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를 품은 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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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로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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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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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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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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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노병의 서시

DUMMY

이타적인 죽음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제이든과 함께 홍염사제단의 소굴로

향하는 동안 내내 그런 의문을 가졌다.

그는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데에 한 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이게 자기 운명이라는 듯이 담담하기까지 했다. 고작 오늘 처음 만난 소년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저기군.”


나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제이든이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동굴 입구처럼 생기긴 했는데, 절벽에 난 구멍이 말도 안 되게 컸다.


“보초도 없군요.”

“그런 게 필요하겠나. 대외적으로 저들은 그저 일개 마법 학파일 뿐인데.”


하긴, 맞는 말이다. 실상은 어지간한 도적 무리보다 더한 놈들이지만.


“카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려가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여기에 기절시켜 두고 저 혼자 내려가서 저들을 일망타진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다만 저는 같은 칼잡이로서 제이든, 당신의 명예를 존중하기 위해 그러지 않는 것뿐이고요.”


제이든이 털썩 주저앉더니 목젖이 보이도록 껄껄 웃었다. 그가 가죽 수통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곤 내게 내밀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내 상관 같았다.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후에 마셨는데⋯


‘윽.’


⋯술이었다.


“하하하! 암만 싸구려 술이라고 해도 그리 오만상을 쓸 정돈 아니지 않나.”

“⋯그게 아니고, 물인 줄 알았다가 방심해서 그렇습니다.”

“하하⋯ 자네 같은 부하를 뒀다면 경비대 생활이 꽤 재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뭐, 조금 어색하긴 한데 그것도 나쁘지 않지.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제이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선택한 정의가 제피로스냐고 물었던가.”


내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내게 돌려받은 가죽 수통을 연거푸 들이켰다.


“한때는 나도 가장이었네.”


제이든이 턱 주변에 흐르는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어쩐지 눈동자도 약간 축축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엔 왕국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네. 딸은 그런 아내를 쏙 빼닮았었지.”

“⋯⋯.”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때도 어리석은 사람이었네. 허황된 꿈이었을지, 아무튼 거창한 뭔가를 열심히 쫓고 있었는데 돌아보고 나니⋯ 나만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더군.”


제이든이 한 번 더 목을 축인 다음에 말했다. 이번엔 그도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랭스터파를 위시한 어느 잡놈들에게 보복당한걸세. 신이 그리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군. 대체 왜 나만 살려놨느냐 이거야. 그렇다고 두 사람을 따라갈 용기는 나지 않고 내게 남은 건 그야말로 비루한 이 목숨 하나뿐이었네. 나는 내 바닥을 확인했지. 정말이지 최악의 인간이었어.”

“⋯복수는 하셨습니까.”


제이든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했지. 했고말고. 했는데⋯ 두 사람은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더군.”


나는 내 나름대로 그들을 애도했다. 진심이 닿은 걸까. 제이든의 목소리가 한결 개운하게 들렸다.


“살 이유를 찾기 위해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네. 도중 마렌의 어머니에게 은혜도 입고, 여러 인연을 만났지.”

“그래서⋯ 이유를 찾으셨습니까.”


눈이 마주쳤고, 제이든이 미소를 머금었다.


“내 힘이 닿는 작은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걸세. 그래서 다나와 보니타에게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그의 회고가 마치 기사도의 서시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가죽 수통을 다시 빼앗아서 한 모금 들이켰다.


“저도 그리 살겠습니다.”


잔을 나눌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


입구에 서자 한기가 엄습했다. 안쪽은 암벽에 등불을 걸어놔서 시야가 제법 환했다.

내가 칼을 고정한 요대를 조이며 말했다.


“일단 단주라는 자와 담판을 짓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게 상책입니다. 그동안 마서린은 인원을 전부 구출하고요.”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는 여기 남는 게 좋겠는데. 제국인이라는 점이 저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나.”

“그 점 때문에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곁을 지키는 한, 저들은 대장 몸에 그을음 하나 묻히지 못할 겁니다.”


내 입에서 대장이라는 말이 술술 나왔다. 거부감이 없었다.


“알겠네. 같은 칼잡이로서 자네의 결단을 존중해야지.”

“감사합니다.”


내부는 고요했다. 전반적으로 정돈된 지하 갱도의 분위기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두 차례나 맞이했는데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이는 대로 감상을 말하자 제이든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들도 사람인 이상 밤이 늦었는데 자야겠지.”

