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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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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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1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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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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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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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글자
19쪽

4. 한계 (2)

DUMMY

전생에서나 지금이나 책이란 것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로베른 왕립도서관의 웅장함이나 장서량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문드문 보이는 사서를 제외하고는 사람은 전무했고 오직 오래된 먼지 냄새만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었다.

텅 빈 도서관을 가로질러 사서에게 하이스쿨 학생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주니 사서는 열람증을 써 주며 약간 놀라워했다. 검사 지망생이 도서관을 찾는 일이 퍽이나 신기했던 것 같다.

도서관의 규모도 규모지만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전체적으로 잘 정리 되어 있어 무공에 대한 연구 자료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책장 한 칸의 책을 모조리 빼서 그 근처에 마련된 열람석에 앉아 자료를 탐독했다. 그러나 고작 멜븐의 기억으로 말을 배우고 미들스쿨을 대충 다닌 내게 연구 자료는 너무 어려웠다. 집중력 이전에 도저히 읽을 수가 없군. 궁여지책으로 천의결까지 운용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천의결이 만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인지 원.


난무하는 전문용어에 질려버린 나는 금세 책을 덮고야 말았다. 무공비급을 봐도 이것보다는 쉽겠군. 그래도 혹시 어딘가에 조금 쉬운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해서 나는 계속해서 서가를 뒤적였다. 그러다 나는 우연히 서가 옆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와 마주쳤다. 그 사내는 놀랍게도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비룡검객?”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서가 앞에 서서 책을 읽던 비룡검객이 내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실수다. 이 조용한 곳에서 혼잣말을 내뱉다니. 비룡검객이 약간 놀란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당신은 내 별명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은 오리엔트와 관련이 있습니까?”어색한 말투였지만 끊김 하나 없는, 나름대로 유창한 서역 말이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림에서의 관습대로 포권을 취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하이스쿨에 재학 중인 도군입니다. 부친께서는 오리엔트 분이셨고 모친께서 이곳 분이시지요. 저번에 폰테일의 영애와 연이 닿아 멀리서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대협의 검을 알아봤습니다.”

“제 검이 무엇입니까?”

“검집에 새겨진 푸른 비룡은 바로 비룜검파의 상징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곳이라 기억에 남아 이렇게 대협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원체 남을 칭찬하지 않는 분이라 이 또한 역시 거짓말이었다. 만약 비룡검객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검을 한번 겨룬 다음 단순히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대신 냉정하게 검을 분석하고 후일을 기약하겠지. 그 다음에는 충고를 받아들여 더욱 강해진 검객과 다시 겨루고. 그것이 아버지가 강한 검객을 대하는 태도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명성은 보잘것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무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아버지의 성함을 들을 수 있습니까?”

비룡검객은 약간 긴장하기라도 한 듯 조금 빠른 어투로 서역의 말을 구사한다. 얼굴 한구석에 난처한 기색이 엿보이는 것이, 조금 복잡한 말은 그에게도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비룡검객의 행동거지에서는 명문정파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온다. 그 부조화가 조금 우습게 느껴져서 나는 간신히 실소를 참아가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아버지께서는 은거하신 몸이라 절대 이름을 밝히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내가 천의검문의 도군이라는 사실은 들키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전생에서도 별다른 인연이 없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비룡검을 가지고 있군. 무슨 연유로 검을 잃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내가 검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한다면 비룡검객은 비룡검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검집에 새겨진 비룡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데 비룡검객이 책을 한 권 더 뽑아들다가 문득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검을 수련하는 학생인데 책을 좋아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저 부족한 공부를 보완하려고 온 겁니다. 미처 가전무공을 완전히 배우지 못해서요.”

비룡검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신은 대단하군요. 혼자서 물려받은 검술을 익히다니요.”

