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름값 하는 길드, 불야성(不夜城)과 현시언 (6)
“네?”
“특히 돈이랑 아이템 같은 거 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마. 쓸데없이 PK 고기방패 노릇도 하지 말고.”
구두쇠가 되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리는 조언이었다. 거기에 PK 방패 노릇을 하지 말라는 조항은 자칫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이곳은 PK로 점철된 서버였고, 길드였으니까.
“대충 이해는 했는데, PK 관련은 좀……. 여긴 PK길드잖아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PK를 하지 말라는 게 아냐. 고기방패 노릇을 하지 말라는 거지. 다같이 가는 길드전이 아니라 개인적인 일로 싸우는 것에 나서지 말라는 거야.”
“아.”
강희성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김예빈이 사사로운 일로 다른 사람들과 싸움이 붙었을 때 무턱대고 나가지 말라는 뜻이리라.
“아까도 말했지만, 한 달이야. 한 달 동안 분위기를 보면서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너도 깨닫는 게 있겠지.”
한 달.
3:1인 위드리스 온라인의 시간 배율을 고려하면, 실제로 게임에서 체감하는 시간은 상당할 것이다. 강희성은 이드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 켠으로 불안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예빈이가 이드 누나가 말한 것처럼…… 그런 애라면, 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몰라.”
여태까지 조언해 주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무책임한 어투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강희성의 얼굴이 절로 황당한 빛을 띄웠다.
“모, 모른다뇨.”
“니가 무슨 서너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내가 결정해 줘야 돼?”
“그건 아니지만 하다못해 조언이라도…….”
강희성은 여자와 이렇다 할 일을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앞으로의 상황을 위해서라도 여성인 이드의 조언은 꼭 필요했다.
이번에는 이드가 황당무계하다는 표정이 되어 강희성을 바라보더니, 푸핫! 하고 다소 경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 여자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지?”
“…….”
“아마도 남중, 남고, 군대 출신이겠고?”
뜨끔. 가슴 깊이 한 줄기 칼날이 들어와 훑고 가는 기분에 강희성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드의 표정이 가상현실 캐릭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도 짓궂게 변했다. 아마 이 여자는 현실에서도 표정이 다채로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며, 강희성은 눈길을 피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애먼 눈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이드가 깔깔거렸다.
“미치겠네 진짜. 어쩐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이상할 정도로 맹하다 했더니만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였구나? 푸하하.”
“……뭐 어쩌라고요.”
나름 짜증을 낸다고 냈는데, 너무 소심해진 나머지 마치 친누나에게 어리광 부리는 남동생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걸 스스로 깨달은 순간 강희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눈을 감았다.
‘아, 내가 어쩌자고 이 여자랑 얽혀서…….’
후회해봤자 이미 때는 늦으리.
“괜찮아. 이제부터 정신 자~알 차리면 되니까! 내 말만 명심해.”
“뭐요. 한 마디로 노예 노릇 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오, 이해 빠르네. 그 정신 기억하라고.”
이드는 강희성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기더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음 속도를 올렸다. 서쪽 협곡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더 있었다. 그녀는 강희성이 자신의 잰걸음을 따라잡기 시작했을 때에야 지나가는 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별 거 없어. 싸워서 박살낼 거 아니면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내면 돼. 뭐 실체를 까발려서 복수를 하느니 어쩌니 하는 건 다 드라마 얘기지. 그냥 소 닭 보듯, 그러고 지내면 되는 거야. 같은 대학교라고 했던가?”
“네.”
“너도 참 운 없네.”
붉은 머리칼이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를 따라 파도를 그렸다.
“하지만 대학이라 봤자 생각보다 많이 마주칠 일 별로 없거든.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낚이지 말고, 그렇다고 사고 치지도 말고. 알았어?”
“노력은 해 볼게요.”
“그럼 서두르자. 아마 지금쯤이면 서쪽 협곡에 상대 쪽 저격수가 있을 거야. 우리가 제거하고 자리를 뺏으면 금방 뚫리지는 않을 거야.”
이드가 더욱 걸음을 재촉하자, 강희성은 고심하던 마음을 접어 두고 그 뒤를 따랐다. PK를 할 때 잡념은 강제 로그아웃을 부를 뿐이었으니까.
서쪽 협곡은 남쪽 중턱에 비해서 훨씬 크고 굴곡이 심한 지형이었다. 칼날 같은 절벽 두 개가 위태위태하게 마주친 아래로 미처 얼지 않은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절벽 위쪽도 전체적으로 울퉁불퉁한 편이었으며, 강 주변에는 빙판까지 있어 그야말로 전투 난이도가 알카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형이었다. 허나, 강 위쪽 폭포 밑에 지배의 수정으로 가는 지름길인 물밑 동굴이 있었기에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강희성과 이드는 우선 양쪽 절벽의 저격수를 모두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북쪽 절벽은 이미 완전히 점거당해 손쓸 도리가 없었고, 마지막 보루인 중앙 물길만을 남겨둔 채 결사적으로 수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절벽은 좁은 샛길 두 갈래를 통해서만 오를 수 있어 다시 점거하는 건 지금으로썬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남쪽 절벽의 저격수 두 명과 선인 한 명을 제거한 뒤 절벽 위쪽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하, 정말 십년감수했네. 저격수랑 선인이라니.”
