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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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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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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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85

작성
24.08.1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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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EP2: 늙은 여우

DUMMY

오후 업무는 생각보다 수월하다.


약제실에서 내일 쓸 주사약들을 준비하고,

바로 옆 세척실에서 쓰고 난 장비를 씻고 건조만 하면 되는 작업이었다.


지수는 세척실로 가서 마지막 소독 장비를 넣고 구석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금세 졸음이 밀려오더니 그녀는 꾸벅꾸벅 헤드뱅잉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딸깍,

세척실 문이 열렸다.


“아니, 강지수 너무 웃기지 않아? 아까 병원 앞에서 최 원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 봤지?”


‘내 얘기다.’


지수는 찔릴 것도 없는데 순간 놀라 세척실 옆 약제실로 몰래 들어가 문을 살짝 닫았다.


“강지수 일부러 최 원장님 나오실 때까지 거기서 기다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직 최 원장님 미혼이시지? 강지수 속셈 뻔하지 않아?”


“하긴, 최 원장님 정도면 나이가 있으셔도 모아 놓은 돈도 많을 테고. 나이만 드셨지 키도 크고 꾸준히 몸 관리하시니. 젊었을 때는 인기도 엄청 많으셨다던데?”


“퇴근하실 때 사복 입은 거 봤는데 40대로도 보이시더라. 강지수 같이 늙은 여우한텐 완전 땡큐 아니야?”


어린 동료들이 세척실의 문을 열며 지수의 뒷담화를 까기 시작했다.


‘늙은 여우? 내가?’


지수는 환멸감이 느껴졌다.

단지 점심시간에 담화 정도 나누었을 뿐인데.

그들 눈에는 내가 최 원장님 꼬시려는 늙은 여우로밖에 안보였구나.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그 나이에 3년 차가 뭐냐? 여기서 일하기 전엔 뭐 했대?”


“뻔한 거 아니냐? 보나 마나 부모 밑에서 뒹굴뒹굴하며 놀다가 나이 들어 결혼도 못하니 대충 여기서 늙은 의사하나 꼬셔서 취집하려는 거지.”


“어우, 토할 것 같으심. 나 같음 그렇게 살기 싫겠다.”


지수는 당장이라도 약제실의 문을 박차고 나와 그 어린년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내가 언제 여우 짓을 했느냐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희들이 아느냐고.

너네는 그 젊음이 영원할 것 같냐고.


하지만 지수는 몸을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구석에서 인기척이라도 하면 감당 하지 못할 일들이 생길 것 같아 숨을 얕게 쉬며 그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이 세척실을 나가는 순간 지수는 참았던 숨소리를 옅게 뱉어냈다.


‘숨어서 뭐 하는 짓이야. 나 참 한심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입을 삐죽거렸지만 코가 점점 찡해짐을 느꼈다.

거칠거칠해진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야속했다.


“됐어, 한두 번도 아니고.”


지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자···.’


지수는 세척실로 가려고 약제실의 문을 열었다.



순간.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약제실 문 앞엔 키가 큰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도 없었던 거 아니었나?’


지수는 너무 놀랐지만 담담한 척 말했다.


“누, 누구세요?”


“강지수 씨 맞으세요?”


“네. 누구세요?”


지수는 재차 물었다.


키가 큰 남자는 조금은 앳된 얼굴이었다.

어깨 길이의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푸른빛 눈동자.

날렵한 턱선에 핏기 없는 얼굴과 입술.

하얀 정장을 입었지만 액세서리라곤 없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했다.


‘코스프레 인가?’


“저기, 여기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에요, 나가주세요.”


그녀는 살짝 겁이 났지만 애써 용감한 척 했다.


“제대로 찾아 왔네요. 시간이 엇갈렸지만.”


은빛 머리 남자는 지수를 마치 알고 있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다니?’


지수는 점점 두려웠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 들어와 있었던 거지?

외계인인가?

아님 미쳐서 병원에 들어온 살인자?

날 어떻게 알까? 내 이름은?

아, 간호복에 명찰이 있었지.


지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은빛 머리 남자를 어찌나 쳐다봤던지 눈알이 충혈될 지경이었다.


은빛 머리 남자는 품 안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제가 미리 본 지수 씨의 환영은 지금이 아니긴 한데···. 뭐, 어쩔 수 없죠. 제 환영이 한 번씩 뒤틀릴 때도 있거든요.”


“··· 환영이라뇨?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누구시냐고요.”


“제 소개를 할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 지금은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막무가내인 은빛 머리 남자는 다시 회중시계를 꺼내 분침을 맞췄다.

그리고는 딸깍 하고 소리가 났다.


“강지수 씨, 시간이 없어요. 자,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가요?”


지수는 의문의 남자가 건넨 물건을 받았다.


언뜻 보기엔 그냥 평범한 가방이었다.

학창시절에 책을 넣고 다녔던 그런 낡고 민무늬인 백팩.


