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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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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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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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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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아무것도 없던 숲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멍하니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틴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그 저벅거리는 소리는 조금씩 소녀에게로 가까워지고 있다.

남자도 곁에 없는 숲속.

크리스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아버린다.


「크리스틴, 거기 있느냐?」


「어...?」


다행히도 들려온 것은 남자의 목소리.

그 음성에 크리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요정 소녀는 몸을 휘감는 부자연스러움에 몸을 떤다.

그는 단 한 번도 소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에 휩싸인 크리스틴에게, 답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스리슬쩍 흘러들어왔다.


「안녕, 꼬마 아가씨.」


「앗...!」


「어머,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 많이 놀랐니?」


「아, 아뇨...」


「괜찮으냐? 많이 놀란 것 같구나.」


「괜찮,아요... 조금, 예상하지 못해서...」


남자와 함께 온 이름 모를 여자.

옛날의 크리스틴이라면 크게 두려워하며 우물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크리스틴은 옛날의 그녀가 아니다.

그녀도 남자와 함께 다니며 생긴 눈치가 있다.

남자가 한 번도 하지 않던 일을 한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름 모를 여자와 함께 왔다면 무언가 일이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그 여자가 갑자기 그녀에게 살갑게 대한다면 그 역시 무언가 일이 생긴 조짐일 것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틴은 잠시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남자에게로 다가가 귀여운 딸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아빠...!」


「흐응?」


「늦으셨잖아요...! 일찍, 오신다고 하시고선...!」


「미안하구나.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만나서 말이다.」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한 표정을 짓는 크리스틴.

그 행복은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실 같다.

그렇기에 여자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겠지.


「이상하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 나온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그 목소리에서 확신을 찾았던 걸까.

남자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낮고 단단하다.


「자, 이제 믿겠소?」


「흐음... 뭐, 일단은 그렇다고 치죠.」


「우리가 아직도 의심되오?」


「당연하죠.」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에 남은 의심을 지울 수는 없다.

마음속에 싹튼 불신의 뿌리까지 뽑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렇다면 남자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그럼 하나만 묻겠소.」


「뭐죠?」


「어째서 그렇게까지 의심하는 거요?」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가 의심의 잔뿌리부터 걷어내는 것.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의심이란 녀석은 다시 끝도 모르고 뿌리를 내릴 테니까.


「당연한 일이잖아요?」


「당연하다?」


「네.」


다행히 남자의 말은 아직 독뿌리를 건드리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아직 나아갈 수 있다.

절벽길보다도 위험한 길이지만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뭔가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려.」


「그건 말해줄 수 없네요.」


「무법자 때문이오?」


그렇기에 앞으로 나선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마음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그의 앞에 선 사람은 굳이 말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급한 사람이 다가가 말을 걸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이 상황을 풀 수 있을 테니까.


「뭘 안다고 입을 놀리는 거죠?」


「그것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소.」


「당신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구요.」


「물론 난 그대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오.」


여자의 말에 남자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늘 그를 처음 본 여자는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칼을 뽑을 준비를 한다.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한다면 그 검이 용서하지 않겠지.

물론 그가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이런 곳에서 의미 없는 싸움을 할 정도로 남자는 멍청하지 않다.


「그러나 무법자에게 당하는 것은 여행자만은 아니오. 그렇지 않소?」


「흥. 말은 잘하네.」


그리고 그 말은 다행히도 여자의 이성을 잘 설득한 모양이다.

답하는 목소리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성의 한편에 걸쳐 있는 감정이란 녀석의 마지막 발악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이곳에서 호의를 받지 못한다면, 머나먼 북쪽숲까지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일 테니까.

그 고난 위에 또 하나의 고난이 한 겹 더 겹쳐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남자로서는 이 방법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저, 저기...」


「응? 왜 그러니, 꼬마 아가씨?」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급박한 순간에 갈증을 참지 못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갈라지듯이 들려온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여자는 그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 이거라도 마시렴.」


「앗, 네...!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남자에게 딱딱한 표정만을 보여주는 사람은, 소녀에게만큼은 풍부한 미소와 함께 이것저것 챙겨준다.

여자에게도 크리스틴만 한 여동생이 있는 것일까.

소녀를 돌보는 솜씨가 매우 야무지다.


「동생이 있나 보오.」


「응?」


「아이를 돌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구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인품은 행동으로만 알 수 있으니 말이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듯이 입을 연다.

그녀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다.

그것을 선물할지는 여자의 판단에 달렸다.


「갑자기 칭찬이라니... 너무 속 보이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소. 딸아이를 조금이라도 편한 데에서 재우고 싶으니.」


「편한 데에서...」


남자의 말에 여자는 잠시 시선을 돌려 크리스틴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곁에 달라붙어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여자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꺼내 마음을 달랠 옛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면 알 것 같네요.」


「그러니 부탁드리겠소.」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나요?」


「그렇소. 그러니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이오.」


남자는 그 기억을 건드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오랜 추억에서 느꼈던 행복을 빌어 사정하고 있다.

그 혼자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어디까지 가는데요?」


「머나먼 북쪽의 오래된 숲 근처요.」


「북쪽? 거긴 왜 가시죠?」


「내 고향이오.」


「고향...」


남자의 말에 여자의 눈이 반짝인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분명히 한 단어를 듣고 반응한 것이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이라는 말을 듣고 반응한 것이다.

그 감정은 남자에게 또 하나의 길이 되어 주었다.


「그대의 고향도 그 부근이오?」


「그건 갑자기 무슨 말이죠?」


「표정이 변한 것 같아서 말이오.」


「말도 안 돼...」


남자의 말에 여자의 표정이 살짝 구겨진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 누구도 몰라야 할 자신의 마음을,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읽어냈다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이미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말에 살을 붙여 이어 나가야 한다.


「내 말이 틀리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나는 한낱 여행자일 뿐이오. 다만...」


「다만?」


「눈치는 좀 빠른 편이오.」


평소라면 들을 수 없는 남자의 능청스러운 말.

그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손님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리고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또 다른 말을 비집어 넣는다.


「서로를 대화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건 그렇지만... 으으, 뭔가 짜증나...」


남자의 말에 조금 화가 났는지, 여자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고 부르르 떤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기분 나쁠 수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굳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게서 호의를 바란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저, 저어...」


「응?」


「그, 그러니까... 제 이름, 크리스틴이예요...!」


「어?」


그리고 또 한 번, 크리스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던가.

소녀의 목소리에 이름 모를 여자가 다가와 꽃 한 송이가 되어주었다.


「그렇구나. 나는 앤이라고 해.」


「앤 언니, 군요...!」


「언니라니... 조금 이르지 않니?」


크리스틴의 말에 앤이 새침한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린다.

하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다.

언니라고 친근감을 보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기는 했다.


「그, 불편하셨다면...」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어.」


「아...!」


하지만 앤은 너무나도 솔직하게 기쁨을 말한다.

크리스틴처럼 순수하고 예쁜 아이에게 언니라고 불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앤의 말을 들은 요정 소녀도 행복한 표정으로 그 말에 답한다.

표정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

오직 남자만이 두 소녀의 표정을 평소와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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