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를 품은 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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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로뎅
작품등록일 :
2024.09.0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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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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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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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 카발

DUMMY

상단 마차 기습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여느 때처럼 기분 좋게 건질만한 것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인데.”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하던 걸 멈추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뜬금없이 현자에 빙의한 놈은 헤르만이었다.


“말이 의적단이지, 실상 도적이랑 다를 게 뭐냐고 이게.”


난장판 한가운데서 시체를 깔고 앉은 상태로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코웃음 치면서 응수했다.


“그게 그거다, 등신아.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챙기던 거나 마저 챙겨. 경비대원들 몰려오면 골치 아파진다.”

“카발. 네놈은 눈알이 한쪽뿐이라고 생각하는 수준도 반쪽이냐?”

“⋯이 새끼가 돌았나.”


들고있던 자루를 내팽개치고 다가가는 찰나였다.

놈이 손만 뻗어서 날 제지했다. 혼자 온갖 분위기는 다잡고 있었다.


“카발. 우리 입대하자.”

“입대? 제국군에? 뭘 잘못 처먹었냐?”

“아무래도 우린 큰물에서 노는 게 맞아. 시발, 까놓고 말해서 너랑 나는⋯ 여기 이 새끼들이랑은 애초에 결이 다른데.”


헤르만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열댓 무리 중에 누구 하나 화를 내기는커녕 찍소리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의적단 구성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나름 귀족 가문 출신인 나와 헤르만이 일단 머릿수부터 채우려고 어디서 대충 근본 없는 놈들 몇몇 주워다 만든 게 우리 의적단이기 때문.

헤르만이 일어서며 말했다.


“제국이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단다. 너나 나 같은 놈들한텐 전쟁이야말로 인생 역전의 기회 아니겠냐? 우리가 갈 길은 거기에 있다.”


하급 무사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고 파문당한 뒤 이젠 오갈 데도 없는 신세,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곁눈질로 배운 검술이 다인 사내.

그게 바로 나다.


“제법 일리가⋯ 있어.”


하긴 나 정도 되는 칼잡이가 실력을 이렇게 썩히는 것도 재능 낭비기는 하다.


제국, 여름이었다.


***


“화염의 권세로 어둠을 추방하노라!”


콰아아아!


마법사가 기다란 소매를 허공에 뿌렸다. 불꽃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지더니, 날 집어삼킬 기세로 덮쳐왔다.


“후우.”


왼쪽 허리춤에 매단 검 쪽으로 몸을 낮게 기울였다. 시선은 전방 고정.


‘벤다.’


마법사 상대법은 다양하다. 칼잡이마다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마법을 베는’ 건 나, 카발 벤코우가 유일무이하다.


키- 잉!


거창하지도 않다. 수천, 수만 번 휘두른 평범한 올려베기.

내가 사선으로 그은 궤적을 따라 불꽃 덩어리가 두 동강 나듯 갈라졌다.


화르르륵.


양옆으로 흩어지는 불티 사이로 마법사의 기겁하는 얼굴이 보였다.

나는 단숨에 쇄도하여 놈을 벴다.


“쿨럭⋯!”


쓰러진 마법사가 피를 토했다. 긴 로브가 벗겨지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풍성한 금발 위로 핏물이 튀었다.

⋯그녀가 피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파란 눈동자로 날 쏘아봤다.


“자, 잘도 사람 얼굴을 하고 있구나, 이, 인면 마수 같은 놈들⋯! 쿨럭!”


이젠 지겹지도 않다. 나는 칼끝을 여자의 목에 겨눴다.


“너희 마법사들도 등위가 있다고 들었다. 넌 뭐냐?”

“다, 닥쳐라⋯!”

“유언은 잘 들었다.”


푹-


곧바로 등 뒤에서 함성이 들렸다.


“독안룡 카발이 마법사를 쓰러뜨렸다!”

“돌겨어어어억!”

“숨은 놈들까지 싹 다 찾아내! 전부 남김없이 베어버려라!”

“오오오오!”


병사들이 들판에 풀린 사냥개들처럼 일제히 내 앞으로 쏟아졌다. 그들이 숨결을 토하고 지나간 자리는 열기로 뜨거웠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카악- 퉷!”


뒤에서 나타난 헤르만이 여자 마법사의 사체에 침을 뱉었다.

입대 1년 차, 전쟁 2년 차.