혼자서 하는 통에 영 엉망이라는 걸 알 리 없지. 하지만 굳이 사족을 붙일 필요야 없어서 나는 겸양의 말을 꺼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건 그렇고 말투가 영 적응이 안 된다. 차라리 애초에 무림의 말을 쓸 걸 그랬나? 그랬다면 지금처럼 억지로 평정을 가장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하지만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림의 말을 쓰는 건 지극히 수상해 보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그 생각을 그냥 접어버렸다.


그 다음으로는 별다른 대화 없이 비룡검객은 그대로 책을 뒤적이고 나는 나대로 필요한 자료를 찾았다. 비룡검객도 무공에 대한 연구자료를 찾는 모양인지 나와 같은 서가에 머무르며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나는 내가 읽지 못하고 내버려두었던 책이 생각났다. 비룡검객은 어색한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능숙하게 책을 훑어보고 있다. 혹시 말하는 건 어설퍼도 이곳의 언어를 읽는 건 능숙한 게 아닐까? 나는 혹시나 해서 운을 띄워 보았다.

“저, 대협. 혹시 여기서 보법. 여기서는 스텝이라 부르는 것을 연구한 책을 본 적 있으신가요?”

비룡검객은 약간 고민하면서 스텝과 비슷한 발음의 말들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은 성공이다. 나는 조금 무례할 수도 있는 부탁을 하기로 했다. 비룡검객이 결코 방약무인한 성정이 아니며 무림의 피가 섞인 나를 좋게 보고 있을 거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시도다.

“그럼 죄송하지만 그 책의 제목을 말씀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어렵지 않은 부탁입니다. 저는 말하는 건 서툴러도 읽는 건 잘 합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비룡검객은 서슴없이 몇 권의 책을 뽑아들고 내게 건네주었다. 아쉽게도 두께가 상당히 얇아 내게 유용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시간을 절약한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

그런 의미에서 비룡검객에게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니 비룡검객이 여전히 어색한 말투로 내일도 도서관에 올 수 있다면 책을 해석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타지에서 혼혈이나마나 무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접한 것이 퍽이나 기쁜 모양이다. 이것도 기연이라면 기연이겠지.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세상사가 다 그렇듯 쉬운 일은 없는 법인지 나는 비룡검객의 도움을 받고도 별다른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곳의 무인들은 무공을 보고도 아무런 호기심도 안 생겼나? 자료들은 죄다 마법이란 것을 기본으로 무공을 논한 것들이 전부였다.

“기껏 건진 거라고는 4대 원소에 맞춰서 마나를 분류한 걸 알게 된 것 뿐인가?”

알고 보니 마나를 지수화풍으로 분류한 것은 사실 마법사들이 음양오행을 보고 멋대로 만들어낸 잣대였다. 마나를 나름대로 분류하고 그에 맞추어 효과적인 수련법이 탄생했으니 분명 연구의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건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검공이든 보법이든, 무공이란 결코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하나의 검의를 바탕으로 수련을 하고 있지만 검식이나 내공 운용을 편향되게 하지는 않듯 말이다.

소득은 없었지만 그렇게 나는 오전에는 간단한 기초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가는 식으로 꾸준히 무공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약 이틀에 한 번꼴로 비룡검객과 마주치면서 조금씩 친분을 나누었다.

그러다 비룡검객은 내가 도서관 뒤편의 정원에서 보법을 연구하는 걸 보고는 몇 가지 조언을 해 주며 친히 시범까지 보여 주었다. 이걸 위해 비룡검객과 안면을 튼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보법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느긋하게 수련에 몰두하면서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나는 비룡검객과 굉장히 친해져서, 수련을 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지체없이 그를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대로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내게 조언을 해 주며 비룡검객은 빠른 속도로 서역의 말에 익숙해졌다. 심지어 그 속도는 내 성취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무공 못지않게 오성도 상당한 사람이었군.

“이쪽입니다.”

