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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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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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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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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천둥새가슴살 5인분

DUMMY



빙산 주둔군과의 전투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황혼 교단의 힘을 잘못 가늠하고 있었다.


추적자들은 정말 매서웠다. 돌러가 왜 이기지 못한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성벽에 미끼로 세워둔 언데드들은 시간벌이조차 되지 못했다. 절벽에 매복해있던 군단들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나마 항구를 철저히 파괴한 게 우리의 목숨을 살렸다. 적들은 배없이 물 위를 건너지는 못했다.


고생만 잔뜩하고 얻은 것 없이 군단만 잃었다. 짜증이 감당이 안되서 이를 악물었다. 이 손실을 메꾸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아서 한 방 먹은 걸 되갚아주지? 아니,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 당장 천둥새의 꼬리깃은 또 어디서 얻지? 다른 소재부터 얻어야 하나? 다른 소재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데? 여명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서 여명관 앞에서 용병대장 카를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면상을 후려갈길 뻔 했다.


-워워, 여명왕! 일단 말로 합시다, 말로!

-왜 그러세요, 주인님? 동료분 아니셨어요?


카를의 옆에는 스텔라가 서있었다. 그는 내 공격적인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였다.


-동료 같은 소리!

-하지만... 이 분이 천둥새의 꼬리깃을 가져다주셨는걸요?


뭐라고? 나는 카를에게 달려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을 수 밖에 없게 됐다. 내 공격성에 반응해 카를에게 달려들던 돌러도 움직임을 멈췄다. 카를은 돌러의 날랜 기세에 움찔했다가,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넉살도 참 좋다.


-고용주님 말씀이 딱 맞았군. 완전 분기탱천해있을 거라더니.

-제가 기뻐하고 있겠습니까, 그럼?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간에 배신을 해놓고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도 사정이 있었소. 악의로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카를은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하나 건넸다. 편지의 봉인이 낯익었다. 계약을 작성하던 밤, 주디가 사용했던 봉인이다. 나는 그 봉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별 수 없이 편지를 받았다. 거칠게 봉인을 뜯어내자 주디가 쓴 편지가 있었다.


< 황혼 교단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있다는 말은 했잖아. 그럼 우리가 황혼이랑도 거래 관계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어야지. >

-진짜 화나네, 이거.

< 화내기 전에 일단 읽어. 우리와 황혼의 관계가 그렇게 깊은 편은 아니야. 대륙 남부에 위치한 황혼교가 북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물자 조달을 돕는 정도지. 교단은 우리에게 대가로 금전이나 마법을 제공하고. 하지만 제국의 편에 서도 딱히 상관 없는 황혼과 달리, 혁명군은 황혼의 지원이 없으면 좀 힘들어져. 우리의 혁명은 아슬아슬하거든. 쓸데 없는 적을 늘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하필이면 여명의 습격으로 우리가 이득을 보는 아주 공교로운 상황에 대해서, 충분한 변명이 필요했지. >


그래서 우리와의 밀약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위치를 고자질했다는 거군. 편지를 구겨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읽지 못한 내용이 남아있었다.


< 오해하지마.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용서해주길 바라지는 않아. 단지 우리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 당신들을 대하지 않았다는 점, 그건 알아줬으면 해서 구구절절 쓴 거야. 사과는 물건으로 할게. 용서에 있어서 배상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


나는 카를과 그의 수하들이 수레에서 상자를 내리는 모습을 봤다. 천둥새의 꼬리깃 하나만으로 저 많은 상자를 채웠을 리는 없을 터.


< 천둥새의 꼬리깃과 함께 보낸 것은, 전송 장치의 일종이야. 동봉한 설계도대로만 설치하면 돼. 전송 장치의 귀환석을 가지고 있으면, 어디에서라도 전송 장치의 위치로 순간 이동할 수 있어. 편리한 물건이지만, 몸에 부담이 상당하다는 단점이 있지. 그래서 산 사람들은 비상시가 아니면 절대 사용하지 않아. 당신들의 경우 손상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자주 사용하는 건 권장하지 못해. >

-비상 탈출 장치 같은 느낌인가...

