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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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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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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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0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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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24

DUMMY

옥정이 숙종의 앞으로 주안상을 내려놓고 나가더니, 이내 다시 들어와서 자의전의 앞에도 주안상을 내려놓았다. 옥정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숙종의 짙은 눈동자에 언뜻 차가운 냉소가 비꼈다.


"옥정아, 주상께 술한잔 따라드려라."


옥정은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일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자의전의 자애로운 음성에 숙종의 눈치를 보면서 주섬주섬 옷깃을 여미고는 다소곳이 그 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우유빛 손가락으로 은주병을 기울여서 숙종의 은잔에 진홍빛 술을 따랐다.


그 순간 숙종은 자신의 곤룡포 자락이 옥정의 무릎에 살그머니 밟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은근히 찌푸렸다.


하지만 숙종은 미심쩍은 눈길로 자의전을 흘끗 쳐다볼 뿐, 옥정이 따르는 술을 묵묵히 받았다. 옥색 소맷자락이 살랑살랑 숙종의 손등을 스치면서 숙종의 코끝에 진한 사향내음과 상큼한 자초향이 차례로 엉겨붙었다.


숙종은 옥정의 촉촉한 붉은 입술을 흘낏 쳐다보고는 흰 술잔에 아슬아슬하게 채워진 붉은 술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한밤의 등불이 넘실거리면서 술잔을 비추면서, 고혹적인 진홍빛 술이 자신을 유혹하듯 손안에서 찰랑거렸다.


어쩐다. 그냥 술을 마다하고 일어서야 하나. 이때 그의 뒷덜미로 자의전의 흡족한 음성이 미끄러졌다.


"홍로주는 은잔에 마셔야 제맛이 나지요."

"..."

"소주를 내릴 때 자초를 넣어 우려내어 빛깔이 아주 곱지요."

"자초요..."

"예, 어혈을 풀어주고 복부의 독기도 빼주어 산증에도 아주 좋다지요."


순간 시들하게 은잔을 놓으려던 숙종은 손가락에 힘을 쥐어 은잔을 고쳐쥐었다. 그런 숙종을 보는 자의전의 두눈에 회심의 빛이 스쳐갔다.


"드세요."

"먼저 드시옵소서."


숙종은 가만히 장지문쪽을 내다보며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기다렸다.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갯벌으로 발을 내딛기라도 하였는지 느낌이 질척거렸다.


자의전은 가만히 상체를 틀어서 문쪽을 바라보며 은잔을 비웠다. 그런데 불덩이가 목울대를 태우면서 내려가는 듯했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얼큰한 술에 자의전의 표정이 기묘하게 찌푸러졌다. 숙종은 그 모습을 덤덤히 지켜보곤 자신도 가만히 돌아앉아 공손하게 술잔을 비웠다.


옥정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술잔을 비우는 숙종의 희디 흰 뒷덜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목젖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 없는 모습이 어쩐지 야속했다.


"저런, 우리 옥정이도 술이 고픈 게야?"


자의대비가 다정히 옥정에게 건넨 말에 숙종은 어깻죽지가 오싹했다. 이러다 잘하면 합환주를 마시게 생겼다. 자신의 반려인 중궁은 지금 태아를 잃은 슬픔으로 중궁전 안에 갇혀지내는 마당에.


그는 용포자락을 힘껏 잡아당겨 옥정의 무릎맡에서 잡아빼었다. 순간 옥정은 중심을 잃고 잠시 몸이 기우뚱하여 하마터면 엎어질 뻔했다.


"어맛."

"왜 그러느냐."


놀란 자의전이 얼른 팔을 잡아 부축해주자 옥정은 이내 균형을 되찾고 바로 앉아서는 숙종에게로 살살 눈웃음을 흘리며 답하였다.


"취했나보옵니다."

"취하긴. 술은 한방울도 안 마셔놓고서."

"소녀는 그저 두분 조손간에 정답게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취하옵니다."

"..."

"어쩜, 말도 이리 이쁘게 할꼬."

"..."


