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심천패왕(深川覇王) <32>
그들은 넓은 죽립을 둘러쓰고 있었고 뭔가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단 신원을 밝히지 않고 진영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음으로 그곳을 지키던 대막천궁 무사들은 그들이 결코 아군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대막천궁 무사 두 명이 일갈을 하며 검을 휘두르자 갑자기 한 인영이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단 칼에 두 명의 다리에 검상을 입히고 주저앉혔다.
발검의 빠른 속도와 궤적을 봤을 때 결코 하수의 실력이 아니었다.
“적이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대막천궁 무사들은 무기를 뽑아 들고 일사불란하게 그들을 포위하였다.
위현룡과 무천동의 격전과는 별도로 다른 한쪽에서 기습으로 인한 큰 소란이 일어났기에 자연스럽게 비무는 중지되고 사마제는 적을 막기 위해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네 이놈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굳이 사마제의 호통소리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는 적월교 교주를 비롯해서 수장들과 대막천궁 무사들이 즐비했다.
그런데도 버젓이 들어와서 대뜸 공격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환장한 게 분명해 보였다.
당장 눈앞에는 피가 줄줄 떨어지는 검을 든 죽립인이 서 있었다.
(이 놈이 공격을 한 것인가?)
고수의 솜씨이긴 했지만 자신과 비교해보면 별 것 아닌 상대로 느껴졌다.
본래 심도있는 무학을 연마한 사람에게서는 그 특유의 기도가 느껴지는 데 이 자에게서는 그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간단한 분석을 토대로 사마제는 단 칼에 요절낼 심산으로 다가갔다.
그때 공격을 한 괴인 뒤에 있던 또 다른 자가 앞으로 나서면서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소. 내 제자가 성격이 급해서 말이오.”
“뭐라? 넌 또 뭐냐!”
이 살벌한 자리에서 그것도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헛소리에 사마제는 일순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조용히 주시하던 적월교 교주 동방유조는 앞으로 나선 사람의 한쪽 소매가 헐렁한 것을 보고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버렸다.
누군가가 뇌리에 스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름 석 자를 읊조리게 된 것이다.
죽립이 벗겨지면서 괴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살기등등하게 다가서던 사마제는 기겁을 하여 몸이 굳어졌다.
“서...설마...적무평 대협이십니까?”
사마제의 떨리는 음성에 적무평이 너털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사마대협이군. 오랜 세월 만나지도 못했는데 용케 이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있구려.”
“제 이름도 기억해주시는데 제가 적대협을 몰라볼 리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정중해진 사마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망설였다.
적월교에서라면 몰라도 이렇게 전투가 벌어지는 한 가운데 그의 출현이 영 불길했던 것이다.
이러던 와중에 동방유조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을 비치면서 걸어왔다.
“적대협 실로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교주는 이곳에 어인 일이시오?”
지나는 길에 궁륭성 전투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위현룡이 관여되었음을 알고 서둘러 오게 된 적무평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동방유조가 모습을 드러냈음으로 적무평은 의아하면서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시찰을 하다가 우연히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동방유조의 태평한 대답에 적무평은 퉁명스런 소리를 냈다.
“적월교 교주가 그렇게 자꾸 새외를 쏘다니면 여러 문파들이 긴장해서 제대로 숨이나 쉴 수 있겠소?”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간에 껄끄러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쉽게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룡아! 저기 저 사람 적무평대협이 아니냐!]
먼저 발견한 홍후인의 외침에 위현룡은 깜짝 놀랐다.
약왕문에서 헤어진 후 소식이 궁금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당시엔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다행히 온전히 회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적대협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을까요?”
[글쎄다...아마 너 때문에 온 것 같구나.]
홍후인의 추측에 위현룡은 걱정부터 앞섰다. 적무평은 새외사람인데 자신 때문에 혹여 곤란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었다.
홍후인이 그 기색을 눈치 채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세상에서 적무평대협을 계속해서 걱정하는 사람은 네가 유일할게다.]
**
동방유조는 갑자기 나타난 적무평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은근히 느껴지는 그의 적대적 기도가 이곳에 뭔가 목적을 가지고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여기 오신 특별한 연유가 있으신 겁니까?”
동방유조의 물음에 적무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지기(知己)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지기라 하시면...혹시...”
“저기 있는 위현룡을 말하는 것이오.”
약왕문에서의 격렬했던 전투이후에 정리된 정보들을 보고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방유조는 그 정보를 모두 다 믿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안에 적무평의 지기가 무림공적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 적무평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입을 통해 사실임을 확인받게 된 동방유조는 속으로 심히 놀랐다.
