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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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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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최근연재일 :
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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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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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그녀의 연기

DUMMY

현우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시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뭐라고 말을 둘러대야 할지 몰라, 계속 경부를 등지고 구두끈을 묶으며 못 들은 척하고 있을 뿐.


“본정경찰서에서 왔다고 해.”


유치장에 있던 재호가 속삭였다.


“이 새끼가! 뭐 하는 거야!”


종로경찰서의 경부가 구두끈을 묶고 있는 현우에게 소리 질렀다.


“앗!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본정경찰서에서 왔습니다!”


뒤돌아선 현우가 경부에게 경례를 하며 말했다.


“뭐? 본정경찰서에서 왔다니, 왜!”


“그게···. 가보면 알 거라고 본정경찰서장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게 먹힐까?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린 현우는 더 이상의 변명 거리가 없었다.

생각이 짧았다.

소속을 물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무슨 소리야! 전화로 말하면 되는걸 본정경찰서장님이 일개 순사 따위를 여기로 보내?”


먹히지 않는다.

더는 입을 열면 일이 더 커질 뿐이다.

현우는 머리를 굴려야 했다.

단지 재호만 살짝 데리고 경찰서 밖으로만 빼내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누구신가. 기차에서 쓰레기들에게나 당하던 그 멍청한 순사 아니신가?”


마침 종로경찰서장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메데이아가 현우에게 아는 척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현우를 추궁하던 경부가 메데이아를 향해 경례했다.


“본정경찰서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곳 서장님이 보냈다고 하는데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경부가 메데이아에게 보고했다.


“본정경찰서장이? 직접 오지 않고?”


“네! 맞습니다! 일개 조센징 순사 따위를 보내다니 수상합니다!”


“흠······. 따라오너라.”


메데이아는 현우에게 자신의 방으로 따라올 것을 명령했다.

일이 일파만파 커지는구나!

일단 눈치 빠른 경부에게는 벗어났지만 현우는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


지켜보던 재호의 눈동자도 초점 없이 흔들렸다.



*

“유신! 현우가 나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지수는 들어간 지 2시간도 넘은 현우가 나오지 않자 불안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지금으로선 현우 씨가 유일한 희망이에요.”


미적지근한 유신의 말에 엘런은 아까부터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


“유신! 당신만 나서면 일이 다 해결되는 거잖아요! 우리를 지켜준다면서요! 지금 재호도 잡혀있고 현우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요!”


“제가 지구로 오면서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데이아를 죽이지 않고 라메탈 별로 데려오는 것. 두 번째는 지구인들을 죽이거나 헤치지 않고 제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이죠. 세 번째 제일 중요한 약속은 지구의 역사가 바뀔 그 어떤 일도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는 그대들을 지킬 겁니다. 그건 우리 개인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제가 종로경찰서에 들어가 저들을 제압해 버리면 제 정체도 들키고 역사가 바뀌어버립니다.”


“······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줍니까?”


“물어본 적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남자들은 참 단순하다.

계획 없이 들어간 현우도,

물어본 적이 없다고 중요한 얘길 하지 않은 유신도.


특히···.

그건 그렇죠? 저건 단순한 건가, 멍청한 건가?


“안 되겠어요.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가 들어가겠어요.”


“지수 씨!”


“뭐? 네가?”


지수도 사실 큰 계획은 없었다.

어차피 계획이란 건 세워봤자 내가 계획한 대로 상대방이 나오지 않으면 플랜B, 플랜C도 필요한 법이다.

이 남자들은 임기응변에 약하다.


“아무리 일제강점기 시대라고 해도 아무 잘못 없는 저 같은 여자에게 해코지할 리는 없어요. 정 안되면 혼자라도 나올 거에요.”


“미쳤어? 장난해?”


엘런이 지수를 막고 서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엘런, 걱정하지 마. 나 잘할 수 있어.”


“차라리 내가 들어가. 나 연기자인 거 몰라? 연기를 할 거면 내가 해. 너보다 내가 더 그럴싸하다고!”


“이건 현실이야. 대본이 있는 연기가 아니라고. 저들이 남자는 독립군이라는 의심부터 하고 대하는 거 몰라?”


“지수!”


“제발. 엘런, 나 한 번만 믿어줘.”


“지수···.”


지수는 엘런의 손을 뿌리치고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지수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유신과 엘런은 위풍당당한 그녀의 뒷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

2층 경무국장실로 들어간 현우는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들통이라도 난 걸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겠지?’


메데이아는 회의실 의자 상석에 앉아 반쯤 드러누워 한참을 뭔가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본정경찰서장이 뭐라고 하던가?”


한참 뒤 메데이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젠장.

주관식이라니.

단답형이나 OX 문제라면 자신 있는데.

