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새글

자빵
그림/삽화
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110
추천수 :
0
글자수 :
94,585

작성
24.08.29 22:00
조회
4
추천
0
글자
10쪽

EP13: 지킬 수 있는 남자

DUMMY

“메데이아를 찾았다구요? 어디서 말입니까?”


현우가 물었다.


“이등석 칸에 앉아있더군요. 하얀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처럼 보였습니다.”


“흰 정복을 입은 사람이라면 저도 이등석 칸에서 본 거 같군요. 키가 크고 허리춤에 권총도 차고 있었어요. 일본 경찰 치곤 꽤 높은 사람 같이 보이던데···.”


일본 순사 자격으로 이등석 칸에 탔던 현우도 그를 보았다, 유신과 같은 머리 색과 키도 훤칠한 것이 형제는 제법 닮아 보였다.


“다행히 아직 우리를 눈치채진 못한 것 같습니다. 재호 씨는 아직인가요?”


“아! 사실 재호가 기차 안에 없어요. 표를 못산 것인지···.”


현우가 대답하자 유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큰일이네요. 하필 지금···.”


“일단 우리끼리 진행하죠. 메데이아를 잡은 다음 재호가 있는 제물포로 다시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엘런이 나서자 유신은 정색하며 말했다.


“그건 위험해요. 재호 씨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자칫 잘못하다간 길이 엇갈려 다시 돌아가지 못해요. 일단 우리가 경성으로 간다고 했으니 재호 씨도 경성으로 올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계획을 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지금 메데이아를 잡지 못한단 거에요?”


엘런은 실망스러운 말투로 유신에게 말했다.


“경성역에 가서 기다립시다. 저는 메데이아를 미행해서 그의 신상부터 파악해볼게요. 그대들은 경성역에서 재호 씨를 기다리세요.”


엘런은 벌써부터 역한 기차 냄새에 속이 안 좋았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환기도 안 되는 복잡한 삼등석 칸에서 두 시간이나 버티려니 짜증이 났다.

기차 안에서 긴 장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할아버지,

우는 아이를 일곱이나 데리고 서서 가는 부부,

자리다툼을 하는 사람들,

혼잡한 기차 안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도둑들···.

그야말로 생지옥 같았다.


그런 사람들 속에 지수는······.


지수, 지수는 혼자 잘 있을까?

엘런은 갑자기 혼자 있을 지수 생각이 났다,

그러더니 자신도 모르게 화물칸을 박차고 나갔다.


“엘런! 어디가! 엘런!”


뒤에서 현우가 엘런을 불렀다. 그러나 엘런은 들리지 않았다.


젠장, 혼자 놔두는게 아니었어.

빨리 돌아온다고 했는데!

차라리 데리고 같이 올 걸 그랬어!


불길한 예감이 엘런을 미치게 했다.


삼등석 칸의 문을 벌컥 연 엘런은 지수를 찾기 시작했다.

지수가 앉아있던 구석진 칸 쪽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지수!!”


그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엘런은 지수 자리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밀치며 뛰어갔다.


“엘런···!”


머리가 헝클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수와 일본 낭인 세 명.


지수에게 무슨짓을 했는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들은 지수가 쓰고 있던 비단 쓰개치마와 노리개를 들고 있었다.


“에헤헤! 네 서방인가? 얼굴이 허여멀겋게 뜬 걸 보니 샌님이구먼!”


낭인 중 한 명이 거들먹거렸다.


“지수, 괜찮아? 이 미친놈들!”


“햐···. 이런 옥으로 만든 노리개는 어디서 나셨나? 이거 돈 좀 되겠는데? 저 여자 머리에 꽂힌 비녀도 값이 꽤 나가겠는걸?”


일본 낭인중 한 명이 쓰러져 있던 지수의 머리채를 잡아 비녀를 뽑아냈다.

그들이 비녀를 뽑자 지수의 찰랑거리는 갈색의 긴 머리가 달리는 기차의 바람에 흩트려졌다.


“뭐하는 짓이야!”


엘런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퍽!」


찰나, 엘런은 일본 낭인들 사이로 들어가 지수의 머리채를 잡은 놈의 얼굴을 미친 듯이 가격했다.


한 번도 누굴 때려 본 적은 없었다.

고작 드라마를 촬영하며 액션신이 잠깐 있을 때 무술 감독에게 코치 받은 게 다일 뿐. 흉내는 제법 낼 수 있지만 실제로 싸워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엘런은 그들보다 훨씬 키가 큰 덕에 싸움에 유리했다.


그러나 이들은 낭인이다.

떠돌아다니며 조선인들에게 약탈과 겁탈을 일삼고 돈만 쥐여주면 누구나 죽여주는 되는대로 사는 양아치 중의 양아치.


엘런은 세 명을 혼자서 상대하기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놈만 팼다. 한 명쯤은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


그들이 힘이 셀진 몰라도 피지컬은 어른과 아이와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엘런이 한 놈만 패는 동안 나머지 낭인들은 옆에서 엘런을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나 엘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맞고 있던 낭인의 우두머리는 엘런에게 이길 재간이 없자,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엘런! 칼! 칼이야!!”


지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엘런은 칼을 휘두르는 우두머리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엘런이 피지컬이 낭인들보다 월등하다지만 마음먹고 휘두르는 칼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진 몰랐다.


“이 새끼들! 당장 그만두지 못해!!”


순간. 뒤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본 순사 차림새인 현우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칼을 꺼내 낭인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의 턱 아래에 쓱 들이대었다.


“비켜, 버러지 같은 새끼들.”


