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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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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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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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1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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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해의 그림자 113

DUMMY

박태보와 오도일은 불안하고 다급한 마음에 곧장 최석정의 집으로 찾아갔다. 최석정이 과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걱정된데다, 시제의 일에 대해 조언이나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최석정의 집에 당도하여 그집 가노가 문을 열어주었을 때는 최석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 처 경주이씨만 부엌에서 계속 입덧을 하며 두 아이에게 밥상을 차리는 참이었다.


"어머니, 괜찮으시어요?"


최석정의 열한두살 된 딸이 의젓하게 어미의 등에 조막손을 갖다대며 묻는 말이었다. 경주이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차마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세숫대야에 대고 입덧을 했다. 그러자 박태보와 오도일은 열림 부엌 문틈으로 쳐다보며 적이 놀랐다.


한눈에도 임신이었다. 최석정의 처가 아이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칠 땐 헛구역질을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식사를 하다가 밥냄새에 속이 뒤틀려서 구토를 하는 걸 보니 입덧이 맞았다. 아예 부엌에 세숫대야 하나 갖다놓고 토하는 모습에 그들은 속이 뜨끔해졌다. 저렇게 입덧이 심한 여인네한테 술상을 차려달라 할 뻔했던 것이 생각나서 더욱 켕기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박태보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어? 그때 그분들이세요."


걱정스레 제 어미를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기척을 느끼고 반가운 얼굴로 오도일과 박태보를 쳐다보았다. 방금 세숫대야에 희멀건 토사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토악질을 하느라 탈진해버린 경주이씨는 뒤돌아보는 순간마저도 등허리에 작열감을 느꼈다.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손목 노뼈 부분에 호아급히 문질러 닦고 오도일과 박태보를 쳐다보았지만 일어설 기운도 없었다.


"어쩐 일이신지...혹시 그이가..."

"아, 여기도 최봉교가 안왔습니까?"


오도일은 자신들을 보며 경주이씨가 조바심을 내며 묻는 모습에 곧바로 최석정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사실을 눈치챘다. 경주이씨 역시 오도일의 반문에 저들도 남편의 소식을 모르고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 허면...허면 등청도 아니하신..."

"아니..저희들은..."


힘없이 경주이씨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릎부터 발목까지 힘이 다 빠져버렸다. 여자들은 임신을 하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몸은 둔해진다. 몸과 신경이 분리되는 듯한데 하필이면 남편이 행방이 묘연하다.


"어디서 저처럼 술먹고 뻗어있겠지요."


오도일이 일부러 걸걸한 말투로 경주이씨를 위로했다. 허구한 날 술먹고 아무데서나 퍼질러 자는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해줄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둘러댄 말이 경주이씨에게 통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술마시는 사람도 아니랍니다."

"..."


오도일은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위로엔 소질도 없고 하니 적당히 둘러대고 최석정의 집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대문쪽을 쳐다보는데, 하필이면 또 붉은 철릭을 입은 별감들이 담장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로 이들도 문을 열어달라 곧잘 소리쳐 부르지 않고 집안 동태부터 살피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전하께서 보내서 왔는데...안계신 모양입니다?"

"..."


박태보는 생각보다 눈치빠른 별감들을 보고 어깨죽지가 들썩거릴 정도로 몸서리를 치며 오도일을 쳐다보았다. 같은 품계, 같은 관직이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오도일이 노련하게 상대해주길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오도일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집에도 없고, 과장에도 없고, 심지어는 왕도 낌새를 채고 별감을 보냈으니, 무슨 말로도 둘러댈 수가 없었다.


"평소..속병이 좀 있는 것 같던데..어디 약방에 몸져누웠을 지도 모르지요."


겨우 그렇게 둘러대니, 경주이씨의 안색이 더욱 흐려졌다. 그 말이 오히려 그럴싸하게 들린 탓이었다. 아직 젊고 하니 남편이 평소에 건강을 잘 돌보지 않는 것도 있었다. 책을 즐겨 읽다 보면 제때에 끼니를 잇지도 못했고, 그래서 잔소리를 하면 노상 하는 말이라곤 전하께서도 함께 책을 읽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끼니를 굶게 된다는 것이었다.


"..."


정말로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까봐 더 걱정이었다. 아무리 젊은 나이라 해도 사람 명줄은 길고 짧은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발견해서 의원에게 데려다주었으면 모를까, 혼자 쓰러진 채로 방치되었다가 죽는 경우도 허다한 일이었으니.



"그래서 예판한테 운서를 넘겼다고 답하였다? 그게 전부다?"

"예 전하. 허정자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어..."


