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의 비선실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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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도둑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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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1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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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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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월 (3)

DUMMY

“화월아.”


“예, 전하.”


“호위무사여.”


“···예, 전하.”


이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나와 정화월을 불러세웠다.


이번 회차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굳은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보통 저 표정을 한 이설은, 느닷없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설과 몇 년간 친우 관계를 유지해온 정화월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지라, 그녀 역시 마른 침을 삼켜가며 이설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해는 중천이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것이···”


이설은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더니, 허리에 척 손을 얹고는 당당하게 고했다.


“체통 따위는 뒤로 하고, 낮잠이나 거하게 자고 싶은 날씨로구나!”


···제 딴에는 엄청난 결심을 한 채 이른 말로 보인다.


“사실, 내 그대들만 데리고 나들이를 나온 것도 전부 계획된 일이니라. 딱 한 시진, 아니, 반 시진이라도 좋으니··· 잠시 저 정자에 가서 낮잠을 잘 것이니라!”


“전하, 체통을 지키셔야···”


“내 그 말이 듣고 싶지 않아 굳이 이 곳까지 나온게다! 본궁이 봄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자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화월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 그게··· 하오나···”


이설에게 무어라 더 일갈하려던 정화월은,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


최근에 청휘궁에 들렸다 하니, 피차 할 말이 더 있을 터.


“괜찮지 않겠습니까. 적당한 휴식은 되려 수학(修學)에 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화월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딱 반 시진 뒤에 깨워드리겠습니다. 전하. 한 시진 뒤에 국사강론 수업이 예정되어 있고, 두 시진 뒤에는 고전경서 수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으, 으윽··· 괜한 소리를 하는구나. 오늘 하루만 쉬는 날로 하면 안 되겠느냐? 가끔은, 본궁도 수학하기 싫은 날도 있는 법이니라. 하루,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


한 번 제 고집이 통하기 시작한 뒤에는, 이설은 제법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그녀를 몇 회차나 봐온 나는,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어리광을 부리곤 있으나, 이설 본연의 성품이 바르기 그지없었으니.


그녀는 백 마디 아첨보단 한 마디의 바른 말에 가책을 느끼곤 하는 인물이었다.


“전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같이 하는 수학이 부질없어 보이더라도, 이것이 하루 이틀 쌓이기 시작하면 후일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설의 둘도 없는 친우였던 정화월 역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 무인의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는 말도 있지요. 별채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돌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꾸준히, 쉼없이 수학하면 전하 역시도 후일···”


“그, 그런 입 바른 소리는 그만하거라! 내 그대들의 뜻은 잘 알겠다! 본궁은 이제 오침 시간을 가질 것이니! 반 시진··· 딱 반 시진만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거라!”


이설은 더는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허리에 두었던 손을 양쪽 귀로 가져다 대고는, 제 말대로 체통따윈 개나 주겠다는 듯 꽃신을 휙휙 벗고는 정자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둘이 언제 친해졌는지 모르겠구나··· 참 기쁜 일이지만, 잔소리가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놓고 기뻐할 수 만은 없겠구나···”


이윽고, 이설은 정말로 잠에 들어버렸다.


시녀장이 없을 때에 이설은, ‘정말 황족이 이래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풀어진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 모습에 웃음을 짓고 있자니, 어느새 눈 앞에 댕기머리를 한 나인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서 무인.”


“예, 정 나인.”


“···소인이 무어라 사죄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화월.


이설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매 회차 내게 죽임을 당했던 그녀는 내게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사과를 해왔다.


생활감이 물씬 묻어있는 치마에 굳은살 베긴 손이 공손히 올라가 있었다.


“황녀 전하의 시종 되는 자로써, 전하께 해를 끼치려는 자들에게 속아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공손히 올라가 있던 손은, 어느새 치마에 주름을 만들고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소인이 직접 전하께 해를 끼칠 뻔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서 무인께서 일러주지 않았다면 소인은··· 소인은···”


“···”


나는 정화월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한참을 고민했다.