숙종은 자의전과 옥정 사이의 정담에 몰래 고개를 틀며 소리없이 코웃음을 치곤 손가락 옆선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자신이 그다지 후각이 예민하진 못하지만 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코끝에 미약하게나마 술냄새가 비낀 것만 봐도 몰래 술을 홀짝여본 모양이었다. 참으로 맹랑한 계집이었다.


"허면 주상에게 한잔 더 따라드리거라."

"예, 마마."

"..."


숙종은 가만히 술잔을 쥔 채로, 어서 옥정이 술을 따르기만을 기다렸다. 참으로 야릇한 분위기였다. 사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붉은 홍로주에,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 잉어구이라니. 생선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미에 젓가락을 댈 수 밖에 없도록 준비한 것을 보니 아예 작정한 느낌이었다.


그런 숙종의 손등 위를 옥정의 비단 소맷자락이 살그머니 스쳤지만, 숙종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술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은잔에 붉은 홍로주가 가득 차고 옥정의 소맷자락이 자신의 손등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얼른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서 단번에 한방울도 넘기지 않고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봐야겠사옵니다."

"아니 왜요. 벌써요."

"..."

"한잔 더 하세요. 그냥 가면 이 늙은이 서운합니다."

"소손은 술을 배우질 못했습니다."

"그래요?"


자의전은 이제 열여덟이 되는 숙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선팔도의 사내들은 약관이 되기도 전에 술을 배운다. 승하한 효종도, 현종도 일찍이 술을 배웠다. 심지어 함께 대작을 하기도 했다. 평소 현종이 그렇게나 술을 즐겨 마셨는데 그 아들인 주상이 아직도 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제를 올리고 남은 술을 마시거나, 사신의 영송을 위한 연향 및 궁중의 크고 작은 연회에서 신하 및 종친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을 터였다. 그런데 술을 배워보질 못했다니 어쩐지 가슴이 짠하였다. 하기야 고작 열네살, 그것도 만 열세살에 즉위한 임금이니 왕실 어른에게 술을 배울 새도 없었다.


"허면 이 할미가 지켜봐줄 터이니 마음껏 술을 배워보시구려."

"..."


숙종은 난감한 눈빛으로 자의전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왕실의 웃어른인데 한사코 자신의 소매를 잡아끄는 것을 물리치고 자의전을 박차고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는 이 자리에서 옥정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실 자신이 없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한잔만 더 하세요.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


숙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주안상 앞에 앉았다. 그런 숙종을 쳐다보는 옥정의 눈빛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술에 취하면 이미 주름이 자글자글한 봉선루의 행수기생 봉선도 천하절색으로 보인다는 오라비 장희재의 말이 귓전을 스쳤다. 지금 그녀는 잠자코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왕이 취기가 올라서 그윽하게 초점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주기만을.


그런 옥정을 위해 시간을 끌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자의전이 은근한 음성으로 숙종에게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힘들지요?"

"네?"

"소산으로 몸과 마음이 힘든 중궁을 보는 주상의 마음도 힘들 것이고..또 사내로서 외롭기도 할 것이고.."

"..."

"중궁이 회임을 하고, 또 소산까지 하였으니...당분간 복침도 미뤄야 하겠고..주상은 독수공방을 한 일년쯤 하겠구려."

"..."

"그동안 얼마나 적적하실꼬."

"..."


숙종은 차마 대꾸를 못한 채로 마지막 세번째 술잔을 비웠다. 목울대를 적시는 술맛이 어쩐지 달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뻐근하게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일어서기가 살짝 귀찮기도 했다.


그런 숙종의 낌새를 귀신처럼 읽었는지 옥정이 곁에서 짐짓 신경쓰듯 고개를 기울여 물어왔다. 손으로 살며시 왕의 용포자락을 짚으면서, 왕의 코끝에 고혹적인 사향냄새를 끼치면서.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


어쩐지 정신이 몽롱하다 못해서 초점이 살짝 풀리는 느낌이었다. 눈앞의 계집이 예쁘다는 느낌은 딱히 없는데도 살그머니 자신의 곤룡포를 눌러 하체를 자극하니 복부가 괜히 뻐근해졌다. 감히 옥체에 손을 대지 않고도 맹랑하게 유혹하는 계집이었다. 숙종은 자신의 곤룡포자락을 내려다보고 옥정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너는 참으로..."


