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The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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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이에너
작품등록일 :
2016.04.01 23:48
최근연재일 :
2016.04.19 22:41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4,313
추천수 :
542
글자수 :
101,705

작성
16.04.09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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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 Chapter1-3 마을 (3) ]

재밌게 봐주세요 !!




DUMMY

스걱!


공간을 세로로 갈라 지면의 꽃마저 베어버릴 기세의 검, 그 직후의 쫙, 가죽을 찢는 소리...


어깨와 이어지는 쇄골 부위에서부터 오른쪽 흉부까지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


"아윽...!"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여린 볼과 손, 꽃밭의 사방으로 핏물이 튀었다. 힘이 풀린 아르다는 지면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검격에 서 있을 만큼 소년은 강하지 못했다. 검이 순식간에 날아드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안갯속이 그의 시야를 빼앗은 탓이었다.


"으으윽...아악..."


아르다가 어깨를 움켜쥐고, ㅇㅇㅇ를 입은 다리부터 모습이 드러난 것은, 은백의 갑옷...앞서 숲 안쪽에서 보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분명했다.


"...미안하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모든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니..."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를 안갯속으로 데려가려는 사자(死者)의 음성처럼 들렸다.


"......."


가슴을 움켜쥔 손 바깥부분에서 피가 꿀럭거리며 흘러나왔다. 근육이 경직되어 굳은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힘이 빠졌다. 아르다는 바닥에 주저앉아 사각거리는 풀들을 머리카락을 움켜쥐듯 쥐었다. 온 몸의 에너지가 전부 상처를 통해 새어나간 느낌이었다. 격한 통증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자, 반쯤 몽롱한 상태로 피에 젖어있는 꽃들과 땅을 짓밟듯이 딛고 서 있는 남자의 두 다리를 볼 수 있었다. 그 외의 앞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으...윽..."


단번에 머릴 두동강 낼 기세로 간신히 고개를 든 아르다는 눈 속의 떨림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하다. 저 세상에 가거든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나를 용서하지 마..."


"......."


아르다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저건...결국은 내리칠 것이 아니던가.


남자의 모습은 꽤나 기괴했다. 중무장한 갑옷은 체격을 더 커보이게 하는데다 위압감을 배가시켜 주었지만, 목 위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흥분한 듯이.


주마등도 스쳐가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 아르다의 눈은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떨린다. 떨리고 있다. 기사의 두 눈은.


처음보는 인간인데도, 자신을 가련하다는 듯 보고 있는 붉은 눈은, 왤까. 왜지?


자신은 이제 죽는 걸까. 사라지는 걸까.


그렇겠지. 두 손으로 든 검 한 번만 내리치면, 생명의 끈은 끊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야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둠에 휩싸일 것이고...


지르베르처럼, 족장처럼, 마을사람들처럼 되는 거겠지. 피에 적셔진 꽃처럼 절절한 슬픔을 머금고...


...하다 못해 누나의 얼굴이라도 보게 되면 좋을 텐데. 누나는, 세릴 진 하르미카얀은 이곳으로 올까? 올 테지. 만일 광장에 엎어져 있는 한 명이 아니라면, 정처없이 곧 재로 변할 마을을 떠돌다가 종국에는 두 눈을 감지도 못한 자신을 볼 것이다.

아르다는 남자의 눈을 보았다. 숨이 멎게 되면 당신은, 두 눈이라도 감겨줄 건가...


그렇게 해줘. 누나가 슬퍼하는 모습은 볼 수 없게.


츠르르


아르다는 생각했다. 짧은 순간은 이미 지났다고. 이윽고 아르다의 피가 칠해진 그 검은, 남자가 힘을 쥐며 휙 올려들었던 기세와는 다르게 축 무릎 아래로 떨구어졌다. 검날 끝부분이 애꿎은 풀만을 쓸며 살살 건드렸다.


"......."


남자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아픈 몸을 둔 아르다가 할 수 있는 건 눈동자로 보는 일 뿐이었다.


이윽고 들려온 남자의 말은 뜻밖이었다.


"꼬마...어서 도망을..."


그러나 말끝은 매듭지어질 수 없었다.


파악!


"으컥!"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갑옷 사이를 뭔가가 뚫고 나왔다.


"아아..."


순간 한 번 충격을 받은 듯 크게 번쩍 튕겨오른 남자의 몸, 부르르 떨리는 손...미세하게 경련하는 고통의 몸짓...그 모든 광경을 아르다는 동공에 담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서서히 내리깔아 흉부를 훑어가는 남자의 눈...그리고 피.


놀랄 만한 양의 피...