도서관 앞에서 비룡검객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긴다. 오늘은 비룡검객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라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서관에 나왔다. 놀랍게도 비룡검객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 나는 그동안의 고마움도 있고 해서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적당한 식당을 찾아 번화가로 향하는 비룡검객의 발걸음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희한한 복식의 비룡검객을 주시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슴없이 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낡아빠진 문짝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선 비룡검객을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빈자리로 향했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도군 당신은 무림의 음식을 먹어 본 적 있습니까?”

당연히 먹어보았다. 보잘것없는 실력을 가졌어도 천의검문의 소문주라는 자리는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는 그럴듯한 위치였다. 내가 못 먹어본 음식이라면 황실의 숙수가 황제를 위해서만 만들었던 음식뿐일 것이다. 황도가 궤멸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것도 먹어 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렇군요. 저는 이 객잔에 자주 다녔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부탁해서 무림의 음식과 비슷한 것을 자주 주문했죠. 오늘은 그걸 먹도록 하겠습니다.”

비룡검객은 익숙하게 오리엔트 스페셜이라는 황당한 이름의 식사를 주문했다. 메뉴 이름이 참 괴상망측하군. 설마 비룡검객이 직접 지은 이름은 아니겠지? 잠시 후 낯익은 모양새의 음식들이 죽 차려지고 비룡검객은 젓가락 두 쌍을 품속에서 꺼내들고는 내게 한 짝을 건네준다.

“이렇게 쥐는 겁니다.”

난처하군. 이런 것에까지 연기를 해야 한다니. 일부러 젓가락을 서투르게 쥐면서 어렵다는 듯 끙끙댔다. 그냥 무림에서 나서 서역으로 왔다는 설정을 할 걸 그랬다. 아니면 그쪽 문화를 충분히 배웠다는 말을 해 둘걸.


음식의 맛은 제법 그럴싸해서 나도 모르게 향수를 느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 무림은 내 고향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도군, 이곳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혼혈이기 때문에 힘든 점도 있을 텐데 특별히 어려움은 없습니까?”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비룡검객이 진지한 기색으로 묻는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나는 삶은 야채를 우물거리면서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비룡검객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사실 제가 서역에 온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서역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그 때문에 무림맹에 들어갔고 억지로 서역으로 향하는 일행에게 끼어들었지요. 하지만 사실 첫 번째 이유는 겉치장일 뿐이고 두 번째 이유가 진짜였습니다. 그 이유란....”

비룡검객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였다. 그리고 작은 한숨과 함께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오래 전 저를 도와준 한 서역의 검객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 검객은 저를 위해 대신 목숨을 버렸으니 정확히는 그의 가문을 찾기 위해서이죠. 가문을 지탱하던 검객을 잃고 힘겨워할 그 가문을 찾아 무엇이든 돕고 싶었습니다.”

비룡검객이 서역인에게 뭔가 도움을 받았다고? 심하령에게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다. 거대상단을 운영하는 심가장에서도 모르는 이야기이니 아마 이건 비룡검객이 평생 혼자서 품고 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지만 그 가문은 감히 제가 도울 수 없을 정도로 성세를 누리고 있더군요. 가문의 명성으로든 실력으로든. 저 때문에 가르침일 끊어졌으니 제 심득이라도 모조리 전수할 생각으로 왔지만 오히려 제가 가르침을 받게 되었지요.”

비룡검객에게 가르침을 줄 정도의 실력자. 그리고 비룡검객이 현재 머물고 있는 장소. 나는 내 생각이 들어맞는지 물었다.

“설마 그 가문이 폰테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를 도와준 검객의 아들이 바로 폰테일 공작입니다.”

그렇군. 비룡검객이 왜 폰테일 저택에 있나 했더니 이런 이유에서였군. 그리고 서역에 온 지 십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왜 아직도 여기 머물러 있는지도. 비룡검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폰테일 가문은 이미 서역 굴지의 명문가가 되어 있더군요. 임무에 따라 용을 상대할 때 폰테일이라는 자가 서역에서 대표로 내세운 고수라는 데에 우선 놀랐고, 용을 상대하는 그의 무위에 또다시 놀랐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저는 폰테일 공작의 딸에게라도 도움을 주려고 했지요. 하지만 부전여전인지 딸 역시 비범하지 그지없더군요.”

