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끄래기산 이야기-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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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거사
작품등록일 :
2024.09.17 23:25
최근연재일 :
2024.09.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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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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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3. 완)

DUMMY

5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정향 선생의 눈앞에 차례차례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계속 열에 시달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삐걱거리는 안락의자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은 채 몽상에 잠겼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정향 선생은 전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열도 씻은 듯 사라지고, 늘 핏발이 곤두서 있던 눈동자도 맑고 깊게 빛났다.

머릿속도 투명하리만치 맑게 씻기워졌다.


정향 선생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만년필을 꺼내들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무수한 것들을 차례차례 원고지에 옮겨 적어나갔다.


그것들은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숱하게 생각해온 기억들이었고, 상념들이었고, 그리움들이었다.


그는 오로지 그 작업에 몰두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얼마만큼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향 선생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 붓고 있는 중이었다.


책상 한옆에 쌓이는 원고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새록새록 숨 쉬고 있었다.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져간 많은 것들이 새로이 생명을 부여받아 되살아나고 있었다.


정향 선생은 그 일을 나흘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잠도 한숨 자지 않고,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마침내 닷새째 되는 날 아침, 소설을 한 편 완성했다.

마지막 원고지 한 장을 채우고 났을 때, 정향 선생의 몸은 하나의 뜨거운 불덩어리였다.


찬란하리만치 황홀한 쾌감이 화살이 되어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지나갔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격에 정향 선생은 자칫 지금까지 써온 원고지를 허공에 날려 버릴 뻔하였다.

그는 두 손으로 책상 양옆을 움켜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몽환 같은 뜨거운 열기에 사로잡혀 정향 선생은 또다시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황홀경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 전체가 바다 밑으로 잠겨드는 듯한 느낌에, 정향 선생은 방바닥을 기어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잠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한순간 이대로 잠이 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눈을 뜨려 했으나, 도저히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정향 선생은 끝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밖은 여전히 밝은 햇살로 빛나고 있었고, 새들이 잔망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6



내가 삼거리숲의 정향 선생 집을 방문한 것은 날씨가 화창한 어느 초여름날의 오후였다.


신발은 놓여 있는데 두드려도 아무 응답이 없기에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향 선생의 서재는 언제나 그렇듯 어지럽게 널려져 있어 친근감이 일었다.


여느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초여름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방안에 썰렁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늘 일어나서 서재 앞까지 나와 맞이하던 정향 선생이 그날은 방안의 안락의자에 앉아 나를 맞이한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정향 선생은 잠을 자고 있었다.

단잠에 빠진 듯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정향 선생을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방금 전에 묶인 것인 듯 송곳과 함께 원고뭉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실제로 정향 선생이 쓴 소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원고뭉치가 매우 뜻밖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소설을 완성하셨는가.


반가운 마음이 일어, 나는 정향 선생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겸 책상 위의 원고뭉치를 한 장 한 장 넘겨 나갔다.


제목은 ‘까끄래기산 이야기’. 누군지 짐작이 갈 만한 사냥꾼들의 이야기인 데다 나도 등장인물 중 하나라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덮으려는데 원고 끝에 쓰인 날짜가 이상했다.

내가 잘못 알았나 싶어 달력을 보니 분명 원고의 날짜가 달랐다.

이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 정향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정향 선생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안락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퍼뜩 이상한 느낌이 스쳐갔다.


“선생님!”


“······”


정향 선생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비로소 정향 선생이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향 선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향 선생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십 년 가까이 정향 선생을 알고 지내면서 그처럼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향 선생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그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차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정향 선생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그 방을 나왔다.


정향 선생의 집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해미의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가롭고 평화스러웠다.


나는 그 거리의 사람들에게 해미의 유일한 작가 정향 선생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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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승부(3. 완) 24.09.19 8 0 10쪽
5 승부(2) 24.09.19 5 0 8쪽
4 승부(1) 24.09.19 5 0 9쪽
»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3. 완) 24.09.18 11 0 6쪽
2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2) 24.09.17 9 0 15쪽
1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1) 24.09.17 1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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