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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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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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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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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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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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넌 친구니까

DUMMY

엘런이 이곳으로 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메데이아의 소식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그 덕에 그들은 ‘공짜 시간’을 즐기며 편안하고 한가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엘런은 5년 동안 열심히 활동해온 자신에게 포상휴가를 준 것으로 생각했고

재호는 나라를 뺏긴 치욕스러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던 현실에서 벗어났다.

현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맡던 최루탄 냄새를 더는 맡지 않아도 돼서 행복했고

지수는···. 그냥 좋았다.


유신은 그들과 한참을 같이 있다가도 한 번씩 사라졌다가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왕창 가져오곤 했다.

혈기 왕성한 23세의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려니 그는 쉴 틈이 별로 없어 보였다.


“지수 씨.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요.”


한 번씩 유신은 지수에게 원하는 걸 묻곤 했다.

그녀 혼자만 여자라서 조금 어려워하는 건지.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유신은 특히 지수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커피요. 아침에 커피는 꼭 마시고 싶어요.”


지수는 유신에게 원두가 필요하다고 콕 짚어 말했다. 밥은 포기하더라도 커피만은 포기가 안 되는 그녀는 커피 머신까진 바라지 않지만 직접 원두를 갈아서라도 꼭 내려서 마시고 싶었다.


유신이 원두를 가져온 뒤로부터, 현우와 재호, 유신은 신세계의 맛을 알게 되었다.


엘런이야 같은 시대 사람이니 다양한 커피를 접해봤겠지만.

현우는 기껏해야 달달한 다방 커피나 맛보았을 테고,

재호는 커피가 왕족이나 접했을 시대 사람이니, 그 맛도 모를 터.

특히 유신은, 메데이아를 추격하기도 바빴을 텐데 커피에 대한 지식조차 전무했을 것이다.


“우웩! 향이랑 맛이 완전 다르잖아! 고소한 향인데 맛은 완전 써!”


현우가 원두커피를 처음 맛보고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원두커피는 정말 묘한 매력이 있다. 마시면 마실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마성의 미각이라고 해야 하나.


지수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1층 대문 앞 난간에 앉아 싱그러운 바다를 보며 커피 마시는 걸 자주 즐겼다.


“지수, 뭐해?”


재호가 대문 기둥에 발을 꼰 채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날이 너무 좋아서. 이런 눈부신 날의 바다는 살면서 처음 봐.”


“나도 그래. 경성에는 바다가 없으니까.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바다가 참 이쁘네. 커피도 참 맛있고.”


재호는 커피를 잘 마시겠다는 인사 대신 머그잔에 든 커피를 들어 보였다.

지수도 자신이 내린 커피가 맛있다는 호평을 듣자 기분이 좋아 재호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긴 갈색 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리자 지수는 한 손으로 머리를 훑어 뒤로 쓸어넘겼다.


다정한 아침햇살에 지수의 어려진 피부는 광이 났고 머리칼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조막만 한 얼굴에 비교해 크고 동그란 눈, 머리칼에 맞춘 듯 진갈색의 눈동자.


이쁘다, 정말.


재호는 흘긋 눈길을 돌렸다. 봐선 안 되는 걸 본 것처럼.


“지수! 나랑 같이 숲 속에 가지 않을래? 유신이 닭을 풀어 놓았대! 오늘은 치킨 각인가?”


눈치 없는 엘런이 오두막집의 대문을 빼꼼 열더니 얼굴만 쏙 내민 채 지수에게 물었다.


“오, 치킨? 좋아, 가자! 재호, 너도 가자.”


지수는 마냥 즐거워하며 재호에게도 같이 갈 것을 권유했다.


“다녀와. 난 커피나 마저 마실게.”


재호는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며 지수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재호!”


지수가 엘런을 따라가며 뒤돌아 재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는 몸을 잠시 움찔했다.

내가 지금 정상인가?

그는 엘런과 지수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없어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신재호!’


재호가 멀어져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나이 23세.

그의 시대의 남자 나이치곤 장가를 가고도 한창 남았을 나이.

외동아들이었던 재호는 어릴 적 부모님이 일본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조국의 독립이 있지 않은 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여기, 유신의 세계, 4차원의 세계로 온 이후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현실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그는 속으로 재빨리 자신을 꾸짖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려는 듯.



*

“이쪽 숲길로 쭉 가면 버려진 나룻배가 한 척 있는데 그 근처에 닭이 있대.”


엘런은 한쪽 손엔 그물, 또 다른 손엔 닭을 유인할 먹이를 들고 있었다.


“엘런, 그물로 잡으려고?”


