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심천패왕(深川覇王) <10>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탁자위에 놓인 성운비가 건네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는 열다섯 개의 비책들이 들어있다. 허나 성운비가 말했었다. 상황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비책은 절반도 안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선택권은 모두 적벽관에 일임하였다. 이참에 적벽관의 능력을 재차 확인해보겠다는 뜻일까? 아무튼 첫 번째 계책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제는 두 번째 계책을 골라 써야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천보군대협이 대막천궁에 우리들의 행적을 알리고 있겠지. 그 전에 그는 우리가 궁륭성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후, 가까운 대막천궁 지부에 급히 알려 우리들을 포위하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일차적으로 발을 묶어두라 명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지모가 출중한 그로서는 당연한 수순일 것이고······.문제는 며칠 뒤에 도착하게 될 대막천궁의 본대다.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대막천궁 본대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계책을 활용해야한다.)
그녀는 지도를 펼쳐서 꼼꼼히 지형을 살폈다. 대막천궁이 이동할 경로를 포함한 공격로와 도주로 등을 따져보는 것이었다.
(분명히 대막천궁 본대는 지부에서 먼저 진군해오는 무사대와 같은 경로를 택할 것이다.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일 테니까... 그렇다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던 매요비는 이내 결단을 내린 듯 자신을 보좌하고 있는 한목풍을 불렀다.
“한대협께서는 위대협, 채대협과 함께 이쪽으로 진격해오고 있는 대막천궁의 무사대를 선제기습공격 하십시오.”
“저희가 먼저 치자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매요비는 한목풍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궁륭성에 적벽관 무사들은 겨우 삼백명정도이기 때문에 선제공격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성을 방비해야하므로 공격에 넣을 수 있는 수는 겨우 백여 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목풍이 난색을 보이자 매요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 말은 모든 무사를 선제공격에 넣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네? 그럼 궁륭성은 누가 지킨단 말씀입니까?”
“궁륭성은 대막천궁 무사대를 격파하고 돌아오는 아군이 다시 지키겠지요. 그 전까지는 그 어떤 세력도 궁륭성을 공격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목풍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조막조와 한적수가 호시탐탐 궁륭성을 넘보고 있습니다. 30리 밖이면 도착하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사들을 이끌고 성 밖을 나서는 즉시 조막조에게 보고될 것입니다.”
“그 점은 이미 고려해두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속히 시행해주세요.”
노파심에 언급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오랜 세월 적벽관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총명함을 몸소 체험한 그였다.
“알겠습니다.”
자신의 걱정이 한낱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그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명을 받들었다.
** **
그날 밤 조막조는 수하들에게 희한한 보고를 받았다. 어둠을 틈타 약 수백여 필의 말이 궁륭성을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적벽관이 보호막과도 같은 궁륭성을 버렸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야반도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로 향해 갔단 말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자 옆에서 한적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설마 우리의 뒤를 치려는 속셈은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것이오. 우리가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도 잘 알 텐데 말을 타고 요란하게 떠날 리가 없지 않소? 분명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인데... 설마...”
그 순간 조막조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엇인가가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저것들이 대막천궁을 선제공격하겠다는 것인가!!!!!!”
대막천궁과 궁륭성 패거리들은 누가보아도 우세와 열세가 명확히 나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면 밟힐 놈들이 오히려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정말로 궁지에 몰린 쥐이던가 아니면 대막천궁과 대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조막조는 날카로운 눈으로 저 멀리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궁륭성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자신의 일생 숙원을 꿰뚫어보았다면 이렇게 어설픈 준비를 하고 대막천궁과 일전을 불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벽관이니까.
(분명 엄청난 전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상대로 하여금 얕보는 마음을 갖게 하고 그 틈을 노려 단번에 와해시키겠다는 전술이렷다? 누가 속을 줄 아느냐!)
지금에 이르러 대막천궁과 적벽관 간의 싸움을 관망하기로 결정한 것이 더더욱 잘한 일이었다고 자평하던 조막조는 당장 명을 내렸다.
“여봐라! 무사들을 10리 밖으로 더 후퇴시키도록 하라!”
“아...아니 더 후퇴한단 말입니까?”
한적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조막조는 껄껄대며 설명하였다.
“생각해보시오. 만일 우리가 적벽관을 얕보고 공격하여 들어갔다가 함정에 빠진다면 어떻게 되겠소? 성 밖으로 나갔던 적벽관 무사들이 되돌아와 우리의 퇴로를 막고 고립무원이 된다면 우린 그냥 끝장날 것이오. 안 그렇소?”
“아!”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차적으로 파놓은 덫에 굳이 우리들이 들어갈 필요는 없는 것이오. 기다려 보십시다. 저것들이 대막천궁과 일전을 벌이다가 피해가 더 커졌을 때 들이쳐도 늦지 않을 것이니...”
