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일보전진(一步前進) <15>
무당파를 떠나온 지 여러 날이 지났다.
그 동안 위현룡과 홍후인은 전력을 다해 무당파의 세력권을 벗어나려 애썼다.
위현룡이 자신과 신의를 지킨 청무도장을 믿는 것과는 별도로 홍후인은 오랜 경험상 다른 자들이 추격을 벌일 공산이 크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간 아무런 추격의 조짐이 없을 때 비로소 홍후인은 마음을 놓았다.
[이 정도면 더는 쫓아오는 자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
위현룡은 도피하는 도중 내내 초조해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간혹 보면 왠지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내력에 대해서 거의 물어보지 않았지만 - 아니 물어봐도 그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질 않았다.- 늘 쫓기는 상황이 오면 이상하리만큼 과민하게 반응하곤 하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선배님께서 이렇게나 심적으로 불안해하시는 구나.)
너무나 고마우면서도 죄송하여 마음 한 구석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쫓겨다녀야하는가 하는 걱정, 그리고 기약도 없는 희망에 힘이 쭉 빠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러자 그런 기미를 눈치 챘는지 홍후인이 돌연 차가운 소리를 냈다.
[쓸데없는 사념으로 육신을 병들게 하는 것은 멍청한 자나 할 짓이다. 갈 길을 잡았으면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면서 맞서 싸우는 길만이 무림에서 살아남는 길이 될 것이다.]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목적지도 없는 길을 계속 가려니 지쳐서 잠시나마 나약해진 것 같습니다.”
[물론 맞서 싸우는 일이 쉽지는 않다. 도망자의 입장으로서는 그것을 위해 비열하거나 부끄러운 일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기 때문에 심적 갈등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겠지. 허나 살아남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힘을 키워 든든한 세력을 만들 때까지는 악착같이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세력을 만들어 중원무림과 대적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누명을 벗고 청성파의 제자로서 예전처럼 살아갈 수만 있다면 족합니다.”
[이런 한심한 녀석...솔직히 말해서 네가 어떻게 누명을 벗겠단 말이냐? 누명을 입증할 만한 방법이라곤 고작 염청석뿐이다. 염청석이 퍽도 너를 위해서 나서주겠구나...잘 들어라! 무림공적이 된 이상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구파일방이 너를 범인으로 오인했다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너는 죽을 때까지 무림공적이다. 알겠느냐? 차라리 그럴 바엔 힘을 키워 무림공적에서 벗어나는 것이 훨씬 빠르단 말이다.]
홍후인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늘 정의를 부르짖는 무림이지만 실상 그 안에서는 온갖 아귀다툼이 다 일어나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은 어느 때보다 평화스럽다. 왜 일까?
그것은 바로 힘의 균형 때문이었다.
[중원무림은 소림과 무당이라는 두 세력이 양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머지 중소방파들이 골고루 매달려 있는 것이지. 그런데 만일 네가 소림이나 무당에 버금가는 세력을 구축했다고 치자. 어떻게 되겠느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를 제거하려 하지 않겠는지요?”
위현룡의 대답에 홍후인은 곧바로 부인하였다.
[틀렸다. 물론 네가 가세함으로 해서 팽팽한 균형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너를 제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요? 저는 무림공적인지라 충분한 명분도 있지 않습니까?”
[명분? 하하 그거 참 우습구나. 명분이 있어서 뭐 어쩌자는 거냐?]
“네?”
[명분은 있는데 실리가 없지 않느냐?]
“....”
[세력을 구축한 너를 치자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 소림과 무당이 너를 침으로 해서 그들의 전력에는 커다란 불균형이 생기겠지. 즉 한 쪽이 독주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단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나겠느냐? 바로 혼란이다!]
홍후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이용하여 무림공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소림과 무당은 그것 염려하여 너를 제거하는 데 크게 망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더 이상 무림공적이 아니다. 네 세력을 배경으로 네가 곧 무림의 법도가 되기 때문이다.]