절대 담고 싶지 않은, 충격에 휩싸인 장면을 아르다는 담고 있었다.


울컥 하며 입가에 줄줄 피를 토하듯이 흘리는 남자의 가슴 정중앙에는 창날이 반쯤 비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관통된 가슴은 아르다가 토해낸 것보다도 훨씬 많은 피를 꽃밭 위로 쏟아내었다. 이제는 누구의 피인지도 모를 것을 뒤집어쓴 꽃잎은 완전한 핏빛이었다.


츄욱, 하고 핏줄기가 분수대의 물처럼 흐르는 소리는 '지금 그의 영혼이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으니 지켜보라'고 알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아..."


정작 눈이 경악으로 물든 남자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소리를 내주는건 아르다였다. 기사는 끅끅거리고 하악거리는 거친 바람 빠진 숨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거기엔 음색이라곤 없었다. 그저 공기가 입 속을 지나다니는 소리뿐.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가 남자를 부축해주고 싶었다.


풀썩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린, 이윽고 두어 번 쯤 깜빡거리던 남자의 눈동자가 완전히 정지될 때까지, 아르다는 죽어가는 과정 또한 눈에 담았다. 풀밭에 널부러진 검으로 삶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남자를 찔러 완전한 최후를 맞게 해줄 수도 있었음이라.


그러나 아르다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웅덩이를 만든 핏덩이를...


갑옷을 뚫고도 뻗어나온 창을 기도라도 하듯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고개를 떨구고...


"......."


싸늘해진 공기가, 생의 마감을 알려주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죽음, 그 본인도, 아르다 자신도 몰랐을, 예상치도 못한 의외의 죽음...


...죽었어. 죽었어. 죽다니.


그건 마을 사람들의 죽음...그것을 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경우였다. 남자가 검을 내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흙인형처럼 엎어진 사람을 보는 것과, 멀쩡하던 사람이 완전히 죽어가는 걸 보는 것은...


당신은 몇 명이나 죽였을까.


'또 어린아이인가'라고 했으니, 그 검에 피를 묻혀가며 몇 명의 생명을 빼앗았을까. 어쩌면 이런 최후를 맞이하는 건, 이 남자가 받아야 마땅할 응보가 아닐까. 그 때가 조금 일찍 도래했을 뿐이고...


충격이 휩싸는 몸은 순간적으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쯤 넋이 나가 혼미해진 정신이 문제였다. 한참 후에 겨우 다치지 않은 반대편 팔로 풀숲을 짚고 일어섰을 때, 동공은 아직까지도 남자의 시신 위에 못박혀 있었다.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엔 무리였다. 더 커지기 직전의 소용돌이 상태에 있는 감정은. 잘된 걸까. 자신은 살고, 저자는 죽었으니.


그건 그렇게, 간단한 비유로 해결될 수 있는 걸까. 무엇보다 자신은 보지 않았는가. 정점까지 올라갔던 사내의 살의가 바닥까지 떨구어지는 것을. 그래.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려 했었지.


도망치라고. 그런데 그 순간, 죽어버렸어. 이 자는 더욱 위에 있는 자에게 받은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을 뿐인 것을. 그리고 아르다는 그 순간, 말하고 싶었다.


그 사이에 안갯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한 개 더 나타났다.


“아르다?”


"...누나!"


아직 굳지 않은 피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옷을 적셔갔지만, 아르다는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겨우 몇 시간 만에 본 누나의 얼굴은 여전했다. 헤어지기 전의 상냥하던 눈도. 그러나 눈동자는 약간 흐려져 있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누나!"


붉은 색 물감처럼, 피가 덕지덕지 묻은 누나의 얼굴과 뺨... 아르다는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힘없는 다리가 동작을 방해했다.


아르다는 금방 알아봤다. 창날을 집어던져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누나임을. 검술도 초보 수준이면서...왠만한 검보다도 무게가 더 나갈 것 같은 저 장창은 어디서 들고 온 걸까.


세릴이 말했다.


“아르다! 괜찮아? 어째서 돌아왔어...”


그렇게 말하는 세릴의 목소리는 비교적 나긋해보였다. 생각지 못한 이질적인 말투에 아르다는 순간 이상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뜰을 가로질러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건 환영 따위가 아닌 진짜 누나였다. 왤까. 평소같으면...왜 다쳤냐고, 먼저 난리법석을 떨던 누나가 아니던가.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한 건 늘 자신이고.


아르다는 목구멍에서부터 뭔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한 차례 강제로 참고선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당연히 와야지...누나가 여기 있는데."


