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램프턴에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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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euze
작품등록일 :
2024.09.14 15:21
최근연재일 :
2024.09.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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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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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울타리 너머 들려오는 낯선 미성의 목소리에 도움닫기를 하려던 엘로이즈는 곧장 멈춰 섰다.


“누구야?”


“이번엔 조심히 넘어와. 어제처럼 엎어지지 말고.”


“너······!”


엘로이즈는 재빠르게 울타리에 매달려 어제 자신과 부딪혔던 소년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냥용 무릎 바지와 트위드 재킷을 입은 금발의 소년이 파란 눈을 천천히 끔뻑이며 정오의 햇살을 온 얼굴로 받아내고 있었다.


“너구나? 어제 아무 말도 없이······!”


“어제는 나도 놀랐어. 그래서 사과하러 온 거야. 이것 봐! 선물도 있어!”


엘로이즈보다 키가 한 뼘 정도 큰 소년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활과 화살집을 발 옆에 내려놓고 재킷 안쪽 주머니에 꽂아놓은 꽃팔찌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흰 들꽃들만 엮어 만든 귀여운 모양새의 팔찌였다.


“어제 그냥 가버려서 미안해.”


불쌍한 척하듯 눈썹을 팔자로 휘며 입술을 부루퉁 내민 소년의 모습에 경계심이 풀린 엘로이즈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도 미안해. 사실 내가 뛰어들었는걸.”


“그건 맞아.”


“뭐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놀리는 소년의 말에 엘로이즈는 가볍게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엘로이즈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소년은 당황하며 자기도 모르게 너른 들판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투명한 햇살과 고요로 가득했던 들판 위로 어린 소년 소녀의 영문 모를 웃음소리가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렸다.


두 아이는 한참이나 잡힐 듯 말 듯 들판 위를 쏘다니다 지친 듯 들판 위로 철퍼덕- 몸을 뉘었다. 한창 떠오른 태양에 온몸을 맡긴 아이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울타리에 매달려 자신을 바라봤을 땐 그녀 뒤로 솟아오른 태양 빛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작고 말간 얼굴을 봤을 땐.


‘어마마마보다 어여쁜 사람은 처음 봐.’


이것이 소녀에 대한 소년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진 채 누워있는 제 옆의 말괄량이를 보고 있자니, 첫인상과는 영 다르단 생각에 소년은 그만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엘로이즈는 눈을 떠 소년을 새초롬히 바라보았다.


“왜 웃어?”


“너 되게 잘 달리는구나?”


“너, 아니고 엘로이즈.”


“엘로이즈?”


“엘로이즈 브라운. 너는 이름이 뭐야?”


엘로이즈의 질문에 고민에 빠진 듯 잠시 생각하던 소년이 곧 대답했다.


“에··· 에드윈······! 에드윈이야, 내 이름.”


“무슨 에드윈? 성이 뭔데?”


“들어도 모를걸? 난 저-기 먼 시골에서 왔어. 어머니가 여기 블랙우드 공작의 친척이라 종종 와.”


“여기 블랙우드 공작?”


엘로이즈는 되물으며 어제 호숫가에서 만난 검은 머리칼의 소년을 떠올렸다. 그 애는 분명 블랙우드 공작의 아들이겠구나.


“응. 여기 블랙우드 공작저잖아.”


“블랙우드 공작이 누군데?”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은 엘로이즈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드윈이라는 소년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 호기심 어린 눈빛을 읽어낸 소년은 엘로이즈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벨더스 귀족 중에 제일 높은 귀족이지. 엘로이즈 넌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던 거야?”


“응. 이 들판에서 저기 호수까진 늘 아무도 없는걸?”


엘로이즈가 호수를 가리고 있는 자작나무 숲을 가리키며 말하자 소년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여긴 별채 아래라 아무도 오지 않겠네.”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년은 자신을 향해 몸을 기울인 채 귀를 쫑긋 세운 엘로이즈를 순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마치 토끼 같아. 희고 작은 토끼. 뽀송뽀송하고 부드럽고 귀여운······.