그때였다. 장지문 밖에서 숨넘어갈 듯이 헐떡거리는 두광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중전, 중전마마께오서..."


숙종의 칠흑같은 눈동자에서 흩어졌던 초점이 중궁의 중中자만 들어도 돌아왔다. 숙종은 옥정에게서 눈길을 돌려 장지문을 쳐다보았다. 방금 중궁이라 했다. 숙종의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급한 일이 아니시오면 내일 다시 오시옵소서."

"중전마마의 일이래도!"

"여기는 왕실 최고 어른이 계신 만수전萬壽殿이옵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면 나중에 아뢰시지요."


숙종은 바깥의 실랑이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의 어깨죽지로 옥정이 원망섞인 눈초리를 쏟아내었지만, 숙종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온 신경이 활짝 열린 장지문 너머로, 자신의 녹피화부터 챙겨들고 초조하게 대청 아래를 서성이는 두광에게로 쏠린 터였다.


"무슨 일이냐?"

"중전마마께오서 하혈이 심하시다 하옵니다."

"중궁이?"


숙종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더는 예를 지킬 경황도 없이 그대로 자의전 문지방을 넘어버렸다. 놀란 자의전 조씨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제지할 새도 없이 그대로 숙종은 쏜살 같이 대청 밖으로 뛰쳐나가서 정신없이 자신의 녹피화를 신고 허둥지둥 자의전을 나서는 참이었다.


"주상!"

"또 뵙겠사옵니다!"


숙종은 뒤를 돌아보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남여에 올랐다. 곤룡포 자락이 하필이면 팔걸이에 걸려서 당기는 느낌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잡아채어 바로하고는 별감들을 독촉했다.


그런 숙종의 남여 뒤로 두광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만수전을, 그리고 대청으로 달려나온 옥정과 자의전을 힐끔 흘겨보곤 서둘러 뒤따랐다.


그렇게 나는 듯이 숙종의 남여가 달려가버리자, 자의전과 옥정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았다. 야심차게 벼르고 벼른 일이 이렇게 아무런 보람도 없이 틀어질 줄은 몰랐다.


그렇게 두 여인의 기대를 무참히 꺾어놓고, 숙종은 쏜살같이 중궁으로 달려갔다. 마음이 급하고 눈앞이 아득했다. 하혈이라니, 또 하혈이라니. 그나마 소산은 뱃속의 아기가 잘못된 일이라 쳐도, 지금은 뱃속의 아기도 없는데 누가 또 잘못된 것인지. 가슴 속 심장박동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중궁은! 중궁은!"


숙종은 용마루도 없는 청회색 지붕이 눈에 들어오기 무섭게 목청을 돋워서 소리쳐 물었다. 통명전 편액이 떨어지기나 할 것처럼 요란스레 뒤흔드는 음성에 지밀나인들은 화들짝 놀라서 숙종을 쳐다보았다. 이제나 저제나 오시나 앞뜨락을 서성이며 지켜보고도 놀라서 두눈이 화등잔만해진 그들이었다.


"중궁은 무사하냐! 살았느냐!"

"..."


호흡이 턱에 걸렸는지 목에 걸렸는지, 숙종이 남여에서 뛰어내려 미친 듯이 닥달하는 순간, 장지문이 열리면서 흰 버선발이 대청으로 살짝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궁장을 갖춰입은 진홍이 요요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궁!"


숙종은 기가 막혀서 온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하혈이 심하다고 하여 정신없이 달려왔더니, 이렇게도 멀쩡하게 두 다리로 걸어서 자신의 눈앞에, 그것도 선홍빛 당의까지 갖춰입고, 또 풍성한 가체에다 연꽃 금떨잠까지 꽂은 아리따운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당장 자신은 튀어오른 심장이 목구멍에 걸릴 지경인데.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숙종이 거칠어진 숨결로 되묻자 진홍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마주보기만 했다. 진홍의 까만 눈동자가 별을 품은 듯이 요요하게 반짝거렸다.


"어찌 된 일이냐?"

"..."


