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1-1 숲의 경계와 아치문 (1)]
재밌게 봐주세요 !!
"너무 좋아. 누나, 내가 고마워하는거 알지?"
아르다(Arda)는 환한 태양빛을 받고 있는 넓은 연녹빛 들판을 환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키 큰 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는 숲을 지나자, 풀냄새를 머금은 공기가 살갗에 부드럽게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소년의 앳된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특유의 기쁨이 담겨있었다.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초원의 끝자락에선 간간히 반딧불같이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대신 노랑색이 아닌 파란 불빛이었다.
“응. 대신 아까 말했던 약속은 다 지켜야 돼. 놀기 전에...”
아르다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숲의 생물들을 만나면 예의를 지킬 것, 독초나 위험생물에 다가가지 말 것, 다섯 시 까지는 여기로 돌아올 것, 그리고 또...”
약 1분 정도 우물대는 대던 소년은 자기 머릴 통통 두드렸다. 그렇지만 대답은 결국 누나인 세릴(seryl)의 몫이었다.
“문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절대로. 알겠지?”
“...응.”
소년은 잠시동안 눈을 내리깔며 발치에 있는, 줄기가 베베 꼬인 흰 꽃을 쳐다보았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작은 돌들 옆, 줄기는 두 개인데 남은 꽃은 하나뿐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용도 반, 신기함 반으로 아르다는 잠깐 동안 그 꽃을 관찰했다.
“왜 그래?”
누나의 부름에 아르다는 곧 생각을 떨쳤다. ‘괜찮겠지’ 하는 표정을 애써 지운 그는 누나가 환하게 웃는 걸 보았다. 순수함이 얼굴에 묻어난, 햇빛으로 밝아져 있는 들판보다도 더 환한 미소. 그건 누나의 가장 강력한 매력포인트 중 하나이자 마을 사내들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 바보스러운 행위 1호-아르다식 명명법으로는-였다. 적어도 아르다 자신의 기준으론 이 명명법은 정당했다. 왜냐하면 동생인 그조차도 누나의 미소를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들판은 아르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누나 다음으로’ 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 만큼, 오늘만큼은 누나의 얼굴을 잠시 피하고 싶었다. 오늘은 사소한, 누나같은 어른들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큰 잘못을 할 테니.
“아르다. 알겠지? 다시 한 번 말해도 될까? 아무리 멀리가더라도...”
“...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절대로.”
아르다는 한 손을 들고 선언하듯이 짐짓 근엄한 말투를 흉내냈다. 누나인 세릴은 아르다의 모습에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가 따라한 주인공을 알기에. 젖살이 남아있는 동생의 얼굴은 마을 꼭대기 부근에 살고 있는 근엄한 관리인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이제 그만.”
아르다는 입을 길게 늘려 씨이익 웃었다. 항상 그는 자신을 풀밭에 풀어놓는 토끼처럼 취급하지 않길 바랬다. 누나는 좋지만, 때때로 누나의 이런 걱정에 가득찬 말이 잔소리화 되어가는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 나이 때 소년의 행동이 으레 그렇듯, 아르다도 그런 누나를 ‘엄마병’에 걸렸다며 자주 이죽거렸다. 그러면서도...
와락.
‘이제 열 넷이나 됐으면서.’라고 말하는 누나의 속삭임은 신경쓰지도 않고, 아르다는 누나의 허리를 살짝 껴안았다. 누가 보면 ‘다 커서 뭐하는 거냐’는 말을 들을 법도 했지만, 누나인 세릴도 표현 많은 동생의 성격을 잘 알기에 딱히 두 번 말하진 않았다. 이럴 때마다 응석받이로 키운 것인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해변의 하얀 모래보다 고운 손길이 소년의 뺨을 서너 번 정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르다의 얼굴이 손에서 미끄러지듯 쏙 빠져나갔다.
“다녀올게, 누나!”
쪼르르 널리 펼쳐진 녹빛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아르다의 모습은 손톱만큼의 걱정도 가지지 않은 순진무구한 소년 그 자체였다. 어디서 저렇게 에너지가 넘쳐 나오는지.