교서관 서리는 과거장에서 갑자기 내금위에게 붙들려서 대전 앞으로 끌려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찬바람이 싸리비처럼 자신의 얼굴이며 목덜미며, 온몸을 사정없이 훑어대었다. 상투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입안으로 사정없이 흘러내리는데도 두팔로 바닥을 짚고 고개를 조아린 탓에 손을 입에 넣어 빼낼 수도 없었다.


헌데 엉겁결에 대답하자마자 붕어눈을 한 왕의 측근내시 하나가 서슬퍼렇게 쏘아부쳤다.


"전하 앞에서 감히 누구를 존칭하는 것이냐?"


워낙 눈에 힘이 들어가서 금세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예?"

"허정자께서가 아니라 허정자가. 말씀이 아니라 말을. 암만 배운 것이 없어도 대답은 똑바로 해야지 않겠느냐?"

"소,소인이 못배워서..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


숙종은 한숨이 차서 눈밑을 실룩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른 침을 넘기고는 심문을 계속하는 한편, 다시 최석정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어 혹시라도 최석정이 귀가했는지를 탐문했다. 두번, 세번 최석정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잦아지자 보다 못한 금군별장이 간언했다.


"송구하오나...최봉교의 처도 지금 임신 중인데...지아비가 밤새 돌아오지 않아 한숨도 못잤다고 하옵니다. 자꾸 집에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시오면, 그 처도 불안하여 소산小産(임신 3개월 이전의 유산)을 할 수도 있사옵니다."

"음...허면, 최봉교의 소식을 아는대로 알려줄 터이니, 혹시라도 최봉교가 돌아오면 궐로 사람을 보내어 알리라 전하여라."

"그리..하겠사옵니다."


금군별장이 곧바로 대답하고 겸사복 한명을 불러서 어명을 전하였다. 숙종은 초조히 대전 뜨락을 서성였다.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가 모조리 왕의 눈치를 보느라 눈알만 굴리는 판국이었다.


교서관 서리를 에워싼 금군 내금위들의 뒤로, 이번에는 예조 서리들이 다섯명의 금군들에게 이끌려서 엉거주춤 끌려왔다.


"최봉교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느냐?"


왕이 직접 하문을 한다. 금군별장은 바짝 긴장해서 미동도 못한 채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러다 의금부까지 불려올 판이다. 왜 왕이 굳이 일을 키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환한 대전 앞 뜨락이 어느덧 컴컴한 어둠에 갇혔다. 인정이 울리는데도 왕은 끄떡도 않고 계속해서 예조와 교서관의 서리들을 있는 대로 추궁했다. 증광시 때문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당에. 한시가 급한데 그깟 최석정이 뭐라고 왕이 서리들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비전에 사람을 보내어 전하를 말려주십사 청하였지만, 왕은 대비전이 언문으로 보내온 전언도 무시하고 계속해서 한명씩 일일이 대질하여 추궁할 뿐이었다. 그러기를 열댓명쯤 하였을까, 서리 하나가 살짝 주눅이 들어 답하였다.


"어...어젯밤에 소인에게 예판대감이 전하께 운서를 전했는지 물었습니다. 아마 예판대감 집으로 찾아갔을 것입니다."

"예판?"


이제는 예조판서까지 불려올 기세였다. 예조를 관장하는 수장이 시관 하나 때문에 시간을 뺏기게 생겼다. 금군별장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아뢰었다.


"하오나 전하, 예판대감도 증광시 문제로 바쁠텐데, 이리로 부르지 마시고 승전색을 보내어 탐문을 하시는 게..최봉교도 별일 아닐 것이옵니다. 원래 사내들이란 곧잘 하루이틀씩 집을 비우기도 하는 법이오니..."

"임신 중인 아내를 놔두고 깜깜무소식일 리가 없지 않으냐."

"그렇긴 하오나...전하, 옥체를 보전하셔야 하오니 신문은 신들이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허니 이만 침수를 드시옵소서."


금군별장의 말에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교서관과 예조의 서리들을 닥달하였더니 벌써 목구멍이 부었다. 다리도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뻐근한 느낌이었다. 신문도 왕이 직접 할 필요가 없이 금군별장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운서를 찾아 뒤쫓던 최석정이 벌써 만하루나 행방불명이었다. 임신 중인 아내를 놔두고 이렇게까지 종적을 감출 리가 없었다. 이대로는 발뻗고 잠잘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시옵소서 전하. 또 해수가 도질까봐 염려가 되옵니다."

"예. 전하. 옥체가 상할까 저어되옵니다."


대전상궁은 물론 두광마저 한마디 거들자, 숙종은 흘끗 흘겨보고 고개를 홱 돌리려다 갑자기 마른 기침이 입밖으로 툭 삐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증발한 최석정을 찾느라고 피가 마른 건지, 목이 마른 건지, 벌써 기침이 났다. 손바닥으로 복장뼈 부근을 꾹 눌러보니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해수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만, 사람은 없어지면 없어지는 것이다. 아비도, 누이도...그리고 스승도."