당신 때문에 이설이 죽을 뻔 했다고 하며 화를 내어야 할까.


뒤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됐다고,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할까.


나 역시 당신을 오해했으며, 오해를 풀지 않았더라면 매 회차 그러했듯 이번에도 당신을 죽였을 것이라며 사과를 해야 할까.


잠깐의 정적을 묵언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정화월이 재차 설명을 덧붙였다.


“전하께도 사죄를 드렸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전하께 폐를 끼칠 뻔 했다고··· 궁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으니, 전하께 제 처분을 결정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어렵사리 입을 뗐다.


“하여, 전하께선 무어라 답하셨습니까?”


“···어찌 되었든, 본인을 위해 동분서주 움직이다가 생긴 일이 틀림없을 것이라 하시곤,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설 전하는, 그런 분이지요.”


사실, 정화월에게 어떤 말을 돌려주어야 할 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화를 내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당사자인 이설이 할 일이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여, 나는 부외자로써 던질 수 있는 질문을 하고자 했다.


“정 나인께서는, 무지로 행한 악한 일이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


정화월은 침묵했다.


구태여 대상을 지정하진 않았으나,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잘 알고 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해를 끼칠 뻔 했으며, 해를 끼쳤으니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화월에게 묻는 말이었으나, 나 자신에게 묻고싶은 말이기도 했다.


나 역시도 정화월이 흑막이라고 착각하고는, 매 회차 그녀를 죽이곤 했으니.


“···”


“···”


침묵이 길어졌다.


대략 5분여가 지난 뒤에야, 정화월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건 핑계에 불과하겠지요. 이미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기 마련입니다.”


역시 정화월 본인에게 하는 말이겠으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허나, 죄스러움에 잠식되어 씁쓸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걸로 압니다.”


어느새, 정화월에게 비치던 씁쓸함이나 괴로움 같은 감정들은 자취를 감췄다.


“전하께 해를 끼치려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전하께 속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인은 그리 생각합니다.”


정화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저 당당한 표정을 한 채 내게 그리 말해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속죄··· 말씀이십니까.”


“예, 아마 평생을 속죄하여도 제 죄의 무게를 전부 덜어내진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


어쩌면, 정화월과 나는 제법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후회와 비탄에 울부짖던 정화월도.


마음 속 깊이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결국 제 할 일을 꿋꿋이 해나가겠다며 다짐하는 정화월도.


멍청한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아득바득 최선을 다한다는 부분에서···


분명,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분위기를 풀어볼 생각으로, 내가 느낀 바를 그대로 말로 옮겨 보았다.


“정 나인, 저희··· 제법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화월은 질색하며 얼굴을 구기곤, 나와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엑, 서 무인, 다른 건 몰라도, 아무래도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은 참이었던 모양입니다. 공통분모를 강조하며 제 호감을 살 생각으로 보입니다만··· 송구하오나 서 무인같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데다가, 능구렁이 같은 심성을 가진 이는 제 취향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자고로 무사라면 좀 더 우직하고, 단단한 기질이 있어야 하지요.”


나 역시 정화월의 말을 듣고는 질색할 수 밖에 없었다.


“저도 정 나인같은 사람은 딱 질색입니다. 도끼병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뭐 좋다고 정 나인에게 플러팅···”


“···플, 뭐요?”


 “아니, 추파를 던진단 말입니까? 저를 흑막으로 생각하신 것도 모자라, 이젠 본인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또 의심하시는 걸 보아하니, 도끼병 뿐만 아니라 의심병도 있는 모양입니다. 예, 착각도 유분수라는 말은 필히 정 나인을 보고 만든 말이겠지요.”


“하,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좋을 것을! 제 한평생 이렇게 말 많은 무사는 처음 봤습니다!”


