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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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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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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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12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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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4. 한계 (9)

DUMMY

짙은 혼돈은 나를 먹어치웠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올도 놓치지 않고 혼돈은 다시금 나라는 존재를 잠식해 나갔다. 동시에 점점 생각의 색이 옅어진다. 혼돈이라는 날카로운 이빨에 뜯기고 또 뜯겨져서 나 자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천의결. 나는 가까스로 천의결에 생각이 닿았다. 미약한 상념의 뺨을 후려쳐 정신을 집중하고 천의결의 구결을 읊어 마음을 가다듬으니 천의결은 아주 힘겹게 빛을 발하며 격류에 휩쓸린 나를 건져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내 상태는 벼랑 끝에 매달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고가 혼돈에 희석되고 또 희석되어 나를 잊을 때가 되면 천의결 역시 나를 구해주지 못할 것이다.

“크아아!”

에럴드가 내려치는 검을 바라보며 나는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내질렀다. 의식이 잠깐이나마 또렷해진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천의결은 이 알 수 없는 기운을 통제할 방법을 일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란 망망대해의 미친 파도를 손짓만으로 가라앉히라는 말이나 진배없어서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는 조심스레 혼돈의 폭풍 속에 손을 집어넣어 차근차근 그 기운을 유도해 나갔다. 혼돈으로부터 검의가 쏟아져 나온다. 이제 와서는 다 부질없지만 다시 얻으니 기쁘긴 하군.

검의에서 비롯된 이유제강의 묘리로 혼돈의 거친 움직임에 내공을 기반으로 한 부드러운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경맥을 통해 혼돈의 흐름을 통제하려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내공이 혼돈의 기운에 빨려들어가 산산히 부서진다. 천의결이 말한다. 혼돈은 그렇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고작 터럭같은 내공으로 다스릴만큼 혼돈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 이대로 혼돈을 방치하는 순간 단전이며 기경팔맥은 종이조각처럼 찢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약하게나마 유지하던 의식이 끊길 테고 나는 정말로 모든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나 나는 해냈다. 심상의 세계에서 나는 혼돈의 기운을 잠재우고 멜븐이 아닌 도군으로 다시 거듭났다. 과거에 해냈던 일조차 다시 해낼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찰나이자 영원과도 같은 시간동안 나는 혼돈을 잠재우려 씨름했다. 아니, 혼돈을 통제하려는 의식 자체를 놓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혼돈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이겨낼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풍전등화같은 의식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혼돈이 온몸의 경맥과 단전을 뒤덮는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갑자기 혼돈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의식이 또렷해진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에럴드의 검이 이마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씩 이마의 피부가 짓이겨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굴려 에럴드의 검을 보았다. 여기저기 흠집투성이가 된 검신은 그간 에럴드가 얼마나 검을 수련했는지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천재적인 재능에 수련이 더해졌으니 설령 에럴드가 흡혈귀의 종복이 되지 않았더라도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주 느리게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다. 죽음은 정말 목전에 있다. 에럴드의 검에 올라탄 죽음의 아찔함은 전생에 이어 다시 나를 앗아가기 위해 내게 다가온다. 죽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천의결이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토해낸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전신에 잠들어 있던 혼돈이 스스로 움직여 나는 인지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강대한 일수(一手)를 뻗어내 에럴드의 검을 쳐냈다. 그러나 제대로 단련한 적도 없는 맨손이었는데 뼈가 부러지기는커녕 내 손에는 생치기 하나 없다. 심지어 이 팔은 어깨가 박살난 팔이다.

“대체 무슨!”

알리오네가 당혹해 하며 언성을 높인다. 다 죽어가는 내가 다친 팔로 에럴드의 공격을 막았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왜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왠지 통쾌하다.

그때 에럴드가 재차 검을 날린다. 무시무시한 기세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에럴드의 검이 무척 느리고 형편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육신은 여전히 내 사고와는 동떨어져서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반대편 팔을 뻗어내자 내 몸을 휘감은 기운이 폭포수처럼 쏘아져 나가 에럴드를 덮쳤다. 그리고 에럴드의 좌반신이 마치 모래로 된 성이 파도에 휩쓸리듯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용의 발톱에 스친 것처럼 몸의 절반이 산산조각 나 버린 것이다.

