜어대는 수증기에 그들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새까만 기차 옆에 쓰여 있는 「모갈 1호」

지수는 학창 시절 배웠던 근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최초의 기차가 경인선의 모갈 1호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역사와 함께라니···.’


기차가 도착하자 지수는 긴 한복 치마와 쓰개치마를 각각 한 손씩 잡고 얼른 기차에 발을 디뎠다.

속치마 속에 속바지, 버선 위에 고무신까지. 겉엔 한복을 입고 쓰개치마까지 쓴 그녀는 아까부터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 어어!”


지수가 열차 계단을 오르며, 치맛자락을 밟아 무게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아줌마야?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올라가.”


엘런은 자신의 넓은 가슴으로 그녀의 뒤를 받쳤다.


“아니···. 자리 맡으려고···.”


“왜, 가방이라도 던져놓으시게? 어차피 다 똑같은 자리야.”


그녀의 등이 따뜻했다.

엘런의 가슴이 따뜻해서였다.


그녀의 등에서 맥박 소리가 들렸다.

아니, 맥박 소리는 그녀의 등이 아니라 엘런의 가슴이었던 것 같다.


엘런은 두 팔로 사뿐히 그녀를 잡고 들어 기차에 올렸다.


엘런과 지수는 삼등석 구석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엘런은 지수를 먼저 안쪽 창가 자리에 앉혔다. 폭이 큰 치마를 사람들이 밟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좁은 나무 의자에 치렁치렁한 치마가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


“지수 넌 여기 계속 앉아있어. 난 차표 검사가 끝나면 화물칸으로 갔다 올게.”


“왜? 같이 가면 안 돼?”


“둘 다 자리를 비우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자리를 뺏길 수도 있고···.”


“··· 알았어.”


지수는 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답답한 속바지와 한복 때문에 도저히 2시간 가까이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승무원이 차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검사가 끝나자 엘런은 일어서며 지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복잡하고 냄새나는 삼등석 칸에 그녀 혼자 놔두려니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뚫고 화물칸으로 지수와 이동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빨리 올게. 조금만 기다려.”


“응.”


지수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뽀얀 얼굴에 쓰개치마를 두르고 활짝 웃는 유치원생 같은 그녀의 모습에 그는 피식 웃음이 났다.


기차 제일 뒤 칸에 도착한 엘런은 어두운 화물칸 문을 열자, 갖가지 곡식들과 보부상들의 짐, 인천항에서 잡아 온 수산물, 수레가 빼곡하게 실려있었다. 그 어둡고 빼곡한 수레 사이로 일본 순사가 보였다.

현우였다.


“유신과 재호는?”


엘런이 현우에게 다가가 물었다.


“엘런, 재호가 안 보여.”


“뭐? 아까 표 살 때 분명 내 뒤에 있었는데.”


“내가 삼등석 칸을 계속 둘러봤는데 재호가 보이질 않아.”


“이런···. 표를 못 산 걸까···.”


「드르륵!」


화물칸 문이 다시 열렸다.


깔끔하고 세련된 턱시도 차림의 유신이었다.

그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메데이아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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