그러나 돌아온 누나의 대답은 전혀 예상할 만한 답이 아니었다.

"바보로구나...연기가 피어올랐을 때, 이곳에 오지 말고 도망쳤어야지."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그래. 자신은 누나가, 누나가 걱정되어서 왔을 뿐이다. 한참을 달려올 때에도 도망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러나 아르다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온 세릴의 얼굴에서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보였고, 눈은 붉은데다 누구에게 맞은 듯한 보랏빛 피멍이 들어있었다. 물기 어린 누나의 눈을 보자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말’따위는 어느새 싹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을 알았기에. 아르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느새 세릴은 아르다를 마주보며, 손을 올려 우윳빛 두 뺨을 쓰다듬었다. 다시는 짓지 않을 것 같은 옅은 미소가 세릴의 얼굴에 생겨나는 것을 보자, 아르다 또한 마음속에 단단히 매인 실뭉치가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평소의 누나였다. 이윽고 상냥한 손길이 머릴 감쌌다.


"다행이다. 다행이야...아르다...다행이야."


그러나 아르다는 느낄 수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귀가 지나치게 밝은 탓일까. 일렁이는 누나의 눈 속...안쪽의 더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감정이라니. 도대체 왤까. 이렇게 불안해하는 심장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자신도 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누나, 다른 사람들은?”


“......”


“......”


둘 다 말은 없었다. 잠시동안은.


“혹시 하멜도 못봤어? 그도 여기 왔는데...”


“...못 봤어.”


세릴은 말끝을 흐렸다. 곱게 빛나던 금발은 이곳저곳이 헝클어져 피가 뒤엉켜 붙어 있었다. 거칠한 짐승의 털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아르다는 그런 세릴을 꼭 껴안았다. 얼굴을 포함한 미모가, 이제는 못 볼 지경이 되어 있었다. 특히 햇빛보다도 더 눈부신 피부가 이곳저곳이 많이 상해 있는 것을 보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누나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르다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항상 보석의 중심에서 빛나는 것보다 더 밝던, 그래서 그 밝음이 불변할 것 같은 누나가 왜, 겁먹은 쥐처럼, 어딘가 정결한 혼을 반쯤 빼놓고 온 반쯤 죽은 시체처럼, 넋 나간 사람처럼 구는지를.


스산한 여름바람이 뼛속까지 찬 기운을 몰고 왔다.


공포. 누나가 느끼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르다의 두 뺨을 끌어안다 말고 응시해오는 애수에 젖은, 그러나 절반이 허공처럼 빈 눈...


어린 소년도 느낄 수 있었다. 피, 피를 너무 많이 보았어. 너무 많이...


그래서 도저히 말해줄 수가 없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여린 새처럼 떠는 누나의 몸을 부드러운 음성으로 진정시켜 줄 수가 없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음에도 창을 주워 쓸 수 밖에 없었겠지.


쓰다듬는 누나의 손바닥, 엄지와 검지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있었다.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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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Chapter2-2 별 밤 아래에서 (1) ] +7 16.04.18 182 22 9쪽
17 [ Chapter2-1 세릴 (3) ] +3 16.04.18 170 21 13쪽
16 [ Chapter2-1 세릴 (2) ] +7 16.04.17 139 26 13쪽
15 [ Chapter2-1 세릴 (1) ] +7 16.04.16 180 28 11쪽
14 [ Chapter1-5 항거 (4) ] +3 16.04.15 198 26 13쪽
13 [ Chapter1-5 항거 (3) ] +6 16.04.14 207 31 12쪽
12 [ Chapter1-5 항거 (2) ] +2 16.04.14 207 32 16쪽
11 [ Chapter1-5 항거 (1) ] +4 16.04.13 219 30 7쪽
10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3) ] +2 16.04.12 219 31 9쪽
9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2) ] +4 16.04.11 200 30 10쪽
8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1) ] +6 16.04.10 282 29 13쪽
» [ Chapter1-3 마을 (3) ] +5 16.04.09 225 29 12쪽
6 [ Chapter1-3 마을 (2) ] +2 16.04.08 325 33 10쪽
5 [ Chapter1-3 마을 (1) ] +3 16.04.07 208 31 9쪽
4 [ Chapter1-2 침입 (2) ] +4 16.04.06 224 32 14쪽
3 [ Chapter1-2 침입 (1) ] +5 16.04.02 224 29 14쪽
2 [ Chapter1-1 숲의 경계와 아치문 (2) ] +6 16.04.02 226 33 18쪽
1 [ Chapter1-1 숲의 경계와 아치문 (1)] +14 16.04.01 336 3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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