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램프턴에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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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eu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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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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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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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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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

DUMMY

푸른 호수의 나라 벨더스 왕국의 수도, 브램프턴의 봄이 유독 아름다운 건 비단 거리 곳곳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나비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교철을 맞아 수도로 몰려드는 귀족들의 다채로운 외양과 고상한 표정 같은 것들이 브램프턴을 더욱 환하게 밝혔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몸짓으로 마차에서 내린 그들은 봄바람 함께 춤추듯 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의 발길이 당도한 곳은-


“제 생일 무도회에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귀부인.”


왕국에서 제일 큰 무역상인 헨리 브라운의 외동딸, 엘로이즈 브라운의 생일 무도회가 열린 브라운 대저택이었다.


“엘로이즈. 깜찍하기도 해라. 안 본 사이에 키가 한 뼘 더 자랐구나.”


“엘로이즈 양도 곧 클로이처럼 아름다운 숙녀가 될 모양이에요. 눈도 더 깊어진 것 같고. 돌아가신 브라운 부인을 많이 닮았네요. 가여워라.”


얌전히 서서 어색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작은 소녀에게 모두 한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아이에게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곧 엘로이즈를 부드럽게 지나쳐 화려한 그랜드 홀 안으로 유유히 흩어졌다. 대게는 닭마냥 고개를 쭉 빼고 주위를 돌아보기 바빴는데, 이 반듯한 대저택의 주인인 헨리 브라운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함이었다.


헨리 브라운은 벨더스 왕국 무역의 포문을 연 상인 니콜라스 브라운의 장손이었다.


두 세대에 거쳐 이룬 막대한 재산으로 수도 외곽에 유서 깊은 대저택과 영지를 사들인 일화는 온 대륙 평민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곤 했다.


영지를 가진 평민은 젠트리 계급으로 불리며 여느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 수준을 영위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브라운가는 그 어떤 젠트리 보다 십 년은 더 빠르게 귀족사회로 편입되었다.


<벨더스의 모든 동전은 브라운을 거친다>


브라운 가문이 얼마나 부유한지 알 수 있는 이 문장은 언제부터인가 벨더스 왕국 귀족들 사이에서 오래된 속담처럼 떠돌았다.


믿을만한 소식지에 의하면 벨더스 왕가가 동맹국 알핀베르크에 진 빚을 브라운 가문이 한 번에 갚아주었고 그 공헌으로 하사 받은 것이 이 영지가 딸린 대저택이라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어 대게는 뜬소문이라 여겼다.


사실 귀족들은 브라운 가문이 어떻게 땅을 샀고, 벨더스 왕가가 어떻게 빚을 갚았는지에 대해 딱히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는 브라운 씨에게 상상 못 할 만큼의 돈이 있고, 그의 유일한 외동딸인 엘로이즈는 여성이기에 그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


특히 아들이 있는 귀족가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있을 수 없었다.


엘로이즈를 며느리로 들이게 되었을 때 그녀와 함께 딸려 올 거대한 지참금. 그 정도 따위가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었다.


“브라운 씨, 제 자랑스러운 장남 찰스가 브램프턴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지 뭐예요? 아, 경제학을 배우고 있다는 걸 제가 언급하였던가요?”


헨리 브라운에게 간신히 인사를 건 버클리 남작 부인이 잔뜩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왕국 최고의 대학에 무려 ‘경제학’으로 입학한 자신의 장남, 찰스 버클리가 브라운 가문의 사위로 들어와 마땅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브램프턴의 신사 브라운 씨, 올해도 봄의 시작을 활기차게 열어주시니 거리마다 아리따운 여인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합니다.”


꿍꿍이가 훤히 드러나는 부인의 말에 버클리 남작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말을 붙였다.


헨리 브라운이 다른 손님을 맞이하느라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떠나자 버클리 남작은 칠칠치 못한 제 부인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부인. 엘로이즈는 이제 열한 살이오. 아직 어린 꼬마란 말이오.”


