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램프턴에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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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euze
작품등록일 :
2024.09.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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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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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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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하고 돈 많은 브라운 영애

DUMMY

손님맞이가 끝난 블랙우드 공작이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2층 발코니에서부터 사분의 삼박자의 느리고 우아한 오케스트라 연주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왕가 일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높은 플랫폼 테이블에서 천천히 일어난 윌리엄은 어머니인 왕비 제너비브 벨더스를 에스코트하며 무도회장 중앙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행사 때문에 꽤 피곤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티 내지 않았다.


윌리엄과 제너비브가 무대 중앙에 도착하자 오케스트라는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평생 배워온 대로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미뉴에트를 추기 시작했다.


많은 인파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한 탓인지 윌리엄은 스텝을 조금 절었다. 하지만 그의 태연한 표정과 제너비브의 노련함에 가려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윌리엄은 타고난 왕세자였다.


그는 천성이 선하고 순종적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왕세자 직위에 오른 이 순간까지 그는 부모에겐 둘도 없는 효자였고, 형제들에겐 다정한 위로였으며, 하녀들에겐 신뢰받는 미래의 군주였다.


왕궁에서 그와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윌리엄의 왕세자 봉작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주변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건 오늘 왕세자를 처음 보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온화한 얼굴로 기품 있게 행동하는 윌리엄 왕자에게 모두 경탄했다.


“왕비님께서 미인이셔서 그런지 왕세자께서도 외모가 수려하네요. 물론 우리 찰스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호호.”


블랙우드 대저택 주저의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버클리 남작부인이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둘째 왕자님이 훨씬 준수하시다지요? 왕세자 저하께서는 금안을 지니셨지만, 둘째 왕자님께서는 벨더스가의 상징인 푸른 눈을 가지셨다고 하더군요.”


옆에 있던 러셀 백작부인이 버클리 남작부인의 말을 교양 있게 무시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두 부인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자, 헨리는 엘로이즈가 눈치챌세라 본능적으로 그의 딸을 향해 몸을 낮추며 말을 걸었다.


“엘로이즈. 이곳에 와보니 어떠냐? 재미있는 게 많지?”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예뻐요!”


엘로이즈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 후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넓은 메인 홀을 가득 채운 금빛과 푸른빛의 향연.


처음 보는 색 배열에 엘로이즈의 동공이 커졌다. 과연 희귀한 걸 좋아하는 엘로이즈가 설렐법한 풍경이었다.


무도회장은 전체적으로 벨더스를 상징하는 색인 파란색과 금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특히 엘로이즈의 마음에 쏙 든 건 파란 델피니움과 노란 수선화를 엮어 만든 꽃 아치였다.


엘로이즈는 메인 홀로 들어오자마자 거대하고 아름다운 꽃 아치에 매료되었지만, 여태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 옆에서 예법을 연습해 보라던 가정교사 샬럿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블랙우드저에서 왕세자 봉작 축하 무도회를 연다는구나. 아비와 같이 가볼 테야?’


‘블랙우드 대저택이라고요, 아버지? 당연히요! 갈래요!’


‘잘 됐구나, 엘로이즈. 브라운 씨 옆에서 내가 가르쳐준 예법을 실천해 볼 수 있겠어. 실전에서 많이 부딪혀야 예법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단다.’


저녁 식사 중 뜬금없이 나온 헨리의 말에 엘로이즈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하루 종일 이어지는 샬럿의 수업에 도통 놀 시간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태 샬럿은 오로지 엘로이즈의 흥미에 근거하여 수업을 진행해 왔지만, 최근부터는 벨더스의 역사와 귀족들의 관계도 등 엘로이즈에겐 영 흥미 없는 것들을 외우길 요구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엘로이즈로선 이 모든 게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개중에 제일 답답했던 것은 루퍼트 블랙우드에게 <검은 머리카락을 밝게 물들이는 네 가지 방법>이 적힌 쪽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샬럿이 좀처럼 자유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엘로이즈는 이러다가 루퍼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건 아닌지 몹시 걱정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제안이 마치 행운처럼 느껴졌다.


블랙우드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가면 그 아이를 볼 수 있겠지?


무도회 시간이 다가오자 엘로이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제일 먼저 현관문 앞에 나와 헨리를 기다렸다.


처음 사용해 보는 흰색의 작은 손가방에 루퍼트에게 전해줄 쪽지도 고이 접어 넣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지만 무도회장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루퍼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은 블랙우드 공작과 그의 첫째 아들이라는 루이스, 그리고 공작부인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이 블랙우드라구?


루퍼트랑은 다른, 밝은 색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랙우드들을 마주친 엘로이즈는 어리둥절했다.


호기심이 더욱 깊어진 엘로이즈는 어서 루퍼트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 헨리의 손을 살짝 잡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왕비와 왕세자의 춤을 감상하고 있던 헨리가 곧바로 반응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제가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엘로이즈는 샬럿에게 배운 대로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물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가까이서 이들의 대화를 듣던 귀부인들은 작은 아이가 내뱉는 숙녀의 언어에 감탄 반 귀여움 반으로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화장실이······.”


헨리가 고개를 내밀고 화장실을 찾으려 할 때였다.


“제가 에스코트해도 될까요?”


밝은 주홍빛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다가와 엘로이즈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찰스 버클리입니다, 브라운 양.”


밝고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어디선가 버클리 남작부인이 불쑥 튀어나와 빠르게 말했다.