은혜 갚기도 쉽지 않군. 비룡검객의 심득은 즉 비룡검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외인에게 전수해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룡검객은 그런 걸 서슴없이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은혜를 아는 진짜 무림인다운 모습에 나는 다시 비룡검객에게 감탄했다.

폰테일 가문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비룡검객은 그동안 서역에서 겪은 무용담을 조금씩 들려 주었고, 나는 그것들을 들으며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천재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이나 혼돈의 수작 따위를 잠깐이나마 잊을 정도로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비룡검객이 씁쓸한 맛이 나는 차를 주문해서 조용히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 커피라는 것인데 향은 좋은데 맛은 영 아니어서 나는 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차를 반쯤 마셨을 쯤에 비룡검객이 다시 물었다.

“식사는 입에 맞았는지 모르겠군요.”

“아주 좋았습니다. 이곳의 음식과는 다른 풍미가 있었습니다.”

익숙지도 않은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나는 비룡검객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비룡검객은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킨다. 마치 독한 술을 마시는 것 같은 모습에, 비룡검객이 뭔가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감은 적중했다.

“도군, 제가 왜 이 곳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껴서 그런 겁니다. 사실 저 역시 혼혈이니까요. 당신과는 반대로 어머니 쪽이 오리엔트 분이었고 아버지가 이곳 분입니다. 도군 당신은 잘 지내는 모양이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오리엔트 사람이나 평민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습니다. 저는 둘 다 해당되는 사람이었고요. 그래서 친구 하나 없었고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오리엔트 어로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죠.”

오늘은 놀랄 일만 듣게 되는군. 비룡검객이 서역인과의 혼혈이라니. 겉으로는 서역인의 모습이 전무해서 전혀 몰랐는데. 이 일을 비룡검파에서 알면 뒤집어지겠군. 비룡검파 최고의 검객이 혼혈이라는 걸 알면 비룡검을 빼앗아가고 파문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비룡검파는 그만큼 보수적인 곳이다.

“그래서 당신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듣고 상당히 반가웠습니다. 서역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검은 머리카락에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저처럼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당신을 구해 주겠다고.”

“아......”

과거의 자신이 투영된 모습을 보고 내게 잘 대해 준 모양이군. 그리고 자신이 도움을 받은 것처럼 나를 도울 작정일 작정이었어.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다른 처지에 있다. 세월이 흐르며 세상의 시선이 바뀐 탓인지, 아니면 내 실력 덕분인지 별다른 차별도 받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 자신이 그런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무림에 대해서는 향수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곳에 무척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밝히며 최대한 비룡검객에게 예를 다하여 사의를 표했고 비룡검객이 어째서인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말이 길었군요.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록 도군 당신이 별로 원하지 않더라도 저는 당신에게 제 심득을 전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니, 당신이 무공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미 몇 가지 심득은 전수해 드렸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심득을 주시다니요?”

나는 화들짝 놀라서 비명과도 같은 물음을 던졌다. 비룡검객은 살며시 웃으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사실 제가 연구 자료를 해석할 때 몇 가지 심득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당신이 수련할 때 조언을 해 드렸지요. 이 보법은 아마 당신이 수련하는 대로 변화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잠룡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만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군요. 보법을 완성할 때 잠룡이 깨어난다는 의미지요.”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지? 비룡검객의 말이 끝났지만 나는 얼떨떨한 나머지 감사도, 놀라움도 제대로 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비룡검객이 탄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아, 물론 사문의 무공을 모독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본래 오리엔트에서는 함부로 남의 무공을 익혀서는 안 되겠지만 잠룡보는 서역에서 얻은 심득이 기본이 되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예 서역의 무공이라 해도 좋습니다. 게다가 당신의 무공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변화할 무공이니까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사문의 무공을 익히다 말고 다른 무공을 익히는 건 무림에서는 사문의 무공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거나 혹은 사문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게 그런 건 별로 상관없는 사실이다. 애초에 나는 천의결이라는 괴상한 것을 익혔으니 말이다. 그저 나는 이런 상황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혹시 비룡검파의 무공이 궁금하다면 언제든지 폰테일 저택으로 오세요. 어차피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야 할 무공이었는데 폰테일 가문에 전해주지는 못할 듯 하니 당신에게라도 전해주고 싶습니다. 소렌이 극찬하는 재능을 가진 당신이라면 저도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아, 아닙니다. 이미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더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지요.”

