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일보전진(一步前進) <01>
노을이 붉게 타오르면서 서서히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무렵, 한 사내가 공허한 눈동자로 일렁이는 수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확실한 이름은 모르겠으나 인근 사람들은 이 강을 풍강이라고 부른다 했다.
위현룡은 바람에 떠밀려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풍강(風江).
이름 때문일까? 그것은 마치 거친 풍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가는 인생사를 대변해주는 듯 하였다.
[이제 어디로 가려 하느냐?]
약왕문에서의 비참하고도 격렬했던 전투를 뒤로하고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취하려는 것 같았으나 홍후인은 왠지 그 쓸쓸한 뒷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걸어 답답한 침묵을 깨고 있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무당산으로 갈까 합니다."
강 쪽을 향해 있던 위현룡이 미동도 않고 대답을 하였다.
[소림과 무당 중에 무당으로 마음을 정한 것이냐?]
"아무래도 태극혜검이 귀혼환령검과 같은 검법인지라 소림 달마신장보다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자니 참으로 담담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이미 무림 전역에 용모파기가 붙어 조만간 날고 기는 협객들이 영웅심리로 위현룡을 죽이고자 불나방처럼 날아들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피하기는커녕 나름 목적지까지 정해놓고 있다.
한때 자신도 무림공적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도피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의 칼날이 자신에게 겨눠질 때의 울분과 두려움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위현룡은 그런 점은 아예 배제하고 청성파에 대한 신념만을 신봉하면서 앞으로 나갈 생각만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간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다. 네 생각은 그리 좋아보지가 않는구나.]
잠시 이런저런 고심을 해보던 홍후인이 제동을 걸어왔다.
위현룡이 무당파로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무당파 최고 절기인 태극혜검을 거의 극성까지 익힌 괴짜노인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여 귀혼검법이 가지고 있는 내력소모의 약점을 보안해보려는 것이다.
허나 다른 때 같았으면 홍후인이 닦달하면서 위현룡을 떠밀었을 것이나 환령검법의 무서운 힘을 본 다음부터는 그따위 생각일랑 싹 사라진지 오래였다.
[한번 생각해보거라. 그 작자가 아무리 미치광이라 해도 무당파 최고 검법인 태극혜검의 깨달음을 네게 순순히 알려줄 리가 없지 않느냐? 더군다나 그렇게 몇 십 년간 안에 틀어박혀 폐관수련을 한 것들은 앞뒤가 꽉 막히고 편협하여 가까이하기가 참으로 어렵단 말이지...]
"그래도 저나 선배님께 다른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대안이 없긴 왜 없어!! 네가 약간 독한 마음만 먹고 환령검법에 온 정신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간단한 것 아니겠느냐?]
그 말에 위현룡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조용하나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환령검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슨 소리냐! 어째서 연마하지 않겠다는 게야?]
"아시지 않습니까? 환령검법은 사용자의 이성을 마비시키면서까지 잔악무도한 살인을 유도하는 검법입니다. 그에 비해 귀혼검법은 위력은 떨어지나 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검법이지요."
[그래서? 귀혼검법의 약점을 보안해서 끝까지 귀혼검법 하나로 버텨보겠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홍후인은 위현룡이 환령검법으로 제갈무를 죽인 다음부터 상당히 괴로워했던 것과 나중에라도 환령검법에 홀려 어떤 부정한 살인을 할까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하밀성에서 나온 무공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온갖 살겁(殺劫)이 일어날 것이 자명한데 위현룡 혼자만 소극적이 되어 피하면서 살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 하지 않았는가.
아직까지도 무림정복에 미련이 조금 남아있었던 홍후인은 위현룡이 장차 만인(萬人)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단중의 말을 잊었느냐? 대천마교에 의해 벌써 지하밀성 무공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단 말이다. 마음을 돌리거라! 환령검법 아니면 방도가 없다!]
