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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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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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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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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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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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EP14: 임옥호텔

DUMMY

「엘런··· 엘런···.」

누구지? 넌 누구야?

누군데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거야?


「네가 날 잊을까 봐 두려워···.」

잊지 않을게··· 누구야, 넌···.

말해줘··· 제발···.

.

.

.

“엘런, 일어나. 도착했어.”


경성역에 도착하자 지수는 그녀의 어깨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엘런을 깨웠다. 무슨 달달한 꿈을 꾸는지 그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엘런이 잠든 뒤로부터 그녀의 어깨는 경직되어있었다. 혹여나 깰까 봐 노심초사하며 일관된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흑발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지만 꾸욱 참았다.


하지만 이제 한계다···.


“엘런!!” 도착했다고!“


지수가 큰 소리로 엘런을 부르자 엘런은 눈을 번쩍 떴다.


“놀랐어?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도착했어.”


“미안, 깊이 잠들었었나 봐.”


“그런 것 같았어. 자면서 잠꼬대하던데?”


“오늘 너무 일찍 일어났더니 피곤하네.”


투덜대며 일어나는 엘런이 기차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뒤따라오는 지수에게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경성역에 도착한 지수와 엘런은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물포역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규모의 경성역은 마치 왕이 사는 궁궐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여기···. 우리 시대에 아직 있지 않나?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엘런이 경성역 주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있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자리에. 아직도 건재하게 우리 곁에 있지.”


둘은 경성역 중앙의 벽시계가 있는 곳에서 유신과 현우를 기다렸다.

지수의 학창시절까지 서울역이었던 경성역은, 역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되어 있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시계 밑으로 모였었다, 습관처럼.


지수는 현우도 이쪽으로 올 거란 확신이 있었다.


“지수, 엘런! 괜찮아?”


벽시계 밑으로 현우가 나타났다.

역시 현우 너도 옛날 사람인 게지.


“당연하지.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아까 꽤 쫄았던데.”


엘런은 괜찮다는 뜻으로 현우의 어깨를 툭 쳤다.


“나쁜 놈들. 아까 내가 진짜 죽여버릴까 하다가 내 시대가 아니라서 함부로 못 한 거야.”


“내 말이 그 말이야. 나도 세 명 다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는데 유신이 침착하게 행동하래서 참은 거라니까.”


현우와 엘런은 서로의 허세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유신은?”


지수가 물었다.


“메데이아 뒤를 쫓는다고 먼저 갔어. 우리는 재호를 만나서 근처 호텔로 가 있으면 돼. 유신도 그쪽으로 올 거야.”


*

현우는 경성역에 도착할 때쯤 일등석과 이등석 사이의 갱웨이에서 유신을 다시 만났다.


“유신!”


“알고 있습니다. 메데이아가 그대들의 얼굴을 알게 되었군요.”


“혹시 눈치챈 것 아닐까요?”


“아닐 거에요. 메데이아가 눈치를 챘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을 겁니다. 단지 시끄러운 게 정말 싫었던 거에요. 그래도 역시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는 메데이아가 경성역에서 내리면 어디로 가는지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언제 다시 기차를 탈 건지···. 그대들은 재호 씨를 찾으세요, 여기에서 일정이 생각보다 길어지겠네요.”


유신은 답답했다.


절대 그들의 정체가 알려지면 안 되는데.

신분이 노출되어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는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도움을 바라는 자신이 미웠다.


메데이아가 지수에게 쓰개치마와 노리개를 주워서 직접 건넸을 때 멀리서 지켜본 유신은 지수를 바라보던 메데이아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뭔가 꺼림칙 한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뭘까.

왜 그런 쓸데없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



*

“어쩐지···. 유신과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유신보다 체격도 좀 더 크고 날카로운 느낌이 있었지만.”


지수가 말했다.


“제물포에서 오는 다음 기차는 오늘 저녁이야. 재호가 다음 기차를 타고 올 때까지 우리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있어야 해.”


현우는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사실 재호가 우려스러웠다.


「살면서 한 번도 이렇게 많은 돈은 만져본 적도 없어. 이 돈이면 우리 독립군들이 1년을 먹고 버틸 수 있어」


‘설마···.’


지수와 엘런, 현우. 그들은 같이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지수와 엘런은 조선인이었고, 현우는 일본 순사다. 조합이 맞질 않았다. 같이 다니면 눈에 더 띌 게 뻔했다.


기차 안에서 메데이아만 잡으면 다 끝낼 일이라 생각해서 여기까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옷을 다시 맞춰서 입자.”


엘런이 경성역 근처 양장점을 지나며 말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점은 최신 스타일의 옷들이 쇼윈도에 걸려 있었다.


