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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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한
작품등록일 :
2024.08.30 17:17
최근연재일 :
2024.09.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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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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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DUMMY

피를 마신 후 도경은 자정이 되길 기다렸다가 의식을 잃은 민소매 남자를 등에 업고 집으로 향했다.

도경은 산 아래에 위치한 오래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주택들 사이로 난 골목은 대부분 좁고 어두워 자정이 넘으면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는 길에 두 번 정도 행인들과 마주칠 뻔했지만, 예민해진 시각과 청각을 이용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경이 사는 집은 작은 마당이 딸린 낡은 단층 주택이었다.

거기서 도경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녹슬어 삐걱거리는 철제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 도경은 주택의 현관문 밑에 있는 계단의 옆쪽으로 갔다.


계단 옆에는 반지하 정도 되는 창고로 사용하는 방이 있었다.

도경은 그 창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남자를 눕힌 후 문을 닫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흐릿한 불빛을 타고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창고 방 안에는 쓰지 않는 살림살이와 할아버지의 유품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경찰이었던 도경의 할아버지는 정년퇴임 후 취미로 색소폰을 연주했었는데 이 창고 방을 연습장처럼 사용하셨었다.

그래서 문도 방음이 되는 철문으로 바꾸고 벽과 천정에는 방음용 스펀지를 붙여놓았다.

비록 오래돼서 군데군데 떨어진 곳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방음 효과는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경은 쌓여 있는 짐에서 찾은 헌 옷과 노끈으로 남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과 발을 묶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현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갑자기 거실 불이 켜졌다.


“아이고 놀라라. 난 또 도둑이 든 줄 알았잖냐.”

도경의 할머니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 시간까지 안 주무셨어요?”

도경이 칼에 찔린 팔을 황급히 뒤로 감추며 말했다.

“파출소에서 너 찾는 전화가 불이 나게 오는데 걱정이 돼서 잠이 와야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문제는요.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됐다. 밥 아직 안 먹었지? 밥 차려 줄 테니 어서 씻고 와서 먹어라.”

도경은 욕실로 들어가서 윗옷을 벗고 팔에 묻은 피를 물로 씻어냈다.

그런데 피를 다 닦아냈는데도 다친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고사하고 긁힌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 같았다.

아무래도 피를 마신 후 몸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저 육중한 남자를 업고 몇 킬로를 걸어왔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밤인데도 대낮처럼 앞이 환하게 보였다.


그때 밖에서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경은 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건너갔다.

식탁 위에는 국과 반찬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사실 도경은 민소매 남자를 업고 오는 내내 극도의 허기를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다.


도경은 의자에 앉자마자 식탁 위의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하이고. 요즘 통 밥도 못 먹는 것 같길래 어디 아픈가 걱정했는데 이제 다 나았나 보다.”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가 흐뭇한 듯 도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밥 좀 더 주랴?”


도경은 밥 두 그릇을 더 해치우고 나서 자기 방 침대 위에 곯아떨어지듯 잠이 들었다.

사흘 만에 든 잠은 아주 깊고 평화로웠다.


도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새벽 2시경이었다.

거의 24시간 동안 잤다는 걸 깨달은 도경은 화들짝 놀라 창고 방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민소매 남자는 처음 상태 그대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순간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확인해 보니 호흡과 맥박은 모두 정상이었다.

하지만 뺨을 몇 대 때려도 깨진 않았다.

아무래도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대체 남자의 피를 얼마나 빨아 마신 걸까?

정확한 양은 알 수 없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간 느낌으로 봤을 때 상당한 양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민소매 티셔츠도 가슴에서 배까지 온통 붉은 혈흔으로 얼룩져 있었다.

흘린 피가 저 정도였으니 어쩌면 과다출혈로 죽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경은 남자의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자신이 물었던 곳을 살펴봤다.

남자의 목울대 좌우로 두 개씩 점처럼 작은 네 개의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출혈이 있었던 상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사흘 전 화상을 입은 여자에게 물렸던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붉은 네 개의 자국의 형태도 도경의 목에 난 것과 똑같았다.


다른 점은 자국이 난 곳이 목의 뒤쪽이 아니라 앞쪽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방 깨어난 도경과 달리 민소매 남자는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도경이 물었던 부위는 목의 경동맥이 지나가는 자리였다.

그곳을 문 이유는 거기서 피 냄새가 가장 짙게 풍겨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구대에서도 같은 이유로 코피가 난 남자의 목 앞쪽을 노렸었다.


그런데 여자는 도경의 목의 앞이 아니라 뒤를 물었다.

그가 알기로는 목뒤에는 큰 혈관이 없었다.


경황이 없어 아무 곳이나 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무슨 이유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방법은 없었다.


도경은 다시 민소매 남자를 내려다봤다.

지금도 남자에게서 달큼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민소매 남자뿐만이 아니라 집에 오늘 길에 마주칠 뻔한 행인들과 할머니에게서도 피 냄새가 났다.