“응, 닭이 꽤 빠르다더라. 먹이로 유인해서 그물을 먼저 던져서 도망 못 가게 한 다음 양쪽 날개를 잡으면 된대.”


“우와 그런걸 어디서 배웠어?”


“현우가.”


지수는 엘런의 한 번씩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귀여웠다.

스크린에서 본 엘런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요즘 그는 이 상황을 적실히 즐기고 있는 듯하다.


하긴,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과 입을 신경 쓰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했었으니.

너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자유를 느끼고 있을까.


“쉿!”


엘런은 버려진 나룻배 옆에 앉아있는 통통한 암탉을 가리켰다.


“지수 넌 먹이를 던져서 네 쪽으로 유인해 줘. 뒤에서 내가 그물을 펼칠 테니까.”


“오케이. 알았어.”


지수는 엘런에게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그녀는 통통한 암탉이 있는 곳을 향해 먹이를 던졌다.

그러나 닭은 앉아서 지수를 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먼저 맛보기로 닭 앞으로 먹이를 던져 봐!”


엘런이 속삭였다.


지수는 닭 바로 앞으로 먹이를 던졌다.

닭은 기웃기웃 한참을 고민하더니 살짝 엉덩이를 들어 먹이를 살짝 쪼았다. 닭의 엉덩이 사이로 3개의 알이 빼꼼 보였다.

앗싸, 달걀도 덤으로 얻겠다···.


그러나 알에 금이 간 걸 보니 곧 병아리가 부화하기 직전인 것 같다.


“쟤는 잡지 말자.”


닭 뒤에서 그물을 한참 들고 있던 엘런은 이내 지수에게로 돌아오며 말했다.


“병아리가 깨어나면 엄마를 찾을 거 아냐. 고아가 되는 건데···. 불쌍하잖아.”


엘런의 말에 지수는 마음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에게 하는 말 같아서였다.


“오늘 치킨은 망했네. 치맥이 당겼는데.”


엘런은 닭을 잡는 것에 흥미를 잃었는지 숲 바닥에 털썩 앉았다.


“치맥~ 나도 먹고 싶다.”


지수도 거들었다.

둘은 닭 잡는 걸 포기한 채 진한 숲 내음이 맡으며 드러누워 울창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수가 맑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왜?”


“왜라니. 노래도 듣고 사진도 찍고. 특히, 재호랑 현우가 핸드폰을 보면 깜짝 놀라 까무러칠걸?


”크크! 걔네들 기절하는 거 봐야 하는데! 진짜 웃기겠다.“


”유신에게 와이파이 연결도 부탁하면 해주려나?“


”하하하!“


엘런은 지수가 한 번씩 엉뚱하지만,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난 지수 네가 정말 편한 것 같아.”


“왜? 현우랑 재호도 있잖아?”


편하다는 말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 지수가 물었다.


“지수 넌 친구니까. 현실 세계에서도 나이가 같잖아.”


그녀는 엘런이 나이를 언급할 때마다 정곡이 찔린 듯했다.


“현우는 한 번씩 꼰대 같아. 말끝마다 라떼를 써. 꼭 우리 아빠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재호랑은 대화가 힘들어. 친구한테 하듯 말하다 보면 내 말뜻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 말할 때마다 언어순환을 해야 하잖아. 하지만 지수 넌 그냥 내가 편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지수도 그랬다.

유신은 지구인이 아니라 말하기가 조심스러웠고, 재호와 현우도 시대적으로 달라 신조어라고 생각도 안 하고 지수가 자연스럽게 썼던 말들을 어색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었다. 엘

런과 공감대가 생기니 그녀도 그가 편해졌다.


지수는 하루하루가 요즘 같기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지수의 삶은 참 지루하고 힘들었다.


엄마와 지수를 버리고 떠난 얼굴도 모르는 아빠와,

어릴 적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 엄마의 배다른 이모 집에서 눈칫밥만 14년을 견디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집을 나와 무작정 아르바이트만 했다.


친구들이 즐기던 학창시절이라는 건 꿈도 못 꿀 처지였다. 혼자 힘으로 살아가던 지수는 뒤늦게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간호 일을 하면서 간호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을 못 해보고 여행 한 번을 못 가봤다. 숨이 막히는 도시에 살면서 바다를 못 본지도 오래됐다.


그런 그녀에게 요즘은 정말 선물 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엘런! 지수!!”


멀리서 현우가 그들을 부르며 숲길을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왜?”


엘런이 벌떡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유신이···. 환영을 봤어, 메데이아 환영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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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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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8 0 9쪽
3 EP3: 여긴 도대체 어디 24.08.17 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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