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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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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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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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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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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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DUMMY

“소원?”


엘런이 입을 삐죽거렸다.


“난 소원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유일한 내 소원은 원래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야. 이런 낡아빠진 집에서 외계인이 지껄이는 헛소리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엘런은 아직 화가 나 있는 듯했지만 아까만큼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다.


“메데이아만 잡고 나면 원래의 시간대와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지금은 그대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신? 지금 이 시간이 현재의 시간이랑 상관이 없다는 건가요?”


지수는 사실 어제부터 병원에 말도 없이 무단결근을 했다는 것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렇습니다. 저를 만났던 그때의 시간, 그때의 장소로 다시 돌아갈 거예요. 지금 우리가 함께하고, 함께할 시간은 그대들의 시간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럼···. 덤으로 ’공짜 시간’이라도 갖게 된다는 건가요?”


현우의 ‘공짜’라는 말에 엘런과 지수는 솔깃했다.


‘그래, 덤으로 얻는 시간. 나의 세월과는 관계없는···. 언제 다시 이렇게 젊어진 내 얼굴을 실컷 보겠어. 난 그것만으로도 좋은데.’



“··· 저는 유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재호가 먼저 나섰다.


“저는 그대들보다 예전 사람이라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만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면서요? 조국이 독립하는 걸 저는 꼭 봐야겠어요. 어차피 일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해보겠어요.”


“뭔 개소리야···. 나이도 제일 어려 보이는데.”


엘런이 중얼거렸다.


“저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어차피 지금 제 시대엔 데모가 한창이라 자칫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제가 필요할 거예요.”


현우도 동참했다.


“자꾸 뭔 개소리들이야, 전부.”


엘런은 재호와 현우가 정말 이상해 보였다.

독립은 뭐고, 데모라니, 지금 이 시대에.


“저도요.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할게요, 저.”


지수도 자신도 모르게 재호와 현우의 말에 동참했다.


30대가 넘어서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루하루, 1년, 2년은 가속도가 붙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요양 병원에서 거동이 힘들고 치매를 앓는 노인들은 찬란했던 예전 시간을 그리워하곤 했다.


지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특히 현우와 재호.

그들이 좋았다, 그 좋은 사람들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었던 것 같다.


“그럼···. 이제 한 사람 남았네요.”


유신이 엘런을 보며 웃었다.

웃고 있지만, 유신의 마음은 초조했다.


“난, 아까도 말했듯이 소원 같은 거 필요 없어.”


엘런은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엘런···.”


지수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쳐다만 본 것뿐인데 엘런 혼자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아···. 그런데 내 시간과 상관없다면. 피해받을 게 없다면 말이야, 휴가라고 생각하면, 뭐···. 어차피 좀 쉬었으면 했었으니까.”


“잘 생각했어요, 엘런.”


정오가 넘어 해는 눈 부셨고 지수가 엘런을 향해 웃자, 그녀의 환한 미소는 빛을 머금었다.


그런 지수가 엘런은 약간 신경 쓰였다.


“그럼 언제 시작하나요?”


현우가 물었다.


“미래 환영은 제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불현듯 보게 되는 거라. 메데이아가 환영에 보이면 그때, 우리는 움직일 겁니다.”


지수는 오랜만에 온몸에 달뜬 느낌이 들었다.



*

“뭐? 과거에서 왔다고, 둘 다?”


“흠. 그대의 시점에선 과거지만 우리에겐 현재라고. 난 1928년에서 온 거고 현우는 1987년에서 왔어.”


“헐, 홀리 쉿! 아깐 진짜 미친놈들 같았어! 하하! 난 그것도 모르고 날 못 알아봐서 섭섭할 뻔!”


엘런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나름 이 상황들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현우와 재호랑 반말 쓰는 것도 겨우 했는데. 엘런은 정말 붙임성이 좋은 것 같아.’


지수는 새삼 엘런이 부러웠다.


“넌 지수와 같은 2024년에서 왔다며? 나이도 지수와 같고. 동갑이네.”


“그래서 지수만 날 알아본 거구나.”


재호의 동갑내기라는 말에 지수는 또 한 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나중에 이 일을 어찌 감당할꼬.


“자, 저와 함께 해주실 제군들! 마음껏 드세요.”


유신은 어딜 다녀 왔는지 한가득 짐을 싣고 돌아왔다.

먹을 것과 옷가지들 여기서 필요한 것들을 산타처럼 잔뜩 들고서.


“곡간도 채워놨으니 먹고 싶은 거 편하게 드세요. 참, 지수 씨, 옷도 몇 벌 가져왔습니다. 계속 같은 옷만 입고 있어서.”


“감사해요. 이 잠옷같이 생긴 옷을 계속 입고 있었더니 불편했었는데 잘됐네요.”


지수는 치렁치렁한 소맷자락을 유신에게 보이며 웃었다.



