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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로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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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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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부잣집 아가씨

DUMMY

[황제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이어지는 제국과 달리, 왕국은 태생부터 귀족연합체제였다.]


[왕국 귀족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가문과 영지다.]


[유력 귀족들은 유산 배분과 불필요한 후계 다툼으로 가문의 위세가 약해지는 걸 두려워했다.]


[장자계승 원칙으로 배제된 아들들이 모두 어디로 갔겠는가.]


[그들이 바로 오늘날 기사라 불리는 낭인들의 시조다.]


[바야흐로 군웅할거,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중심에 기사들이 있었고.]


[세르반테스는 엘더우드의 기사다.]






브로커 중년인은 내게 선내 단독 침실을 제공했다.

배에는 남녀노소로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 갑판 위에서 부대끼며 숙식을 해결했기 때문에 내 경우엔 브리언의 고급 여관 못지않은 호사를 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헤르만을 구제해 준 보람이 또 있었다.

바로 이 책, ‘엘더우드의 기사’.


사각.


조용한 방에는 낡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등불이 흔들리는 소리만 고요히 울렸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나는 이 기사도 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벌써 며칠 밤이 지났는지도 모르겠군.’


탁자에 앉은 채로 힘껏 기지개를 켰다. 칼 휘두르는 데만 익숙했던 근육들이 내게 항의하듯 비명을 질러댔다.

눈에는 그다지 피로감이 없었지만, 나는 깍지 낀 손을 눈두덩이 위에 덮고 차분히 머릿속을 정돈했다.


‘엘더우드의 기사’는 어느 누군가에겐 흔한 모험담일 터다. 싸구려 염정소설이라고 평가받을 만한 부분들도 많았다.


‘내겐 달랐어.’


엘더우드의 기사, 세르반테스는 폭력과 혼돈으로 점철된 왕국에서 홀로 ‘정의’를 좇는 남자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부르짖는 정의를 바보 같은 신념, 무의미한 아집, 허무맹랑한 꿈이라며 비웃었다.

그럼에도 세르반테스는 나아갔다.

한 치 앞이 절벽 아래일지라도, 그는 주저 없이 나아갔다.

오직 자기가 믿는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최초의 기사도, 세르반테스.]


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제야 어렴풋이, 기사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


여운은 금세 허탈한 감정으로 얼룩졌다. 소설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적어도 전생의 내 기억에⋯

왕국에는 엘더우드도 없었고, 세르반테스도 없었다. 그를 추종하는 기사조차 없었다.


‘어쩌면 그 노기사가 세르반테스였을까.’


입안이 쓰고 가슴이 먹먹했다. 과몰입의 후유증이다.

나는 침실을 나섰다.

갑판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머리 위로 뙤약볕이 쏟아졌다.


“아, 그분이시구나. 이번 항해 최고 귀빈 손님.”


선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날 보며 히죽거렸다. 악의없는 빈말이라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갑판 위에 올라서자마자 배 난간을 따라 줄지어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쏟아졌다. 무슨 어디 팔려가는 가축들처럼 죄다 우울한 눈빛이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가 먼 수평선을 바라봤다. 탁 트인 풍경과 우렁찬 갈매기 울음소리가 갑갑한 내 속을 환기했다.


“와! 드디어 뵙네요, 공자님?”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움찔하고 말았다. 갑판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던 찰나였기 때문.

생기발랄한 목소리만큼이나 구김살 한 점 없이 해맑은 면상의 여자가 싱긋 웃고 있었다.


“아니, 닷새 내내 안에만 틀어박혀 계셔서 정말 무슨 일 난 거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라니까요? 도대체 뭐하셨어요, 안에서?”

“꼭 대답해줘야 하나?”

“⋯아뇨? 안 내키면 안 하면 되지, 뭘 사람 무안해지게 되묻고 그런대.”


또각, 또각.


여자가 걸을 때마다 신발의 뾰족한 굽이 뱃마루를 찔렀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 저 희한한 생김새의 신발이 제국 사교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게 떠올랐다.

배 난간에 걸터앉은 여자가 손 그늘을 만들곤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봤다. 바람결을 따라 흑갈색 머리칼이 휘날렸다.