나와 헤르만은 일류 경지를 인정받아 십인장 직위를 얻었다.

그러고도 헤르만은 본연의 날것 근성을 벗지 못했는데, 되레 그 점이 유연한 처세력으로 변모하여 군대라는 딱딱한 관료 조직에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즉, 이놈은 군인이 적성이었던 것이다.


“으하하하! 카발! 마침내 네놈 적성이 아주 만개를 하는구나! 거봐라, 내가 기회라고 하지 않았냐. 이 몸의 혜안이 적중했다는 말씀이다.”


내 경우는 좀 다르다.

군인은 몰라도 전쟁은 확실히 나와 맞지 않았다.

요리사가 음식을 싫어한다는 소리와 뭐가 다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내 검술의 경지 상승 욕구는 병적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거부 심리가 내 안에 깊숙이 잠들어있던 욕구를 일깨운 게 아닐까⋯ 라고 추측하는 중이다.


“적성은 무슨.”

“거, 무게 적당히 잡아라. 보기 언짢다. 그나저나 개 같이 부럽구나. 독안룡 카발이라니. 나도 너처럼 근사한 이명을 얻고 귀환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가주 자리는 따놓은 당상인데.”

“그거 너 해라. 대신 네놈 한쪽 눈은 내가 직접 파주마.”

“씁! 됐다. 이 몸은 브리언의 호랑이⋯ 후, 텄다. 이제 조만간 전쟁도 끝날 거 같으니 말이다. 좀처럼 활약할 기회가 없구나.”


나는 칼날에 비친 얼굴을 응시했다. 가져본 적도 없는 왼쪽 눈이 문득 그리웠다.

외눈박이라 길눈이 어두운 걸까. 방황하는 칼은 여태 수라의 길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다.


헤르만이 공연히 헛기침을 뱉었다.


“큼큼, 그래서 안 갈 거냐? 군단장께서 개인별로 거둔 왕국인 머리를 헤아린다는 소문이 있다. 공적 잣대로 삼는다더군. 혹시 아나, 군공이 네 성취의 계기가 되어줄지.”

“개소리도 정도껏 해라. 그랬다면 내가 왕국인의 씨를 말렸을 거다.”


내가 돌아서서 손만 휘적휘적거리자⋯

브리언의 살쾡이께서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내달리셨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가던 길을 갔다.


“⋯⋯.”


분명 몸은 도살장에서 멀어지고 있는데도, 어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린다.

귀곡성에 단단한 내성을 지닌 나지만, 산 사람의 곡성만큼은 좀처럼 적응이 안 된다.

내 인간성이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진 않았다는 뜻이겠지.


나는 귀 대신 눈을 닫았다.


***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는 헤르만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쏴아아아아아─


지금 왕국 남부는 우기다. 비가 지겨울 정도로 많이 온다.

뭐, 여기 와서 지겨운 게 어디 한 두가지겠냐만은.


“크흐으⋯”


철퍽!


오늘도 어김없이 왕국 기사 하나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은빛 갑주는 온통 진창과 피로 범벅된 상태였다.

주위에서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봐라, 다섯 합! 내 말 맞지? 다들 내놓으셔. 얼른, 얼른!”

“에이, 퉤! 카발 놈, 매번 세 합 안에 끝내더니⋯ 잠깐, 너희 둘 원래 친구라며. 씨발, 너네 짰지?”

“미친놈이 속고만 살았나. 저 노인장, 저래 봬도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라고 꽤 소문난 양반이다. 소드 엑스퍼트 상위라나, 뭐라나.”

“낄낄. 이놈들 등위는 들을 때마다 웃기단 말이지.”


나는 시간의 흐름에는 점점 무감각해지는 반면⋯ 심신의 변화만큼은 오롯이 인지하고 있었다.

검술은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절정의 벽은 뚫지 못하고 답보 상태였으며, 정신을 좀먹는 머릿속 벌레는 나날이 몸집이 커지고 있었다.

⋯그래, 나는 지금 좀 위험한 상태다.

이런 나보다 더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노기사가 말했다.


“주, 죽여라.”

“패자인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 네 생사여탈권은 승자인 내게 있다. 명심하도록.”

“잔악무도한 놈들⋯”

“뭐, 그런 말은 해도 상관없지.”


덜걱.


나는 칼날에 묻은 핏물을 한 번 털어낸 뒤에 납검했다. 목재 칼집이 맞물리는 소리는 묘한 안정감을 준다.


