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암중암투(暗中暗鬪) <01>
장마로 인해 어두웠던 잿빛하늘은 실로 오랜만에 밝은 햇살과 함께 활짝 열렸다.
월천교의 성지나 다름없는 궁륭성은 새로운 시대에 부흥하여 그 웅장한 자태를 맘껏 뽐냈다.
이젠 더 이상 죽어 움츠려있던 월천교가 아닌 새외에서 명성을 쌓아올릴 수 있는 당당한 교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장로 손복서는 월천교의 부활을 널리 알리고 새로운 교도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세월이 너무 흐른 탓일까. 과거의 월천교를 숭배했던 교도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새로 탄생한 문파에 대한 호기심과 무소불위의 적월교와 담판을 지었다는 소문에 몰려든 무림인들이 들락날락하는 촌극만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지역주민들에게는 월천교가 곧 팔황문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고착되고 있었다.
이는 단독으로 월천교를 융성시키려는 손복서에게 크나큰 악재로 다가왔다.
허울만 좋은 사상누각은 피해야만 했다.
그는 고심 끝에 월천교에 대한 명성을 세상에 알리고 이를 통해 믿음과 충성을 더욱 강화해야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급히 수하를 불렀다.
“교주께서는 어디 가셨느냐?”
“아직 팔황문에 계십니다.”
손복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월천교 교주라는 자가 성지(聖地)인 궁륭성은 내팽개치고 계속해서 팔황문에서만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팔황문의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는데 반해 월천교는 중간에서 어중간한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리 팔황문을 같이 맡는데 동의를 해줬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열불이 난 그는 단번에 팔황문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예전에 봤던 그 팔황문이 몇 주 만에 크게 바뀐데 깜짝 놀랐다.
허름한 건물은 보수작업과 증축으로 인해 더욱 거대해졌고 식솔들도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손복서는 원래 팔황문의 재정이 탄탄한 것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 지역 갑부인 한적수가 기여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적월교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뒤로 적벽관과 팔황문에 충성을 다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 이면엔 팔황문을 등에 업고 지역 상권을 모조리 독점할 수 있게 된 이해관계가 포함됐을 수도 있다.
심사가 뒤틀린 손복서는 찬바람을 내면서 총총걸음으로 교주 채겸을 찾았다.
“지금 문주께서는 만나실 수 없으십니다.”
“뭐라?”
“적벽관 수장과 중요한 의논을 하고 있으니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넌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난 월천교 장로니라!”
대차게 호통을 쳐봤지만 지키는 무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방문 앞에서 제지를 당하게 된 손복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적벽관 수장 매요비가 온 모양이었다. 근래 적벽관도 팔황문에 달라붙어 기세등등하게 세력을 불리고 정비하는 모양새였다.
월천교 빼고는 모두가 괄목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초라해지는 기분에 더욱 화가 난 손복서는 말리는 무사를 뿌리치며 채겸의 서재로 밀고 들어갔다.
내실 문을 벌컥 열리고 안에는 예상대로 채겸과 매요비가 인상을 찡그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못 들은 것이오?”
채겸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당연 들었습니다. 하지만 월천교에 중대한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교주와의 대면을 청하게 된 것이옵니다.”
“일단 여기 앉으시지요.”
매요비가 미소를 지으며 손복서에게 정중히 착석을 권했다.
얄미운 듯 그녀를 한번 노려본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시오. 손장로.”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왠지 기분이 나빴지만 손복서는 차분한 어조로 대화를 시작했다.
“갑자기 월천교로 들어오는 교도들의 수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그렇소? 그래서 어쩌라는 말씀이시오?”
월천교 교주가 하는 말치곤 너무나도 무정한 소리였기에 손복서는 기가 다 막혔다.
하지만 꾹 참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대규모 집회를 준비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새외는 물론 중원에 까지 월천교의 재림을 알리고 충실한 교도들을 대거 받아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음....”
채겸이 신중히 숙고하는 와중에 매요비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제 생각으로는 아직 시기상조일 것입니다.”
“뭐요? 시기상조라니? 지금이야말로 적기가 아니오?”
그녀가 초를 치려한다는 것을 직감한 손복서가 노기를 드러내며 반발하였다.