"그리고 전하두요."


갑자기 들려온 진홍의 음성에 숙종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진홍이 궁장을 갖추고 나왔다. 사람들 앞이라 얼굴을 내비치기 조심스러운 탓인지 중궁 좌우의 궁녀들이 산선으로 슬며시 얼굴을 가린 탓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알아들었다. 숙종은 부채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서 진홍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들었다. 공기가 푸르스름해서인지, 그 낯빛도 어쩐지 파리했다.


"중궁이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전하를 모시러 왔사옵니다."

"..."

"최석정이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병이 나시면, 신첩은 어찌해야 좋으리까. 최석정을 원망해야 좋으리까, 전하를 원망해야 좋으리까."

"..."

"이만 들어가시옵소서. 최석정은 곧 돌아올 것이옵니다."

"..."


숙종은 대꾸 대신 중궁의 어깨너머로 상궁들의 표정을 살폈다. 행여 회임한 중궁을 왕이 동침하려 들까 저어되어 노상궁들이 인절미처럼 찰싹 붙어 있었다. 저들의 속눈썹 하나하나가 뻣뻣하게 굳어서는 중궁의 뒤로 바짝 붙어선 것이, 중궁의 역할은 그저 잠을 안자고 대전 앞에서 서리들을 신문하는 왕을 들여보내는 것까지인 모양이었다.


어미가 보냈을까. 그러고도 남을 어미였다. 요즘 들어 아들이 어미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수태한 며느리를 일부러 보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공주가 아파서 마음고생 몸고생이 지대했을텐데. 숙종은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중궁의 말을 내 어찌 거역할까."


말끝에 마른 기침이 또 달라붙었다. 애써 침을 꼴깍 넘기며 기침을 삭여보았지만 벌써 복장뼈 아래가 근질근질했다. 아무래도 해수가 도진 모양이었다.


"금군별장은 내일 사시(9시~11시)까지 봉교 최석정의 행방을 확보하여 고하라. 내일도 찾지 못하면 의금부에 넘겨 찾아내도록 하라."

"예 전하."


금군별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숙종과 눈길을 피했다. 어서 왕이 들어가주었으면 싶었다. 관리가 하루이틀 안보일 수도 있는 거지, 왜 이리 유난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불만스런 금군별장의 뒤로 예조 서리 두명이 서로 눈치를 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금군별장은 결코 최석정을 찾아내지 못할 일이었다. 존경각으로 흘러든 원고와 운서를 찾기 위해 최석정이 그 밤중에 반촌까지 가서 존경각에 갇힐 줄은 상상도 못할테니. 자기들이 존경각의 존자만 입밖에 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듣자 하니 존경각도 몇날 며칠이고 유생들이 찾지 않아 방치되고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고 하니.


그때였다. 성균관 서리가 대전 뜨락으로 총총히 달려왔다. 서리가 금군 한명한테 속닥거리자, 금군이 놀라서 두눈을 크게 뜨곤 엉거주춤 숙종 앞으로 나섰다.


"전하, 최석정이 지금 성균관에 있다 하옵니다."

"뭐라?"


숙종은 뜻밖의 장소에서 최석정의 소재가 파악되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과장엔 나타나지도 않은 최석정이 어떻게 이렇게 늦은 시각에 성균관에 있다는 건지.


"낮에 성균관 존경각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하옵고.."


숙종은 너무도 놀라서 더 듣지도 않고 금군의 어깨를 부여잡고 다그쳤다.


"뭐라, 그래서! 무사한 것이냐! 어찌된 것이냐!"

"지, 지금 약방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 하옵니다."


금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감히 함부로 쳐다도 볼 수 없는 용안이 눈앞에 있다. 눈동자가 이렇게 무섭게 짙었는지 전에는 미처 알 수도 없었다. 마치 무예를 익힌 자신들처럼 등줄기가 항상 꼿꼿하여 신기하게 여겨지긴 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열일곱살의 왕을 그리 무섭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신료들이 쩔쩔매는 것이 좀 남다르게 느껴진 게 전부였다. 그런데 막상 부딪힌 왕의 격정어린 눈길은 두눈을 후비는 느낌이었다.


"최석정은! 내 스승은!"

"저 서리한테..서리한테.."


금세라도 숨넘어갈 기분으로 금군은 왕이 어서 자신을 놓아주길 빌었다. 자신이 왕의 용안을 본 것도 아니고, 왕이 용안을 자신에게 들이밀었는데도 마치 자신이 죽을 죄를 진 기분이었다. 이러다 최석정이 죽었다고 하면 왕이 자기 칼을 빼어들어 목이라도 칠 것 같았다. 실제로 몇몇 왕들은 간혹 광기가 폭발하면 내시나 궁녀의 목을 벤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무, 무사하옵니다."