차마 비룡검파의 진짜 심득을 받을 염치까지는 없어서 나는 거듭 사양하면서 다시 감사를 표했다. 비룡검객은 조금은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 스스로의 힘만으로 강해져야 한다. 더욱이 천의검문의 무공으로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노력이 온전히 보상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소렌은 아직도 내가 엄청난 천재라고 착각하는 모양이군. 언젠가 한번 제대로 대련을 하고 그녀를 납득시켜야 할 텐데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군. 르네가 전해달라는 말도 있으니 구차한 명분도 있으니 내일이라도 찾아가기로 하자.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서역이니 무림이니 오리엔트니 무공이 뒤섞여서 고민입니다.
서역 말을 할 때는 무림을 오리엔트라 지칭하지만 서역을 뭐라 지칭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무공이나 대협 등 여러가지 것들이 적당한 말로 치환되어야 하는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음독하는 느낌으로 혼용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일주일에 한편을 쓰는게 고작이라니. 주 2회는 연재해야 감도 잃지 않고 좋을텐데..... 그런 의미에서 그럴 용의가 있으신 분들께 약간의 피드백을 구걸해 봅니다. 피드백을 받으면 매너리즘에 빠진 현재 상태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제 글의 문제점도 알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피드백 여부와는 별개로 선작해주신 분들이나 읽어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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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3.24 18:15
    No. 1

    그러게요.
    매번 "오리엔트 말로 '대협'이라 하더군.'
    이럴 수도 없고-_-;
    대협은 외국이로 바꾸기에 너무 까탈스런 부분이 있네요.
    히어로! 하면 거창하고 직역해서 큰사람, 빅맨! 이라면 웃기고...
    ㅡ,.ㅡ;
    고생이 많으십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park77
    작성일
    13.10.01 13:10
    No. 2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4.02.18 03:00
    No. 3

    주인공이 가진 의식의 한계가 보이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2.18 03:36
    No. 4

    참 어렵습니다. 사람 하나 만든다는게.... 괜히 1인칭으로 했나 싶기도 하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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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5. 징집 (1) +4 13.04.26 5,112 142 9쪽
36 4. 한계 (11) +4 13.04.15 4,769 84 17쪽
35 4. 한계 (10) 13.04.15 4,247 68 11쪽
34 4. 한계 (9) +5 13.04.12 4,475 78 18쪽
33 4. 한계 (8) +3 13.04.10 4,339 73 14쪽
32 4. 한계 (7) +4 13.04.10 4,570 80 13쪽
31 4. 한계 (6) +9 13.04.01 4,922 89 14쪽
30 4. 한계 (5) +6 13.04.01 4,688 88 12쪽
29 4. 한계 (4) +3 13.03.27 4,348 100 11쪽
28 4. 한계 (3) +1 13.03.27 4,678 96 16쪽
» 4. 한계 (2) +4 13.03.23 4,986 98 19쪽
26 4. 한계 (1) +3 13.03.18 4,906 105 9쪽
25 3. 매칭 (12) +4 13.03.14 6,380 94 20쪽
24 3. 매칭 (11) +8 13.03.08 6,474 212 9쪽
23 3. 매칭 (10) +4 13.02.27 4,989 108 15쪽
22 3. 매칭 (9) +3 13.02.18 5,215 11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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