숙종은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서 등뒤의 두광을 쳐다보았다. 두광은 조금은 켕기는지 합죽이처럼 입술을 꽉 물고는 딴청을 부렸다.


"두광이 네 이놈!"


숙종이 두광을 다그치자 진홍이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혈은 사실이옵니다."

"뭐, 뭣이?"

"원래 소산을 하고 며칠간 하혈을 하는 것이온데, 요즘들어 하혈이 다시 도졌을 뿐이옵니다."


진홍이 너무도 담담하게 아뢰었다. 숙종은 기가 막혀서 진홍을 뒤돌아보았다. 어쩐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감히 조선의 지존인 자신을, 지아비인 자신을, 중궁이 농락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괘씸했다.


"감히 나를..."


그런데 막상 화가 치밀어 섬돌 위로 사납게 발을 디디며 그녀를 쏘아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분노가 탁 풀어지면서, 온몸의 신경이 확 물크러져 버렸다.


"나를 기만한 것이오?"

"..."


하지만 진홍은 송구하다는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만히 숙종의 두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지아비의 두눈에서 무언가 흔적을 열심히 찾아 읽으려는 듯이.


그 탐색하는 진홍의 눈길에 숙종은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술기운이 갑자게 오르면서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정신은 몽롱한데, 그 와중에도 눈앞의 진홍의 두눈은 영롱하게 반짝이니, 참으로 미칠 노릇이었다.


"송구하오나, 소산한지 석달 안에 회임이라도 하게 되면 중전마마께서 위험해지시옵니다."


고양이 쥐 생각해주듯이, 대전상궁이 숙종의 어깨너머로 황급히 아뢰었다. 진홍은 그런 대전상궁을 살짝 노려보았다.


한밤중에 왕이 자의전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하혈을 핑계로 두광에게 연통을 넣은 것이었다.


소산한 산모에게 하혈이 나쁜 징조이긴 해도 목숨이 경각에 달릴 지경은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두광은 허겁지겁 달려가서 왕을 이리로 불러낸 것이었다. 두광 자신도 아리따운 궁장 차림의 진홍을 보고는 속았다는 느낌에 얼른 딴청을 부렸지만.


"찬바람을 너무 오래 쐬시어도 아니되옵니다."


숙종의 녹피화가 섬돌에 머물러 있자, 지밀상궁도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한마디 아뢰었다. 중궁에게 들으라는 건지, 숙종에게 들으라는 건지, 그 말투도 살짝 애매모호했다.


"..."


숙종은 가만히 진홍을 쳐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과 등불이 진홍의 몸에 아스라이 닿아선지,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자코 시선을 못박으니 알 수 있었다. 허리 아래로 내린 가느다란 손끝이 덜덜 떨리고, 똑바로 서지도 못해선지 버선코도 흔들리는 참이었다.


"들어갑시다."


숙종은 진홍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잡아보았다. 손의 체온은 평소대로였다. 하지만 어쩐지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흠칫 놀라 움츠러드는 진홍의 손끝이 느껴졌다. 진홍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숙종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전하 손이..."

"내 손?"

"전하 손이...너무 차옵니다."

"내 손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숙종은 중궁의 손이 여느때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이 유독 차디차게 식은 것을 깨달았다. 추운 겨울날씨에 워낙 가슴을 졸이며 달려온 탓에 손이 얼음장 같았다.


방금 전까지 자의전이 거처하는 만수전에서 그 독한 술을 석잔이나 마시고 와놓고도, 당장 중궁이 잘못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손끝은 물론 발끝까지 차디차게 식어버리다니.


"누구 덕분에."


그 손의 한기가 옮기라도 한 것인지, 진홍은 더욱 오한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달달 떨면서도 자신의 손을 놓지 않는 진홍을 보니, 숙종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대청을 훌쩍 올랐다. 이번에도 녹피화가 걸리적거린다 싶었더니 두광이 그새 뒤에서 번개처럼 녹피화를 잡아빼었다. 발을 잡는다는 느낌이 잠깐 나는가 싶더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나날이 발전하는 수발 솜씨에 내심 흡족히 여기면서, 숙종은 나머지 발도 뒤로 내뻗었다. 이번에도 잽싸게 두광이 녹피화를 잡아빼었다. 숙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온돌 앞으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진홍이 달달 떨면서도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서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의아히 여기면서 숙종도 뒤를 돌아보니 꽉 닫힌 채로 한기만 내뿜는 동온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닫힌 장지문 너머로 풋풋한 추억이라도 있는 듯이 진홍이 두눈을 반짝였다.