성균관 서리는 겁에 질린 채로 자라목이 되어 단숨에 답하고는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왕이 밤늦게까지 이리 관련자들을 닦달하며 최석정의 행방을 찾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고할 걸 그랬나 싶었다. 과거를 치른 뒤라 수복들은 비천당 청소하느라고 바쁘고, 서리들은 서리들대로 성균관에 들른 과유들을 상대하느라 바빠서 도통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사실 홍만종이 진작에 궐에 고하라곤 하였지만, 귀찮아서 미루다가 등떠밀려 왔을 뿐이었다.


"무사하다?"

"예 전하."


숙종이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성균관 서리를 쏘아보았다. 어서 뒷얘기를 하라는 독촉이었지만, 켕기는 게 있는 성균관 서리는 헛숨을 들이키며 아무 말도 못하였다. 왜 진작 고하지 않았냐는 질책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자신도 저 예조와 교서관의 서리들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무릎꿇릴 것 같은 기분에 오금이 저렸다.


"자세히 말하라."

"예에...성균관 존경각에서 쓰러진 채로..동재 상색장에게 발견되었사옵고..."

"쓰러져?"

"예, 산증이라 하옵니다."

"산증..."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히 산증이 무슨 얘기인지도 몰랐다. 서리의 답변으론 최석정이 존경각에 감금되었거나 하는 일은 짐작도 할 수도 없었다.


"두광아, 당장 백어의를 성균관 약방에 보내거라."


목구멍이 뻐근하고, 뭔가 티끌 같은 것이 낀 느낌이지만 당장 최석정이 걱정도 되고 궁금도 하였다. 숙종이 두광에게 어명을 내리자, 성균관 서리는 두눈을 깜빡였다. 고작 녹단령에게 왕이 어의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홍단령은 커녕 청단령도 아닌 일개 녹단령한테.


"내 같이 가고 싶지만 공주 때문에 오래 비울 수가 없다고 전하여라."

"예 전하."

"봐서, 거동할 수 있으면 내의원으로 옮겨오라 하고."

"예 전하."


두광이 잰걸음으로 물러갔다. 숙종은 이래저래 심기가 사나웠다. 공주는 잦은 병치레로 애를 태운 데다, 최석정까지 갑자기 쓰러져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니. 어쨌거나 성균관은 바로 옆이었고, 백광현이 돌아오면 최석정의 몸상태를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최석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의식불명에 빠져 있었다. 성균관에 상주하는 의관들이 반총산蟠蔥散을 투여하는 데만도 병자가 졸음과 혼몽이 교차하니 제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나마 홍만종이 머리맡을 지키면서 다 풀어헤쳐진 조보 낱장들의 침눈에 일일이 노끈을 꿰어가며 상세를 지켜보았기에 조금 흐릿하게나마 정신이 들자 바로 의관을 불러 반총산을 투여하게 한 것이 효험을 보는 듯 하였다.


하지만 홍만종이 조보를 다 철할 때까지도 최석정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혼수상태랄 것도 없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정신이 좀 몽롱해 보이는 정도였다. 엉뚱한 건 홍만종 역시 최석정에게 산증이라도 옮은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왕이 보낸 어의 백광현이 당도하여 최석정에게 당도할 무렵엔, 최석정 만큼이나 몽롱한 모습의 홍만종을 볼 수 있었다.


"자넨 누군가?"

"에? 예? 저는 그냥..."

"최봉교와 아는 사인가?"

"아니..그게..."

"대답 하나 똑바로 뭣하고 뭔가 대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저, 저.."


백광현은 줄행랑을 놓고 사라지는 홍만종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여태 최석정의 곁을 지켜놓고 막상 자신이 오니 겁을 지어먹고 내빼는 건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얼빠진 모습이 참으로 요상했다.


"저 정신나간 친구는 누군가?"


광현이 묻자, 약방의 서리가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동재 상색장으로 최봉교를 교서관에서 발견하고 데려오신 분임다."

"그래? 상색장 씩이나 하면 멍청한 친구는 아닌데."

"예에. 의술에도 밝으시어 아까 이리 데려오시며 복부를 만져보시고 산증이라 진단도 내리셨슴다."


서리의 대답에 백광현은 의아한 눈길로, 홍만종이 나간 문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최석정을 진맥해보고 놀란 눈길로 다시 한번 문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홍만종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최석정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약방을 나온 홍만종은 조보를 싸서 수복 하나를 불러 수레에 책을 싣게 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최석정이 있을 약방을 돌아보는 홍만종의 눈빛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호기심이 깊어졌다. 그런 홍만종을 쳐다보는 백광현도 나름대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꽤나 명민한 친구일 텐데, 어쩐지 반쯤 얼빠진 듯한 느낌이었으니.