< 솔직히 말해서 용도나 구입처가 한정적이라 매각이 난해한 노획품이였던 건 맞아.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이건 최고가의 진귀한 마법 물품이야. 사과의 뜻이 충분히 전해졌다면 좋겠다. 미안해. 황혼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만큼, 너희 역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친교를 이어갈 수 없어도 부디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기를. >


카를은 스텔라의 안내에 따라 상자들을 여명관으로 옮기고 있었다. 여명관의 방위군들이 섬뜩한 침묵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면 순식간에 목을 칠 기세였다. 나는 편지와 카를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네?

-안으로 가져가지 말고 입구 바로 앞에 설치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카를은 벌써 여명관으로 들어간 상자 몇 개도 다시 꺼내오라고 소리를 쳤다. 부하들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사정이야 지들 사정이고, 어쨌든 내 목숨을 팔아 자기들 이득을 챙긴 건 사실이지 않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의 문제. 얻을 길이 요원해졌다고 생각한 천둥새의 꼬리깃도 얻었고, 비상탈출장치 비슷한 것도 얻었다. 분명 유용하게 쓰일 물건을 보상으로 받자 분노가 누그러들었다.


최소한 기를 쓰고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영리하신 분이네요. 그쪽 고용주.

-아무렴요. 하하하!


카를은 사람 좋게 웃었다. 언데드가 가득한 설원에서 그 웃음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카를은 내가 여명왕인걸 언제부터 알았죠?

-계약하신 다음 날 아침에요. 진지 내에서 당신을 발견하지 못하자, 고용주님께서 저를 찾아와 당신에 대해 묻고 설명해주셨죠. 이야,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하니 리치셨을 줄이야.

-거짓말은 아니죠?

-그럼요.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하하!


아무래도 이 사람에게서 무슨 정보를 빼내는 일은 어려울 듯 했다. 허점이 가득해서, 아무 허점이 보이지 않는 타입의 남자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송 장치의 설치 감독을 스텔라에게 위임한 후, 그들이 따로 분류해놓은 천둥새의 꼬리깃을 찾았다. 상자를 열자 안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나왔다. 아니, 푸른 전격이라고 해야겠지.


내 허벅지만한 꼬리깃의 사이즈로 보아, 천둥새 자체의 크기도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괴물의 소재라면 비쌀만 하지. 나는 상자째로 들어올려 미켈란에게 갔다. 몸도 꽤 피곤했으나, 우선 마음의 위로를 얻고 싶었다. 미켈란은 강렬한 전격이 요동치는 꼬리깃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렸다. 꼬리깃은 우레 소리와 함께 붓으로 빨려들어갔다. 미켈란이 척수를 그리기 시작했다.


등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확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리치가 된 이후 항상 목 아래가, 두꺼운 이불로 덮인 것 마냥 둔탁하게 느껴졌었다. 지금 처음으로 그 답답함과 막막함을 걷어낸 기분이였다. 비록 척수 주변 부위의 감각을 한정적으로 느낀 것 뿐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나는 기지개를 펴고 스트레칭을 하며 척수가 가져다 주는 자극 신호를 만끽했다.


-즐거워보이시네요, 나의 왕이시여.


서늘한 음성. 뒤를 돌아보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목소리만큼이나, 아니, 목소리 이상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유령이였다. 부채로 입 아래를 가린 그녀는 내 시선을 마주하자 살짝 목례를 올렸다. 나는 스트레칭 동작을 마무리하며 답했다.


-신경참모군요.

-루나 드림워커 아오룸이라고 합니다.


말투는 다른 참모들처럼 공손했지만, 기본적으로 공손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였다. 자세나 태도나 단정하게 정돈한 금발이나, 귀부인이라는 티가 팍팍 흘러나왔다. 스텔라는 짓궂고, 돌러는 바보고, 이 루나라는 자는 까칠하고. 좀 무난한 성격의 존재는 없나.


-전문 분야는요?

-통신과 첩보. 참고로, 다른 신경들이 복원될 때마다 지휘관을 생성해 군단을 지휘하게 할 수 있어요. 임무형 지휘가 가능한 자들이죠.


방위군의 유령 기사가 전장을 지휘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신경의 기능이 그런 거긴 하지.


-훌륭하군요.

-회의 상태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네요.