“사람은 이렇게 햇볕을 의무적으로 쬐야 한다구요. 모르셨죠?”

“⋯⋯.”

“⋯아아, 알겠다. 그냥 얼굴값을 하시는 분이었구나.”


기가 막혀서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적당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면전에서 제국 평민의 비아냥을 듣고도 적당히 넘어가 줄 정도로 너그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색하며 체면을 차리려고 드는 권위적인 성격도 아니란 말씀.


“크흠, 큼큼.”


나는 여자가 내 왼쪽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도록 고개를 돌린 다음에 열심히 헛기침했다. 귓불 아래로 늘어진 외이환이 흔들리면서 내 턱을 살살 간지럽혔다.


“풉.”


⋯설마 비웃은 건 아니겠지? 은근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찰나, 난간에서 내려온 여자가 자기 치맛자락을 꼬집은 채로 엉덩이를 슬며시 뒤로 뺐다. 일부러 어설프게 귀족 예법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주엘리나 코헨이에요. 무인 가문의 훌륭한 자제님을 미리 알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코헨? 혹시 그 코헨 상단을 말하는 건가?”

“어! 아시는구나.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정중히 모시는 건데.”


⋯알다마다. 제국의 왕국 침략 때, 길잡이 및 현지 물자 보급을 도맡다시피 한 게 코헨 가문이다. 전쟁이 아직 한창인데도 가주이자 상단주가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본국으로 가서 무공 훈장과 귀족 작위를 받고 온 일화는 당시 꽤 유명했지. 심지어 군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국군 내에서 입김이 상당해서 일곱 명의 군단장 바로 아래 서열이 코헨 상단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전쟁 전에는 상단 규모가 작았다고 들었는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제국기가 꽂힌 돛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문양이 기억 속 한 장면과 일치했다.


“⋯코헨 상단의 배였군.”

“네. 맞아요. 와, 조금 놀랐어요. 딱 봐도 앳된 도련님⋯ 아니아니, 아직 연식이 좀 어리신 귀족분께서 바깥 일을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데 잘도 이런 험한 일을 하는군.”

“가업을 이어받아야 하니까요?”

“상단주의 딸이었나.”

“네. 그것도 외동딸이죠.”

“⋯대단하신 분이었군.”

“아니, 뭐⋯ 아직 그 정돈 아닌데⋯”


도로 난간에 걸터앉은 여자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긴 드레스 아래로 빼꼼 드러난 양발 사이는 쩍 벌어진 상태였다.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허술하지는 않은,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얼굴이지만 몸의 곡선은 농염한, 여러모로 갈피를 잡기 어려운 여자였다.


“아차, 그래서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요?”

“카발 벤코우. 벤코우 가문의 장자다.”


여자가 소리 없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선을 피하듯 눈알이 은근히 옆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굳이 그 의미가 뭐냐고 캐묻고 싶진 않았다.

바람도 쐴 만큼 쐤으니 돌아서는 찰나였다.


“어어, 잠깐잠깐. 나오신 김에 나랑 얘기 좀 하다 들어가세요. 괜찮으시면 식사 어때요? 우리 코헨 상단을 알아봐 주시는 귀빈께 뭐라도 대접을 하고 싶어서요. 헤헷.”

“그런 건 됐어. 도착은 언제쯤이지?”

“넉넉잡아 일주일 후 브레드포트에 무사히- 도착할 예정이랍니다.”


브레드포트라면 왕국 동부의 항구 도시다. 서부 지역에 상륙해서 대륙을 가로질렀던 전생과는 반대라서 기분이 묘했다.


“카발 공자께선 어떤 연유로 왕국으로 가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별 이유 없어. 단지 무사수행이니까.”

“오오, 과연 예삿분이 아니셨네. 맞아요. 제국보단 왕국이 수행에는 훨씬 도움이 되죠.”


내가 의아하다는 식으로 쳐다봤다. 뒤늦게 내 시선을 의식한 주엘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세요?”