“어?”

뒤늦게 에럴드의 죽음을 인식하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한 건가? 에럴드를 조각낸 기운은 이제 다시 그 이빨을 내게 뻗어냈다. 영혼이 깎여나가는 충격이 몰아치며 나는 그만 정신을 놓을 뻔 했다. 그러나 천의결이라는 부러지지 않는 기둥이 있기에 나는 아직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내 혼돈의 기운이 잦아들고 나는 그제서야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내가 물었어야 할 말이었지만 역할이 정반대로 바뀌었군. 나는 에럴드의 일부였던 작은 육편을 바라보았다. 죄책감이나 구역질 같은 건 없었다. 혼돈의 기운을 억누르는 큰일을 겪은 탓일까?

“그 엄청난 기운은 대체.... 너는 악마와의 혼혈인가?”

알리오네가 잔뜩 흥분해서 헛소리를 지껄인다. 더 이상 들어줄 필요도 없겠지. 나는 시험 삼아 검을 쥐고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그 순간 수많은 검의가 폭발하듯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통 이해할 수 없었던 검의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미처 터득하지 못한 검의가 그동안 연마했던 검의와 연계되어 하나가 되어간다.

지금이라면 무공비급의 뜬구름잡는 소리마저도 모조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검의는 다른 검의를 부른다. 검의는 오롯이 선 하나가 아니라 곧 전체와도 같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라면 도저히 못하겠지만 깨달음이란 본래 말로 전할 수 없지 않던가.

“치잇, 죽어라!”

알리오네가 양 팔을 뻗자 그녀의 주위에서 피비린내가 물씬한 붉은 구체 다섯 개가 형성된다. 붉은 구체들은 기괴한 형상으로 내게 짓쳐든다. 그 어떤 형식도 없는 무질서한 공격이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란 곧 혼돈이니 혼돈 그 자체를 품은 내게 알리오네의 공격은 정말로 단조롭기 짝이없었다. 아니, 파훼할 가치도 없겠군.

나는 약간의 집중으로 혼돈의 기운을 주위에 둘렀다. 그리고 혼돈과 부딪힌 붉은 줄기는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감히 내 피를!”

알 것 같다.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경지에 있었다. 이제는 자면서도 외울 수 있을 만큼 머리에 박혀있던 천의결의 구결이 떠오른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천의결을 단숨에 참오한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천의결은 분명 천의검문의 비급이다. 천의결의 구결은 파자(破字)로 되어 있어서 여태까지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상단전을 연 다음, 그를 통해 말로 전할 수 없는 깨달음을 전하는 방식인가?”

“뭐?”

알리오네가 흠칫 놀라서 반문한다. 물음에 답해주는 대신 나는 나직이 천의결의 구결을 읊었다. 천의결 안에는 천의검문의 모든 무공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천의검문의 모든 무공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천의검문의 검공이다.

“진천(振天)이라...”

단지 기운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뒤집힐 듯 요동친다. 가루가 된 내공 대신 늑대처럼 날뛰려는 혼돈의 기운을 제어해 그것에 내 의지를 담는다.

알리오네가 아예 온몸을 핏덩이로 바꾸어 내게 달려든다. 보잘것없는 공격이군. 지금까지 그녀에게서 압박감을 느낀 게 부끄러울 정도다. 나는 핏덩이를 향해 단숨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핏덩이가 에럴드가 그랬던 것처럼 터져나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그 안에서 하얗게 질린 알리오네의 모습이 드러난다.

“마, 말도 안돼! 드래곤 슬레이어도 아닌 주제에 내 공격을 이렇게 쉽게!!”

알리오네에게서 다시 피가 쏘아져 나온다. 역시 아무런 의지도 담겨 있지 않은, 그저 외적인 강함만 가득한 공격이다. 이런 공격으로 날 우롱하다 죽일 작정이었겠지? 이런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한 죽을 터였다. 그렇게 알량한 힘을 자랑할 생각이었겠지.

“진짜 강함이 뭔지 보여주지.”

