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The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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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이에너
작품등록일 :
2016.04.01 23:48
최근연재일 :
2016.04.19 22:41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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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05

작성
16.04.1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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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2) ]

재밌게 봐주세요 !!




DUMMY

-

남매는 들판을 걸었다. 완만한 경사였다. 다 자란 듯한 선명한 녹색 풀들이 고스란히 무릎 언저리에 살살 부딪혀 왔다. 먼지를 끼얹은 듯한 색의 로브를 입고, 심정은 달랠 수 없는 참담함을 간직하며.


노을이 점차 산 아래로 사라져가는 연보랏빛 하늘아래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밤을 맞이할.


다그닥, 다그닥.


아르다는 고개를 홱 돌렸다. 흐릿한 별들, 불타는 메리웨더 숲을 품안에 품은, 거인처럼 서있는 산...그 아래의 들판으로 달려오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추격자였다.


“적인가!”


"...달아날 수 없구나. 뒤에 서 있어, 아르다."


“어떻게 하려고...”


두그덕대며 달려오는 말발굽의 연속...작게만 보이던 적은 단숨에 다가왔다. 세릴은 아르다를 내려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르다는 세릴의 잿빛 로브를 잡아끌었다.


"누나?"


도망가야지,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도망칠 수 없다. 그래...이런 탁 트인 곳에서, 풀밭에 엎드려 적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미 들켰는데.


그렇지만 누나는 무슨 생각인 걸까. 아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그녀의 얼굴 아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무언이지만 하나의 표현이었다, 자신이 하겠다는.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두세 걸음 뒷걸음질 쳤지만, 아르다는 세릴의 뒤에 꼭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자신도 가세할 것이다. 아까처럼 도움만 받지 않을 것이다. 다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아르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말을 몰아 최고 앞에서 오는 대장격인 사내는, 칠흑처럼 까만, 민무늬의 긴 흑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세릴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앞에서 다가오는 저들이 돌진해오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는 것 만큼이나.


쉬익!


이윽고 다짜고짜 돌진해온 한 명이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릴의 동작이 더 빨랐다.


"억!"


재빠른 동작으로 옆으로 한 바퀴를 굴러 말 다리를 베어버린 그녀는 그대로 창을 상대의 목에 꽂아 넣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곤 확인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갤 돌려 이번엔 다음 상대를 노렸다.


"물러서 있어, 아르다!"


"계집...역시 여자였나!"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나의 창이 허공에서 그어졌다. 분명 왠 정령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푸른 빛의 잔상이 그어졌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내리친 창은 남자의 두개골을 쪼개고도 멈추지 않고 사선 위를 향해 그었다. 세 번째 적도 그렇게 무너졌다. 변변한 저항한 번 하지 못하고 아래에서 위로 그어진 선을 따라 몸 전체가 쪼개졌다, 순순하게.


"뭣들 하느냐! 동시에 공격해!"


아르다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츠파파팟!


아르다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세릴의 창이 말의 목을 갈라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그녀의 창은 세네 번을 순식간에 찔러 적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다른자가 다가오면 다시 그를 공격했다. 왜 일련의 동작이, 전혀 군더더기가 없는 걸까. 자신이 알고 있는 누나가 맞는 걸까.


분명한 건 자기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빠르고 강한 창이 검을 들고 말을 몰아오는 정예 기사들을 베어버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르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기분이 들뜨기까지 했다, 세릴...누나가 이렇게 강하다니.


푸른 빛을 머금은 세릴의 창날이 나머지 기사들을 죽이거나 방어불능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측에서 달려오던 기사의 말머릴 내리찍자, 말이 부르르 몸부림치며 중심을 잃었다. 바닥에는 또 피가 흥건했다, 바로 몇 시간 전 그의 집 앞에서처럼.


“으으...아으으으!”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는 남자의 운명 또한 뻔했다.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마치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돌진해 오지 못했다. 아니, 돌진해 올 상대가 없다는 것이 정확했다. 남은 건 단 한명이었다.


흑색의 기사. 갑옷도 아닌 로브입은 남자. 드러난 소매아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손은 보통 성인 남자보다는 큰 축에 속했다. 그의 말이 서서히 세릴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그 때였다. 엎어져 있던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왜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느냐? 테사르...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흥. 나는 적이 여자라고 전했을 뿐이다.”


“그런 소릴...이런 곳에서...개 죽음...”


기사는 뭐라 더 말하려 고개를 들었으나, 테사르의 검이 그대로 남자의 두개골을 꿰뚫고 흙바닥까지 박혀버렸다. 세릴이 말했다.


"테사르...당신..."


"테사르...테사르가 맞단 말야?"


아르다는 세릴을 쳐다본 뒤, 다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를 보았다. 남자는 서서히 후드를 걷었다. 분명했다. 테사르...몸집에 비해 작은 얼굴, 그에 어울리는 작은 코, 갸름한 얼굴 속에 보석처럼 박힌 흑빛 눈동자. 로브색과 같은.

눈을 몇 번 비벼봐도 테사르가 분명했다. 그는 웃기게도, 더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세릴은 피묻은 자신의 창날을 보았다가, 테사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르미카얀이군.”


"배신자."


그 단어를 듣자마자 테사르는 입술만을 움직여 낄낄댔다. 이빨은 굳게 닫혀 있는데 웃고 있는 모습이 부조화였다.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루베잘은 네가 갖고 있겠지. 얼른 내놓아라."


그건 마치 도적떼가 ‘보물을 놓고 꺼져’라고 할 때와 비슷한 말투였다.


“테사르 형, 이건 도대체...”


“아르다, 가까이 가지 마.”