"여기..."


홍만종은 여전히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조보를 한수레 실어서 수복과 함께 서종태의 북촌 집을 찾아왔다. 자신이 존경각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운서 부록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자네 말대로 존경각에 갔다가 말일세...참으로 대단한 사람을 구했으이."

"대단한 사람이라뇨?"

"봉교 최석정."


홍만종은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누구? 봉교 최석정?"


서종태의 두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허면 최봉교께서도 조보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음...그럴 수도 있겠지만, 최봉교 주변에 이런 원고와 책들이 있었으이."


홍만종은 최석정의 원고다발을 품속에서 꺼내어 서종태에게 내밀었다. 서종태는 최석정의 친필로 적힌 원고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훈민정음 자모음을 발음에 따라 분류한 글이라니.


"이건..."

"사람이 아니야."

"네?"

"사람일 수가 없어."

"네?"

"운서 부록으로 편찬하려고 최봉교가, 아니 그분이 쓰신 원고인데...이건 정말...정말..."

"..."

"이 글이 운서 앞뒤로 붙어 있으면, 보는 사람들은 중화의 발음이 우리의 발음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어. 서포공의 앵무지인언의 그 의미를 납득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언문의 비밀까지 다루었다네."

"..."

"아마도 최봉교는 이 운서를 편찬하려다가 함정에 빠져서 존경각에 갇혔던 것 같으이. 내가 갔을 때는 문마다 시퍼렇게 녹슨 철사로 묶여서 갇혀 있었으이."

"최봉교 나으리를 노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허면 최봉교께선 무사하십니까?"


서종태는 최석정이 편찬하려던 운서나 원고보다는 당장 최석정의 안위가 더 궁금했다. 자신의 은인이었다. 항상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언제든지 보은할 기회를 기다린 터라, 이번 과거장에서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함정에 빠져서 존경각에 갇혔다니?


"무사...무사하다고 하긴 좀.."

"네?"

"하필 가을이고..새벽녘이면 제법 춥지 않은가. 달랑 관복만 입은 채로 존경각에 갇혀서 추위에 덜덜 떨다가 한기가 침습하여 산증을 일으켰지 뭔가."

"산증? 산증이면..."


서종태가 미간을 찌푸리며 홍만종을 보니 홍만종 역시 몸서리를 치며 하복부를 괜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일부러 더운 기운이 뱃속에 돌게 하며 그는 씁쓰레히 입을 열었다.


"복부의 사기가 음낭까지 건드려서...저러다 자식을 못 갖게 될 수도 있으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서종태의 얼굴이 흙빛으로 일그러졌다. 자신도 형조에 갇혔을 당시 장 대신 곤장을 맞는 바람에 하마터면 볼기가 으스러져 후사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될 뻔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해준 최석정이 후사를 갖지 못하게 생겼다니.


"평소에도 산증이 있었나보지. 그몸으로 밤새 먹지도 싸지도 못하고 갇혀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뛰어난 명의한테 빨리 치료받으면 괜찮겠지만."

"..."

"어우, 나도 이제 존경각에 그만가야 하나. 그러고 보니 어여 몸의 탁기를 배출해야겠네."


홍만종은 혀를 차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눈을 감고 심호흡을 골랐다. 먼저 뱃속의 탁한 기운을 입으로 내뱉고는 코로 맑은 공기를 한번, 두번, 세번 들이마셨다. 거기까진 기괴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홍만종은 앞니, 오른니, 왼니를 서른번씩 위아래로 딱딱 맞부딪쳤다. 일명 명천고, 추천경, 타천종이니 하는 도가의 도인술이었다. 제법 도사처럼 엄숙하게 도인술을 마친 홍만종은 두눈을 뜨고 대뜸 이렇게 물어왔다.


"근데 혹시 자네 윷판 있는가?"


뜬금없는 홍만종의 질문에 서종태는 자신도 모르게 눈밑을 실룩였다. 아비가 워낙 위중하여 사사로운 일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되었다. 그나마 아비의 성화 때문에 과거에 참가했고, 또 과장에 참가해서 시제의 일을 보니 의혹이 동하여 풀어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윷놀이는 다르다. 동지와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윷놀이를 하는 일 빼곤 평상시에 윷놀이를 하는 것도 향락이라 지탄받을 일이었다. 하물며 아비가 위독한 상황이라니.


"같이 노름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 보여줄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일세."

"그래도 안됩니다. 아버님이 위독하신 판국에 어찌 윷판에 눈길을 두겠습니까?"