쏴아아아아.


왜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내리는 비가 애처롭게 느껴진달까. 마치 이 노기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노기사를 내려다봤다.


“너희가 그토록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는 대체 언제쯤 등장하는 거냐. 내 보기엔, 너희 왕처럼 어디 다 같이 내빼버린 것 같다만.”

“크, 크큭⋯”

“노인장, 웃겨?”

“궁금한 게 있는데. 혹 내게 마지막으로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겠나?”


나는 팔짱 낀 다음에 턱을 까딱거렸다.


“좋다.”

“제국의 목적이 뭐냐. 무얼 위해 이런 끔찍한 전쟁을 일으켰느냔 말이야.”

“왕국의 요사한 마법과 그걸 다루는 마법사를 근절하여 장래에 닥칠 더 큰 파멸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제법 군인다웠다, 카발.

이때, 멀리 어디선가부터 비명과 절규가 울려 퍼졌다. 잇따른 곡성은 빗소리와 뒤섞여서 내가 듣기에도 퍽 처량했다.

하필이면 꼭⋯

내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자, 노기사가 입으로 바람을 빼듯이 웃었다.


“애꾸 친구, 그래서 자넨 이 전쟁이 옳다고 생각하나?”

“⋯일개 병정한테 옳고 그름은 없다. 나는 칼잡이로서 할 일을 할 뿐이야.”

“크학학! 제국 칼잡이가 할 일은 무차별 학살과 패악질뿐이더냐?”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다음에⋯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난 네게 일대일 생사결을 제안했다. 정정당당한 결투, 이 진흙탕에서 이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또 있나?”


찰박.


노기사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나는 이에 반응하며 움직이려는 동료들을 손만 들어서 제지했다.


“쿠흐으으⋯”

“⋯⋯.”


피와 비에 절은 동공이 탁하게 빛났다. 노기사는 생명력을 불사르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그가 간신히 균형을 잡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에, 엘제루스를 경외하고, 그분의 나라를 지키라.”


엘제루스는 왕국인들이 숭배하는 신이라고 들었다. 뭐, 어디에나 있는 건국 신화의 주인공일 터다.


‘⋯맛이 갔군.’


내겐 아무런 소득도, 의미도 없는 전쟁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출정식을 치르던 때로 돌아가 그냥 그 자리에서 멍청한 카발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나마 얻은 게 있다면⋯

앞으로 기억할 일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왕국 지리 따위?

그리고 사람마다 죽음을 대처하는 방식이 각양각색이라는 걸 깨달은 정도다.


노기사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준비하려는 찰나였다.


부- 웅!


대뜸 노기사가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멈칫한 나는 꼬았던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등골에 전율이 흘렀다.


‘거, 검기⋯?’


노기사의 칼이 점점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빛은 우중충한 비안개 속에서도 또렷이 발광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왕국에도 존재한다고 들었다.

우리 제국의 절정 검사들이 다루는 검기처럼, 오러라 불리는 왕국 검술의 진수가 있다고.


“언제 어디서나⋯ 부정과 악에 맞서 정의와 선의 투사가 되라.”

“⋯⋯!”


나는 현학적 표현을 극도로 혐오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노기사의 음성은 빛나고 있었다.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라.”


느릿느릿하면서도 가볍게, 유려하면서도 올곧게.

노기사가 허공에 남긴 궤적이 겹겹이 쌓여 어느새 그의 주위를 환하게 수놓고 있었다.

분명 노기사의 생은 다하고 있었지만, 그의 검이 광채를 흘리며 지나간 자리는 생명력이 넘쳤다.


척.


절도있는 춤사위를 그리던 노기사의 칼끝이 마침내 나를 겨눴다.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아라.”

“⋯⋯.”

“어리석은 칼잡이여, 이것이 바로 기사도. 진정 칼잡이가 걸어야 할 길이다.”


쏴아아아아─


떨어지는 빗물이 내 눈꺼풀을 두드렸다.


그제야 멈췄던 세상이 다시 굴러갔다.

어느새 노기사를 감싸던 빛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기어코 생을 다 태워버린 노기사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찰박! 찰박! 찰박! 찰박! 찰박!


“이 노인네가 재수 없게!”


퍽!


발길질에 노기사가 속절없이 쓰러졌다.

내 하나뿐인 동공에 핏발이 섰을지도 모르겠다.


“뭐하는 거냐, 헤르만.”