“코트 데뷔까지 몇 년 안 남았네요. 남녀가 천천히 알아가기에 넉넉한 시간이지요. 여러 집안이 저 애를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으시겠죠, 버클리 경? 물론 엘로이즈도 눈이 있다면 우리 찰스의 남자다운 외모에···.”


“부인···!”


군인 출신인 남편의 불호령에 의기소침해진 남작 부인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입가로 천천히 가져가며 엘로이즈가 서 있던 저택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능청스런운 태도였다.


[제 생일 무도회에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귀부인.]


저택 입구를 살펴보던 버클리 남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꼬마 숙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어디 구석에서 팔자 좋게 선물 상자나 뜯어보고 앉았겠지.


무심한 남편에게 쓴소리를 들은 남작 부인은 저보다 돈이 많은 꼬마 아이를 걱정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고 그랜드 홀의 인파 속으로 걸어가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



“멍청한 까마귀 대가리.”


고딕 양식이 매력적인 블랙우드 대저택과 제법 떨어진 별채는 밝고 시끌벅적한 브라운가의 분위기완 사뭇 달랐다.


“하찮고 열등한 것.“


경멸에 찬 블랙우드 공작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블랙우드 공작의 눈부신 금발과 확연히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제 아버지 앞에서 공손히 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역사학에서 낙제를 해? 네놈에게 들어가는 돈이 얼만 줄은 알고 이 따위 성적을 가져오는 게냐?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돌보다 딱딱한 대가리로 평생을 빌어먹고 살아도 시원찮겠군.”


점점 더 거칠어지는 공작의 훈계에 소년의 늙은 유모는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참아냈다. 제 불쌍한 어린 주인에게 쓰이는 돈 따위는 공작의 말과는 다르게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블랙우드의 작은 공작, 루이스 블랙우드에게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품위유지비에 비하면 이 작은 사생아에게 쓰이는 돈이란 기숙학교 학비가 고작이었다.


“다른 과목은 다 만점인데요, 공작님.”


찰싹-


잠자코 있다 한마디 던진 소년의 왼쪽 뺨에 공작의 커다란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루퍼트 블랙우드.”


“······.”


“한 번 더 대꾸하면 다음엔 그 악마 같은 검은 눈알을 파버리겠다. 내가 네놈에게 아량을 베풀어 먹이고 입히고 빌어먹을 왕립학교까지 보내주는데, 죽어라 노력해도 모자랄망정 낙제로 블랙우드의 명성에 먹칠을 해? 은혜도 모르는 천치 같으니라고.”


공작은 구둣발로 루퍼트의 허벅지를 걷어차며 말했다.


“블랙우드의 헛간을 축내는 쥐새끼 같은 놈. 그 천한 피는 어디 안 가는 모양이야. 역겹군. 제 애미를 쏙 빼닮은 면상 하곤.”


다시 한번 제 허벅지에 가해지는 공작의 구둣발에 루퍼트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쩌면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공작을 더 화나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제 몸에 있는 까만 것들을 최대한 숨기려 했다.


얼굴, 몸통을 가리지 않는 대여섯 번의 발길질을 끝으로 공작은 연미복 끝자락을 털며 별채를 나섰다.


“가세. 오늘 브라운가 여식의 생일 무도회가 있다는군. 그 젠트리 놈···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꼴이 영 성가시단 말이지.”


마부와 함께 사라지는 공작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후 루퍼트는 천천히 일어나 군데군데 찌그러진 옷을 정리했다.


어느새 곁으로 달려온 늙은 유모도 잔뜩 구겨진 셔츠를 빳빳하게 당겨주며 그를 도왔다.


“유모, 나 산책 좀.”


덤덤한 태도의 루퍼트가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도련님.”


눈시울이 붉어진 유모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말했다.


그녀의 작은 도련님은 자존심이 강했기에 함부로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울고 싶을 때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는 제 가엾은 주인을.