"이보게..내가 보여주려는 건 최봉교의.."

"나중에, 나중에 보여주십시오."

"..."


홍만종은 눈앞의 서종태가 누군지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비가 억울하게 의금부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의 몸으로 홀로 대궐에 뛰어들어 격쟁을 한 인물이다. 효자 중의 효자다. 그런 서종태가 윷판에 눈길을 두는 것을 죄악처럼 여긴 것은 지당했다. 유학에선 윷판은 연말정초에만 즐겨야할 유희일 뿐인 탓에.


세속에선 도학道學이라 하여, 주자학을 일컫는가 하면, 도교도 도학이라 일컫었다. 똑같은 이칭異稱을 갖고 있는데도, 주자학을 받드는 유학자들은 윷놀이를 연말정초에만 하는 유희로만 간주하여 금하였다.


"자네는 다 좋은데...가끔 너무 유생 냄새가 나."

"형님도 다 좋은데...가끔 너무 도사 냄새가 나지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서종태를 홍만종은 슬쩍 흘겨보며 또다시 도인술을 펼쳤다. 이번에는 미리 두손바닥을 비비더니, 엄지로 눈두덩을, 또 엄지와 검지로 콧등을, 귓바퀴 안팎을 차례로 문지르곤, 두손으로 얼굴을 문질러서 혈맥이 원활하게 돌도록 했다.


"어우. 먼지 풀풀 날리는 존경각에서 여기저기 널브러진 조보를 일일이 철하여 챙겨왔더니 눈이 뻑뻑하고 코가 맹맹해서 말이야."

"..."


서종태는 홍만종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씁쓸히 웃고는 조보를 한권 챙겨들어 펼쳐보았다. 워낙 분량이 방대해서 자신이 찾는 두 글자를 언제 찾아낼 수 있을 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비가 곧 숨이 넘어가게 생겨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도, 이번 과거가 최석정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걱정되어 살펴보는 참이었다. 도인술을 마친 홍만종은 서종태의 분주한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같이 하세."

"아니, 됐습니다."

"같이 해야 빨리 찾지."

"아니...최봉교께서 위험하시니 형님이 가서 곁을 지켜주셔야지요. 의술도 잘 아시니. 찾는 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

"제 은인이니, 부탁드립니다."

"하긴, 이번에 자네도 그 빚 갚은 셈이네. 자네 부탁 아니었으면 사실 나도 더 늦게 존경각에 갔을테니 말일세."

"..."


홍만종은 사실 성균관 서리를 보내어 대궐에 기별을 전했으니 곧 왕이 사람을 보내올 거라 믿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걱정되고 불안했다. 운서 부록으로 쓴 원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이 있었다. 단지, 그 행간에 숨은 뜻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총명한 사람들에게만. 어쨌거나 최석정의 곁을 지키고 또 그가 눈을 뜨면 인사도 주고 받고 싶은 마음에 홍만종 자신도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럼...난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게나."

"예."


서종태는 홍만종을 먼저 보내고서 조보에 적힌 글귀들과 글자들을 한자한자 뜯어보듯 살펴보았다. 분명 어린 시절 재미삼아 읽을 때만 해도 약석이니 악석이니 하는 글귀가 있어서 문중 어른들에게 물어본 기억이 있었다. 이 단어가 예사롭게 쓰이던 것이라면, 미진불여악석은 시휘에 어긋난다느니, 왕실을 능멸했다느니 하는 모함에서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조보는 엉망진창으로 철해져 있었다. 침눈 하나 똑바로 꿰지 못하고 듬성듬성 노끈을 꿰어 종이를 넘길 때마다 종이가 우그렁우그렁거렸다.



최석정이 의식을 찾을 때는 어둠 속을 등불이 어슴푸레 밝히면서 성균관 약방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산증도 산증이지만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축축 늘어져서 눈꺼풀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계속 잠을 자다 깨다 자다 깨다하면서 의식이 온통 몽롱하고 흐릿했다.


처음엔 낯선 의관이 자신의 눈꺼풀을 뒤집어보더니, 이번엔 친근한 백어의가 인상쓰며 자신의 복부에 뜸을 놓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처음 보는 낯선 선비 하나가 자신을 코끼리 다리 더듬어 보듯 하는 해괴한 장면도 보였지만 물어볼 여력도 없었다. 쳐다보는 듯한 표정도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가?"


백광현이 물어오자 최석정은 가만히 미간을 찡그렸다. 여전히 뱃속이 얽히고 설킨 느낌이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도 뱃속에 힘이 들어가니 배가 몹시 당기고 아팠다.


"으, 으으..."