아르다는 그 말이 아니더라도 입을 꾹 다물 생각이었다. 풍겨오는 분위기는 사람을 칼날로 금방 찌를 것만 같이 무서웠다. 세릴은 테사르의 말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테사르의 뱀 같은 눈과 혀는 그녀를 꿰뚫어본 것처럼 굴었다.


“너...원통해하고 있군.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보지? 마을이 없어진 것이 충격이 큰가? 으흠, 아니면 하얀 날개 부족이 멸망한 것이? 이제는 인간도 아닌 시체가 된 자들 때문에?”


말이야 어쨌든 다 같은 뜻...이 자는 비웃는 건가.


"그런 말을 잘도...입을 함부로 놀리지마."


"흐흐, 렐도 그렇게 말했었지."


테사르는 잠시 짙은 빛이 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다시 내린 고개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안에 있는 감정을 거울 보듯 티끌하나 놓치지 않고 보려는 듯이. 그녀의 일순 떨림을 본 테사르는 괴랄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렐은 죽었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나는 배신자이니. 배신자의 길이란 그런 것 아니던가. 그런데 넌 분노하고 있군. 그 놈이 소중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어차피 다 죽을 목숨인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너란 놈은 어떻게..."


세릴이 누군가를 너, 또는 놈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아르다로선 도저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왜? 설마 렐을 좋아했다, 사랑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울리지도 않는 말은 집어치워."


"당신은...종족에 대한 긍지도 없단 말인가?"


세릴의 말에 테사르는 코방귀를 꼈다.


"긍지? 긍지를 버린 건 마을 놈들이야! 한 때 우리는 찬란한 문명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건 수많은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어딘지도 모를 숲 따위에 정박해 만족하며 인간제국의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갈 정도로 나약해진 종족의 긍지 따위가 입에 담길 만한 것인가? 너 마저 스러져간 다른 놈들과 같은 소릴 건 실망스러운걸. 좀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거늘."


"종족을 배신한 이유가 그까짓 거라니...이런 생활이 싫으면 네가 떠났어야 했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어! 넌 우리의 삶을, 무욕의 삶을 존중했어야 했다!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기나 해?"


"내가 아니라, 가넬론이 죽였다고 해야지. 네 손가락을 베어간 기사가."


"웃기지마! 그 놈이나 너나 다 같은 놈들이다!"


세릴이 외쳤다.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우는 거냐? 이미 죽은 놈들 때문에? 마음대로 해라. 살인마라고 해도 좋고 쓰레기라고 해도 좋다."


"너 때문에 죽었어...선량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때 아르다가 불쑥 물었다.


"그럼 하멜은...하멜은...어떻게 됐지?"


"그 꼬맹이 말인가? 귀찮았어."


테사르는 자신의 왼쪽 팔뚝을 걷었다. 그러자 무언가의 이빨에 두 세 번 정도 물린 끔찍한 핏자국이 보였다. 더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저질러 버려.'

마음속에서, 이상한...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얌전히 내놓거라! 이제와서 하르미카얀 가문 따위가 뭘 어쩌겠다는 거냐? 하얀 날개는 끝났어! 얌전히 루베잘을 내놓으면 특별히 생각해서 둘만큼은 보내주겠다! 대신 이 세상에 나타나지 말아라. 그 전에 어딘가에서 죽어도 할 말은 없지만."


“천박한 입으로 하르미카얀의 이름을 담지 말아라.”


누나의 그 말은, 엄숙하고도 품위가 있었다. 테사르의 미간이 씰룩거렸다.


"끝까지 어리석구나. 렐이나 다른 놈들처럼, 고집 하나는 끝내주는군. 누가 마을 것들 아니랄까봐."


"넌...종족의 수치다."


테사르는 얄밉게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곤 세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말을 마치자마자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긴 창과, 레이피어처럼 얇지만 기다란 장검이 서로를 향해 부딪혀나갔다.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앞으론 연재를 좀 더 빠르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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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Chapter2-2 별 밤 아래에서 (2) ] +4 16.04.19 181 9 8쪽
18 [ Chapter2-2 별 밤 아래에서 (1) ] +7 16.04.18 184 22 9쪽
17 [ Chapter2-1 세릴 (3) ] +3 16.04.18 170 21 13쪽
16 [ Chapter2-1 세릴 (2) ] +7 16.04.17 139 26 13쪽
15 [ Chapter2-1 세릴 (1) ] +7 16.04.16 180 28 11쪽
14 [ Chapter1-5 항거 (4) ] +3 16.04.15 199 26 13쪽
13 [ Chapter1-5 항거 (3) ] +6 16.04.14 208 31 12쪽
12 [ Chapter1-5 항거 (2) ] +2 16.04.14 207 32 16쪽
11 [ Chapter1-5 항거 (1) ] +4 16.04.13 220 30 7쪽
10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3) ] +2 16.04.12 221 31 9쪽
»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2) ] +4 16.04.11 202 30 10쪽
8 [ Chapter1-4 어둠의 심연 속으로 (1) ] +6 16.04.10 282 29 13쪽
7 [ Chapter1-3 마을 (3) ] +5 16.04.09 225 29 12쪽
6 [ Chapter1-3 마을 (2) ] +2 16.04.08 326 33 10쪽
5 [ Chapter1-3 마을 (1) ] +3 16.04.07 208 31 9쪽
4 [ Chapter1-2 침입 (2) ] +4 16.04.06 225 32 14쪽
3 [ Chapter1-2 침입 (1) ] +5 16.04.02 224 29 14쪽
2 [ Chapter1-1 숲의 경계와 아치문 (2) ] +6 16.04.02 227 33 18쪽
1 [ Chapter1-1 숲의 경계와 아치문 (1)] +14 16.04.01 337 3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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