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이렇게 만나네?(1)
쿵. 쿵.
뭐지.
층간소음인가.
가뜩이나 어제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쿵. 쿵!
그러고보니 여기가 제일 고층인데 층간소음···?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순간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쿵! 쿵!
이내,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자각했다.
누가 이 시간에 온단 말인가.
그것도 굳이굳이 69층까지.
나는 꽁지발을 서서 천천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누, 누구세요?”
“에코포로 회장실 이기영 비서실장입니다. 잠시 대화 좀 가능하시겠습니까?”
“화장실이요?”
잠에서 갓 일어난 탓에 말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문 너머로 화를 참는 듯 숨소리를 간신히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코포로 이동주 회장님 비서실장입니다. 잠시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문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우선 문을 열었다.
“에코포로에서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아니 잠깐만요! 저희 집을 어떻게 안 겁니까?”
막내 딸의 애인이라고 하니 미행이라도 붙인건가.
이해는 하겠다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규 씨를 뵐려면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하- 그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회장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셔서 잠시 들렸습니다.”
어제 한 번만 만나고 오면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 도와줬으면 할 만큼 한 거겠지.
“저,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나본데 며칠 전에 이나연 점장님이···"
"알고 있습니다. 실제 애인 사이는 아닐테고 아가씨가 부탁을 드렸겠죠."
"그렇죠? 역시 알고 있었··· 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왜 나를?
"저와는 다르게 회장님께서는 그 쪽을 꽤나 좋게 본 것 같습니다."
"아니, 제가 그 자리에 가서 뭘 한 게 없는데 마음에 들고말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리 선견지명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고작 몇 분만에 사람을 마음에 들어할 수가 있는건가.
내 말에 기분이 조금 상했는지 이기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자신의 자켓 안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이게 뭐죠?"
"제 명함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저에게 주냐 이 말입니다."
"저희 회사 홍보팀에 한 자리를 마련해놓겠습니다. 우선은 그 곳에서 시작하세요."
"네?"
이런 걸 스카웃 제안이라고 하는 건가.
설마··· 라스미디어에서의 내 실력이 거기까지 벌써 소문이 난 건가.
이기영은 고개를 잠시 들어 김민규를 쳐다보자 그의 미간이 더 좁혀졌다.
'저 기분 나쁘게 우쭐해하는 표정은 뭐지?'
"우연이든 실력이든 김민규 씨가 돈이 많은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과연 그 돈에 맞는 사람인지를 보고싶어하십니다."
"저를 사윗감으로 평가라도 하겠다는건가요? 죄송하지만 저는 이나연 점장님이고 에코포로고 일절 관심이 없어서요."
"적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리죠. 저희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할 때가 된다면 민규 씨는 그 어디에 가서도 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왜 회장님의 마음에···"
"회장님께서 딱 이 말씀 하나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기영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돈을 버는 법 뿐만 아니라 쓸 줄 아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그 말씀은 제게 그 법이라도 알려주겠다라는 말씀이십니까?"
"약속드리죠. 아마, 민규 씨가 과거에 다니던 회사와는 다를 겁니다."
벌써 회사까지 뒷조사를 한 건가.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기영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한동안 명함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고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확실한 건 입꼬리가 그 어느때보다 올라가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회사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를.
그리고 내 능력은 정말 투자에서 돈을 버는 것에만 쓰여질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발휘될 지.
업부트에서 확인한 비트코인은 여전히 횡보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트코인 매수를 진행하고 이후 고점에 매도한다.
그리고 그 금액으로 에코포로를 매수하고 주가 150만원에 팔아넘긴 돈이라면 에코포로를 사고도 남을 돈이 될 것이다.
대주주가 되면 조금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세계 최고의 졸부가 될 것인지.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될 것인지.
이제는 그걸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
결정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주말에 생각정리를 마쳤고 이기영 실장에게 연락을 하자 당장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에코포로에 낙하산으로 입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인턴사원이었다.
3개월 간 수습기간을 거쳐 정직원이 될지 안될지는 미지수.
입사하면 이동주 회장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대면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일절 없었다.
지이잉-
이기영 실장으로부터 문자가 들어왔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건투고 권투고간에 뭐를 알려줘야 하지.
로비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채 주변 눈치만 힐끗거렸다.
지나가는 직원들의 목에는 다들 사원증이 하나씩 걸려있었다.
한 손에는 가방.
그리고 다른 손에는 아침 일찍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온 커피까지.
회사를 다닐때는 그렇게 출근하기가 싫었는데 막상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가슴이 울려왔다.
누군가 그랬다.
회사는 전쟁터라고.
그 전쟁터 속에서 살아남으면 평사원 기준 한달에 얼추 200만원에서 300만원 수준의 보상이 주어진다.
내가 여기에 발을 들인 건 그 보상이 아닌 경험을 얻기 위함이다.
보상이라면 이미 넘칠 듯 많으니까.
또각- 또각-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과 맞닿으며 청량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인기척에 나는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그녀를 응시했다.
긴 생머리에 유독 진한 쌍커풀.
콧대는 금방이라도 치솟아 날아오를 것 같이 높은 콧대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을 건넸다.
"김민규 씨?"
"아, 네 맞습니다."
"반가워요.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될 김현지 대리에요."
"그럼 홍보팀 선배님이십니까?"