간당간당한 생명력을 포션으로 겨우 채우며 이드가 중얼거렸다. 선인이 스킬로 화살을 거의 빗나가게 만드는 바람에 매우 힘든 전투를 치룬 직후였다.
불야성에 저격수가 비단 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쪽 절벽이 점거당하면서 불야성 측의 저격수 대부분이 제거되었고, 지금은 서쪽 절벽에 있는 강희성과 다른 두 명이 전부였다. 전체 인원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저격수 숫자를 보고 있자니, 강희성은 자신이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 환영을 받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어쨌든 난 내려간다. 입구 쪽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 샛길로 올라오지 못하게만 막아. 분명 여기도 점거하려 들 거야.”
절벽 길로 올라오는 적을 넉백 화살로 밀어 버리면 낙하 피해로 죽거나 빈사상태가 되기 때문에 수비하기엔 매우 좋은 곳이었다.
“조심하세요.”
“아까 채팅 봤지? 조금만 더 버티면 다른 쪽에서 전투 끝낸 애들하고 현시언도 올 거야.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힘내자고.”
그 말을 끝으로, 대답조차 듣지 않고 이드는 바삐 몸을 돌려 샛길 아래로 내려갔다. 강희성은 그녀가 잘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샛길이 보이는 나무 위로 가뿐히 올라갔다.
동굴 앞쪽에서부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서 혼잡하게 싸우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데 싸우다 보니 스킬의 화려한 효과가 버벅이면서 나타나기도 했다.
화살을 쏘자면 굳이 못 쏠 것도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인원이 적은 이상 조금의 허점이라도 보일 수는 없었다. 현시언은 이드의 말을 따라 활을 겨누기만 한 채로 보호색 스킬을 사용하고 대기했다. 3분이나 있었을까.
-좌측 길에 두 명!
누군가의 채팅을 시작으로, 그가 있던 좌측 길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는구나!’
강희성은 침착하게 바위의 혼 스킬을 사용한 뒤, 길 쪽으로 화살촉 끄트머리를 향했다. 이윽고 눈을 뽀드득 밟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올라왔다.
직업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화살을 떠나보내자 핑, 하는 울림이 차가운 대기를 뚫었다.
“악!”
운이 좋았는지 한 발에 두 명이 저 멀리로 나가 떨어졌다. 뒤쪽에서 당황한 음성이 들렸다.
“뭐야, 벌써 저격수가 자릴 잡았어?”
아마 자기 측 저격수가 제거된 것을 알고 지원을 온 모양이었다. 강희성은 쓸데없이 소음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화살을 계속해서 날렸다. 길이 보이는 위치이긴 했지만 보호색 스킬을 사용한데다가 거리가 꽤 있었으니 바로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이리라.
“으헉!”
“아오, 겁나 잘 맞…… 악!”
“빠져, 일단 빠져!”
한 명이라는 숫자가 무색하리만큼 방어는 무척 쉬웠다. 바위의 혼을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이 끝날 때마다 사용하고, 사이사이에는 대지의 속박을 사용해 최대한 발을 묶었다. 단순한 패턴이었지만 지형 특징상 치고 나오기가 매우 힘들었던 탓에 적들은 일단 한 발 물러서는 방법을 취했다. 곧 길이 조용해졌다. 강희성은 한파 효과를 받지 않기 위해 옆 나무로 향했다.
‘아깐 한파 효과를 간신히 받지 않고 끝났지만……. 이번엔 오래 가겠지.’
옆 나무에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보호색 발동’ 스킬까지 사용한 뒤에서야 강희성은 한 숨 돌리고 주변을 휘이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는 다른 경로로 습격하려는 기미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중앙에 점점 더 상대 쪽 길드원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이었다. 머리 위에 붉은색으로 ‘숲의 영혼’이란 길드명을 띄우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메마르지도 않은 입술을 버릇처럼 혀끝으로 적셨다. 현실의 온기 있는 살과는 다른, 실리콘 같은 미묘한 감촉에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활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상대편은 남쪽 절벽을 재차 점거하느니, 정면을 돌파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위험하겠다고 생각한 강희성은 화살 일체화를 사용한 뒤 공격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이 새끼들이 요새 안 밟아줬다고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오만에 가득 찬 익숙한 목소리가 하늘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허공을 올려다본 강희성의 눈에 익숙한 인형(人形) 두 개가 잡혔다.
- 작가의말
오늘은 좀 길게 쓰려고 했는데 어쩐지 또 4천자네요.
롤이 재밌어서 큰일났습니다. 할 게 많은데...
내가 바로 미드의 트롤러다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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