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길원 많은 길드 파벌 잘 날 없다. (6)
혼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작은 소리와 함께 눈에 익은 검은 머리 청년이 나타났다. 천령은월이었다. 뭘 하다 왔는지 꽤나 피곤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무심코 인사를 주고받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참이나 서로 눈치만 보던 둘 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천령은월이었다.
“……시언 형이 카르휘 씨를 만나 보라던데요.”
“아, 그게…….”
머뭇머뭇하던 강희성은 결국 한숨과 함께 그간 있었던 일, 그리고 현시언과 아까 했던 대화까지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천령은월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완전히 체념한 목소리였지만 얼핏 분노가 엿보였다. 강희성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쫓는 거죠.”
시무룩한 말이 돌아왔다.
“예상이야 하셨겠지만, 전 르웨델을 싫어해요. 하지만 현시언 형은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서 부길마 노릇을 하는 거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강희성은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현시언을 제외하고, 현재 불야성을 휘어잡고 있는 것은 르웨델이다. 이것은 돌아가는 분위기로 볼 때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웨델 쪽 사람이 아닌 천령은월을 부길드마스터로 임명한 것은 아마 현시언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반대 파벌 중에서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이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을 부길마에 놓고 붙잡아 둔 건가.’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은 곧 또렷이 드러났다.
“르웨델을 싫어하는 사람은 꽤 많아요. 단지 여기에 있는 것이 게임하기가 수월하고, 얻을 것도 많고, 돈도 벌기 쉬우니까 그냥 있는 거지. 현시언 형은 저를 부길마로 임명하면서 그 사람들을 잘 달래 보라고 했었어요. 저야 형이 부탁하는 일이니까 기꺼이 받아들였고요.”
“으음.”
어쩐지 천령은월의 성격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편이라고 판단된 상대에게는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는 그런 사람인 듯싶었다.
“전 부길마 노릇을 하면서 르웨델에 대해서 형한테 몇 번이나 충고했었어요. 그런 여자는 내쫓아 버려야 한다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걸 보면…….”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강희성은 아까 천령은월에게 현시언이 정확히 무슨 메시지를 보냈는지는 보질 못했지만, 그 태도를 보고 있자니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현시언은 천령은월을 내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전 그 여자에게 불야성이 휘둘리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노력한 건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다니…….”
아무래도 천령은월은 현시언의 자세한 속내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알면서도 싫은 것이거나.
“시언 형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그 여자에게 반하기라도 한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순간적으로 아까 현시언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꺼낼 뻔했던 것을 간신히 삼켰다.
조금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령은월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같이 나가야 했다. 한 명이라도 아쉬운 이 상황에서 천령은월은 없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현시언의 속내를 그대로 밝혔다간 천령은월은 차라리 불야성을 뒤집어엎는 쪽을 택할 가능성인 높았다.
“아니긴요. 형은 그 여자한테 반한 게 틀림없어요……. 가망이 없다구요 이 길드는.”
“…….”
강희성은 침묵을 고수했다. 천령은월은 현시언의 변심한 태도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전에 봤을 때와 비교가 될 정도로 크게 동요를 하고 있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무너질 것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강희성은 현시언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근거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섬광이 지면을 스치듯 그런 느낌이 전신을 관통했다. 동시에 그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추측도 떠올랐다.
‘현시언…….’
현실에서 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카르휘 씨에 관한 얘기도 방금 들었어요. 르웨델에 관한 것도……. 그런데, 그걸 다 듣고서도 저를 내치려고 하다니…….”
이를 악물던 천령은월이 난데없이 등 뒤의 대검을 뽑아 지면을 내리쳤다. 푹!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눈발에 대검이 깊이 박혔다.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겠죠. 그래도 현시언 형이니까,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걸 거예요. 나가야겠지요.”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천령은월은 현시언을 신뢰하고 있었다.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몰라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시언이건 천령은월이건 간에 말이다.
검을 다시 뽑아든 그가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강희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가려고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인원은 다 모았어요?”
“인원? 아.”
멍하니 있던 강희성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재 이 서버에서 길드도 없이 혼자 게임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이렇다 할 대형 길드는 불야성 이외에 없고, 그나마 저렙존에서 명성을 날리는 PK길드인 ‘레지스탕스’와는 아예 척을 진 상태.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새 길드 창설.’
거기까지 판단하자 현재 인원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희성, 그리고 이드와 천신혈갑은 무조건 데리고 나간다. 거기에 여기 앞에 있는 천령은월도 더하면 총 4명.
“한 명 부족합니다.”
새 길드를 만들기 위한 조건은 최소 5명의 초기 인원, 그리고 20만 골드의 자금, 길드 마스터의 레벨이 80이상일 것이다. 돈과 레벨이야 충족하고도 남으니 인원만 어떻게든 충당하면 된다.
천령은월이 그의 답을 듣더니 또 한 번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앞길이 험난하네요.”
그러더니만 메신저를 시야에 띄워 올려 현재 접속 중인 사람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스크롤을 주르륵 내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르웨델을 싫어한다고는 해도 길드에서 나가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고…… 어디 적당히 데려올 만한 사람이…….”
한참을 고민하던 천령은월의 표정이 어느 순간 밝아지더니, 메신저에 있는 한 사람을 불렀다.
“레닭 형, 빨리 알카스로 와 봐요.”
‘레닭?’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불야성 내에서도 크게 존재감이 없는 길드원일 터였다. 천령은월의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다소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런 말하면 좀 그렇긴 한데……. 적당히 존재감이 없으면서 우리 쪽인 형이거든요. 아마 불야성은 저 형이 나갔는지도 모를 거예요.”
“확실히 좀 그렇긴 하지만……. 잘 된 일입니다.”
강희성 또한 겸연쩍은 웃음으로 답했다. 천령은월이 다시 메신저를 몇 번 건드리더니 이내 닫고서는 지배의 수정을 가리켰다.
“지금 온대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가리킨 쪽에서 흰 빛이 일렁이더니 낯선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작은 키에 흰 피부, 평범한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남성 캐릭터였다. 선인을 상징하는 쥘부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인 특유의 하늘하늘한 비단 의상과 둥글둥글한 생김새가 어우러져 유순한 모범생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레몬닭꼬치’라는,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다소 익살스러운 닉네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에, 안녕하세요.”
생긴 것과 달리 제법 좋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기를 울렸다.
“레닭 형, 메시지는 다 봤지?”
“일단은 다 봤는데……. 으음…….”
레닭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헤실쭉 웃었다.
“뭐어, 언젠간 나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니까…….”
“그래, 그럼 됐네.”
강희성은 순간 한 편의 꽁트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멍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게 말끝을 흐리는 느릿한 말투가, 선인이라는 이미지에 맞춰 컨셉을 잡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 5명은 만들어졌네요. 어떡하실래요?”
천령은월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강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드 누나와 천신이를 부르죠.”
- 작가의말
내일이면 연참대전이 끝납니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네요. 덕분에 일반연재에 무사히 입성했으니
연참대전에 참가한 것이 잘 한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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