“에드윈!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보채는 엘로이즈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 차린 소년이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에디······! 어디 있는 거야?! 에디!!!”


언덕 너머로 윌리엄의 다급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왕궁에서 가족들만 사용하는 제 약칭이 이토록 반갑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제 손에 들고 있던 꽃팔찌를 엘로이즈에게 내밀며 말했다.


“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우리 다음에 또 놀자, 엘로이즈.”


엘로이즈는 미소로 화답하며 꽃팔찌에 자기 손목을 끼워 넣었다.


“좋아. 또 놀자, 에드윈.”


자신이 만든 꽃팔찌를 손목에 건 채 손을 흔드는 말간 얼굴을 바라보던 소년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내 진짜 이름을 말할 걸 그랬나.


에드워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로이즈는 난생처음 사귄 친구를 향해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주었다.



***



점점 멀어지던 소년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쯤 되어서야 엘로이즈는 흔들던 손을 거두었다. 엘로이즈가 제 또래와 이토록 긴 이야기를 나눠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기에 무척 설렜다.


“에드윈······.”


파란 눈의 장난스러운 에드윈은 잘 웃었고, 또 상냥했다. 엘로이즈는 부푼 마음으로 처음 사귄 친구의 이름을 한 번 더 되뇌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 순간,


[하얀 드레스에 하얀 구두? 귀족도 아닌 게 귀족 행세는.]


상냥한 에드윈과는 다르게 처음 본 자신에게 아픈 말들을 내뱉던 흑발의 소년이 떠올랐다.


[귀족 중에 제일 높은 귀족이지.]


귀족 중에 제일 높은 귀족······. 자연스레 움츠러드는 어깨를 애써 바르게 편 엘로이즈는 어젯밤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렇지, 엘로이즈. 네게 주어진 것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 해.]


아버지는 내가 서대륙에서 돈이 제일 많은 소녀라고 했어. 어쩌면 내가 그 애보다 돈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 그 애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고 그 대가로 하얀 달맞이꽃을 달라고 하면 어떨까?


엘로이즈는 망설임 없이 자작나무 숲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에드윈과 놀던 때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



루퍼트는 날이 새도록 밤잠을 설쳤다. 퀭한 눈을 한 자신을 점심도 거른 채 졸졸 따라다니는 유모가 걱정된 루퍼트는 처음으로 대낮에 별채 밖 산책을 감행했다.


내가 나가면 그 틈에 유모가 좀 쉴 수 있겠지.


유모는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루퍼트의 말에 놀란 듯했으나 곧 그의 얼굴을-특히 눈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곤 안심하며 보내주었다.


그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어제 소녀를 울리고 얻은 그 압도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멍청한 젠트리 계집.]


하지만 어째서 마음이 무거운 걸까.


[하얀 드레스에 하얀 구두? 귀족도 아닌 게 귀족 행세는.]


붉게 물든 볼 위를 타고 흐르던 엘로이즈의 눈물이 딱딱한 돌이 되어 자기 가슴에 툭- 떨어진 듯했다.


“그깟 말들이 뭐라고. 나는 매일 듣는데.”


애써 아닌 척하려 했으나 루퍼트는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발목에 쇳덩이가 감긴 것처럼 느린 걸음으로 레이크 블랙우드를 향해 걸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호숫가에 다다른 루퍼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왔다!!”


······!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란 루퍼트는 하마터면 다리를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어제 보았던 갈색 머리의 소녀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오도카니 서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루퍼트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홀린 듯 엘로이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쿵쿵.


제 발소리보다 크게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에 루퍼트는 자신이 엘로이즈에게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계속 널 기다렸어.”


기다렸어······?