아무런 연마 없이 본연의 기운을 쏘아내는 것만으로는 나를 당해낼 수 없다. 진천검결로 끓어오르기 시작한 기운을 갈무리하고 단숨에 명경지수로 정신을 이끌어 진천검결을 뛰어넘은 뭔가를 펼쳐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런 기세 없이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은 검이었기에. 그러나 알리오네는 내 검에 겁을 집어먹었고 그래서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모양이다. 멍청하군. 아직도 자기가 끝장났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죽어라 인........ 캬아악!”

그 순간 알리오네가 억지로 붙잡아 두었던 타인의 힘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하며 알리오네의 칠공에서 선혈이 터져나온다. 알리오네의 몸통이 두 동강 난 건 그 다음이었다. 정수리부터 회음부까지 미끄러지듯 잘려나가고 그 상처에서 다시 미친 듯이 피가 쏟아져 나온다. 지금까지 빨아들인 피가 모두 제 모습을 갖추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돼! 뱀파이어 퀸인 내가 이렇게!”

아무런 고뇌 없이 얻은 능력이란 한계를 갖는 법이다. 눈앞의 적을 베겠다는 의념이 담긴 진짜 검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폭우처럼 쏟아지던 피가 어느정도 잦아들고, 마침내 알리오네가 쓰러졌다. 그러나 알리오네의 시체에서는 계속해서 시뻘건 피가 샘솟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를 빨아먹은 건지 모르겠군.

나는 옆에서 피에 잠겨 엉망이 된 에럴드의 시신을 수습했다. 화장이라도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에럴드의 시신을 수습한 다음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우선 피분수 때문에 더러워진 옷부터 갈아입을까?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수십의 빛줄기가 쏘아져 내려온다. 하나하나가 검기를 능가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단숨에 흩어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약간 푸른빛이 도는 하얀 날개를 가진 엘프들이 있었다.

내가 일격에 공격을 무력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은 동요한 기색 하나 없이 재차 활을 겨누고 무심한 얼굴로 나를 주시한다.

“날 막지 말았으면 좋겠군.”

엘프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더욱 세게 당길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강행돌파다.. 성산을 벗어나 대막으로 가면 사막의 열풍 때문에 엘프들도 쉽게 날 쫓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아량도 거기까지다. 그 이상 쫓아온다면 나는 엘프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다.

“멈추세요!”

엘프들이 떠 있는 방향에서 빈틈 하나 없는 흰 갑옷을 입은 검사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그 가운데 있는 여성이 외친다.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성녀인 호비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진작 왔으면 그녀는 자연히 알리오네의 음모를 파악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르네의 모습으로 절명해 있었고 나는 피범벅이 된 채 몸의 절반이 날아간 에럴드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신이 아닌 이상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공격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모두 공격태세를 풀도록 하세요.”

호비나가 피칠갑이 된 내 모습에 흠칫 놀라면서도 침작하게 엘프와 검사들을 제어한다. 엘프들이 크게 활공하여 내 주위에 원을 그리며 착지하고 검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비나가 다가온다.

“적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내 이름과 에럴드의 죽음. 그리고 르네의 진짜 정체에 대해 말해주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호비나는 꽤 오랜 시간 고심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군이라고 하셨습니까? 일단 에럴드 군을 이쪽으로 넘겨 주시지요.”

나는 선선히 에럴드를 앞으로 나선 검사에게 넘겨주었다. 검사의 하얀 갑옷이 피범벅이 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호비나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사실 신탁을 받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 평화협정이 있기 전에 신께서는 피에 물든 악이 평화를 망칠 것이라 말씀하셨고 그 악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 흡혈귀는 제가 이미.....”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호비나의 손짓에 따라 검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엘프들이 활을 든다. 그리고 호비나가 그녀의 목걸이에 입을 맞추고 손을 모아 기도하자 성산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성산의 휘장이 급격히 줄어들며 이 주위를 휘감았다.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막으라고. 그리고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자는 당신 하나뿐이군요.”

억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신께 다시 여쭈어 보는 건 어떨까요?”

“신께서는 완전한 존재이십니다. 감히 한낱 인간이 그 뜻에 의문을 품어선 안 될 것입니다.”

외골수 광신도군. 나는 끓어오르려는 혼돈을 억누르며 항변했다.

“좋습니다. 그럼 르네의 시체를 확인해 보세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만약을 위해 당신을 먼저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나는 호비나가 손을 잡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더불어 혼돈의 기운도 잠재워 두었다. 이 정도면 의심을 살 일은 없겠지.