어릴 때부터 적어도 매주 한번씩은 본 초원이 질릴 만한데도, 동생은 유달리 이 들판을 좋아했다. 매주 처음보는 것처럼. 어찌나 좋아했던지, 저번 달 부터는 들판에 이름을 붙였다. ‘아르다 & 세릴’이라고.
세릴은 한 손을 머리위로 들고 천천히 흔들어주며 그를 배웅했다. 동생의 뒷모습이 주먹만해질 때까지.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잔존하는 구름이 크게 몇 덩이 정도 모여들어 때때로 태양을 가리곤 했지만, 이 정도면 아주 맑은 날씨라고 생각하며 세릴은 허리까지 자란 금빛 머리칼을 넘겼다.
......
잔디와 풀밭을 밟으며 한낮의 초원을 달려나가는 것은 아르다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그만큼 끝은 허무한데다 그가 성장할수록, 식물에게는 매번 미안한 일로 생각되어 이제는 그 횟수가 점점 줄고 있었지만. 아르다는 약간 이어지는 산비탈을 내려가며 푸른 빛을 내뿜는 움직이는 짙은 색 덩어리 세 개를 볼 수 있었다. 풀을 뜯다 말고 파란 눈을 가진 사슴 세 마리가 이쪽을 바라봤다.
“세레야(Sereya)!”
아르다는 그렇게 외친 뒤 고개를 두어 번 세차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세레야라 불린 사슴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화답하듯이.
바다보다 청명한 파란 빛의 눈동자는 맑고도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음지를 좋아하는 그들은 대륙 중북부에 흔하게 눈에 띄는 사슴과의 한 종류로, 특히 그들이 사는 제국 이세라(Ysera)에서 흔히 발견되는 데다, 몸통은 다소 짙은 갈색의 영물 취급을 받는 사슴이었다.
세레야를 지나쳐 간 아르다는 돌부리 몇 개를 넘었다. 일분 일초를 아껴 놀아야했다. 기껏 친구들과 놀려고 하면 주어지는 건 두어 시간 쯤, 그것도 한낮을 지나 저녁을 먹기 전까지였다. 세상이 흉흉하다, 그것이 이유였다. 누나의 특별 보호였다면 자신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고 대뜸 항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는 메리웨더(MerryWeather) 숲이 요즘 따라 위험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14살 소년인 아르다에게 위험이란 아직까지 어슴프레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막연한 것일 뿐, 그게 어떤 종류의 위험인지, 어떻게 다가올지는 자세히 몰랐다. 겪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산 위에서만 사는 그들 종족의 몇 명이 실종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을 어른들도 아이들의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추세였다.
자신을 보호해준다는데 불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불친절한 마을 관리인을 만나면 으레 없던 불만도 생겨났다. 우리 일족이 위대하고도 용감한 역사를 가졌다고 자화자찬하는 관리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부터 ‘그 용감한 일족이 이렇게 겁쟁이가 다 되었냐’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면 으레 마을 관리인은 빗자루 한 개만을 들고 그들 일행을 닭 잡듯이 쫒아왔다.
“저건가?”
마을 내에서 놀만한 또래라던지 장소라던지는 정해져 있지만, 오늘은 조금 멀리, 정확히는 문앞까지 나갈 작정이니 장소를 달리했다. 그가 15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키가 큰 침엽수들 한가운데에 호위를 받는 것처럼 우뚝 서 있는, 짙은 갈색빛이 도드라진 미송나무였다.
나무 주변은 작은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다소 어둑한 공터인데다, 그곳만 홀로 동떨어진 다른 세계인 것처럼 이질적인 붉은 점토가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늘진 사이에 피라도 잔뜩 흘린 줄 오해할 만한 색이었다.
막 도착한 아르다가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쉬이이익! 딱!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음향이 들리자마자 아르다는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 주먹 절반만한 크기의 돌멩이 하나가 뒤쪽 풀숲에서 날아들어, 애꿎은 나무의 몸통을 가격한 뒤 바닥을 굴렀다. 아르다를 정확히 노린 공격이지만, 회심의 일격치고는 어설펐다.
감사합니다 !!
- 작가의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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