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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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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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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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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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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 슬픈 영화

DUMMY

“재호, 재호 아니냐?”


제물포역에서 기차표를 사기 위해 인파 사이에서 헤매던 재호를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불렀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한 중년 남자.


‘설마.’


재호는 가까이 다가가 그를 보았다.

오랜만에, 낯이 익은···. 그리운 얼굴.


“현, 현규 삼촌!!”


재호는 아버지의 동생인 신현규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삼촌을 8년 만에 여기서 만나다니···.

재호는 현규를 보자마자 있는 힘껏 꽈악 끌어안았다.


“이럴 수가···. 삼촌! 언제 나오신 거예요?”


“2년 전에 출소했다. 집에 가 보니 모든 게 다 불타 흔적도 없어진 상태라서 널 찾을 길이 없더구나. 너, 도대체 어디 있었던 게냐?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아니?”


“전 삼촌이 붙잡히고 바로 경성으로 올라왔어요. 집도 불에 타버리고 순사들도 계속 감시하니 살길이 없더라고요···.”


재호의 눈에선 이미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혔다.


현규는 어릴 적 재호의 부모가 일본 순사에게 무단 통치에 반대하다 맞아 죽은 이후 어린 재호를 쭉 키워준 작은 아버지였다.


대한제국의 의병이었던 현규는 재호를 맡아 키우기 위해 의병을 그만두고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해오며 재호의 뒷바라지를 계속 해왔다.

그러다 재호가 17살이 되던 해 체포되어 헤어지고 8년만인 오늘,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삼촌···.”


“그래, 나 없는 동안 고생이 많았지?”


“아니에요! 삼촌이 더 고생하셨죠.”


재호는 현규의 손을 꼭 잡았다.

8년간 못 본 사이에 현규의 손은 뼈마디밖에 남지 않았다. 얼굴은 푹 패여 광대뼈가 도드라지게 보였고 피부 곳곳엔 궤양 자국이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현규가 말하지 않아도 재호는 알 수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재호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재호야···. 너 어디 가는 길이냐?”


“경성으로 가려고 기차표를 끊고 있었어요.”


“삼촌도 경성으로 간단다. 삼촌이랑 같이 가자꾸나.”


재호는 그를 따라 제물포역을 나왔다. 현규는 일행인 낯선 남자에게 재호를 소개해주며 말했다.


“재호야, 이 분은 이병묵 동지다. 너보다 4살 많은 형이야. 작년에 만주에서 넘어왔단다.”


“안녕하세요, 재호 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충청도에서 제일 똑똑한 인재라고요. 듣던 대로 정말 미남이십니다.”


병묵은 재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도 경성에 가는 길이다. 같이 가면서 못다 한 얘기라도 좀 하자꾸나.”


재호와 현규는 병묵과 함께 낡은 차를 타고 경성으로 출발했다. 유신과 현우, 엘런과 지수에게 말하지 못하고 온 것이 내심 걸렸지만 경성역으로 가서 만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재호 넌 뭘 하면서 지냈니?”


“전 지금 야학 선생을 하고 있어요. 독립군들은 늘어만 가는데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으니까요···. 낮에는 일본인 집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일본인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라 독립군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주기도 하고요.”


“내 조카. 정말 장한 일을 하고 있구나! 나는 네가 어딜 가든 훌륭한 인물이 될 거라 의심치 않았단다.”


현규는 한시도 재호의 손을 놓지 않고 장성한 그의 얼굴을 흐뭇하게 둘러보았다.


“삼촌, 요즘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시고 계신 건가요?”


재호는 8년 전 자금을 모금하는 운동을 하다 잡혀간 현규가 걱정되었다. 또 같은 일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 내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못 한 게 한스럽더구나. 지금은 신민부에 가입해서 여기 이병묵 동지와 함께 자금 모금을 하고 있단다.”


“신민부면··· 만주에 있는 무장투쟁 단체가 아니던가요?”


“맞다. 김좌진 장군님이 이끄는 단체야.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하신 분이지.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하러 다니는 거고.”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독립군들에게 삼촌 행방만 물어보고 다녔어요···. 삼촌이 그런 대단한 일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재호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 있는 유신이 준 1000원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친 삼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 경성역에 도착해서 유신에게 사정을 말해보자.

유신도 모자라면 더 줄 수 있다고 했으니. 그라면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8년 사이 할 얘기가 많았던 그들은 어느새 경성에 도착했다.


“재호야, 우리가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같이 밥은 한 끼 먹고 가지 않겠느냐?”