"..."

"..."

"동궁전 시절이 생각나옵니다."

"..."

"대청을 사이에 두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괜히 제 방문도 열어보곤 하였사옵니다. 하지만 한발 늦어서, 문이 닫혔지요."

"중궁은 뭐든 한발 늦었지 않소. 워낙 굼벵이라."

"..."

"이번엔 다행히도 한발 늦지 않았지."

"네?"

"아니, 고맙다고."


숙종은 배시시 웃으면서 진홍의 손을 살며시 비틀었다. 투기는 여인이 하지 말아야할 죄악이나 다름 없다. 칠거지악의 하나로 손꼽는 죄목인데도, 투기를 범한 죄로 폐출된 폐비 윤씨의 전례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은 중궁의 질투에 오히려 안도하는 참이었다.


"헌데 전하에게서, 술냄새가 나옵니다."

"술냄새..."

"예, 솔잎향 같기도 하고..맞사옵니까?"

"자초요."


숙종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초요?"


진홍의 눈동자가 호기심에 맑게 반짝였다. 오한이 온몸을 잠식해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녀는 숙종의 입술에 가까이 코를 갖다대었다. 그리고는 한겨울의 시린 공기에 하얗게 새어나오는 입김에 묻어나는 상큼한 듯 시큼한 듯 알 수 없는 술냄새를 가만히 맡았다.


"맡아보려고?"


숙종은 진홍의 코끝에 대고 살짝 입김을 뿜으려다 문득 진홍의 입술새로 떨리듯이 흩어지는 하얀 입김을 쳐다보았다. 이토록 추운데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면서도 고집있게 진홍이 대청에 서 있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동온돌로 이어하겠소. 내일 당장."

"네?"


진홍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왕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답해주자 두눈을 깜빡였다.


"좋소?"

"..."

"왜 대답을 안하오?"


그 와중에도 자초향이 섞인 숙종의 입김이 진홍의 코끝을 간질였다. 숙종은 자신의 하얀 입김과, 진홍의 하얀 입김이 합쳐지는 것을 쳐다보며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기울였다.


"엄마야!"

"에그!"


중궁전에서 수발을 들던 나인들은 물론, 왕을 수행해온 내시, 별감들까지 민망함에 황망히 돌아섰다. 물론 그중에는 이런 광경쯤은 이제 적응이 되었다는 듯이 오히려 두눈을 멀뚱멀뚱 뜨고 지켜보는 두광도 있었다.


"자초맛...어떻소?"


숙종이 살짝 진홍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묻는 말에, 진홍은 그 뜨거운 입김이 온몸을 달구기라도 하였는지, 잠시 오한을 잊었다.


"씁니다."

"이상하다. 난 달던데."


숙종은 짓궂게도 혀를 살짝 내밀어보았다. 남세스런 광경에 궁인들과 내관들이 몸둘 바를 몰라 하거나 말거나, 그는 놀리듯이 집요하게 진홍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 풍성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진홍은 지지 않고 응수했다.


"지금은 알큰합니다."

"달큰하던데."


숙종이 한번더 혀를 내밀었다. 여염의 부부처럼 농밀한 밀어를 주고 받는 모습에 궁인들과 내관들이 파르르 몸서리를 쳤다.


"전하, 중전마마께오서는 석달간은 회임은..."

"나도 안다!"


숙종은 짜증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끼고 꾹꾹 눌러담는 음성으로 답하였다. 당장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눈앞에 말랑하고 다디단 진홍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간질이는 참이었다. 아니, 자신의 입술이 진홍의 입술을 간질이는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아무도 떼어내지 못하도록, 자신의 온몸을 바짝 붙이면서 진홍의 허리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자신의 품안에서 진홍이 힘껏 까치발을 돋우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바람도 그 틈새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진홍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이 맞닿도록, 그녀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을 맞추고, 자신의 심장과 그녀의 심장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런 낯뜨겁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보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왕이 자신에게 건네다 말고 서둘러 중궁전을 달려가는 바람에, 못다 한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그렇게 못내 아쉽고 궁금하여 여쭈어볼 주제도 못되면서 몰래 뒤따라온 옥정이었다.