"뭐, 그런 셈이죠?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면서 설명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
한편 홍보팀의 사무실은 아침부터 새롭게 들어오는 신입사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공채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시채용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거냐고."
배준성 과장이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후릅- 마시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옆에서 주태양 대리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이기영 실장이 움직였다던데요?"
"뭐? 이기영 부장님이?"
쾅-
이기영이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배 과장도 깜짝 놀라 커피를 쏟을 뻔 했다.
"놀랐습니다. 팀장님."
홍보팀에는 총 4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올해 진급한 김현지 대리와 주태양 대리, 배준성 과장.
그리고 홍보팀장 서태석 차장.
"다시 말해봐. 주 대리."
"어떤걸 말씀이십니까?"
"기영이가 움직여?"
"아- 인사팀에 제 동기한테 듣기로는 이기영 실장이 인사담당님을 직접 만나 홍보팀에 자리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서태석과 이기영은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다.
연수원 성적 1등은 이기영의 자리였고 2등은 서태석의 자리였다.
이후, 이기영은 인사팀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고 서태석은 홍보팀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같은 HR부문으로 평가를 항상 같이 받아왔는데 서태석이 이기영을 이긴적은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이기영은 최연소 부장 진급과 함께 회장실의 비서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먼 훗날에서야 알았지만 서태석의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에는 이기영의 경쟁심리로 인한 밑 작업들 때문이었다.
"오늘 들어오는 애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김민규입니다."
"인턴 기간이 얼마라고?"
"3개월입니다."
"그래?"
서 팀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배 과장은 꺼림칙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설마··· 제가 아는 그런 것 아니겠죠 팀장님?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배 과장."
"네, 팀장님."
"기영이는 자신의 정보를 절대로 흘리지 않는 사람이야. 그런데 주 대리 동기가 알 정도면 대놓고 드러내겠다는 거 아니야?"
"네?"
"일부러 흘린거다 내게 보란듯이. 한 번 잘 키워보라 이거지. 그럼 기회를 한 번 줄수도 있다라는 의미로."
"에이- 설마 그럴까요?"
"너는 기영이를 잘 몰라. 크하하하핫! 기영이 새끼가 나를 완전히 우습게 아네. 재밌겠어. 인턴이 떨어졌을 때 기영이의 반응."
인턴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 평가 권한은 오롯이 팀장에게 부여된다.
즉 서태석이 눈치만 보지 않는다면 그를 내쫒는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와 같이 서태석은 입맛을 다셨다.
그 상황에 맞춰 김현지 대리가 김민규를 뎆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스윽-
나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각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
사무실마다 묘하게 다른 공기가 흐른다.
어떤 사무실들은 들어가기만 하더라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는 보통 팀장이 굉장히 까칠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는···
무난하다.
머리가 반쯤 벗겨질 것 같은 남자 하나.
저 사람이 팀장이겠군.
그리고 믹스커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 팀의 차석정도.
그 옆에 붙어있는 남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인걸로 보아 대리급은 되어보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로 함께 일하게 된 김민규 인턴입니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은 그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평범한데?'
김현지 대리가 차례대로 인사를 시키기 시작했다.
"이 쪽은 저희 홍보팀장님 서태석 차장님입니다. 그리고 이 쪽은 배준성 과장님, 그리고 이 쪽은 제 맞선배 주태양 대리님입니다."
배 과장과 주 대리는 나름 살갑게 맞이하고 싶었지만 서 팀장의 눈치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서 팀장은 김민규를 위아래로 한 번 훑고는 입을 뗐다.
"오늘 새롭게 찍는 에코포로 홍보영상 입찰 11시 예정이지?“
"네, 11시입니다."
"배 과장이랑 김 대리가 동행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인턴에게도 평가서 하나 내어줘."
"네?"
"걱정마. 입찰 평가에는 반영하지 않을 거니까. 보는 안목이 얼마나 있는지 보려는 거니까 하나 내어줘."
"네, 알겠습니다."
서 팀장은 다시금 자리에 앉으며 배 과장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 입찰 들어오는 업체가 어디어디라고 했지?"
"업체는 총 3곳이고요. 일등기획, HI애드, 라스미디어입니다."
라스미디어···?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
라스미디어 사무실.
김민규가 퇴사하고 그 안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주진영이 있었다.
훤칠한 외모에 일도 잘하고 성격까지 좋아 회사에서 예쁨을 잔뜩 받던 주진영은 그 사건 이후 회사에서 나락이 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싫어하게 된 건 오 부장이었다.
"주진영!!"
하루에도 고성이 몇 번이나 오갔다.
주진영은 발에 로켓이라도 달린 듯 발을 박차고 오 부장의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네, 부장님."
"에코포로 홍보영상 기획안 보고서를 이따구로밖에 못 만들어? 벌써 몇 번을 수정했나!"
"죄송합니다."
"하아- 네 선배 민규의 반만이라도 좀 닮아라. 그렇게 배웠으면서도 아직도 이런 거 혼자 제대로 못 만들면 어떡하냐."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말고 잘 하라고! 잘!"
오 부장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주진영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내가 이래서 무슨 너랑 입찰을 가겠냐. 아니다. 그래도 가야지. 사람이 없는데. 누구 때문에 민규가 나가버려서."
오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진영의 어깨를 톡 잡았다.
"오늘 PT 잘 못하면 각오하라고."
주진영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번 PT를 성공적으로 마쳐 다시금 오 부장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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