하지만 피를 마셔서 그런지 어제와 같은 충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그를 괴롭혔던 갈증과 구토 같은 증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잠도 푹 잤다.


하지만 사람의 피를 마셨다는 죄책감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감이 도경의 마음을 옥죄었다.

여자를 강간하고 죽인 놈이라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긴 했지만, 그건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만약 여자가 살아 있었다면 도경은 아마 그 여자의 피를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사람의 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 남자의 피를 마시는 동안 도경은 온몸이 쩌릿해질 정도의 황홀감을 느꼈다.

그 황홀감은 지금까지 느껴봤던 어떤 감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만약 다시 피에 마시고 싶은 충동이 다시 발동한다면 그 충동에 저항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런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분명 언젠가는 사람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무인도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깔끔할 것이다.


그때 도경의 머릿속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문제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라. 눈앞의 문제들이 하나씩 사라지면 사건의 핵심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 도경의 눈앞에 보이는 문제는 바로 민소매 남자였다.

도경은 남자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다.

몸에서 다량의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갔으니 이대로 두면 남자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강간 살인범이라고 해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를 병원이나 경찰에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남자가 도경이 피를 빨았다고 떠들어 댈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증거도 없는데 그런 황당한 소리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경의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도경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화상을 입은 여자에게 물린 후 어떤 종류의 병이 옮은 건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병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건 확실했다.


여자에게 물려서 병이 전염됐다면 민소매 남자도 도경에게 그 병에 옮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남자가 병원이나 구치소에 있다가 누군가를 물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일단 여기에 가두어 둔 상태에서 남자가 죽지 않을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남자의 상태를 관찰하면 도경이 걸린 병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경은 창고 방문을 잠그고 나와 자기 방으로 갔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찾아 전원을 켰다.

잠시 후 메시지가 빗발치듯 들어왔다.

대부분 지구대와 지구대의 동료들이 보낸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었다.


도경은 그중 그제 저녁, 그러니까 도경이 지구대를 뛰쳐나온 날 밤에 들어온 최 경위의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어디야? 지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피해자 혼절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으니까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괜히 열어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김우식 순경에게 온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어제저녁 10경에 들어온 것이었다.

‘주무시고 계시길래 그냥 돌아갑니다. 메시지 확인하시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지금 지구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도경은 거기까지 보고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우식이 집까지 찾아온 걸 보니 사태가 꽤 나 심각해진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보니 마음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책임도 자신의 몫이었다.

잘리든 징계를 먹던 빨리 결정이 나야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러려면 지구대에 나가야 했다.

다행히 어제는 비번이었으니 아침에 출근하면 무단결근은 아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어두웠던 하늘에 푸른 빛이 번지고 있었다.

도경이 새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어느새 깨어난 할머니가 그를 불러세웠다.

“어제 파출소에서 사람이 왔었다.”

“네. 알아요.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요.”

“그랬구나. 난 또 모르는 줄 알고.” 할머니는 걱정이 되는 듯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된장찌개 끓여 놓았으니까 밥 먹고 가.”

할머니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도경이 주방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담긴 뚝배기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어제 네 아비한테 전화가 왔었다.”

“뭐라는데요? 설마 또 돈 보내달라고 그래요?”

할머니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절대 보내주지 마세요. 돈 보내줘 봐야 노름하고 술 마시는 데 다 쓴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이번엔 정말 급한가 보더라. 사는 곳 월세도 몇 달 치가 밀려 있다고 그러고.”

“지난달에도 똑같은 소리 했잖아요. 돈도 보내주지 마시고 전화도 아예 받지 마세요.”

“그래도 네 아비인데 어떻게 그러니.”

“전 그런 아버지 둔 적 없어요.”

도경이 발끈하자 할머니가 꺼질 듯 한숨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이고, 자식 잘못 키운 내가 죄인이지.”


도경은 묵묵히 남은 밥을 다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서 배웅을 나온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마음은 잘 알지만 그래도 절대 돈 보내주지 마세요. 할아버지도 생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알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다녀와.”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할머니는 결국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줄 거라는 걸 도경은 알고 있었다.


도경은 10분 정도 걸어가 지구대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건물들 사이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햇빛이 비치자 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도경이 얼른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자 통증이 가시고 심장 박동이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다른 증상은 모두 사라졌지만, 햇빛에 민감한 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사고를 치고 아침부터 선글라스를 쓰고 출근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도경은 마음을 졸이며 지구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구대 입구에 위치한 민원실에는 주취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한 명이 누워서 자고 있다.

그리고 데스크 뒤에는 서너 명의 지구대원들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은 여경이 고개를 들고 도경을 쳐다봤다.

도경을 본 여경이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는 도경의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놀란 여경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번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순경 한 명은 마치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환호성까지 질러댔다.

전혀 뜻밖에 상황에 당황한 도경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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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흡혈 24.09.13 9 1 11쪽
5 발동 24.09.10 10 1 12쪽
4 냄새 24.09.06 16 0 16쪽
3 미라 24.09.03 15 0 9쪽
2 교통사고 24.08.30 1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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