알큰? 달큰?


차라리 시큰했다. 자신의 온몸이 이렇게 시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서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용기를 내어 감히 왕의 용포자락을 당겨가며, 일부러 유혹하듯 한모금 마신 자초향을 입가에 흘렸는데도, 도리어 왕은 자초향을 머금은 채로 중궁에게로 달려가서 더욱 뜨겁게, 아무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끌어안아버리다니. 저 모습을 자의전이 목도한다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만 포기하자고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갖고 싶었다. 자신이 아닌, 중궁만 바라보는 저 한길 뿐인 눈길을, 오직 중궁에게로 틀어박힌 저 새까만 눈동자를, 저렇게 오직 중궁의 숨결만 탐하는 저 부지런한 입술을, 오직 중궁의 입속 깊이 탐하는 저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혀를, 저렇게 오직 중궁의 허리만 감싸안은 손을...자의전의 침소에서 술잔에 홍로주를 따르면서 곁눈질로 훔쳐보았던, 저 흰 손에 도드라진 푸른 실핏줄을 갖고 싶었다.



"중전마마, 만수전에서...술을 한동이 보내왔사옵니다."


다음날 동이 트기 무섭게, 만수전에서 사람을 보내어 술을 한동이 보내오자 진홍은 기분이 묘하였다. 직감적으로 좋은 뜻이 아닐 것만 같았다.


"들이라."


진홍의 승낙이 떨어지고, 장지문이 열리면서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어여쁜 지밀나인이 은주병을 소반에 받쳐서 길다란 치맛자락을 늘어뜨린 채로 살금살금 걸어오는 모습이 진홍의 시야에 들어왔다. 중궁전엔 저런 미모가 없었다.


"자의전께오서..보내라 하셨사옵니다."

"웬 술을..."

"어제밤에 전하께오서 만수전에 납시어..술을 드시고 가셨사옵니다. 소녀가 그 술을 따라드렸는데, 워낙 달게 자시어...자의전께오서 기꺼워하며 보내셨사옵니다."


굳이 자신이 술을 따랐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없는데도, 옥정은 도발하듯 말하면서 진홍의 두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당돌함에 진홍은 괜스레 골반 부분이 욱신거렸다.


너로구나.


자의전이 장현의 질녀에게 각별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의전의 친조카이자 며느리뻘 되는 숭선군 부인 신씨 역시 각별히 아낀다고도 하였다. 암암리에 왕의 승을 입을 수 있도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주선해준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젯밤 자신에게로 오기 전에 지아비는 옥정이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자신이 하혈을 핑계로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저리 화려하고 요염하게 생긴 여인에게 지아비도 얼마든지 이지가 흐려지고 정신이 홀릴 수가 있었다. 자신에게로 왔던 지아비는 몸만 왔을까, 마음도 왔을까.


"드시던 술을 마저 드시라고 뒤따라 가보았더니..소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전하께오선 중전마마께 입을..."

"..."

"너무도 당황스러워서...도로 가져왔다가 이렇게 중전마마께 드리는 것이옵니다."


겉으로는 수줍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으로 옥정은 낯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두손으로 두뺨을 꾹꾹 눌렀다. 진홍은 그런 옥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 아이에게 보여주려고 지아비가 자신에게 그리 다정하게 굴었다는 얘기? 지아비가 이 아이를 그렇게나 의식했다는 얘기? 이 아이한테 흔들렸다는 얘기?


헌데 지아비는 왜 그 밤중에 만수전에 갔으며, 왜 이 계집과 술을 마신 것일까. 정말로 왜 그 밤중에 만수전을 찾은 걸까.


"고맙구나. 잘 마시마."