복부가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최석정을 보고 백광현은 진저리를 쳤다. 하필 산증이라니. 딱 봐도 단순히 복부만 아픈 게 아니라 음낭까지 아픈 모양이었다. 그나마 왕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자신을 보냈으니 망정이지. 게다가 정확히 산증을 파악하고 억지로 반총산을 복용시켰으니 망정이지, 큰일날 뻔했다 싶었다.


"자네, 그만하면 운 좋았으이.'

"운...으...으.."


운좋다는 말에 욱해서 따지려다 말고 최석정은 또 고통에 신음하며 몸부림을 쳤다. 운이 좋을 턱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일진이 사나웠다. 교서관에 맡긴 원고와 책은 성균관 존경각으로 흘러들어갔지, 반인 한놈이 허견 같은 놈한테 매수를 당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수틀려서 그런 건지 자신을 협박해서 가두고 나가버렸지, 그 결과 밤새 한기에 덜덜 떨다가 급기야는 산증을 일으켰지...이게 어떻게 운 좋았다는 말인지.


"마침 소생이 조보를 찾으러 왔다가 나으리를 발견했습니다."


홍만종은 눈빛에서 호기심을 지우지 않은 채로 최석정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면서 백광현의 옆으로 붙어섰다. 아무래도 환자의 몸이라서 시야가 좁아졌는지, 백광현의 어깨너머로 서 있는 자신을 최석정이 미처 보지 못하나 싶어서였다.


"이 친구가 자네를 살렸으이. 여기 의관에게 듣자하니 산증인 것도 바로 간파했고 말일세."

"..."

"신기하지 않은가. 일개 유생이 그 정도로 의술을 익혔다니."

"..."

"그러니 자네가 운좋은 친구인 게지."


백광현의 말에 최석정은 눈길을 돌려 홍만종을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서너살 많아보이는 유생이었다. 대체로 성균관은 사마시司馬試(진사시와 생원시, 이칭으론 소과) 급제자들을 동재와 서재에 각각 입재시켰고, 추가로 명문가의 자제들을 하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력있는 이들은 당당히 사마시에 급제하지 못하고 뒷구멍으로 들어왔다는 불명예를 쓰기 꺼리다보니 대체로 성균관 유생들의 연령대가 보통은 지학志學(15세)을 훌쩍 넘겨 이립而立(서른)을 바라보거나, 심지어는 진갑進甲(예순)에 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눈앞의 유생은 성균관 유생치고 그리 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한눈에 자신의 증상을 간파할 정도의 의술까지 지닌 인물이니 그 학식 또한 녹록치 않을 것 같았다.


"함자가..."

"풍산홍가 만종입니다."

"아..고맙소이다. 전주최가 석정이외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겠소."


최석정은 한마디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뱃속이 당기고 아파서 말을 오래할 수가 없었다. 홍만종을 보는 두눈에는 고마움의 빛이 그득하였지만 말을 하는 것도 힘에 겨우니 그저 눈빛만 찰랑거릴 뿐이었다. 백광현은 피식 웃으면서 최석정의 팔을 잡았다.


"그만 얘기하고 쉬게. 아주 아파 죽는구만."

"..."

"한가지, 자네가 더는 후사를 갖지 못할 지도 모르는데..."

"..."

"흠..이미 딸 하나에 아들 하나, 게다가 마누라 뱃속에도 아이가 하나 더 있으니...뭐 여한은 없을 걸세. 여차하면 꾸어오면 되고."

"..."


위로를 하는 건지 속을 긁는 건지. 애 낳아 반타작이란 말이 있을 만큼 자식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아들이 겨우 하나 뿐인 마당에 후사를 더는 못보게 되면 어쩌라는 건지. 하지만 최석정은 입맛을 쓰게 다시면서도 굳이 반박을 하지 않았다. 복부가 당기고 아픈 탓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들 집안은 여차하면 서로 양자를 빌리고 받으면서 대를 이어온 탓이었다.


그때였다. 성균관 향석교 앞에서 유생들의 출입을 통제하던 서리 하나가 누런 보따리를 들고 낑낑대며 약방으로 들어왔다.


"저어..상색장님, 서종태 학유께서 이걸..."

"뭔가 그건."