무얼 하다 온 건지 풀물로 얼룩진 회색 코튼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긴장한 듯 천천히 말을 건넸다. 대답을 해야 할지 말지 루퍼트가 고민하는 사이 엘로이즈가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이름이 뭐야?”


“······루퍼트 블랙우드.”


어제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한 엘로이즈의 밝은 목소리에 루퍼트는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런 악담을 듣고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나를 피해도 모자랄망정 어째서 다시 찾아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걸까?


“블랙우드······. 역시 넌 귀족이었구나?”


루퍼트는 시종일관 당황스러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엘로이즈가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난 귀족이 아니야.”


“······.”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이거야.”


엘로이즈는 하얀 달맞이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이 꽃이 갖고 싶어. 딱 한 송이면 돼. 여기가 블랙우드 공작님의 땅인 걸 알아. 그래서 루퍼트 너와 ‘교환’을 하고 싶어.”


엘로이즈는 언젠가 들어보았던, 아버지의 상점에서 상인들이 자주 쓰던 용어를 기억해 냈다.


교환.


꽤 어려운 단어를 사용했다는 뿌듯함에 엘로이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엘로이즈의 여유로운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루퍼트가 비꼬듯 말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엘로이즈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뭐든 얘기해 봐. 난 돈이 많아. 네가 갖고 싶은 걸 사줄게.”


돈이 많아? 루퍼트는 저보다 어려 보이는 계집애가 지껄이는 말도 안 되는 얘기에 코웃음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퍼트는 자신이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밝은색 머리카락.”


“뭐라구?”


“금색 머리카락이 갖고 싶어.”


몇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루퍼트는 자신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찬찬히 훑어보는 엘로이즈의 시선을 느꼈다. 알쏭달쏭한 엘로이즈의 표정에 되레 긴장한 루퍼트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 없으면,”


“좋아.”


“······.”


“내게 삼일만 시간을 줘. 네 머리카락을 밝게 할 걸 구해올게.”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기숙사 동기들에게 온갖 조롱을 들어가며 레몬수에 머리를 밤낮으로 담가보았을 때도, 관리인들의 숙소에서 몰래 에일을 훔쳐 머리를 감아보았을 때도 바뀌지 않았던 이 저주받은 검은 머리카락을, 저 애가 무슨 수로 바꿔준다는 거지?


“그리고.”


“······.”


“사과해.”


“뭐?”


“어제 내게 했던 말들 사과하라구.”


놀라움이 끝이 없었다.


루퍼트는 유모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이렇게 길고 조용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모두 자신을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어린 루퍼트는 순전히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자신에게 ‘벨더스 최고의 명문가를 무너뜨린 악마’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교계에선 자신을 ‘검은 머리의 이방인’ 혹은 ‘블랙우드의 사생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 또한.


“사과하라니까?”


그래서 루퍼트는 이 상황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왜 계속 내게 말을 걸어?”


그냥 몰래 와서 저 꽃 한 송이 따위 꺾어가면 그만인 일을 왜 굳이 교환하자는 둥 사과하라는 둥 일을 귀찮게 만드는 거지?


“왜 안 돼?”


엘로이즈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에 루퍼트는 당황했다. 어제와는 다른 느낌으로 몸이 아파왔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블랙우드가에서 나는 건 네 것이니 당연히 허락을 구해야지. 꽃 한 송이더라도 말이야.”


“내 것······?”


“응. 넌 블랙우드잖아.”


엘로이즈의 말이 맞았다. 이방인인 어머니를 닮아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채 태어났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블랙우드’였다. 어쩌면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자신의 출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은 루퍼트가 얼빠진 사이, 엘로이즈는 어느새 총총 멀어져가고 있었다.


“곧 봐, 루퍼트!”


루퍼트는 가시지 않은 충격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작아지는 소녀의 실루엣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하얀 달맞이꽃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살랑이며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작은 어깨 아래로 춤추듯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루퍼트가 알던 무채색의 세상을 수채화로 물들였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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