“아직 밤공기가 찹니다. 코트는 입고 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루퍼트의 셔츠가 살짝 찢어진 것을 모른 체하며 살며시 코트를 입혀주었다. 혹시 누군가와 맞닥트리더라도 자존심 강한 그의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루퍼트는 아무 말 없이 코트의 단추를 잠그며 별채를 나섰다.



***



‘엘로이즈.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렴. 우리 공주는 이 아비를 닮아 희귀한 것을 좋아하니 선물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구나. 딸기향이 나는 그린티는 어떠니? 알핀베르크에서 막 들여온 거란다. 아직 벨더스의 어떤 귀족도 맛보지 못한 아주 귀한 선물이고 말고.’


‘그린티는 이미 많아요, 아버지. 그리고 딸기향이 나는 그린티를 마시고 싶다면 차를 마실 때 딸기를 곁들이면 될 일 아닌가요? 저는 그런 것보단 꽃을 갖고 싶어요!’


‘또 그 하얀 달맞이꽃 얘기구나. 엘로이즈, 이 아비는 평생 상인으로 살아 모르는 것이 없는데, 세상에 그런 꽃은 없단다. 노란 달맞이꽃이면 몰라!’


무도회장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엘로이즈가 저택을 뛰쳐나온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다들 왜 이 무도회의 주인공인 자신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그 무관심이 퍽 고맙게 느껴졌다.


[또 그 하얀 달맞이꽃 얘기구나. 세상에 그런 꽃은 없단다.]


엘로이즈는 하얀 달맞이꽃을 본 적 없다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울타리를 향해 자연스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곤 몇 달 전, 토끼를 쫓다 우연히 발견한 자작나무 숲속의 깊고 웅장한 호수를 떠올렸다.


그 호숫가에서 처음 발견한 하얀 달맞이꽃의 아름다운 꽃잎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엘로이즈는 몇 송이 피어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의 하얀 달맞이꽃이 좋아 종종 울타리를 넘어 꽃을 보러 갔지만 꺾어 올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맹세코.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 꽃을 가져와서 아버지께 보여드려야겠어.


엘로이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키만 한 울타리에 매달려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곤 자신의 하얀 드레스가 풀물에 파랗게 스며드는 것도 모른 채 너른 들판을 신나게 달려 나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들판 넘어 드리운 자작나무 숲의 장막이 걷히자 밤하늘을 닮은 깊은 호수가 엘로이즈의 금빛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은빛 보름달을 품은 채 잔잔히 일렁이는 물가로 향하는 소녀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제법 익숙했다.


엘로이즈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좁은 목재 다리 근처로 다가가 하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며시 쪼그려 앉았다.


“잘 있었어? 오늘은 한 송이 더 피었네.”


작고 보드라운 손이 달맞이꽃의 하얀 꽃잎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아버지가 너희들을 믿지 않으셔서 말이야. 꼭 보여드리고 싶은데 너희가 얼마나 예쁜지···.”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던 가정교사의 가르침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엘로이즈는 이미 굳게 결심을 한 상태였다.


온 세상의 희귀한 것은 다 보았다던 아버지가 보지 못한 단 하나의 꽃.


하얀 달맞이꽃을 보고 놀랄 아버지의 표정을 상상하며 엘로이즈는 꽃 한 송이를 조심스레 꺾었다.


천천히 일어선 엘로이즈는 잎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양손을 포갠 후 그 위에 꽃을 받쳐 들었다. 제 손 위에 얌전히 올라간 꽃 한 송이를 물끄러미 보던 엘로이즈는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것 봐요, 아버지. 하얀 달맞이꽃은 있어요. 엘로이즈가 곧 놀라운 것을 보여드릴게요.


엘로이즈는 설레는 마음으로 뒤돌아 왔던 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


“거기 서.”


등 뒤에서 낯선 소년의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로이즈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소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작은 반동에 흔들렸다.


이윽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소년과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을 담은 호수가 숨을 죽인 채 작게 일렁였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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