듣고 보니 그런지라 한적수는 새삼 그의 심계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조대인은 생각이 깊소이다.”
“하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
** **
희미한 달빛을 의지하며 어둠속을 뚫고 달린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 그리고 말들의 거친 숨소리가 피부로 전해져올 무렵 앞서가던 자가 갑자기 외쳤다.
“조금 쉬어가겠습니다!”
고삐를 당긴 한목풍 옆으로 위현룡과 채겸이 나란히 섰다.
“조금 있으면 먼동이 터 올 텐데 참으로 오래도 달렸소. 자시(밤11시-새벽 1시)에 출발하여 쉬지 않고 밤새도록 달렸으니......”
채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위현룡이 한목풍에게 물었다.
“이제 곧 그들과 조우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한 시진 안에 대막천궁 무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도에 나타나있는 가는 선을 따라 한목풍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정보에 의하면 이 길로 2군단의 대막천궁 무사들이 진군해온다고 합니다. 두 군단 사이는 5리의 거리를 두고 있지요. 일단 우리들은 처음에 마주치는 군단부터 격파한 다음에 빠른 속도로 두 번째 군단을 와해시켜야 할 것입니다.”
“두 군단으로 나눠서 온다는 것은 기습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 아니오? 설마 우리의 계략을 미리 염두에 둔 것은 아니겠소?”
채겸의 의견에 한목풍은 즉각 대답을 하였다.
“을지에 위치한 대막천궁 지부의 수장은 황수창 이라는 자입니다. 무용은 그리 대단하지 않으나 지모가 출중한 자이지요.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정석대로 무사들을 통솔해오는 것 뿐 특별히 우리들을 대비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들이 궁륭성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방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그렇소?”
“네. 더욱이 우리들은 모두 대막천궁 무사들과 같은 제복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음..거참 괜찮은 계략이오. 그들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다고 했잖소. 허나 이 정도 기습이라면 이 인원가지고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맨 처음 오는 군단에는 황수창의 부장인 강백록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고 맨 뒤의 군단에 황수창이 있습니다. 두 군단 사이가 가깝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강백록을 일시에 처리하지 못한다면 필시 낌새를 알아챈 황수창이 두 가지 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바로 삼십육계와 반격이지요. 그나마 반격을 해온다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가 몸을 빼내 뒤따라 올 대막천궁 본대에 알린다면 우린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우리의 이번 목표는 이기는 것이 아닌 대막천궁 본대에 부담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매우 신속하게 움직여야겠군.”
“솔직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급적 적들을 죽이지 않은 채 승리를 쟁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래도 그나마 두 분께서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하하하, 나야 뭐 그저 그렇겠지만 여기 동생이 있으니 아마도 손쉬울 것이오.”
채겸이 히쭉 웃으면서 위현룡을 추켜세우자 위현룡은 약간 낯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은 중대한 싸움을 앞에 두고 농이 너무 심하십니다.”
“뭐 그렇다는 거지! 적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우리들이야 김이 빠지겠지만 동생은 힘이 날 게 아닌가. 안 그런가? 하하하.”
아무튼 입씨름으로는 못 당해낼 위인이 아니던가. 문득 위현룡은 채겸이 마교의 백운과 죽이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자 이제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너무 지체해도 계획이 다 틀어질 것입니다.”
어스름이 물러나고 뿌옇게 날이 밝아 왔다.
전력으로 말을 몰고 있는 위현룡 일행의 얼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한편 대막천궁 지부에서 출발하여 선발대를 인솔하고 있던 강백록은 피곤이 덜 가신 얼굴로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오랜만에 야영을 했더니 온 몸이 쑤시는구먼. 갑자기 이렇게 출전하라고 하면 어쩌자는 건지...”
적벽관이 궁륭성에 숨어있을 터이니 어서 가서 움직이지 못하게 포위만 하고 기다리라는 천보군의 급명을 받은 그들이었다. 허나 준비도 제대로 못한 채 부랴부랴 무사들을 독촉하여 강행군을 했으니 상태가 온전할 리 만부하였다. 식량은 소지하고 있는 건량 조금이 전부였고 찬 이슬 때문에 새우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강백록은 품속에서 말라비틀어진 육포를 꺼내 입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곧 본대가 합류하니 그때 가서 푹 쉴 수 있겠지. 적들이야 몇 명 안 된다는데 설마 우리까지 무리하게 공격에 집어넣지는 않을 거야....”
천하태평한 소리가 절로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하얀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수많은 말들이 질주해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안광에 힘을 주어 식별을 해보니 대막천궁 무사들인 것 같았다.
“이상하군. 아무런 연락도 못 받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오는 무사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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