뜻밖의 대답에 옥정은 흠칫 놀라 두눈을 지릅떴다. 자신이 만수전에서 이곳 통명전까지 이 은주병을 들고 걸어오며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이리 화용월태의 대단한 미모를 지닌 자신과 왕이, 어두운 밤안에서 그윽한 방안에서 술에 취해 기분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질투심에 뒤집힐 중궁의 반응을 기대했었다. 자신이 어제밤에, 왕이 하다 말고 가버린 그 얘기가 못내 궁금해서 뒤쫓아왔다가 왕과 왕비의 다정한 장면을 보고 두눈이 뒤집혔던 것처럼.


그렇게 질투심이라는 벌레에 중궁의 속이 다 갉아먹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토록 태연자약하다니.


그냥 아닌 척 하는 것이겠지. 속으로는 질투심에 활활 타오르고 콕콕 쑤셔도, 겉으로는 요조숙녀인 척 애써 질투심을 감추는 것이겠지. 옥정은 눈앞의 중궁이 문득 가소롭게 여겨졌다.


아무리 내명부의 수장인 중궁이라도, 자신을 어쩌질 못한다. 비록 자신의 상전이자 소속인 자의전이 지금은 이름 뿐인 뒷방 늙은이로 늙어가더라도, 왕실의 최고어른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 자의전을 모시는 시녀들을, 중궁 아닌 왕이라 해도 함부로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는 없다. 그랬다간 패륜으로 낙인찍혀 온세상의 지탄을 받을 일이었다.


옥정이 물러가고 진홍은 은주병의 뚜껑을 열어보고, 그 안에 타는 듯이 붉게 찰랑이는 홍로주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아침에 봐도 이토록 유혹적인 빛깔이니 밤에 보면 얼마나 고혹적인 빛깔이었을까. 게다가 그녀의 코앞에서 상큼하고 맑은 술향기가 코끝을 간질간질하게 간질이는 참이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쿵 뛰고 아찔했다.


"..."


진홍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궐밖도, 궐안도 권력다툼이다. 시조모인 대비전 김씨가 서인들과의 결속이 견고하다면, 시증조모인 자의전 조씨는 한발 뒤로 물러난 채로 남인들과도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점점 장현의 질녀를 등떠밀고 있다면, 언젠가는 지아비도 받아줄 수 밖에 없다.


"마마, 대전에서 전하의 집기를 가져왔사옵니다."


지밀상궁의 보고에, 진홍은 고개를 들어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장지문이 열리면, 그리고 맞은편 문이 열리면 지아비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비칠 것만 같아 가슴이 설렜다. 지아비의 칠흑처럼 짙고 검은 눈도, 가끔씩 찡그리는 코도, 얄궂게 놀리는 입술도, 다정한 웃음도, 긴장해서 꿈틀거리는 목젖도, 자신의 체온을 느끼는 손가락도...오롯이,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장지문을 열어라."

"예 마마."


진홍은 그렇게 열린 문틈으로, 왕의 집기들이 동온돌에 빼곡히 들어차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 내시들이 낑낑대며 고구려토기를 옮기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 고구려토기를 보고 있자니 진홍의 두눈에서 초조와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대신,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의 투지 같은 것이 감돌았다.



편전에서 숙종은 대신들이 자신에게 올린 삼망의 명부를 하나하나 훑어보는 참이었다. 대체로 큰 변동사항은 없었다. 이조는 남인들이, 병조는 서인들이 장악해서 피차 인사권을 지닌 자들에게 물량공세 혹은 친분으로 구워삶았거나 하여 대부분 그대로 삼망의 수망을 유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최석정이었다.


"정7품 봉교 2인의 삼망에 최석정의 이름이 빠져 있는데."


숙종은 다음 명부도 살펴서 봉교 2인의 정원에 최석정의 이름이 빠진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편전의 남인들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아무리 형식적인 도목정이라곤 해도, 그 많은 관직마다 삼망을 일일이 살피다 보면 귀찮고 성가신 마음에 얼렁뚱땅 대충대충 넘어가고 싶어질 법도 하였다. 이 와중에도 왕은 섣불리 낙점을 하지 않고, 꼼꼼하게 뜯어보는 참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각별히 여기는 최석정의 자리만큼은, 돌다리를 두들기듯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


사관 자리에 착석한 최석정 역시 자신의 이름이 누락된 사실에 입안이 쓰던 참이었다. 역시나 왕이 건성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편전 안의 신료들이 긴장하여 마른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어쩐지 귀에 잡히는 기분이었다.