호비나가 내 손을 잡고 눈을 감더니 중얼중얼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상당히 날카로워진 감각이 무언가 압도적인 것이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을 경고했다. 그것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본 순간 하늘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려와 어두컴컴한 주위를 밝힌다.

“자, 말하세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이름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하얀 빛이 전신을 침범하는 것을 느낀 탓이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진실만을 말해야만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멋대로 내 의식을 뒤덮는다.

“나, 나는 도군. 천의검문의.....”

“천의검문?”

호비나가 반문한다. 간신히 천의검문의 소문주라는 말을 삼켰지만. 그러자 흰 빛은 더욱 내 의식을 조여 왔고 이에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혼돈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천의결을 운용하려 했지만 진실을 말하려는 입을 단속하는 데 바빠서 채 그럴 틈이 없었다.

그때 온몸은 뒤덮던 빛이 갑자기 나를 기점으로 혼탁하게 변색된다. 호비나가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팽개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혼돈의 기운이 침범해 있었다. 호비나가 혼돈의 기운이 넘실대는 손으로 목걸이를 쥐자 혼돈의 기운이 사라진다.

“다, 당신은!!”

호비나의 어조가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변명해봐야 소용없겠군.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올랐다. 저 앞에 반투명한 성산의 휘장이 보인다. 규모를 줄인 대신 농도가 짙게 변한 건가? 아무래도 순순히 빠져나갈 구조는 아닌 듯 하다.

엘프들이 일제히 비행을 시작했다. 나는 다시 아래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나는 성산의 휘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이 휘장에 닿은 순간 갑자기 힘을 잃는다. 강제로 멈춘 것이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될 것처럼 부드럽게 멈춰버린 것이다.

“반드시 처단해야 합니다! 그는 악. 악 자체입니다!”

호비나가 목걸이를 쥐고 엘프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자 엘프들의 날개가 더욱 눈부시게 산란한다. 더 빨리졌다. 그리고 엘프들은 화살을 쏘려 하자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혼돈의 기운이 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런, 안 돼!”

나는 외려 비명을 내지르며 혼돈의 기운을 추스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혼돈의 기운에 휩쓸린 엘프들이 모두 가루가 되어 버린 뒤였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붉은 파편과 하얀 뼈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혈우(血雨)를 맞던 검사들이 기겁하며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내가 추락할 자리에 모여든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신이여, 당신의 종에게 찬란하고 영광된 힘을.”

호비나가 검사들에게 손을 뻗자 검사들에게서 약간이나마 두려움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각각의 기량이 늘어난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다시 말해서 아무리 신의 가호를 받아도 저들은 나보다 훨씬 약하다는 의미였다.

- 골치 아프게 고민하지 말고 그냥 저들을 죽이는 게 어떠한가?

혼돈이 속삭인다. 웃기지 소리. 나는 결코 살인마가 아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들을 죽일 만큼 형편없는 놈이 아니란 말이다. 공중에서 몸을 들어 그 탄력으로 방향을 바꾸는 한편 능공허도의 경공을 발휘해 예정된 착지지점을 벗어나 호비나의 뒤로 안착한다. 호비나가 입술을 깨문 채 목걸이를 쥐고 손을 모아 외쳤다.

“신이여, 눈앞의 악에 응분의 대가를!”

호비나를 두고 도망치려는 찰나 갑자기 땅이 꺼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무런 조짐도 없이 내가 딛고 있던 땅은 무저갱처럼 깊은 구멍으로 변해 있었다. 뒤늦게 나는 이것이 호비나의 기도가 이뤄 낸 기적임을 알 수 있었다. 마법보다 훨씬 비합리적이군. 아무런 인과 없이 결과물인 기적만을 만들어 내다니.

하지만 이건 새로운 기회였다. 나는 경공을 발휘하는 대신 그대로 구멍에 빠졌다. 성산의 휘장은 반구형의 막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깊은 땅 속은 휘장이 닿자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과연 그건 사실인지 호비나가 경악하며 구멍에 뛰어든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더욱 깊숙이 구멍 안으로 빠져들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어째 쓰면 쓸수록 막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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