“보면 모르겠나, 네놈이 마음이 약해진 것 같아서 좀 도와줬다. 노인네 추태는, 퉷! 패한 주제에 잘도 나불나불 떠들더구나. 듣기 역했다. 하여간 왕국 놈들은⋯”


나는 쓰러진 노기사와 그가 떨군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둘 다 진창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방금 빛⋯ 너도 봤지?”

“빛? 무슨 빛.”

“저 노기사의 칼을 감싸던 빛 말이다. 거, 검기처럼⋯”


헤르만이 대뜸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씨이발-! 정신 차려라, 카발. 빛은 개뿔, 내 눈엔 지랄발광하던 미친 노인네만 보였다.”


뒤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헤르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살인광들이 단체로 일시에 장님이 되었든가, 내 남은 한쪽 눈마저 잠시 멀었든가, 둘 중 하나인 상황이었다.


쏴아아아아아.


나는 전자라고 확신한다.

여태 내 가슴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빗소리가 커서 다행일 지경이었다.


***


이후로 낮과 밤이 수차례 더 바뀌었다.

확실한 점은, 어느덧 청춘의 절반을 이역만리 타지에서 날려보냈다는 거다.

이때를 기점으로 내 인생에서 또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헤르만이 죽고 있다.


“꺽, 커헉⋯ 어우, 씹⋯ 컥!”


숨을 쉴 때마다 역류하는 피가 입 밖으로 쏟아졌다. 덕분에 녀석의 얼굴과 내 팔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미친놈, 갈 때도 결국 너답게 가는구나.”


나는 헤르만의 허공을 맴도는 탁한 동공과, 그런 녀석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는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손을 붙잡고 멀뚱멀뚱거리는 네 살배기 여자애, 그리고 내 등 뒤에 인의 장막을 펼친 채 대기 중인 우리 제4군 병력을 차례대로 번갈아 봤다.


“전쟁이 끝나면⋯ 내, 내가⋯ 호강시켜준다고 약속했는데⋯ 커흡⋯”

“⋯왕국인인 건 둘째치고 유부녀다.”

“무, 무슨 상관이냐⋯ 어, 엉덩이랑 가슴이⋯ 꺽!”

“됐다, 그만해.”


나는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고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헤르만의 여인 뒤로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나는 사람들이 제법 늘어나고 있었다. 대부분 노약자나 어린아이들, 그리고 여자들이었다.


“겨우 사, 삶의 의미를 차, 찾았건만⋯ 하필, 하필 지금 딱 걸려서⋯”

“⋯⋯.”

“카, 카발. 내가 말했잖냐⋯ 우, 우리 길은 여기 있다고 말이다.”

“그래, 네놈 말이 맞다. 사는 동안 내내 방황만 할 줄 알았는데, 기어코 길을 찾았다.”


내 대답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헤르만은 방긋 웃고 있었다.


“배려는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목소리는 제4군단장 그리엄 이그레인.

⋯헤르만을 단칼에 벤 초절정 검사.


“⋯⋯.”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그를 응시했다.

그리엄이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하여간 이놈의 전쟁이 문제다. 멀쩡한 놈들을 저리 등신들로 만드니 말이다.”


확실히 전쟁이 문제다. 조금 전까지,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어리석은 칼잡이여, 이것이 바로 기사도. 진정 칼잡이가 걸어야 할 길이다.


불현듯 울림이 더해진 노기사의 음성이 내 머릿속을 왕왕 뒤흔들었다.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하더니⋯

나도 모르게 헤르만처럼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스릉.


칼을 뽑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탁 트이는 걸 느꼈다.

워낙 익숙해져서 모르고 살았던 시야의 얼룩이 걷히고, 몸 안의 불순물이 증발해버린 감각.


조용히 말에서 내린 그리엄이 칼을 뽑으며 말했다.


“외눈박이 이무기가⋯ 기어코 독안룡이 되었구나.”


놈이 뭐라 지껄이든, 나는 실로 미친놈처럼 어깨를 들썩거렸다.

단지 절정의 벽을 넘어섰기에 이토록 전율이 돋는 걸까?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죽는 순간에서야 삶이 빛나는구나.’


나는 노기사의 빛나는 검을 기억했다.

아마 나도 지금 그와 닮은 모습일 것이다.


‘이제 와 아쉽구나, 삶이.’






퍼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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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5 157 4 12쪽
2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4 159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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