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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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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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빵
작품등록일 :
2024.08.1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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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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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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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소중한 장난감

DUMMY

유신은 충분히 재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인간은 당연히 사후를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러니 인간에겐 종교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이론적으로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멈춰있으니 죽는다고 해도 다시 3차원, 즉 본래의 자신은 살아있어요. 여기 4차원에서의 죽음은 원래의 재호 씨 삶과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저를 만난 이후부터의 기억은 사라지겠죠.”


“그럼, 제가 여기서 죽는다면 당신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겁니까?”


“저와 재호 씨가 만난 날은 1928년 10월 10일···. 저를 만나기 직전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저를 만날 일은 없습니다.”


재호는 혼란스러웠다.

유신은 만난 이후로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현규 삼촌을 8년 만에 만났던 사실도 잊게 된다.


“그럼 지수가 저를 구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제가 고문을 받아 그곳에서 죽었다면···.”


“3차원의 세계에서 죽는다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집니다. 저를 만나기 전과 후, 재호 씨의 경우엔 1928년 10월 10일 전과 후로 나뉘게 됩니다. 저를 만나기 전 과거의 시간대에서 재호 씨가 죽으면 그 과거를 살고 있던 또 다른 자신이 살아가고 있겠죠. 단지 그 과거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겠지요. 4차원에서 죽은 것처럼.”


“그렇다면, 제가 고문을 받다 죽었다고 해도 원래의 제가 살고 있으니 제 존재는 그대로군요. 기억을 잃겠지만요.”


“네. 하지만 저를 만난 시간 이후 미래에서 죽게 되면 존재의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요.”


“사라진다니요?”


“비어버린 시간 때문이죠. 3차원의 시간은 ‘존재’를 증명해야 합니다. 저를 만나 멈춰버린 시간에서 미래로 간다면 멈춰버린 시간과 미래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 거죠. 존재의 공간은 3차원에선 성립하지 않아요. 그러니 멈춰진 시간보다 미래에서 죽게 되면 영원히 사라지는 겁니다.”


“1928년 10월 10일 이후의 시간대에서 죽게 되면 전 그냥 사라진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없었던 사람이니까요.”


재호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어쩌면 유신이 말이 와닿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이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과, 현규 삼촌을 만났던 일도, 그리고 지수, 내 생명의 은인인 지수마저 잃는다니···!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엘런이 유신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았다.


“야! 이 사기꾼 새끼! 이런 말은 처음부터 했어야지!! 길잡이만 하면 된다며! 이렇게 위험한 일인 줄 알았으면 우리는 처음부터 거절했을 거야!”


엘런은 유신이 너무 미웠다.


“미안해요. 이렇게 된 건 제 불찰입니다. 이렇게 일이 꼬일 줄 생각 못했어요.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대들을 다시 원래의 3차원 세계로 보내줄 생각입니다.”


“엘런! 유신 잘못이 아니야. 독단적인 행동을 한 건 나야, 내가 유신의 말만 잘 따랐어도 이렇게 모두가 위험한 일에 빠지진 않았을 거야.”


재호가 엘런을 말렸다. 현우도 덩달아 엘런을 말렸다. 엘런은 유신의 멱살을 놓고 숨을 거칠게 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힘든 시기인 걸 진작 알았다면 저도 다른 대책을 세웠을 텐데. 메데이아는 제 선에서 처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신은 흐트러진 셔츠의 깃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전 그래도 유신과 함께 하겠어요.”


지수의 목소리였다.

2층에서 줄곧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난간을 잡고 찬찬히 내려왔다.


“재호의 시대에 가보고 알았어요, 지금의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고작 내 집 하나 없어서 나는 여태껏 불평하고 서러워했지요. 편안한 내 땅을 자유롭게 밟을 수 있음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난 재호를 저렇게 만든 인간들을 용서 할 수 없어요. 역사는 바꿀 수 없겠지만 작은 복수쯤은 해볼 생각이에요.”


“지수,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정말 큰일 날 뻔한 거 몰라? 기차에서도 종로경찰서에서도! 이번엔 운이 좋았던 거지, 다음번에도 운이 좋을 거란 보장이 있을 것 같아?”


엘런이 소리쳤다.

기차에서 낭인들에게 위협을 당할 때 구해준 것은 사실 현우와 엘런이 아닌 메데이아였다. 종로경찰서에서도 그녀와 재호를 풀어준 건 바로 일본 경찰이 아닌 메데이아였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알아, 나도. 그렇지만 메데이아를 막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도 없는 거잖아. 유신은 사람을 해칠 수 없다며. 들켜서도 안된다며···. 그럼 도울 사람이 우리밖에 더 있어?”


지수의 쓴소리가 재호와 엘런, 현우의 심금을 휘저었다.


“그래. 한반도는 대대로 한겨레의 삶의 터전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어? 나도 지수 의견에 찬성이야. 아까도 말했듯 나도 유신과 함께 가겠어.”


현우는 지수의 말에 공감했다. 나라를 위해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선 그인데, 심지어 지구를 구하는 일이라는데 기쁘게 동참하고 싶었다.