그러자 매요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적월교와 협정을 맺었다지만 그 안에는 월천교나 팔황문의 자중도 포함된 것입니다. 지금은 불안정한 동거상황이니만큼 적월교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옵니다.”
“자제라니? 협정에 의해 우리의 세력을 인정한 마당에 뭐가 무서워서 소극적으로 문파를 운영한단 말인가!”
“손장로께서 착각을 크게 하시고 계시는군요. 팔황문과는 달리 월천교는 과거 적월교에 의해 발본색원이 된 교파입니다. 그런 월천교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상황이 좋게 보일리가 없지요.”
“뭐라! 내가 지금 나댄다고 빈정대는 것인가!!”
탁자를 쾅 치면서 벌떡 일어선 손복서의 얼굴은 분노로 벌게져 있었다.
매요비는 그 앞에 찻잔을 내밀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노여움을 거두시고 제 말을 들어보시지요. 당분간 월천교는 몸을 낮추셔야합니다. 적월교는 새외에 어떤 분열이라도 막으려 병적인 무력지배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괜히 그들에게 침탈당할 빌미를 보여 자멸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매소저의 뜻은 알겠소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겨우 명맥을 찾은 월천교는 사장되고 말 것이오. 하여 그것을 절대로 좌시할 수가 없는 것이오.”
교주 채겸이 보는 앞에서 절대로 밀리면 안 된다는 입장인 손복서는 강경하게 적벽관의 권고를 뿌리쳤다.
잠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채겸은 결론적으로 매요비의 말을 쫓아 집회를 불허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손복서는 그 모습에 격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월천교 내부의 중대사에 적벽관 따위의 조언을 듣고 따르시다니요!!”
“손장로, 누구의 조언을 듣던 간에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아니...그 무슨...”
열 받은 손복서가 뭐라 항변하려는 데 매요비가 얼른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시기가 엄중하긴 하나 손장로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면 어떨까요?”
“경청하겠소.”
손복서가 뭔가 싶어 성정을 잠시 누그러트리자 매요비가 입을 열었다.
“월천교가 집회를 열돼 그 규모를 어느 정도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축소를 하란 말이오?”
“이제 막 일어서려는 월천교입니다. 초반부터 대규모 집회보다는 대략 천여 명 정도의 집회로 시작하여 차차 세를 불려가는 것이 어떨지요? 그 정도 규모면 적월교도 딱히 반발할 명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손복서는 ‘이것들 봐라?‘ 하는 생각으로 채겸과 매요비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절충안이었지만 일단 자신을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임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만 명은 모여야 할 집회에 달랑 천 명을 모이게 한단 말인가. 거기다가 월천교는 자금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몇 차례나 계속 열만한 사정도 못 되었다.
“나도 소규모 집회에는 찬동하겠소. 조심스런 시국이니 손장로께서 감안하고 일을 처리해주서야 할 것이오.”
매요비의 눈짓을 받은 채겸이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자 손복서는 뭐라 반박할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미 저들은 찰떡궁합이 되어서 월천교의 몰락을 신나게 부채질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잠시 냉랭한 침묵을 유지한 손복서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물러나왔다.
그의 심중에는 어떤 모종의 결단이 굳어진 상태였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채겸이 매요비에게 급히 물었다.
“괜찮을 것 같소?”
“어차피 월천교와 팔황문은 공존하기 어렵지요. 서로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인만큼 이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정해진 순리일 것입니다.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팔황문과 적벽관은 더욱 신중하게 월천교를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손복서는 자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은향을 만나게 되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무슨 수상한 기색이라도 있었느냐?”
그녀는 채겸을 감시하며 팔황문과 적벽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리라는 밀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게...”
은향은 손복서에게 가까이 다가간 채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적벽관에서 월천교 교도들을 회유하여 팔황문 쪽으로 모이게 하는 모양입니다.”
“뭐라고!”
그 말을 들은 손복서는 그제야 월천교 교도들이 크게 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간에 적벽관이 끼어들어 팔황문과 함께 월천교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것은 적벽관이 노골적으로 월천교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적벽관부터 빨리 쳐내지 않으면 월천교에 미래는 요원할 것이다.”
적벽관이 존재하는 한 교세확장은커녕 교주인 채겸을 손에 쥐고 흔들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저들을 이용하는 만큼 저들도 자신을 충분히 이용했다.