“살면 또 얼마나 살았다고···”


“서 무인, 실례지만··· 올해 성년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알기론, 제가 연배로는 한참 위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궁밥만 몇 년을 먹어왔는지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서로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들며, 어느 부분이 꼴 보기 싫은 지 서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뒤.


소강 상태가 찾아오고 나서야, 우리는 본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황녀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서 무인.”


“예,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정 나인.”


그렇게, 이설의 죽음에 깊게 관여하곤 했으며, 매 회차 내 첫 숙청 대상이 되었던 정화월은.


같은 시간이 반복된지 일곱번째가 된 이번 회차에서야, 처음으로 내 우군이 되었다.



***



일화국의 황제는, 나라의 국호를 따라 ‘태양’으로 일컬어지고는 한다.


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는 것이 하늘, 즉 ‘천신’이며, 이 천신과 가장 가까운 자로써 신의 뜻을 대변하는 하늘의 아들이 일화국의 태양, 황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태양’이라 하면, 곧 일화국 만백성의 지아비로 여겨진다.


뭔가 어디선가 본 듯한 구조가 아닌가?


‘황녀님, 호위가 아닌···’의 작가는, ‘요괴사냥궁중암투피폐전개’에 더불어, 성좌물과 성경까지도 재밌게 본 모양인지, 100화 급완결을 때리면서도 본인이 구상한 ‘천신’과 ‘태양’에 대한 설정을 3화에 걸쳐 구구절절 설명하곤 했다.


“진작 50화 쯤에 손절 때릴 걸··· 아니, 애초에 후원도 하지 말걸··· 이미 후원한게 너무 아까워서 관성으로 따라간다는게··· 아이고, 내 팔자야... ”


허나, 정화월이 아무리 후회해도 이설에게 해를 끼칠 뻔 했다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이설이 잠결에 머리에 붙은 강아지풀을 떼어내지 못하곤, 몰래 오침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시녀장에게 들킬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후회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튼, 다시 천신과 황제에 얘기로 돌아오자면.


인간이 자웅동체가 아닌 이상, 아버지 하나만 있으면 그 어떤 생명도 잉태될 순 없는 노릇이다.


고로, 천신에 대조되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땅, ‘지모신’이며.


황제인 ‘태양’에 대조되는 만백성의 어머니가 ‘달’이며, 황제의 정실 부인인 황후이다.


황제는 그저 황제이고, 태양이었다.


다만 달은 그녀의 출신 가문이나, 성정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해를 품은 인자한 달’이나, ‘보름마다 밝게 빛나는 달’, ‘구름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달’ 등등···


저마다의 특징을 나타내며, 황후의 특징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회귀하자마자 휘갈긴 죽지를 들어올리곤, 거칠게 써두었던 글씨를 다시 살폈다.


화난 감정이 물씬 묻어나, 먹물이 이곳저곳 튀어 있던 글씨 사이에.


나도 모르게 꾹 눌러쓴 것인지, 유난히 굵은 단어가 하나 있었다.


‘피칠갑을 한 붉은 달.’


일화국을 패망으로 이끄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이름만으로도 공포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황후.


후일, 권력에 미쳐 황족들을 전원 숙청하려 하고는 황제의 뒤에서 되려 실권을 잡고자 했던 악녀.


···그리고, 역시나 이설을 향해 억까를 이어가던 인물.


‘철혈 황후··· 아니, 아직은 태자비인가.’


태자비 유연희.


그녀가 악녀가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내 다음 목표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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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태자비 24.08.24 12 0 18쪽
7 교육 (2) 24.08.23 12 0 23쪽
6 교육 (1) 24.08.22 14 0 23쪽
» 정화월 (3) 24.08.21 18 0 13쪽
4 정화월 (2) 24.08.21 15 0 12쪽
3 정화월 (1) 24.08.20 19 0 14쪽
2 돌담과 개나리 24.08.20 34 0 19쪽
1 호위무사 24.08.20 4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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