“제국보단 왕국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네? 아니, 뭐⋯ 그야 왕국 상황이 제국과는 많이 다르니까. 완전 무법천지. 마을마다 칼 좀 쓴다 싶은 놈들이 아주 왕 행세를 하잖아요. 다 알고 가시는 거 아니에요?”

“⋯자세히 말해줘.”


나란 놈은 치밀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기보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면이 잘 맞았기 때문에 성격이 다른 헤르만과도 잘 통했던 거고.

안 그래도 성정이 이런데 전생에 인연이 깊은 왕국으로 가는 상황이니 오죽했겠나.

왕국 사정 따윈 애초에 고려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갑판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주엘리나의 말을 경청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왕국의 기사들은 크게 ‘랭스터파’와 ‘쉐론파’로 갈리는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랭스터파 기사들이 온갖 패악질을 일삼고 다녀서 왕국 전역에 곡소리가 마를 날이 없다고.


“어차피 기사란 게 결국 우리 제국의 무사와 똑같은 귀족 혈통 칼잡이를 말하는 건데, 걔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아주 가관이라니까요? 특히 극단적인 랭스터파 기사들은 그냥 생날강도 놈들이라고 보시면 돼요. 마수 떼보다 더 악랄한 게 그놈들이니까 말 다했죠.”


이들의 대척점에 선 쉐론파가 그나마 양심이 있는 편이라고 했다.


“그것도 ‘그나마’예요, 그나마. 영주와 봉신 계약을 한 영내 기사들이 보통 쉐론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뭐, 걔넨 말 그대로 공무원이니까.”


이렇게 두 기사 파벌이 서로 지지고 볶는 와중에, 마수들까지 나날이 기승을 부려서 평온한 날이 없다고 했다.


“안 그래도 지방 제후의 힘이 왕실보다 더 강한 왕국인지라, 수습이 쉽지 않죠.”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나는 다른 의미로 혼란에 빠졌다.

주엘리나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왕국 사정에 열심히 기억을 빗대봤지만, 영 닮은 구석을 찾기가 힘들었다.


‘봉건 귀족들이 득세한 상황말고는⋯’


쉐론파? 랭스터파? 전부 처음 듣는 얘기다. 마물에 관한 점도 마찬가지. 놈들이 워낙 극성이라 성가신 수준까진 결코 아니었다. 이는 제국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아서 특별히 언급될 정도도 아니다.


‘이런 문제들이 몇 년 새에 거짓말처럼 사라진다고?’


물론 당시에 내가 왕국인들과 시시콜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어서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지만, 어딘지 찝찝한 기분이 맴돌았다.


“하~ 간만에 주절주절 떠들었더니 배고프네. 공자님, 같이⋯”

“그럼 코헨 상단은 왕국과 뭘 교역하는 거지? 왕국 상황이 저런데 굳이 이렇게 밀항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얻는 이익이 크다는 건데.”

“영업 기밀을 누설하라고요?”


나는 고개를 돌려서 갑판 위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누더기를 걸친 이들의 낯빛은 하나같이 그늘져서 어두웠다.


“⋯저 사람들이 상단 잡부 같아 보이진 않는데.”


찰나였지만, 줄곧 서글서글하던 주엘리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정색한 것처럼 보였다. 본인도 그걸 의식했는지, 의도적으로 입꼬리를 당기고 있었다.


“에이, 갑자기 왜 분위기 잡고 그러실까.”


나는 습관처럼 주위를 더 탐색했다. 곳곳에 무장한 선원들이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은근히 이쪽을 경계하듯 힐끔거리고 있었다.


“카발 공자님. 여기 제국 아니고 바다잖아요. 바-다.”

“알고 있어.”


너희들을 전부 도륙해버리면 내가 왕국에 갈 방도가 없어진다는 것도.


“후훗, 그래요. 아무래도 오늘은 공자님 기분이 영별로라서 같이 식사하긴 힘들겠다. 그쵸?”


주엘리나가 아까처럼 어설픈 예법으로 인사를 한 뒤 떠났다.

화답은 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귀족의 체면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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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6 153 5 14쪽
3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5 157 4 12쪽
2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4 159 5 13쪽
1 독안룡 카발 24.09.04 235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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