묻다 말고 홍만종의 얼굴이 놀라움에 젖었다. 조보를 살피겠다더니 찾은 모양이었다. 그가 얼른 달려들어 서리에게서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얼른 보따리를 펼쳐보니 봉투 모양의 서산이 귀퉁이에 끼워져 있었고 세필로 홍만종이 표시한 기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효종孝宗 1年 庚寅 / 순치順治 7年 10月 30日庚戌


領議政李敬輿以批辭中有無識二字, 上箚待罪, 答曰: “省卿箚辭, 予之不見信於卿至此, 良用愧歎。 不有卿藥石之言, 國將何爲, 予將何恃? 所謂二字, 不過自謙之辭, 有何深意? 卿無過慮, 安心勿待罪。”

-왕의 비답에 무식無識이란 두글자가 적혀 있으니 영의정 이경여가 차자를 올려 성상께 대죄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건대, 내가 경에게 믿음을 보이지 못한 것이 이 지경에 이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도다. 경의 악석藥石같은 말이 없으면 나라를 무엇으로 다스릴 것이며, 또 나는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그 두글자는 내 스스로 겸양으로 말한 것일 뿐, 어찌 깊은 뜻이 있겠는가. 경은 너무 심려치 말고, 대죄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


"이거면 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효종대왕이 직접 언급한 단어이니.."


홍만종의 두눈이 반짝였다. 서종태가 용케도 찾아내었다. 효종조의 기사였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효종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이경여의 악석 같은 말이 없으면 나라를 다스리기도 어렵고,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이 조보를 내보이면 박태보와 오도일을 구제할 수도 있었다.


"저어, 받았다는 답신이라도 간단히 서주시믄.."


서종태가 보내온 조보를 읽느라고 정신이 팔린 홍만종의 눈치를 보며 서리가 쭈볏쭈볏 말하자, 최석정이 홍만종의 어깨너머로 서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서리 중에 얼굴이 관옥같은 사내가 있는가.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예? 서리 중에요?"


서리는 느닷없는 최석정의 질문에 영문을 몰라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반촌의 사내들은 저마다 허리춤에 칼 한자루씩 차고 다니면서 겉멋은 부릴 지언정 얼굴에 온갖 잡티와 흉터가 가득했다. 얼굴에 점 하나 없이 그렇게 잘생긴 서리 따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 사람 없구마요."


관옥이라니. 서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정말 없는가."

"예에."

"..."


최석정은 뒤통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존경각에 안내한 서리가 가짜였다니? 분명 향문쪽에서부터 자신을 인도했는데도. 그러고 보니 그자는 향문 안에 있지 않았다. 향문 밖에 있었다. 단순히 성균관 유생들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을 기다렸을 지도 몰랐다. 그 말쑥한 얼굴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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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1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7.11 20:01
    No. 1

    제대로 당했네요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그나저나 범인이 서리가 아니다면 찾기가 난망하네요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7.11 21:49
    No. 2

    캬.. 천재도 이렇게 당하는군요.
    근데 작가님을 괴롭힌 댓가로 처참하게 최석정이 당하는건 아닌데
    느낌이 묘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7.11 22:21
    No. 3

    뚱뚱한 멸치님, 다음화 다다음화를 기대해주세요. ^^

    Anu님, 폰으로 댓글다는 거라 소문자 입력도 양해하시길..사실 반달칼 에피 넣을 때 이미 계획된 에피이긴 한데...제 인물들은 원래 파란만장합니다. 아무렴 백광현이 달려왔는데 잘못되기야...(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3.07.12 00:43
    No. 4

    항상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저 시대의 배경지식이 제대로 없는데다가 요즘은 고퀼의 글을 유지하려하시니 텀도 길어서 인물이 살살 헛갈리기 시작합니다. 날잡아서 정주행이나 다시 해봐야겠습니다.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jk******
    작성일
    13.07.12 01:40
    No. 5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경운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7.12 04:06
    No. 6

    백광현 : 산증이 걸린 곳이 좋지 않은 곳이네. 후사를 갖지 못할 수도 있겠네
    최석정 : 이보시오 어의 양반!
    그나저나 딸 둘 아니었던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7.12 07:06
    No. 7

    디오지크님 요즘 제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연재가 늘어지네요. 조만간 주기 회복할게요.

    Jk046069님 다음화를 보셔야...

    일화환님 예리하시네요. 뱃속아기까지 딸이라 2부에서 딸셋에서 하나 죽는 전개로 가려다 부담스러워서 슬쩍 고친 거라.. 인경왕후 비극사를 쓰자니 진이 빨려서 못쓰겠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3.07.12 09:43
    No. 8

    홍만중으로 검색해보다가... 삼복의난에 이은 경신환국 까지...
    슬슬 작가님의 컨디션을 악화시키는 대형사건들이 줄지어 있음을 발견...

    복날도 다가왔는데 컨디션 잘 챙겨가며 연재하세요~

    홍만중도 아까운 인재였네요... 허견만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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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7.12 10:48
    No. 9

    김만중에 홍만종. 이름도 헷갈리죠. 심지어 동명이인 홍만종도 있다는. 최석정과도 친하고 허견과도 엮이고. 좀 미스테리한 인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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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7.12 20:47
    No. 10

    늘 수고하십니다.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7.16 17:49
    No. 11

    수훈님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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