단 한명의 친구도 사귈 필요가 없다던 천상천하 유아독존 적무평이 공공연하게 친구를 사귀다니...
이내 정신을 차린 동방유조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래서 적대협의 뜻은 무엇입니까?”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위현룡이 적대협의 지기인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럼 내가 어떻게 할지도 잘 알겠구려?”
참으로 적무평다운 발언이었다. 상대가 새외를 관장하는 적월교 교주였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들은 동방유조의 안색은 바로 딱딱해졌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따지자면 적대협이 가세한들 우리가 크게 밀릴 게 없다는 판단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동방유조가 차갑게 맞받아치고 있었다.
적무평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비웃음을 흘렸다.
“교주께서는 여전하오. 아직까지 판단력이 흐린 걸 보니...”
“글쎄요...적벽관이 일망타진되고 비무로 지친 무림공적을 제외하면 현재 적대협을 도울 자가 누가 더 있겠습니까? 아무리 적대협이라 해도 이번만큼은 매우 벅차실 것입니다.”
“하하하, 새외에서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교주였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군. 그럼 한번 해봅시다.”
적무평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무형의 예기가 동방유조에게까지 강하게 미쳤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의 제자라는 자의 기세도 나름 고수의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적이 무신(武神) 적무평이라는 것을 알게 된 대막천궁 무사들은 난감하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적무평은 새외에서 경외의 대상이었고 흠모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어찌 감히 그에게 무기를 겨눌 수 있단 말인가.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것만 해도 영광스러운 일일 텐데 말이다.
그 분위기를 못 읽어낼 동방유조가 절대 아니었다.
솔직히 싸움이 벌어지면 죽음을 각오한 고전이 될 것이고, 정당하지 못하게 떼거리로 달려들어 그를 이겨봐야 새외에서 적월교의 명성은 땅에 곤두박질칠게 뻔했다.
막강한 중원과 자웅을 겨루려면 사실상 적무평의 힘은 필수 불가결했다. 훗날 새외가 준동이라도 한다면 단순히 그의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단합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백번 생각해봐도 동방유조는 완력이 아닌 대화로 푸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약왕문에서의 문제는...”
동방유조가 화제를 잠시 바꾸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됐소! 그때의 그 일은 절대로 잊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마시오. 내 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빚은 반드시 갚게 만들 것이오.”
적무평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매몰차게 응수하고 있었다.
이에 동방유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의중을 떠보았다.
”그 원흉인 제갈대협이 이미 죽었고 저희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니 이걸로 서로 넘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당시 제갈무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었지 않았소?”
그가 언급한 다른 사람은 다름 아닌 태휘사진의 손일극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제갈무를 도와 적무평을 협공했었고, 그의 제자들을 죽이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적대협, 그건 좀 곤란합니다. 손대협은 대막천궁이나 새외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아 굳이 교주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아니오. 어차피 그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오.”
적무평의 안광이 범처럼 날카롭게 번쩍였다.
난색을 내비친 동방유조는 그의 말대로 손일극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 예견했다.
적월교 교주로서 이 상황의 해결책이 난감했다. 하지만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 적무평일수밖에 없었다.
이런 냉정한 생각을 하던 동방유조가 차분하게 달래기에 나섰다.
“당시 저희로선 적대협이 나설 것이라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아마 알았더라면 함부로 적대협과 대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걸 믿으란 말이오?”
“사실입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약왕문은 도대체 왜 친 것이오?”
적무평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라는 어투로 묻자 동방유조가 담담히 대답했다.
“대천마교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원래 새외는 마교와 애증의 관계가 아니었소? 새외에서 번성하던 마교가 새외를 버리고 중원으로 가서 더 크게 발전했으니 말이오. 그래서 이참에 대천마교를 도와 내분을 돕고 마교의 힘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오? 하지만 대천마교는 마교보다 더 골치 아플 텐데 말이오.”
“허허허.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허운참모의 생각이오.”
동방유조는 그의 입에서 마교 참모 허운의 이름이 거론되자 순간 갑자기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마교인들이 대천마교의 추적을 피해 새외로 숨어들었다는 소식은 보고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그들은 무사히 잘 지내고 있겠지요?”
적무평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를 통해 마교의 소재를 파악해보려는 것이오? 적월교에서 징처(惩處)(배신자나 죄인들을 추적하여 처단하는 적월교 산하조직)를 보내는 순간 징처라는 그 이름이 무림에서 사라질 것 같소만..."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짧게나마 한 편 올립니다.
취미이긴 하지만 글 쓰는 게 만만치 않군요. 하하
그럼 주말 즐겁게 잘 보내시고 코로나 바이러스도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못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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