현우는 열중쉬어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말하기가 힘든가 보군. 하긴, 순사 따위가 나 같은 상관한테 할 말은 아니지.”


“······”


“계급 낮은 순사나 보낸 걸 보니 본정경찰서장이 기분이 꽤 나빴나 보군. 내 목소리도 듣기 싫어서 자넬 보낸 건가?”


메데이아의 독백을 듣자 하니 현우는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중국과의 전쟁을 위해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중요한 일을 종로경찰서장에게만 맡기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조선인들과 조계지를 옮기는 하찮은 일은 본정경찰서에서 담당하려니 자존심이 상하겠지.”


“그, 그렇습니다! 저희 서장님이 불쾌해 하셨습니다···.”


그래, 길이 보인다, 보여!


“그래서 조선인들의 이주 지원을 안 하겠다고 하던가?”


“그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시고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하셨습니다!”


“흥, 그래···. 기분이 나아지면 제 발로 찾아오겠지. 일주일 안에 생각을 정리하라고 전해라. 더는 기다리기 힘드니.”


“하이! 알겠습니다!”


“나가 봐.”


현우는 2층의 경무국장실 문을 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저 외계인을 속이다니···.’


1층으로 내려오며 재호의 상황을 다시 살피기로 한 현우는 유치장 앞에서 만난, 눈치 빠른 경부와 같이 있는 지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수까지 잡혀 온 건가?’


그러나 잡혀 왔다기엔 분위기가 썩 나쁘진 않다.


경부와 대화를 하던 지수는 현우와 눈이 마주치자 안도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굴려 먼저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현우는 그럴 수 없다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저 작고 연약한 지수를 혼자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하지만 지수는 「썩 꺼지지 않으면 죽여버린다」라는 입 모양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 보는 지수 표정에 잠시 망설이던 현우는 경부의 눈을 피해 경찰서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

지수는 어제 양장점에서 산 원피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망사모자를 고쳐 썼다.

길게 늘어뜨린 빛나는 갈색 긴 머리를 넘기며 종로경찰서 입구를 지났다.

지수의 옷차림과 미모는 100년 전 남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너무나 안성맞춤이었다.


그게 일본제국의 경찰이라고 해도.


“아노···.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금 전 현우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던 경부가 부리나케 달려와 지수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 잡혀 온 신재호가 어디 있나요?”


지수는 경부에게 직설적으로 재호의 행방을 물었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조센징들은... 유치장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긴요, 데려가려고 왔죠.”


“그게 무슨···.”


“누이에요, 신재호 누이. 종로경찰서로 끌려왔다는 말 듣고 왔어요. 얼른 데리고 나오세요.”


호의적으로 지수를 대하던 경부는 재호를 데려간다는 말에 눈빛이 매섭게 달라졌다.


“불령선인들은 함부로 유치장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그쪽이 누이라고 해도 혐의가 있으면 조사를 받고 나가게 되어있죠.”


“뭘 모르시는 건 경부님인 거 같네요. 제 숙부가 이지용 백작님이십니다.”


지수는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을사오적을 달달 외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역사 공부도 재미있게 하게끔 드라마나 교양 프로그램이 많지만 그녀가 학생일 때만 해도 국사는 암기과목 중에서도 고난도에 속해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하필 담임이 국사 선생이라 지수반 학생들은 국사 하나는 잘해야 했다. 아니면 회초리로 가차 없이 맞았으니. 맞기 싫어서 한 공부인데 오늘따라 국사 담임이 고마웠다.


“이지용 백작님요?”


“못 믿겠으면 연락을 해보시던가요.”


연락처라···. 지수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이라고 알겠는가.


“백작님이 숙부신데 왜 불령선인이 된 겁니까?”


“어디 함부로 입을 놀립니까! 데려와 보면 알 거 아니에요!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내가 직접 물어보죠.”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연기에 몰입했다.


그때, 2층에서 내려오는 현우를 보았다.


다행이다, 별일 없었던 거지.

재호는 내가 데려갈 테니 걱정 말고 여기서 나가!


지수를 본 현우가 안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현우가 옆에 있으면 그녀의 연기가 어색해질 것 같았다.


빨리 안 나가면 내가 신경 쓰여서 안 돼! 빨리 가!


지수가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기자 겁을 먹은듯한 현우는 잽싸게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신재호를 찾아서 데려와.”


경부의 말에 졸개로 보이는 순사 한 명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호를 데려왔다.


‘아······!’


얼마 뒤, 재호를 본 지수는 애열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이 터진 곳에는 피가 굳어 입을 떼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고문을 받았는지 왼쪽 가슴팍 옷엔 피가 흥건해져 있는 그를 본 그녀는, 갑자기 재호의 시대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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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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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P12: 모갈 1호 24.08.28 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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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5 0 9쪽
9 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24.08.24 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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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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