*

오랜만에 현우와 재호, 지수는 배 터지게 저녁을 먹었다.

먹은 게 숲속에서 가져온 버섯들과 풀뿐이어서 허기진 상태였는데 갑자기 맛있는 갖가지 음식들을 먹으니 너무 행복했다.


“엘런은 가수라고? 세상 참 좋아졌구나. 우리 시대엔 남자 가수는 보기 힘든데.”


재호는 여전히 엘런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왜 이름이 엘런이야? 미국에서 왔나?”


현우가 물었다.


“아니, 미국은 월드 투어할 때나 갔지. 옛날 말로 하면···. 가명이지, 가명. 내 원래 이름은 지안, 송지안.”


엘런은 대답하면서도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수는 PMB 멤버의 이름은 다 꿰고 있었다.

그러나 엘런의 본명이 송지안이라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지안···. 송지안. 이쁘다, 이름.’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상반된 까만 머리와

그에 걸맞은 새까만 눈동자.

오뚝한 코, 앵두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

떡 벌어진 어깨···.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한쪽 턱을 괴고 엘런을 작품 감상이라도 하듯 쳐다보았다.


’잘 생기긴 했네···. 그래도 이토가 원탑이긴 해.‘


순간 현우와 열띤 대화 중인 엘런과 눈이 마주쳤다.

지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획 고개를 돌렸다.



*

그날 밤, 지수는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오랜만에 잔뜩 먹어서 아직 소화가 덜 된 탓일까.


“좀 걸어야겠다···.”


지수는 한적한 바닷가로 향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알들을 사뿐사뿐 밟았다.

검은 바다의 파도는 그녀를 삼킬 듯이 일었다.


’이곳을 유신이 만들었다니···. 대체 여긴 어딜까.‘


맑은 밤하늘에는 수많은 은백색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유신의 머리칼을 닮은 별인가.


“밤바다가 마음에 드나요, 지수 씨?”


지수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에 어울리는 은빛 단발머리.

그의 머리는 유난히 달빛과 어울렸다.


“유신.”


“제가 방해되었나요?”


“아뇨. 잠이 오질 않아서 산책 중이었어요.”


“산책하긴 정말 좋은 장소죠.”


“네. 정말 진짜 같아요, 여기···.”


“여긴···. 4차원의 공간이에요. 우리가 사는 3차원 세계를 비집고 들어온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세계···. 제 은신처이기도 하지만 제가 타고 온 우주선 안이죠. 진짜가 아닌 것 같지만 진짜인 곳이에요.”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아름다운 건 사실이니까.”


여기가 유신이 타고온 우주선이라니.


그녀의 긴 갈색 머리가 바닷바람에 휘날려 유신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그만큼 그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후회하시나요?”


유신이 말했다.


“뭐가요?”


“저를 도와 함께 하겠다고 한 것 말이에요.”


유신은 지수에게 미안해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언정 돕고 싶다고 말하는 가냘픈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제법 미안하게 했다.


“무슨 소리예요, 후회 같은 거 할 만큼 여태껏 내 삶에 큰 행복은 없어서요. 그리고 유신이 지켜 준다면서요.”


여기서 본 후로 줄곧 웃고만 있어 행복하게만 살아왔을 것 같은 그녀였는데 유신은 지수의 과거가 살짝 궁금해졌다.


“유신,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23살 현재 시절에서 왔다는데. 보셨다시피 전 40살이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어려진 거죠?”


지수는 가장 궁금하지만 가장 감추고 싶은 얘길 꺼냈다.


만약 유신이 「앗, 내가 실수했네, 원래의 네 나이로 돌아가렴, 뿅」 하고 마흔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끔찍했다.


“처음 만났을 때 말했듯이 제 환영이 한 번씩 뒤틀릴 때가 있어요. 시공간이 왜곡된 거죠. 여기 와서 다시 어려진 건···. 제 작은 선물이라고 해두죠.”


“사실은, 저···. 현우와 재호, 엘런에게 그들과 같은 나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렸어요. 마흔이었는데 여기 와서 갑자기 어려졌다고 도저히 말을 못 하겠던걸요. 어쩌죠?”


“푸핫!”


유신은 처음 안 사실에 진심으로 웃음을 뿜어버렸다.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웠다.

지구 나이로 571살인 유신의 눈에는 고작 40년 산 여자애가 겨우 17년을 속였다는 말이 귀여울 수밖에.


“웃지 마세요, 안 그래도 동갑이라고 말할 때마다 찔리는데···.”


“미안해요, 아 정말. 큭···.”


괜히 말했다.

이건 평생 이불킥 감이다.


“비밀을 지켜 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유신은 뾰로통해진 지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마흔이든 스물셋이든 상관없어요. 그대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니까.”


지수는 유신을 바라보았다.


미세하지만 유신의 깊은 바다색을 품은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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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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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24.08.24 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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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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