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를 품은 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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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로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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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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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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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노병의 서시

DUMMY

“⋯기사도의, 규율?”

“예.”


나는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호흡까지 정돈하면서 습관처럼 튀어나오려는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억눌렀다.

제이든에게 지금 이 순간, 내가 제국 무사의 표본처럼 보이길 원한다. 나의 이런 정성과 기개가 그에게 닿길 바란다.

이번만큼은 경건한 자세로 전달받아서 머리가 아닌 가슴 속에 고이 담아둘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그 울림을 듣고 싶다.

전생의 그가 내게 남긴 울림이 나를 이번 생으로 인도했듯이, 이번에도 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계시해 주리라 믿는다.


“어, 음⋯”


제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벌어진 입에선 침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으음, 미안하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들려줄 만한 답안이 떠오르지 않는군.”

“⋯⋯.”

“기사도의 규율이라⋯ 그런 게 있었던가.”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참았던 숨을 찬찬히 내뱉었다. 눈꺼풀과 어깨가 동시에 가라앉았다.

지금 눈앞의 제이든은 틀림없이 내 전생의 그 노기사다.

지금으로부터 제국과 전쟁이 벌어지는 그 몇 년 새에 이 경비대장이 어떤 계기로 각성했다고 밖엔 해석할 길이 없었다.

얄궂게도 시간대가 어긋난 것이다.


“그나저나 놀랍군. 어떻게 제국 칼잡이가 기사도를 알고 있는 것인지⋯ 허허, 뭐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군.”

“기사도에 관해선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나처럼 한물간 기사 중에 더러는 기사도를 가슴 속에 품어봤을 걸세. 그게 낭만이었으니.”

“낭만⋯”


낭만이 이토록 씁쓸한 단어였을 줄이야.

덜컥 겁이 났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전생의 제이든이 기사도의 규율을 읊으며 숭고한 최후를 맞이한 게 아니라, 단지 낭만에 취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발악한 것뿐이었다면?

검기, 혹은 오러가 아니라 그저 내가 헛것을 본 거라면?


─씨이발-! 정신 차려라, 카발. 빛은 개뿔, 내 눈엔 지랄발광하던 미친 노인네만 보였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


‘그럴 리는 없어.’


고작 이 정도 실망으로 흔들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카발.


“기사도를 알고 싶어서 왕국으로 무사수행을 왔대요.”


잠자코 있던 마서린이 툭 내뱉었다.

나는 깜빡 졸다가 깬 사람처럼 흠칫했다. 평소라면 고깝게 들렸을 목소리가 이번만큼은 반가웠다. 이런 식으로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깊은 상념의 수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제이든이 퍽 곤란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큰 도움이 되지 못했구려.”

“⋯아닙니다.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기가 수월했습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숨을 돌릴 겸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애쉬햄에 연고가 있으십니까.”


애쉬햄. 전생에 나와 제이든이 생사결을 벌였던, 그러니까 전생의 그가 최후를 맞이했던 지역이다. 이곳 콘웰과는 거리도 상당히 멀다.

지금으로선 초야의 경비대장에 불과한 그가 어쩌다 최전선까지 가게 된 걸까.


‘그 사연과 각성의 계기가 맞물리는 걸지도.’


제이든이 미간을 구긴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네만. 한데, 그건 왜⋯”

“⋯아, 잠깐 혼동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거 참 민망하군. 뭐 하나라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면 좋으련만.”


오늘은 이만 입을 다무는 편이 낫겠다. 질문을 이어갈수록 내가 무례를 저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힐끔 쳐다본 마서린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까 상단을 습격한 마법사들. 홍염사제단이라고 하셨죠.”

“아아, 그래. 틀림없이 그놈들이야. 아무래도 제피로스와 제국 간 교류가 기어코 놈들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랭스터파와 연대했을 가능성은요?”


제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홍염사제단은 마법 학파 중에서도 굉장히 보수적인 학파야. 콘웰 일대의 다른 마법 학파들이 랭스터파와 손잡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길 거다. 그보다 외세를 끌어들인 제피로스가 더 악질이라고 간주하는 것뿐이지.”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마서린이 알아서 먼저 입을 열었다.


“마법 학파는 말 그대로 마법사들의 파벌이야. 대개 같은 마나 혈통이나 사상, 연고 등으로 뭉치지. 기사 파벌이 크게 두 분류로 갈리는 반면에 마법 학파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아.”


내가 왕국 정세에 어둡다는 걸 알았는지, 제이든도 몇 마디 거들며 내 이해를 도왔다.