“학파라면 뭔가 단체로 명상 수양을 한다든가, 야밤에 집회를 벌인다든가 하는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점을 간과했군. 자네, 보기보다 통찰력이 있구만.”


전쟁 이전부터 제국과 왕국은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들에게 제국인은 과연 어떤 이미지일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보이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마침내 맞은편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기척이 들렸다.


저벅, 저벅.


음영을 한 꺼풀씩 벗기며 등장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야였다. 눌러쓴 두건이 콧등까지 덮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흰 수염이 풍성하게 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두 사람.”


의외로 별 당황하는 기색을 비추지 않는 제이든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마법 학파라는 집단이 미지의 괴인들이란 인상이 박혀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별로 놀라울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쪽으로. 단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마서린과 잔슨, 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여기로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니까.

⋯잡념은 지우자. 홍염사제단 규모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으나, 본거지가 따로 있는 놈들이다. 전체를 동원하지 않은 이상 인원을 배분할 여력이 마땅치 않을 거다.


발걸음은 얼마 안 가서 멈췄다.

거대한 암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텁.


마법사가 암벽 표면에 손을 올리자, 사각이 환하게 빛나더니 그곳에서 시퍼런 광선이 잔가지처럼 뻗어 나왔다. 광선은 테두리부터 뒤덮은 후 점차 가운데로 모이면서 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양을 완성했다.


쿠구구구구.


동굴이 무너질 듯한 울림과 함께 암벽이 양옆으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벌어지는 틈새로 내부의 빛이 쏟아졌는데, 줄곧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지 눈살이 찌푸려졌다.


“단주님을 뵙습니다.”


우릴 안내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 눈을 떴다. 별 희한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서 오라.”


그리 말한 사내는 우리와 멀찌감치 떨어진 정면의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 저놈이 홍염단주란 놈 같았다.


“가까이.”


왜 목소리가 울리나 했더니, 천장이 까마득히 높았다. 너비도 상당히 넓었다. 이런 공간이 지하 동굴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나와 제이든은 마법사를 뒤따라 바닥에 일직선으로 깔린 붉은 융단 위를 걸었다.

제단처럼 장식해놓은 자리에 홍염단주가 홀로 앉아있고, 그 아래로 마법사들이 구부정한 자세로 도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꼴이 영락없는 왕과 신하를 흉내 내고 있어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팔걸이에 기댄 채로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홍염단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어?”

“지하의 왕궁을 보니 신기해서.”

“그래. 유구한 전통이 있는 장소다. 그러고 보니, 방문객은 처음인듯하군.”


홍염단주는 대략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내해준 마법사가 허리를 구부린 채로 슬금슬금 옆걸음질 쳐서 물러나더니 도열의 어딘가로 자연스레 합류했다.

제이든이 자기 차례가 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제피로스의 명을 받고 왔소. 그쪽이 이곳의 수장이신가.”

“표현이 좀 거슬리는군. 정정하라. 홍염단주다. 내가 몸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알겠소. 홍염단주, 나는 에스턴 경비대장 제이든 스타인이고 이쪽은⋯”

“이름 모를 제국인이지.”


홍염단주가 제이든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는 작은 돌멩이 같은 걸 여러 개 손아귀에 쥐고서 쉴 새 없이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달그락대는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정서 불안이냐? 하긴 마법사들이 정신 상태를 온전히 유지하긴 힘들겠지.”


역시 놈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전령 흉내를 내봐야 비웃음만 사겠다는 판단에 나오는 대로 말을 뇌까렸다.

제이든도 굳이 눈치를 주지 않았다. 이 사내 또한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 예상한 대로 성질머리가 사납구나. 내 너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네게 잃은 제자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손바닥 안을 구경하는 것처럼 말하네. 어떻게 알고 있었지?”

“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단주가 손바닥을 펼치자, 손가락 사이로 쥐고 있던 작은 물체가 잘게 바스러지면서 잿가루처럼 흩어졌다.

놈이 입꼬리를 비트는 게 아주 잘 보였다.


“전대 단주는 내가 흡수했다. 오 년 전의 일이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경쟁 학파들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오랜 금기를 깨고 기꺼이 첫 제물이 되길 자청하셨다. 학파의 영원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지.”