"선배님 말씀대로 환령검법의 위력이 귀혼검법보다 월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귀혼검법은 환령검법에 없는 현란한 검초의 조합이 있습니다. 때문에 귀혼검법의 내력소모만 없앨 수 있다면...능히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과연 그럴까? 너는 제갈무와의 싸움에서 그의 무공을 귀혼검법으로 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내력의 문제가 아니라 위력이 현저히 낮았던 탓이지. 현란한 검초의 조합? 착각하지 말거라. 무학은 힘이다! 개인의 힘, 그리고 무공의 힘.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자야말로 진정한 고수란 말이다! 약왕문에서 무천동을 보거라. 그 녀석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력(神力)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무기인 도끼도 힘을 바탕으로 한 무기였다. 네가 그 놈한테 밀렸었지만 그것이 과연 귀혼내력이 모자라서였을까? 내가 보기엔 극성의 귀혼검법 가지고도 그 녀석을 이기긴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 말은 위현룡에게 충격을 주어 환령검법을 익히게 하려는 속셈이 아닌 홍후인의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위현룡이 귀혼환령검법을 연마한다지만 무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식견은 단연 홍후인이 몇 수는 위였으므로 이런 정확한 진단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위현룡도 그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환령검법을 익히고 난 후에 벌어질 참담한 결과를 상상해보자니 도저히 그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난 네가 환령검법으로 싸웠을 때를 똑똑히 보았다. 그 위력을 말이다. 넌 환령검법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
그가 마지막 결론을 최후의 통첩처럼 내뱉었으나 위현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후인은 답답하기 그지없어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쳤으나 한번 마음먹은 그의 고집을 꺾을 재간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저런 똥 고집하고는...저럴 바엔 애당초 검을 들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혀를 한번 차던 홍후인은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수면이 바로 오늘 시작되는 듯 하였다.
[현룡아...또 잠이 오는구나....나중에 보자...]
위현룡은 근래 들어 홍후인의 수면 일시나 기간이 매우 불규칙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벌써 수면에 빠져야했기 때문이었다.
늘상 들려오던 목소리가 일거에 사라져버리자 주위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소리 속에서 위현룡은 왠지 공허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며칠 후면 선배님께서 깨어나시겠지...)
혹시나 그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에 위현룡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뇌까리고 있었다.
주위의 풍광이 산악지대를 벗어나면서 어느 덧 마을 쪽으로 향해있을 것만 같은 작은 길이 나타났다.
그 곳에 가만히 서서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위현룡은 발길을 무당산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돌려 잡았다.
반나절이 지나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번화한 큰 마을이었다.
과거 개방에 몸담고 있을 시, 의형인 채겸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문주께서는 개방 방주가 되시면서 개방을 완전히 다른 방파로 탈바꿈 시키셨다네. 그 중 하나가 길거리를 배회하던 개방형제들에게 동냥대신 상재(商材)를 심어준 것이었지. 그 결과 웬만한 마을의 여각이나 점포들 중에는 금성문 소유의 것이 굉장히 많다네.-
이 말을 토대로 위현룡은 마을에 있는 여각과 점포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개방 소유의 것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자 과연 채겸의 말대로 마을에서 가장 큰 여각이 개방의 소유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에서부터 누군가 정중히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깨끗한 방과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있으니 내실로 드시지요."
그러나 위현룡은 내실로 향하는 대신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 여각을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네?"
무슨 소리인지 언뜻 못 알아들은 그가 멍한 눈을 끔뻑이다가 반문하였다
"무슨 일로 진대인을 만나시려는 것 인지요? 혹 기별을 넣고 오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 분을 만나 긴히 청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위현룡의 말에 그 사람은 뭔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위현룡을 쭉 훑어보았다.
그런데 옷차림새가 중원의 것과는 사뭇 다른지라 혹여 개방에서 상당히 높은 사람인가 싶어 허겁지겁 진대인이라는 사람부터 부르러 달려갔다.
잠시 후 진대인인 듯 한 사람이 놀란 얼굴로 내실 어딘가에서 황급히 뛰쳐나왔다.
"어느 분이시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한쪽에 서 있는 위현룡에게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가 알기론 개방이나 금성문에서 높은 서열은 허리춤에 황금으로 만든 패를 길게 늘어트린다고 한다.
근데 이 사람은 황금 패는커녕 아무리 훑어보아도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평범한 무림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혹...개방에서 오셨습니까?"
혹시나 몰라 조심스럽게 물어봤으나 위현룡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한줄기 경멸의 빛이 진대인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
기실 이런 작자들이 뻗대면서 호화스런 여각으로 들어오는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자신이 무슨 명문 정파 출신이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면서 여비를 뜯으러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사 뼈가 굵은 진대인은 그리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볼일 없으니 당장 나가시오."
위현룡은 그의 반응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으나 들어온 목적이 있었으므로 물러서지 않고 정중히 부탁하였다.