여기에 돈을 채워 넣어 달라는 건가?

여긴 은행이 아닌데?


“이 가방에 뭐든 넣으세요, 10분 뒤에 당신은 여기서 사라져야 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라지는 건 뭐고 시간은 왜 10분인데요!”


“조금 있음 알게 되겠죠. 저는 마지막 할 일을 하러 이만. 곧 봅시다.”


은빛 머리의 남자는 이해하지 못할 만만 남긴 채 세척실의 문을 열고 홀연히 사라졌다.


“잠깐만요! 기다리세요!”


그러나 이미 그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뭐야? 어떻게 나간거야? 귀신인가?”


그녀는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났다.


“뭐야. 그러니까 약제실 문을 열자마자 웬 키 큰 저세상 남자가 나와서··· 나에게 가방을 주곤 10분 안에 사라져라고 한거지, 지금?”


‘그냥 무시하면 되잖아?’


사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였다.

꺼림칙한 은빛 머리 남자는 사라졌고 이제 집으로 가면 되는 거다.

이 좁은 공간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밖엔 없으니.


마침, 시간은 퇴근 시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내가 헛걸 봤나.”


지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달래기로 했다.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정리할 틈도 없이 세척실 문을 열었다.


!!!

맙소사.

세척실의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문을 쾅쾅 두드려 보아도 발로 걷어차 봐도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병원 4층 약제실과 세척실은 병실이 없는 층으로 긴 복도 끝에 있어서 평소 직원들도 띄엄띄엄 지나가는 곳이었다.

하필 퇴근 시간이라 더욱이 인적이 드문 구역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더 세게 문을 차고 짐승처럼 고함도 질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여기 사람이 갇혔어요! 살려주세요!!”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공기만 뱉어내는 것만 같았다.


‘다른 문이 있었던가?’


세척실은 약제실과 이어져 있다.

일단 맘이 급해진 지수는 다시 약제실로 들어갔다.

빼곡히 약으로 둘러싸인 약제실은 당연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저세상 사람이 말한 10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혼자 물어봐도 대답해 주는 이 하나 없는 이 작은 공간에서 지수는 털썩 주저 앉았다.

낡은 백팩만이 이 상황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단서다.


그래, 꿈이라면 창문이라도 있어서 뛰어내리면 꿈에서 깰 텐데.

단 한 번도 꿈에서 깨고 싶을 때 창문 따위가 없었던 적은 없었어.

이건 현실이야.


‘정신 차려, 강지수.’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그녀는 가방을 열었다.

무엇이든 꽉꽉 채우라고 했지만 여기선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일단 뭐라도 채워 넣자.”


도둑질을 하듯 그녀는 약들을 주섬주섬 넣기 시작했다.


마약성 진통제, 거즈, 소독약, 붕대, 봉합 실과 바늘, 노인들을 위한 독한 수면제 등등 필요 없을 것 같은 약제실의 약들을 쓸어 담았다.


'멀대 같은 저세상 인간이 나에게 위협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호신용으로 의료용 가위와 메스도 챙겼다.


백팩은 꽤 커서 끝도 없이 들어갔다.

어떻게 채운 지도 모른 채 꽉꽉 채워진 백팩의 지퍼를 닫고 그녀는 그대로 쓰러질 듯 앉아버렸다.

벽시계를 보니 은빛 머리 남자가 언급한 시각이 다 되어갔다.


'내가 사라진다니···. 대체 어디로···?'


의문투성이지만 일단 그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엄마가 날 데려가려고 저승사자를 보내준 것일지도 몰라.'


불현듯 어릴 적 그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생각나자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갑자기 편해졌다.

그렇게 믿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어차피 세상은 지수에게 가혹했다.

아무리 행복해지려 발버둥을 쳐봐도 부모 없는 고아에겐 세상은 불공평했다.

뒤늦게 어렵사리 공부해서 얻은 일자리도 누군가의 눈엔 능력 없이 늙은 여자로만 보일 뿐이니까.


'차라리 잘된 건가···. 난 더 잃을 것도 없는데.'


이윽고 오지 않을 것 같던 10분이 흘렀다.

지수는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 보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이 부는 곳으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여긴 창문이 없었는데.'


그랬다.

약제실 한구석엔 거짓말처럼 작은 창문이 있었다.

아니, 생겼다.

귀신에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간 지수는 창문을 열었다.


“여긴 4층인데···.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인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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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14 EP14: 임옥호텔 24.08.30 6 0 9쪽
13 EP13: 지킬 수 있는 남자 24.08.29 6 0 10쪽
12 EP12: 모갈 1호 24.08.28 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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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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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P8: 라메탈 별에서 온 아스트론 24.08.23 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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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8 0 9쪽
3 EP3: 여긴 도대체 어디 24.08.17 7 0 10쪽
» EP2: 늙은 여우 24.08.16 8 0 10쪽
1 EP1: 우리는 영원한 스무 살 24.08.15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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