“제가 무림의 법도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위현룡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져왔다.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무림의 속성이라는 것이 속된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도 똑같이 한쪽 발을 담그는 일이 왠지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소림사가 이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사나흘 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답답한 화제를 돌리고자 위현룡이 소림사를 입에 올렸다.
[그래..그런데 문제는 소림사 땡중이 과연 너를 도와줄지 모르겠다. 오래 전에 본 기억으로는 그 땡중이나 무당파 광소자나 매일반이었거든.]
“그래도 한번 부딪혀봐야겠지요. 무당파에서 큰 소득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제 남은 희망은 소림사뿐입니다.”
무당파에서 광소자 장윤의 도움으로 내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직접 경험해 본 위현룡이었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난 직후 귀혼내력으로 다시 해보았을 때는 내력이 전혀 조절되지 않았었다. 오로지 태극혜검의 내력만 조절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여기서 홍후인은 이런 추측을 하였다.
광소자가 태극혜검의 비밀을 풀고자 위현룡을 이용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으나 위현룡은 크게 연연하지 않고 차선책으로 주저없이 소림사를 택했다.
홍후인의 입장에서는 괜한 시간낭비일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위현룡이 워낙 기대를 품고 있는지라 딱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할 수가 없었다.
[녀석...간단하게 환령검법을 익히면 될 것을 왜 저리 집착을 하는 것인지...]
** **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위현룡은 강을 끼고 있는 길을 느긋하게 걸어가면서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로 눈길을 주었다.
노을이 강물위에 펼쳐져 붉은 빛깔을 내고 있다.
그 아름다운 정경에 취하면서 위현룡은 문득 입을 열었다.
“선배님, 선배님과 제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십니까?“
홍후인은 그의 물음을 받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기억나지! 나를 처음보고 무서워 벌벌 떨지 않았느냐?]
“하하하, 맞습니다. 그때 전 꼭 귀신에 홀린 줄 알았습니다.”
[야! 이 녀석아! 그때 나 귀신이었던 게 맞다!]
“하하하.”
이렇게 둘이서 싱거운 농을 주고받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 간 도피하느라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했었는데 수려한 자연경관을 접하니 긴장이 풀어지고 절로 흥에 겨워지는 것이었다.
홍후인을 처음에 만났을 땐 차갑고 무뚝뚝하여 가까이하기 어려웠는데 이런저런 힘든 일을 겪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마치 한 가족처럼 말이다.
[오늘만큼은 마을에서 묵자구나. 오랫동안 찬이슬 맞으며 밤을 보내면 몸 다 상한다.]
“그렇지만 괜찮을는지요.”
홍후인의 걱정에 위현룡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무당파에서 자신을 쉽게 알아본 것만 봐도 이제는 대놓고 활보하기가 어려워졌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 개방 방주 놈이 주었던 인면피구가 아쉽구나.]
개방 방주 예강이 준 인면피구라면 무림공적 흑사린과 싸우다가 손상된 그것이었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인면피구라면 쓰자마자 금방 변용한 티가 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과 의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데 예강이 준 인면피구는 확실히 정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인면피구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임시방편으로 대나무로 만든 삿갓이라도 하나 사서 쓰고 다녀야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어차피 무림인들이 아니면 너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삿갓으로 어떻게 버틸 수는 있을게다.]
그때 시각을 점치기 위해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위현룡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저 멀리 흐린 어둠에 잠식당한 채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위현룡은 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을 뚫어져라 주시하였다.
“설마 자진(自盡)을 하려는 게 아닙니까!!”
그의 말에 홍후인도 안광에 힘을 주었다.
[글쎄다...그냥 강바람을 맞는 게 아니겠느냐?]
그러던 중 그가 하늘을 향해 읍을 한번 하고는 신발을 벗어 내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위현룡의 신형이 그곳을 향해 빗살처럼 달려 나갔다.