네이비 컬러에 얇은 스트라이프가 그려져 있는 슈트, 검붉은 나비넥타이. 하양의 맥고 모자가 멋스럽게 걸려 있었다.


그 옆 마네킹에는 카울 네크라인의 반들거리는 핑크 원피스에 얇은 블랙 벨트가 둘려 있었고 아이보리 망사 모자가 걸려 있었다.


지수는 엘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장점 유리창에 매달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수는 한복이 너무 불편했다. 특히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쓰개치마. 아무리 조선인의 컨셉이었지만 이렇게 오래 입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하던 차였다.


“우리···. 유신이 준 돈 있잖아···. 그걸로 사 입으면 유신에게 혼나려나?”


지수가 엘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치 공범이 되자는 듯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설마. 뭐 안되면 내가 갚는다고 하면 되지! 이 까짓거 얼마나 한다고. 내가 허구한 날 명품관에서 사는 옷보다 비싸겠어? 들어가자.”


엘런은 지수의 눈치를 읽고 먼저 양장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 어서 오세요. 옷 보러 오셨나요?”


양장점의 여주인이 지수와 엘런을 맞이했다.


“네. 저기, 앞에 걸려 있는 남자랑 여자 옷. 그걸로 주세요. 그대로 벗겨서. 바로 입고 갈 수 있게.”


“네? 호호, 저 옷은 오늘 이태리에서 들어온 신상이에요~ 딱 한 벌씩 밖에 안 들어오는 거랍니다. 가격이 무척 비쌀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양장점 여주인은 엘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무시하는듯한 어투로 말했다.


살면서 무시나 질타를 많이 받아본 지수와 달리, 엘런은 유복하게 자란 세계적인 아이돌이었다.


하, 이것 봐라.

살면서 이런 무시를 받는 것은 처음인데.


“이거면 모자란가?”


엘런은 기차표를 사고 남은 999원을 여주인에게 내밀었다. 여주인은 엘런이 내민 돈다발과 엘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 양, 저기 걸려 있는 옷 다 벗겨와, 어서!”



*

“어머 어머···. 두 분 다른 사람이 되신 것 좀 봐~!”


여주인의 비음 섞인 아부가 들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모던 보이가 된 엘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잡지에서 모델이 튀어나온 줄.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시상식에 바로 가도 될 것만 같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옷을 사는 건데 저렇게 나가면 눈에 더 띌 것 같은데.

맥고모자를 한쪽 눈을 살짝 가려서 쓰니 이건 그냥 누가 봐도 영화배우다.


엘런도 옷을 갈아입고 온 지수를 보고 그녀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쓰개치마를 쓰고 나온 그녀에게 달덩이라고 놀렸던 그였는데···.


무릎까지 오는 핑크 머메이드 원피스가 지수의 몸매를 부각했다.

머리를 하나로 묶어 곱게 땋아 위로 틀어 올린 머리 위에 망사모자를 쓰니 선머슴 같던 지수가 꽤 여성스러워 보였다.

특히 카울 네크라인이라 숙이면 살짝 보일 것도···.


엘런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미친! 미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부부가~ 이렇게 선남선녀여도 되는 거예요? 어디, 경성에는 신혼여행을 오셨나? 요즘 경성으로 여행 오는 신혼부부들이 가끔 있어요.”


신혼부부라니!


양장점 여주인 말에 엘런과 지수는 서로 쳐다보지 못했다.

지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려고 했지만 딱히 무슨 사이라고 둘러댈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 그렇죠. 신혼여행··· 이죠.”


당황한 엘런이 얼버무렸다.


“요즘 돈 있는 상류층 사람들은 결혼하면 신혼여행 가는 게 유행이거든요~ 여기 옆에 임옥호텔 가시는 거, 맞죠?”


유신이 만나자고 한 호텔이 임옥호텔이구나.


“우리 바깥양반이 거기 지배인이랍니다~ 올해 지은 호텔이라 시설이 깨끗해서 그 호텔에 신혼부부들이 많이 와요. 스위트룸이 하나 있는데 꼭 거기서 묵으세요, 돈 많은 신혼부부만 잘 수 있는 곳이랍니다.”


엘런과 지수는 여주인이 신혼부부라고 할 때마다 낯 간지러워서 어찌할 줄 몰랐다. 엘런은 얼른 돈을 지불하고 지수와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현우가 그들을 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야! 너네···. 신혼부부 같아···.”


“그만하라고!!”


지수와 엘런은 이구동성으로 현우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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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 EP14: 임옥호텔 24.08.30 6 0 9쪽
13 EP13: 지킬 수 있는 남자 24.08.29 6 0 10쪽
12 EP12: 모갈 1호 24.08.28 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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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5 0 9쪽
9 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24.08.24 6 0 10쪽
8 EP8: 라메탈 별에서 온 아스트론 24.08.23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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