-아직 뭐 보신 게 없지 않나요?

-왕이시여, 여명회의 모든 기능은 왕의 육신에 연동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럼 다시 말해 훌륭하지 않다는 건 내 몸상태라는 뜻이기도 하겠군. 신랄한 비판이였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반박 대신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제 육신이 보이시나요?

-혈액 참모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마법을 좀 다룹니다. 지금 주인님의 마력은 육체의 기능 대부분을 대체하느라 쇠해있어요.

-혈액 참모가 마법을 다루는군요. 다른 참모들은 서로의 기능을 전혀 모르던데.

-혹시 참모장이랑 근육 참모인가요? 그건 그냥 걔들이 멍청해서 그래요. 왕께서도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돌러는 그렇다쳐도 스텔라까지 가차없이 멍청하다고 해버리는 루나의 태도에 헛웃음만 나왔다. 벽 한 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루나에게 당신도 앉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더니, 루나가 한결 더 차가운 눈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의자가 아니면 앉지 않아요.

-목 아픈데요.


루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성격이 안 좋아도 참모는 참모. 몇 번씩이나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하는군. 표정이 한껏 구겨진 그를 보고 있자니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통신과 첩보를 담당하는 참모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일어나자마자 벤시들을 내보냈어요. 세상을 떠돌며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해올 거에요. 왕께서 원하시는 정보가 따로 있다면 거기에 맞춰, 수색법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멋지군요. 벤시들이 돌아와 정보를 알려주면 루나를 거쳐 제가 알게 되는 형식인가요.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는 부채를 접어 지팡이처럼 허공에 휘둘렀다. 맨 얼굴이 드러나자, 그의 턱 아래가 처참하게 뜯겨져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텔라나 돌러는 키메라에 더 가까운 느낌인데, 루나는 확실히 죽은 사람을 소생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았다. 사정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그런 이야기를 남에게 쉽게 해줄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급한 일도 아니고.


루나의 영창이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머리에서 돌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우왓! 이 느낌! 모두랑 연결됐다! "

" 시끄러워. 영혼 통신으로 소리치지마, 페인페인터. "

" 이 까칠한 말투, 루나가 부활했군요! "

" 너도 음량 좀 줄여, 월점퍼. "


통신 마법같은 건가? 아니, 세 참모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가 느껴지는 기분이였다. 나는 신기한 느낌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루나가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어느새 또 부채를 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왕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키고 끌 수 있는 통신입니다. 아직은 참모 미만의 하급 언데드들과는 이어지지 않습니다만, 신경 기능이 활성화됨에 따라 더 많은 언데드들과도 원격 통신이 가능해지실 거에요. "

" 안 그래도 말 전하느라 뛰어다니는 게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정말 좋은 능력이네요. "


입을 열 필요도 없이 그냥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자동으로 전달되는 형식이였다. 다루는 방법도 심플해서 좋군. 하지만 돌러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일단 통신은 꺼두었다. 눈 앞에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는데 굳이 통신을 이용하는 것도 뭔가 장난질 치는 느낌이고.


-그럼 드디어 참모다운 참모님이 오셨으니... 조언을 좀 구해볼까요? 다음 기능은 뭘 먼저 복원하는 게 나을 것 같나요? 심장? 갈비뼈?

-제가 가장 먼저 드릴 조언은 일단 좀 주무시는 거에요. 피로가 쌓인 얼굴이시네요.


의외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알고 보면 상냥한 그런 타입인가. 하지만 루나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그는 눈빛보다 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께서 건강을 해치시면 저희의 능력도 떨어져요. 여명회 전체의 힘은 왕의 육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자각하시길. 건강 관리는 여명왕에게 있어, 언제나 제 0순위의 임무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벤시들이 돌아오면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다시 조언을 드리죠. 일단은 주무세요.


루나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불러세워도 딱히 할 말이 없으므로, 나는 새 참모의 조언을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이 돌침대도 꽤나 익숙해졌군. 제대로 건강 관리를 하려면 허리 모양을 제대로 잡아주는 침대를 구하긴 해야할텐데. 반듯하게 누워 시덥잖은 생각들을 좀 하고 있으니 금방 눈이 감겼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잠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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