“브라운 씨, 제 장남 찰스를 소개해 드릴게요. 이 멋진 청년이 버클리가의 장남이랍니다. 브램프턴 대학에 경제학으로 입학했다는 바로 그 찰스 버클리예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존경하는 브라운 씨. 정원에 여러 가문의 영식과 영애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특히 제 여동생 클로이가 브라운 양과 친분을 맺고 싶어 하는데, 제가 영애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클로이 버클리는 데뷔탕트를 치른 바로 다음 날, 많은 귀족가 영식들에게 청혼받은 것으로 유명한 남작가의 영애였다. 현재 사교계에서 일등 신붓감으로 여겨지는 숙녀이기도 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찰스는 헨리의 필요를 꿰뚫어 보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제가 브라운 양을 정원으로 에스코트해도 될까요?”


가볍게 목례를 한 찰스가 엘로이즈를 보며 싱긋 웃었다.



***



찰스의 에스코트는 엘로이즈가 알고 있던 에스코트와는 달랐다.


처음에 그는 팔을 내밀어 엘로이즈가 손을 올릴 수 있게 한 다음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주저를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팔을 내리고 빠른 걸음으로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리해야 하는 개인적인 일이 뭐야, 엘로이즈?”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던 엘로이즈는 교양이라곤 조금도 없는 찰스의 말투에 깜짝 놀라 멈추어 서버렸다. 찰스도 걸음을 멈추고 엘로이즈를 향해 뒤돌아섰다.


그는 삐딱하게 선 채 엘로이즈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어보며 말했다.


“배앓이는 아닌 것 같고, 방광 문제도 아닌 것 같고.”


엘로이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광이 뭐지? 배앓이라면······.


배앓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챈 엘로이즈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남성에게든 여성에게든 그런 단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나거니와 여성을 대하는 데 있어 굉장히 무례한 처사였다.


하지만, 며칠 전 루퍼트로부터 굉장한 수치를 당했던 엘로이즈였기에 이 정도의 무례함 정도는 견딜 만했다.


귀족들은 다 이런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엘로이즈는 헨리의 조언을 떠올렸다.


[신분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놓고 보면 사실 다들 크게 다를 것 없단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왕이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렁뱅이래도 말이다. 그저 같은 사람일 뿐인 게야.]


자신도. 눈앞에 있는 양아치 같은 귀족 영식도. 그저 같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용기가 생긴 엘로이즈는 흠흠 두어 번 헛기침하며 찰스의 이름을 말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게 배에도 힘을 꽉 줬다.


“찰스 버클리 씨.”


또박또박 들려오는 제 이름에 깜짝 놀란 찰스는 눈을 크게 뜨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무척 화가 났을 때’의 버클리 남작부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로이즈는 허리를 곧게 펴며 말을 이었다.


“제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배앓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엘로이즈는 불편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감정을 바로 드러내지 않는 게 숙녀의 덕목이라 배웠지만, 눈 앞에 서 있는 홍당무 같은 사람에겐 무엇이 문제인지 똑바로 알려주고 싶었다.


“허······.”


찰스는 귀족인 자신에게 당당한 엘로이즈를 괘씸히 여기면서도 팔짱을 풀고 짝다리도 곧게 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 혼났을 때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감사해요. 계속 갈까요? 정원으로요.”


엘로이즈의 부드러운 어조에 찰스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 못한 전개에 머리가 마비된 느낌이었다.


“친구들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엘로이즈는 앞장서라는 듯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무언의 지시에 찰스는 정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엘로이즈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고작 열한 살 난 여자아이의 말에 자연스레 따르는 몸이라니 말도 안 돼.


찰스는 제 어머니가 그동안 귓등에 피딱지가 앉도록 떠들어대던 ‘멍청하고 돈 많은 젠트리 얼간이’가 엘로이즈를 의미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


[찰스 버클리 씨.]


천천히 걷는 동안 방금 일어난 상황을 곱씹던 그는 곧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움만 더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찰스는 엘로이즈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릴 필요가 있었다.


[제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배앓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어머니.


[감사해요. 계속 갈까요? 정원으로요.]


어머니가 며느리로 점 찍어둔 이 아이는 그저 ‘멍청하고 돈 많은 젠트리 얼간이’가 아닌 것 같아요.


찰스는 잠깐 뒤돌아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이 아이는.


[친구들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현명하고 돈 많은 브라운 영애예요.


그것이 엘로이즈 브라운에 대한 찰스 버클리의 정의였다.



***



‘너는 우리한테 감사한 줄 알아야 해. 순수혈통인 내가 너 따위 가짜랑 마차를 같이 타 주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줄이나 알아? 넌 은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


‘······.’


‘에휴, 그게 뭔지 알기나 하겠어? 천한 짐승 피를 이어받았으니 말야.’


마차 안에서 루이스는 쉴 틈 없이 루퍼트의 저급함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슬프고 화가 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루퍼트는 다 참을 수 있었다.


그저 봉작식이 어서 끝나길, 그리 늦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 루이스의 독설 따위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블랙우드저로 돌아오자마자 레이크 블랙우드로 달려간 루퍼트는 하얀 달맞이꽃 옆에 풀썩 주저앉아 엘로이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혹시 왔다 간 걸까?


한참을 기다리던 그는, 결국 자신을 찾으러 온 마가렛에 의해 별채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신이 한 끼라도 먹지 않으면 시름시름 앓는 유모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던 루퍼트는 저녁을 먹고 다시 호수에 가볼 생각이었다.


“도련님.”


집으로 돌아온 루퍼트와 마가렛은 별채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 토마스와 마주쳤다.


“주저로 가셔야겠습니다. 공작님께서 찾으셔서요.”


정말이지 나에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단념한 루퍼트는 조용히 토마스와 함께 주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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