** **
“소생 성운비(星雲飛). 일찍이 모든 책을 독파하여 모르는 학문이 없고, 천기마저 살필 수 있어 세상에 큰 뜻을 품어보려고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흑살성(黑殺星)을 타고 났으니 이를 어찌 하오리까. 흑살성은 많은 인명을 해할 운명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것, 훗날 천인공노할 대죄를 짓기 전에 그 근원의 싹을 잘라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이 목숨을 바치오니 세상은 평화로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거센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심하게 나부꼈다.
벼랑 아래는 거센 물결이 잡아먹을 듯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허나 이미 삶을 버린 그는 아무런 미련도 두려움도 없이 앞으로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이제 한발자국만 더 디디면 그의 몸뚱이는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강물에 휩쓸릴 것이다.
“멈추시오!!”
눈을 감은 채 몸의 균형을 잃으려는 찰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성운비는 갑작스런 기척에 놀라 얼른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자진을 하려하다니 이 무슨 한심한 짓이란 말이오!”
위현룡이 무서운 얼굴로 호통을 쳐댔다.
성운비는 상대가 무엇을 염려하여 이곳까지 급히 올라왔는지 알게 되자 엷은 미소를 띠웠다.
“대협께서 소생을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오나 이는 운명이니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운명이라니 그 무슨 소리입니까!”
위현룡의 도발적인 질문에 성운비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이 고마워 귀찮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다 듣고 난 위현룡이 오히려 엄히 꾸짖었다.
“이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세상을 살 용기가 없어 자진을 하는 것을 가지고 하늘의 뜻이라 변명하는 것이오? 그렇게 미리부터 자신의 미래를 겁내 목숨을 끊을 용기가 있거든 차라리 두려워하지 말고 보란 듯이 살아가시오. 세상에 당신보다 더 고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데 도대체 당신이 뭐라고 이렇듯 쉽게 목숨을 버리려 한단 말이오!”
성운비는 아무런 말없이 위현룡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쓴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자이지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자들은 쉽게 목숨을 끊습니다. 허나 해악을 끼치는 자들의 목숨은 질기지요. 저는 그 질긴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뜻을 따지기 전에 인간적 도리와 양심을 따르는 것이니 곧 순리(順理)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가 순리란 말이오! 인생은 인간이 개척하는 것이지 하늘에 맡겨 스스로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흑살성을 타고 태어나 훗날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고 하였소? 그렇다면 역천(逆天)하시오! 그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시오! 그것이 소중한 목숨을 헛되이 끊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이오!”
위현룡의 훈계에 성운비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읍을 하였다.
“오늘 대협의 말씀은 가슴 깊이 새겨들을 말이오나 소생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각자 사람마다 그 신념이 있고, 이 방법이 제가 세상을 위해 행할 수 있는 신념이오니 부디 이것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목숨을 끊고자하는 그의 결심은 너무나도 확고하였다.
때문에 홍후인도 듣고 있다가 그냥 그의 의지에 맡기라는 충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위현룡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녕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하늘의 뜻이기 전에 제 뜻입니다. 그러니 저를 존중해주십시오.”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선생께서 그리 천기를 잘 살핀다고 하니 묻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생께서 벼랑에서 뛰어내리면 죽겠습니까? 살겠습니까?”
성운비는 오기를 부리는 위현룡을 보면서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내비쳤다.
자신을 끝까지 살리고자 별별 수를 다 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따뜻해져왔던 것이었다.
“대협과의 인연이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이 말을 끝으로 성운비는 미련 없이 허공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러자 그 순간 놀랄 일이 벌어졌다.
위현룡 역시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공중에 머물러있는 그를 꽉 껴안았던 것이다.
성운비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띄우며 부릅떠졌다.
“대협!!”
[혀...현룡아!!]
홍후인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고에 비명을 질러대는 동안 하나가 된 두 사람은 무서운 속도로 시커먼 강물 속에 떨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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