화가 난 현우는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벨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고, 순사 나으리~ 저희는 일본인입니다. 이 조선 연놈들이 먼저 저희에게 달려들었습니다요···. 왜 저희에게 그러십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꺼져.”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현우는 칼을 우두머리의 목까지 점점 들이댔다.

엘런과 지수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아는 척을 하면 안 되기에 최대한 그들과의 눈길을 피했다. 빨리 이놈들을 그들과 떼어내야 하는데.


“흠···. 순사 나리도 조선말을 잘 쓰는 걸 보니, 조선인 순사인가 본데, 조센징은 조센징 편이다 이겁니까요?”


낭인 패거리 중 우두머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현우의 눈을 응시했다.

그 낭인의 눈은 살기가 가득한 외눈박이였다. 그 섬뜩한 눈에 현우는 긴장했다. 낭인도 현우의 두려움을 읽고 한술 더 떠서 도발했다.


“오호···. 그러니까···. 조센징 순사 따위가 대일본제국 사람에게 칼을 들이댔다는 거지?”


낭인들은 현우의 칼 따위는 무섭지 않은 듯 점점 현우에게로 다가갔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현우의 긴 칼이 떨어지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엘런을 겨누었던 낭인의 단도가 현우의 목을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뭐가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현우의 뒤에서 웬 키 큰 남자가 성큼 다가와 말했다.


“이 냄새 나는 곳에서 시끄럽게 뭘 하느냐고 물었다.”


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메데이아!’


현우는 그를 알아보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감히 일본 경찰에게 칼을 들이대다니. 역시 너희들은 대일본제국의 수치스러운 쓰레기로군.”


메데이아는 낭인들의 칼을 보고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나마 한쪽 눈이라도 있어 봐줄 만했는데, 나머지 한쪽 눈도 곧 잃고 싶나 보지?”


그는 가죽으로 된 허리끈에 달린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키가 크고 서늘한 회갈색 눈빛을 가진 메데이아는 유신과 같은 은빛 머리칼이었다.

근육이 꽤 있어 보이는 다부진 몸에 날카로운 턱선은 더욱더 그의 인상을 차갑게 했다.


메데이아의 총을 본 일본 낭인들은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조선인들이 자리다툼을 하는 것 같기에 잠시 와서 훈계를 준 것 뿐입니다요···. 안, 안 그래도 이제 막 떠날 참이었습니다···. 그럼···.”


낭인들의 우두머리는 패거리들에게 눈짓하더니 슬금슬금 메데이아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일본제국 순사이면 순사답게 행동해. 멍청하게 저런 쓰레기들한테 당하지 말고.”


메데이아는 현우는 흘깃 쳐다보고는 쓱 지나갔다.


메데이아는 지수의 비단 쓰개치마와 노리개를 주워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수의 긴 머리가 엉클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새초롬하게 꼭 다문 작은 입술은 꽤 겁을 먹은 듯 보였다.


흥,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퍽 아름다운 여인이군.


“괜찮으시오? 같은 일본인으로서 대신 그대에게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데이아인 줄 알 리가 없는 지수는 쓰개치마와 노리개를 그에게서 받았다.


“그럼 이만. 편안한 여행이 되길 바라오.”


메데이아는 다시 이등석 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지수와 엘런에게 괜찮은지 묻고 싶은 현우도 눈빛으로만 그들을 응시하다 빠져나갔다.

옹기종기 구경하던 조선인들도 다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엘런,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지수는 엘런을 부축해 자리에 다시 앉혔다.


“이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니야. 얼굴만 안 다쳤으면 됐지. 아이돌은 얼굴이 생명이잖아?”


엘런은 그의 까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수에서 찡긋 웃어 보였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왜 괜히 나서서 그래! 쓰개치마든 노리개든 비녀든 뭐든 다 줘버리면 그만인데!”


“미안해, 지수.”


“뭐가?”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빨리 온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충분히 빨리 왔어.”


지수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엘런은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녀를 지킬 수 있었음에 뿌듯했고 한 번도 그 누구를 위해 나서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조금 바뀌고 있음에 스스로도 새삼 놀랐다.


그 하나로 기분 좋아진 엘런은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는 꾸벅꾸벅 절을 하는가 싶더니 곧 창밖을 보던 지수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잠들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EP22: 소중한 장난감 NEW 4시간 전 1 0 9쪽
21 EP21: 슬픈 영화 24.09.21 2 0 10쪽
20 EP20: 복숭앗빛 입술 24.09.06 3 0 10쪽
19 EP19: AtoZ 24.09.05 4 0 9쪽
18 EP18: 그녀의 연기 24.09.04 5 0 10쪽
17 EP17: 종로경찰서 24.09.03 4 0 10쪽
16 EP16: 스위트룸 24.09.02 4 0 10쪽
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 EP13: 지킬 수 있는 남자 24.08.29 4 0 10쪽
12 EP12: 모갈 1호 24.08.28 5 0 10쪽
11 EP11: 잃어버린 시간 24.08.27 5 0 9쪽
10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5 0 9쪽
9 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24.08.24 5 0 10쪽
8 EP8: 라메탈 별에서 온 아스트론 24.08.23 4 0 9쪽
7 EP7: 은빛 머리 남자 24.08.22 4 0 9쪽
6 EP6: VVIP 24.08.21 6 0 10쪽
5 EP5: 당신이 왜 여기에 24.08.20 5 0 9쪽
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7 0 9쪽
3 EP3: 여긴 도대체 어디 24.08.17 7 0 10쪽
2 EP2: 늙은 여우 24.08.16 6 0 10쪽
1 EP1: 우리는 영원한 스무 살 24.08.15 15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