기사의 의무⋯ 라기보단, 체면을 중시하는 쉐론파, 어설픈 상무 정신을 강조하며 힘의 논리를 따르는 랭스터파, 기사 파벌이 이렇게 크게 두 분류로 갈리는 반면, 마법 학파는 많은 숫자만큼이나 성격과 규모가 각양각색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설명이었다.


‘마법 학파라는 개념도 전생에는 없었다.’


어쨌든 전쟁 이전에 절멸된 것으로 추정되는 잡다한 놈들 덕분에 왕국의 혼돈은 더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넌 뭐냐는 식으로 마서린을 쳐다봤다.


“⋯마나를 타고났다고 해서 혈연 가문처럼 학파에 소속되는 게 아니야.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지니까.”

“그럼 너는 낭인 흉내 내는 마법사냐?”

“나는 코헨 상단의 호위 무사이자, 제피로스 소속 기사다.”

“하, 어이가 없군.”


정체성 없는 칼잡이 주제에 잘도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검술을 익힌 귀족이면 다 무사고, 기사인가?

아니다. 본인만의 뚜렷한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 목숨과도 같은 신념. 그것이 칼에 깃든 영혼이고 그걸 지닌 자만이 진정한 칼잡이다. 개인의 역량을 나타내는 경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차라리 소신에 따라 패도를 걷는 랭스터파 기사들이 이따위 애송이보단 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생의 나 또한 방황하는 애송이였지.’


똑, 똑.


등 뒤에서 노크가 들렸다. 부서질 듯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건, 아까 마주쳤던 경비대원이었다.


“저⋯ 대장님, 제피로스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경비대원 뒤에서 멀끔한 차림의 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만으로 바로 옆에 선 꾀죄죄한 경비대원을 패잔병 꼴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지금 즉시 제피로스 본영으로 오라는 제1부대장님의 호출이오, 경비대장.”


새파랗게 어린놈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고개까지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와.”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놈의 왕국은 어디서부터 글러 먹은 건지 당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


제이든, 마서린과 함께 제피로스의 본영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름만 본영이지, 호화스러운 저택이 따로 없었다.

나는 곳곳에 각종 병장기가 의전용 장식품처럼 전시된 접견실을 보면서 제피로스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건달 조직.’


제국에도 낭인끼리 연합한 조직이 더러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단순 친목 도모라든가, 폐쇄적으로 저들끼리만 검술을 교류하고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도 아니면, 전생의 나와 헤르만처럼 의적 행세를 한다든가.’


그런 우리마저 정체를 숨겨가며 제국 각지를 전전했었다. 제국의 이익에 반하거나 권력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 즉시 제국 공적으로 간주하여 척결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각 지방 제후의 권력이 강한 왕국 특성상 제국과 사정이 많이 다르다고는 해도⋯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제피로스의 첫인상은 나름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제국 무사인 나에겐 황실과 가문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고 미덕인지라 그들의 자유정신과 의지에 본능적인 반발감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론 강렬한 호기심까지 동했던 것이다.


마음 속에 내린 결론이 이래서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그저 권력을 누리고 싶은 철부지 귀족들.’


접견실 겸 회의실 정중앙엔 척 봐도 고급진 원목 재질의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다.

입구와 맞은편에 앉은 네스 세르반이 우릴 맞이했다.


“아, 어서 오시오. 경비대장.”


그의 옆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주엘이 나에게 인사하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낮에 봤던 두 남녀도 각각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제이든이 이들에게 예를 취했다.


“네스 경, 찾으셨습니까.”

“일단 앉으시오. 식사는 하셨나?”

“예. 괜찮습니다.”

“이런, 주엘리나 양이 제국에서 공수해 온 제국산 칠면조를 맛볼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군. 육질이 아주 부드럽소.”

“그러셨습니까.”


제이든이 대답하며 착석했다. 언뜻 보면 이들에게 고분고분한 것처럼 보여도, 내 눈엔 철부지들을 적당히 상대할 줄 아는 노련미가 보였다.


“카발 공자님은요?”


주엘은 아까부터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됐어.”

“⋯대체 언제 같이 식사해 보려나.”


네스가 작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주목하라는 뜻 같았다.


“흠흠, 경비대장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아까 상단을 습격한 마법사 놈들 때문이오. 홍염사제단의 소행이 확실한가?”

“예, 맞습니다.”


제이든이 마서린에게 했던 설명을 되풀이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제피로스의 일원이 된 것처럼 자리에 앉아 경청하고 있었다.