재호는 잠시 망설였지만 도저히 삼촌과 당장 헤어지기가 너무 허탈했다. 눈가에 물기가 가득한 삼촌을 보고 있자니 재호는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삼촌을 따라 경성에 있는 독립군의 은신처로 향했다.


“내가 지금 현상금이 걸려있는 상황이라 밖에서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내 아들···.”


현규는 재호에게 은신처에서 밥 한 끼를 대접하며 말했다.

보리밥과 콩나물이 전부인 밥상이 현규는 재호에게 미안했다. 8년 만에 보는 아들 같은 조카에게 줄 거라곤 이게 전부였으니.


“요즘 독립운동 모금을 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줄었어. 일본군에게 탄압을 오래 당하다 보니 그들도 아주 힘들게야. 부족하지만 많이 먹거라.”


재호는 그런 현규의 맘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삼촌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조선이 해방되면 얼마나 잘살게 되는지, 집집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삼촌은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신 거라고···.


결국, 재호는 주머니에 있는 1000원을 꺼내며 현규에게 내밀었다.


“삼촌. 이거···. 어디서 났냐고 묻지 마시고···. 독립운동에 보태서 쓰세요···.”


현규는 재호가 내민 1000원을 보자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재호야! 이게 뭐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이 돈이 어디서 난 거야!”


“삼촌···. 나쁜 짓 해서 받은 것도 아니고 훔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일본놈들에게 쫓기지도 마시고··· 삼촌도 좀 잘 드시고···. 이 돈으로 제발 만주 다시 건너가세요···.”


재호는 보리밥을 먹다 말고 꺼억꺼억 울음을 삼키며 현규의 손을 잡았다.


“삼촌! 저 아시잖아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짓 한 적 없어요.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이 돈 들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보태주세요. 여긴···. 삼촌에게 너무 위험해요···.”


재호를 어릴 적부터 키우며 그의 인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규는 재호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조실부모하여 어렵게 키운 착하디 착한 조카가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무치게 불쌍했다. 둘을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먹었다.

은신처 안은 현규와 재호의 애달픈 흐느낌만으로 가득 했다.


“신현규 동지!! 도망가세요! 윽!”


별안간 은신처를 지키던 이병묵과 동지들이 들어와 현규를 부르며 쓰러졌다.

쓰러진 병묵 뒤에는 일본 순사들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현규와 재호는 저항할 찰나도 없이 그들에게 잡혀 수갑이 채워진 채 독립군들의 은신처에서 잡혀 나왔다.


“안돼!! 경찰 양반! 저 아이는 죄가 없소. 내가 데리고 온 거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란 말이오!!”


현규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재호를 바라보았다.


“삼촌!! 삼촌···.”


“재호야!! 안돼, 안돼···. 제발 내 새끼를 풀어 주시오, 제발···.”


그들은 따로 호송차에 태워졌다.

현규와 재호는 울부짖으며 서로를 불렀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그들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슬픈 영화처럼 끝이 났다.


*

“미안해, 모두한테···.”


엘런의 부축을 받고 재호는 의자에 앉았다.

현우와 엘런, 유신은 지수에게 재호의 사정을 다 들었던 터라 그에게 화가 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안일했어요. 재호 씨의 시대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뼈아프고 위험한 시대였을 텐데. 그대들을 데려가는 게 아니었어요.”


“우리도 너라면 똑같이 했을 거야. 네가 구하고자 하는 나라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야. 모르겠어? 너 같은 의인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는 건데.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현우는 재호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현우는 지수가 재호를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오는 걸 보고 죄책감이 컸었다. 고문을 받기 전에 데리고 나올 수 있었는데. 유치장에 갇혀있을 때 어떻게든 빼 왔어야 했는데.


“유신,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재호가 유신에게 말했다.


“제가 고문을 당하면서 불현듯 생각이 나더군요.”


“네. 말씀해보세요.”


“만약, 지수가 날 구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면.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유신은 대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몰라서는 아니었다. 다만 재호에게는 너무 가혹한 대답이 될 거 같아서였다.


“아니면 제가 여기 와서 이틀 동안 의식이 없었다고 하던데···. 여기서 죽었다면요?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작가의말

신현규(1888~1928)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 1910년대의 대표적 비밀결사인 광복회에 가입하였고, 이후에는 만주 무장투쟁 단체인 신민부에 참여하여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8년 7월, 경성의 은신처에서 일경에게 피체되어 심문을 받던 중, 8월 10일에 자결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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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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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5 0 9쪽
9 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24.08.24 6 0 10쪽
8 EP8: 라메탈 별에서 온 아스트론 24.08.23 5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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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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