하필 듣는 순간 아버지가 떠올라서 웃질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숭고한 희생이라는 대목 때문에 맘껏 실소했을 터다.

놈이 이번엔 제 심장을 가리켰다.


“지혜롭고 위대한 스승을 이 안에 묻음으로써 고리는 여섯 개가 되었다. 이후 그분의 유지를 이어 꾸준히 혼을 섭식한 결과, 고리는 하나가 더 늘어서 일곱 개. 육신이 차츰 생기를 되찾더니 비로소 연대를 맺은 제자들이 품은 마나까지 보이기 시작하더구나. 가시적인 성취를 얻은 것이다.”


나는 전생 덕분에 마법사들의 등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놈들은 나의 벤코우 비전처럼 고유 마나 심법을 운용하여 심장을 감싸는 ‘서클’의 개수로 등위를 확인한다. 우리 칼잡이에 비하면 참으로 직관적인 방식이다.

이번엔 제이든이 물었다.


“하면 제국 상단을 노린 이유는⋯”

“뭐겠나. 스승으로서 우리 제자들에게도 포식의 희열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다. 일말의 죄책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래도 같은 왕국인을 섭식하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는 제자들이 많아. 그래선 성취를 기대하기 힘들다. 이쪽 소식에 의하면, 너희 제국 상인 하나가 싱싱한 제물을 여기저기 상납하고 다닌다더군. 랭스터파 놈들과 손잡은 변절자들에게 말이야.”


굳이 대답해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 침묵을 수긍으로 해석한 단주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 제피로스가 어떤 이유로 날 찾아왔는지 한 번 들어나보자꾸나. 너희 수장이 제국과의 거래에 우리 자리를 터놓겠다더냐? 내 예상이 정확하여 놀랐느냐? 너희가 살 길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지.”

“⋯⋯.”

“돌아가서 전해라.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말이다. 외세를 응징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의 진전까지 노릴 좋은 기회가 되겠지. 우릴 다른 학파와 동일 선상에 놓지 않고 이리 예우를 한 것에도 큰 가산점이 있었다. 어쩌면 너희 수장은 꽤 현명한 인물일 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선 채로 가만히 좌우를 둘러봤다.

도열한 마법사들은 전부 하관만 보였다. 혀로 수염을 핥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놈들은 턱주가리 아래로 침까지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세상에 참 미친 새끼들이 많구나.”

“제국인, 혓바닥을 자꾸 험하게 놀리지 마라. 언제까지 네 그 두 다리가 네 것일 것 같으냐? 뭐든 영원한 것은 없어.”

“네가 날 흡수하는 것도 가능한가?”

“나 정도 경지를 이룩한 위인들은 마나가 없는 인간을 흡수해도 별 효과가 없다. 티끌도 안 돼.”

“그럼 아얀은?”

“아얀을 감당하기엔 아직 내가⋯⋯”


신이 나서 지껄이던 단주가 그대로 굳었다.

서늘하던 공기가 아예 얼어붙어서 살갗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놈이 눈알만 굴려서 나를 쳐다봤다.


“⋯네놈이 아얀을 어찌 알아.”

“에스턴 경비대가 그 아이를 구출했기 때문이오.”


나 대신 대답한 제이든이 칼을 뽑았다.

이럴 땐 나와 제법 죽이 잘 맞는 사내였다.


스릉.


이어서 나 역시 칼을 뽑으면서 귀검술 이단(二段)의 형상을 미리 머릿속에 그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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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노병의 서시 24.09.18 48 3 15쪽
14 노병의 서시 24.09.17 61 3 16쪽
13 노병의 서시 24.09.16 88 3 14쪽
12 재회 24.09.14 100 2 12쪽
11 재회 24.09.13 105 5 14쪽
10 부잣집 아가씨 24.09.12 106 3 15쪽
9 부잣집 아가씨 24.09.11 107 4 15쪽
8 부잣집 아가씨 24.09.10 120 4 12쪽
7 오랜 친구에게 24.09.09 127 5 16쪽
6 오랜 친구에게 24.09.08 135 4 14쪽
5 오랜 친구에게 24.09.07 153 4 15쪽
4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6 154 5 14쪽
3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5 158 4 12쪽
2 검의 길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24.09.04 160 5 13쪽
1 독안룡 카발 24.09.04 237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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