이젠 서로 간에 세력을 보존하는 목적을 완성했으니 더 이상의 밀월관계는 퇴색된 지 오래였다.
“소녀도 적벽관에서 주시하는 터라 행동에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자주 정보를 보내지 못하여도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은향의 고충도 십분 이해가 갔다. 대놓고 첩자노릇인지라 팔황문 내에서 눈치가 보이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네 수하들을 활용하여라. 적벽관의 눈이 있어서 너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터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
팔황문 문주 채겸과의 독대에서 돌아온 매요비는 때마침 들어온 한목풍에게 물었다.
“손장로는 돌아갔나요?”
“네. 그러나 심기가 매우 불편해보이더군요.”
“잘 주시해야 합니다.”
“수하들을 여기저기 보내 손장로는 물론 월천교의 전반적인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도록 명해놓았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인 매요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임시방편으로 월천교의 힘을 빌렸다지만 그들의 교리는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는 것을 경계합니다. 오직 월천교만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이지요. 어차피 서로 같이 동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한, 손장로는 월천교를 위해 무리수를 두려 할 것입니다.”
한목풍은 무리수라는 단어에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채문주를 암살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고 보니 채문주 옆에 시중을 드는 그 은향이라는 여인 말입니다. 그녀는 손장로의 심복인데 어째서 채문주는 그녀를 곁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엇인지요?”
“그녀는 지금 채문주를 감시해야하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녀를 감시하기 쉽다는 말도 되지요. 그녀는 손장로의 눈과 귀나 다름없으니 그녀의 언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월천교의 동향을 살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매요비의 설명에 한목풍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며 물었다.
“하지만 암살이라는 측면에서 채문주는 오히려 위험한 지경에 놓여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손장로가 가지고 있는 지금의 세력으로는 팔황문이나 적벽관을 정면으로 치지 못하니 분명 마지막 선택지는 암살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향이 채문주를 암살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채문주가 죽게 되면 적월교가 나설 것이고 세력이 약한 월천교는 곧바로 사라질 테니까요.”
“그렇다면...그 암살은 설마...”
놀란 눈을 치켜뜬 한목풍과는 달리 매요비는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우선 손장로가 노리는 것은 적벽관일 것입니다. 저와 한대협을 암살하여 적벽관을 단번에 와해시키려하겠지요. 적벽관의 도움이 없는 팔황문의 발전은 더디게 진행될 것이고, 그 틈에서 손장로는 채문주를 어떤 방법으로든 꽉 틀어쥐어 월천교의 세를 확장하려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채문주와 손장로의 사이가 벌어질 텐데 적월교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과연 월천교에 도움이 되는 상황이겠습니까?”
“적월교는 월천교와 팔황문 사이의 불화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중지란을 열렬히 반기겠지요.”
“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긴 합니다.”
“손장로는 간교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근시안적인 암살을 택한다면 우리들은 손장로가 계획하는 궁극적인 노림수에 대해서 파악해야하고 걱정해야하는 것입니다.”
“방금 적월교가 내분에 대해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초반에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내분이 끝나고 월천교의 승리가 되는 순간 적월교는 미련없이 월천교를 공격하여 화의 근원을 완전히 지우려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손장로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확실한 패를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매요비는 번민에 싸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숙고해 봐도 추측이 안 되네요. 그러니 한대협은 더욱 더 손장로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해 주셔야합니다. 또한 은향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주시하라 일러두세요. 채문주에게 암수를 쓴다면 은향을 통하는 길 외에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위대협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위현룡은 채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팔황문이 자리 잡을 때까지만 새외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적벽관은 팔황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용한 숲 속에 임시거처를 마련하여 주었다.
“위대협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무공만 하루 종일 연마 중이신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매요비는 특별히 당부를 남겼다.
“그렇군요. 저번 무천동대협과의 비무가 동기부여로 작용한 것일까요? 아무튼 중요한 수련일터이니 가급적 주위에 수하들이 지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무학을 수련할 때 누군가 지척거리에서 어른거리면 번민이 생겨서 뜻을 이루지 못하거나 최악에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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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새로운 소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그러나 독자님들이 보시기에 개연성이나 기타 문제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글 쓰는데 참고가 될 듯 합니다.
그럼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 다음 연재 때 뵙겠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 경제 전반적으로 위축되어 있지만 모두 힘 내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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