제이든이 말을 마치자, 네스가 턱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출가 전, 가문에 있었을 때 홍염사제단의 수제자와 대련을 펼친 적이 있어서 아는 바가 있소. 그 학파는 질릴 정도로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지. 그런 인간들이 자기들 활동 구역과 한참 떨어진 콘웰까지 와서 똬리를 트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경비대장은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제국과 교류하는 제피로스를⋯”

“아니, 본인 생각은 다르오. 그건 표면상의 명목일 뿐이야. 속내를 들여다봐야지.”


네스가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처음부터 살짝 기울어져 있던 상체는 아예 팔걸이에 반쯤 기댄 상태였다.

이번엔 주엘이 말했다.


“네스 경.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 상단이 계속 이런 식으로 위험에 노출된다면, 다음 지원을 약속드리기가 힘들어요. 아시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애초에 제피로스에 투자하는 걸 제게 반대하셨어요. 우리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건, 순전히 제 의지라고요.”

“주, 주엘리나 양. 그런 세세한 얘기를 여기서 굳이⋯”

“아뇨, 해야죠.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요? 아무튼 홍염사제단이든 뭐든, 신속히 처리해주세요. 제가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여러분을 도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주엘의 말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지는 모른다. 다만, 오로지 그녀의 의지로만 제피로스에 투자하는 거라고 말한 부분이 거짓이란 것쯤은 확신할 수 있다.

⋯아니나다를까, 주엘이 나를 힐긋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걱정 마시오, 주엘리나 양.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네스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말했다.


“경비대장. 이른 시일 안에 홍염사제단과 접촉해 주시오.”

“제가 직접⋯ 말입니까?”

“그렇소. 하여, 우리의 뜻을 분명히 전달해 주시오.”


나는 그가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자못 궁금해졌다. 네스는 탁자 위로 깍지 낀 손에 조용히 하관을 파묻었다.


“협상을 원한다면, 그쪽 수장이 직접 제 발로 나를 찾아오라고 말이오.”

“예? 그 뜻은⋯”

“놈들은 외세를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과격하게 행동하면서, 실제론 음흉한 속마음을 품고 있소. 정작 놈들도 제국에 바라는 바가 있다, 이 말이지.”

“⋯⋯.”

“타협할 여지가 있다는 걸 이쪽에서 먼저 내비치면 알아서 납작 기어들어올 거요. 안 그런 척, 점잔빼면서 욕심만 그득그득한 노인네들이니 적당히 구슬려서 달래줘야지.”


나도 모르게 손이 슬쩍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고 봤을 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 상태였다.


“그럼 그쪽이 직접 가는 게 더 빠르지 않나.”

“⋯⋯.”


내가 생각해도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정적을 틈타 주엘의 풉, 하는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네스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앙다문 잇새로 살벌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아, 홍염사제단을 척살한 게 카발 경이었지. 주엘리나 양에게 언뜻 들었소만, 뭐, 화염 마법을 칼로 벴다고?”

“그랬지.”

“그 얘길 듣고 하마터면 주엘리나 양의 면전이란 사실도 잊고 박장대소할 뻔했소. 마법을 벴다라⋯. 본인 입으로 진상을 듣고 싶은데.”

“있는 사실을 해명하라고?”


제피로스 간부로 추정되는 남녀가 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눈싸움을 마다치 않겠다는 기세로 네스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이든 경비대장과 함께 움직이도록 하지.”

“당신이 왜.”

“그건 주엘한테 물어봐. 아직 코헨 상단과 계약이 남아서.”


나와 주엘의 약속은 내가 기사도의 흔적을 찾을 때까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렇고, 아니라도 상관없다.

일단 나는, 내가 홍염사제단이란 마법사 놈들을 죽여서 생긴 일로 말미암아 제이든이 위험에 빠지는 걸 가만두고 볼 생각이 없다.

당장 목표라고 한다면, 이 경비대장이 어떻게 세르반테스로 변모하게 되는 건지 지켜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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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병의 서시 24.09.16 86 3 14쪽
12 재회 24.09.14 99 2 12쪽
11 재회 24.09.13 104 5 14쪽
10 부잣집 아가씨 24.09.12 105 3 15쪽
9 부잣집 아가씨 24.09.11 106 4 15쪽
8 부잣집 아가씨 24.09.10 118 4 12쪽
7 오랜 친구에게 24.09.09 125 5 16쪽
6 오랜 친구에게 24.09.08 134 4 14쪽
5 오랜 친구에게 24.09.07 152 4 15쪽
4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6 153 5 14쪽
3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5 157 4 12쪽
2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4 159 5 13쪽
1 독안룡 카발 24.09.04 234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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