"저는 한때 개방 장로직을 수행하던 사람인데 혹시 이 여각에 채겸이라는 분과 연락할 방법이 있는지요?"
"뭐요? 당신이 개방 장로였다고?"
어이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개방 장로를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채겸마저 들먹이고 있었다.
"감히 채장로님을 입에 올리면서 개방을 상대로 사기를 치겠다는 것인가!!"
"채장로...."
개방을 빠져 나올 당시 금성문 문주 예강이 채겸을 중히 쓰려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형님이 정말로 개방 장로에 오르신 모양이구나....)
"뭐 하는 것이오! 어서 썩 나가지 않고!!"
진대인은 위현룡이 아직까지도 어물쩡거리고 있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같은 무림인인지라 좋게 넘어가려 햇것만 이건 마치 개방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가 아닌가.
"여봐라!!"
그의 한번 외침에 사방팔방 병장기를 들은 무사들이 수 십 여명이나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개방출신의 무사들인 것 같았다.
살벌한 공기와 함께 위현룡은 그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버렸다.
"마지막 권유다! 어서 꺼지지 못하겠는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이르자 위현룡은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중히 읍을 하고는 물러가겠다고 응답하였다.
"진작 그럴 일이지...."
막 나가려는 순간 몇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오던 한 사람과 마주쳤다.
상대는 멈칫하더니 이내 반색을 띄우며 대뜸 이렇게 목청을 높였다.
"이게 누구시오!! 위장로 아니시오!!"
누군가 했더니 개방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팽서렴이란 장로였다.
(나를 장로라 칭하는 것인가....)
개방과 연을 끊고 나오다시피 했는데도 불구하고 장로로 부른다는 것은 방주 예강이 자신의 직책을 없애지 않고 계속 유지시켜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철석같이 믿고 말이다.
아무튼 난감하던 차에 위현룡은 그를 만나게 되어서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이거 너무 반갑소이다."
위현룡이 먼저 포권을 취하자 팽서렴도 얼른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한편 뒤쪽에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던 진대인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면서 하늘이 다 노래졌다.
개방에서 방주 다음에 높은 직책이 장로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 그 중 한 명인 위현룡을 보란 듯이 문전 박대했으니 추후에 자신의 안위가 어찌 될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난 이제 죽었다...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때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를 향해 팽서렴이 추상같은 호통을 쳐댔다.
"네 놈이 감히 이 분께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더냐!!"
"그...그게..."
그러자 위현룡이 얼른 끼어 들면서 변호하듯 말했다.
"이 분은 저를 친절히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하지 마십시오."
뜻밖의 소리에 진대인은 얼굴에 고마운 빛을 잔뜩 띄우며 위현룡을 쳐다보았다.
팽서렴은 주위에 무기를 꺼내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개방 무사들을 보면서 위현룡이 그를 감싸 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위현룡의 위신을 생각해서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나저나 방주께서 위장로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데 이제 개방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만 이 여각이 개방소유라 하여...오래 전 개방에 놓고 왔던 물건을 찾으러 왔을 따름입니다."
"물건이라 하심은...."
팽서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가운데 위현룡이 대답을 하였다.
"방주께서 하사하신 은자 한 상자를 놓고 왔기에 그것을 찾으러왔습니다."
"은자...말씀이십니까?"
팽서렴은 자신의 귀를 크게 의심하는 동시에 인상마저 찡그렸다.
비록 긴 시간 만나 교감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위현룡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내려놓았던 긍정적인 평가가 단번에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씁쓸한 헛웃음을 지어보던 그는 얼른 미소를 띄우며 마치 옹호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하긴 인간에게 있어서 재물이라는 것은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지요. 위장로도 무림을 활보하시려면 돈이라는 게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약간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하지만 위현룡은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요청을 하였다.
"그 은자를 여기서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상 이런 식의 요청은 장사꾼인 그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씨도 안 먹힐 헛소리였다.
그러나 평서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원스럽게 승낙해주었다.
"물론입니다. 은자 한 상자뿐이겠습니까? 위장로가 원하시는 만큼의 은자를 가져가십시오."
한번 손짓에 대략 열 상자도 넘는 은자가 눈앞에 산처럼 쌓여지고 있었다.
위현룡은 그것들 중 가장 작은 한 상자만 골라 등에 짊어졌다.
"호의는 감사하나 방주께 한 상자만 받았으니 그것만 가져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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