“이번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틀 뒤 제물포로 갈 겁니다. 그때까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유신은 끝까지 부탁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

메데이아는 종로경찰서의 순사 열댓 명과 제물포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 순사들은 그에게 명분상 데리고 가는 걸 뿐 필요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중국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군수물자를 저장해두는 창고를 지으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중국을 식민지화 하든 조선을 말살하든 관심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양이 많아 힘이 좀 들겠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지겨운 곳도 끝이야.’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한반도의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메디아 행성에 송출하는 것뿐. 라메탈 별과 충돌하기 전에 중력을 안정화해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라메탈 별은 오랜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평화롭게만 살아왔던 터라 긴 전쟁에는 약하다.

라메탈 별을 정복해서 메디아 행성에 있는 모든 에너지원을 라메탈 별에 흡수시켜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던 메데이아에게 이번 일은 아주 중요했다.

군수물자를 운반할 큰 창고는 그의 암흑 에너지원을 송출할 장소였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주머니에서 비녀를 꺼내 추억이나 하듯 만지작거려 보았다.


‘신··· 지수. 뭐 하는 여자일까.’


그는 지수라는 여자가 계속 궁금했다.


기차에서는 조선인 부부행세를 했다가,

경찰서에서는 독립군의 누나 행세를 했다.

신출귀몰한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녀의 긴 갈색 머리칼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아우라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소중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싶은 걸까.


뭐가 됐든 메데이아는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새장 안의 새처럼 가둬놓고 키우고 싶어졌다.


‘이름은 신지수가 맞는 걸까.’


독립군의 명단을 다 뒤져봐도 신지수란 이름은 없었다.

신분을 속였거나 독립군이 아니란 뜻인데.


1시간 40분여를 경성에서 달려온 기차는 제물포에 도착했다. 메데이아는 순사들을 시켜 창고 근처를 지키게 했다. 몇 개월 전부터 짓기 시작해 이제 완성된 창고는 축구장 20개를 합친 크기만큼 컸다.


“하하하! 이 정도 양이면 메디아 행성의 중력은 그런대로 채워지겠군. 아버지와 형이 사랑하는 지구의 중력이 줄어들어서 어쩌나?”


기분이 좋아진 메데이아는 비열한 웃음을 내보였다.


‘보름달이 뜨는 날 송출한다.’



*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 재호를 약을 먹여 재우고 지수는 그의 방을 나왔다. 20대 청년답게 건강한 재호의 몸은 금방 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야. 고비는 넘겼어. 상처 티가 많이 안 나면 좋겠는데···. 내 시대로 가서 상처 지워주는 레이저 시술 해주고 싶다.’


지수는 며칠 동안 재호를 간호하며 제대로 씻질 못해 욕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할 참이었다.

욕실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훌훌 벗어 던져버리고 욕조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물을 받으며 지수는 생각에 잠겼다.


재호의 방에서 깜박 잠이 들었을 때 느껴졌던 그의 숨소리, 그의 손길··· 그리고···

지금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재호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수는 착한 재호를 두고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곧 욕조에 물이 차자, 그녀는 물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에취!”


!!

뭐지? 

이 안에 누가 있나?


“에, 에취!”


“누구야!!”


지수는 탕에 앉아 두 팔로 엑스를 그려 보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목욕탕 커튼이 바람에 나부껴 살랑거렸다.

그 살랑거리는 커튼 사이, 엘런이 반나체로 뒤돌아 서 있었다.


“엘런?”


“아··· 씨···.”


그는 들켰다는 제스처로 두 손을 얼굴에 감쌌다. 그의 몸은 불에 덴 듯 온몸이 빨갛게 익어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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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P21: 슬픈 영화 24.09.21 3 0 10쪽
20 EP20: 복숭앗빛 입술 24.09.06 3 0 10쪽
19 EP19: AtoZ 24.09.05 4 0 9쪽
18 EP18: 그녀의 연기 24.09.04 5 0 10쪽
17 EP17: 종로경찰서 24.09.03 5 0 10쪽
16 EP16: 스위트룸 24.09.02 5 0 10쪽
15 EP15: 1928년 7월 7일 24.08.31 4 0 10쪽
14 EP14: 임옥호텔 24.08.30 5 0 9쪽
13 EP13: 지킬 수 있는 남자 24.08.29 5 0 10쪽
12 EP12: 모갈 1호 24.08.28 5 0 10쪽
11 EP11: 잃어버린 시간 24.08.27 5 0 9쪽
10 EP10: 넌 친구니까 24.08.26 5 0 9쪽
9 EP9: 비밀을 지켜 줄게요 24.08.24 5 0 10쪽
8 EP8: 라메탈 별에서 온 아스트론 24.08.23 5 0 9쪽
7 EP7: 은빛 머리 남자 24.08.22 4 0 9쪽
6 EP6: VVIP 24.08.21 6 0 10쪽
5 EP5: 당신이 왜 여기에 24.08.20 6 0 9쪽
4 EP4: 지금은 몇 년도? 24.08.19 7 0 9쪽
3 EP3: 여긴 도대체 어디 24.08.17 7 0 10쪽
2 EP2: 늙은 여우 24.08.16 7 0 10쪽
1 EP1: 우리는 영원한 스무 살 24.08.15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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