"어디에도 최석정의 이름이 없는데, 최석정에게 결격사유가 있던가?"

"그것은 아니온데...얼마 전에 앓은 산증으로...근무일수가 부실했던 것이 그 원인인가 하옵니다."


정5품 이조정랑이 남의 일을 얘기하듯 태평하게, 하지만 두손에 접히는 손금마다 진땀이 배어서 자신의 청단령 자락에 슬쩍 문지르며 아뢰었다. 보고를 듣는 숙종의 눈동자가 의심으로 더욱 짙어졌다.


"알았다."

"..."


뜻밖에도 왕이 선뜻 넘어가자, 최석정은 두눈을 크게 떴다. 막상 최석정의 이름을 삼망에서 빼버린 남인들도 얼떨떨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왕의 용안을 쳐다보려다가 실태를 깨닫고 눈길을 최석정에게로 돌렸다. 최석정 본인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자였다. 일신에 지닌 학문과 실력도 그 나이대에선 최고의 경지였다.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운지, 붓을 꽉 움켜잡는 손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최석정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분주한 눈길로 삼망의 명부를 살피면서 그중 약간의 변동이 생긴 공조판서, 예조참판, 좌윤, 우윤, 교리, 대사간, 대사성, 수찬, 그리고 승지의 삼망을 추려내었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먹물을 찍고는 각각 삼망의 수망에 오른대로 맨위에 적힌 이름들에 낙점을 하였다.


"당상관은 이조에서 수망에 올린 대로 민점을 정2품 공조판서로, 최문식을 종2품 예조참판으로, 김덕원을 종2품 좌윤으로, 이봉징을 종5품 교리로, 정지호를 정3품 대사간으로, 이원정을 정3품 겸 대사성으로, 목창명을 정3품 승지로, 김우석을 종2품 우윤으로 삼는다."


하나같이 수망에 적힌 이름들 그대로 왕이 낙점하여주니, 이조로선 다행스런 노릇이었다. 하기야 왕도 삼망을 다 살피기도 벅찬 노릇이니, 구태여 딴죽을 걸어봤자, 왕 본인만 고달플 일이었다. 그냥 이조에서 올려주는대로 삼망의 수망에 먹물을 콕 찍어주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당하관들도 삼망의 수망대로 임명한다. ..."


허적이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서 고개를 들었다. 일전에도 왕이 최석정에게 예부운략의 발행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건 수찬이나 할 법한 일이었던 탓에, 허적은 왕이 너무나 쉽게 최석정의 봉교직 누락을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런 허적의 눈과 잠깐이나마 마주친 숙종의 검은 눈동자엔 도발적인 눈웃음이 비꼈다.


"단, 정5품 수찬은 따로 가망加望(삼망에 없는 이름을 추가로 올림)하여, 최석정을 명한다."

"네에?"

"전하!"


최석정은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단숨에 정5품 수찬이 될 줄은 미처 상상도 못하였다. 수찬에 응천을 잘못한 죄로 파직까지 당할 정도로, 수찬이란 자리가 막중한 요직인 탓에 더 얼떨떨하였다.


당사자인 최석정도 이토록 숨이 넘어갈 듯 놀랐지만, 그를 찍어내지 못해 안달인 남인 및 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신료들이 두눈을 지릅떴다. 하나같이 충격으로 눈동자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정7품인 봉교 최석정을, 무려 정5품의 수찬에 명하다니.


"전하, 이건...정7품에서 정5품으로 너무 파격적인..."


채 말도 잇지 못하는 신료들을 보며 숙종은 얄궂은 눈웃음을 지었다. 이미 최석정을 수찬에 앉히려고 진즉부터 별러왔던데다, 수찬에 앉히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숙종은 눈앞에서 수찬의 삼망에 적힌 명부를 그대로 한손으로 구겨버리고서 마치 종이로 공을 만들듯이 꼭꼭 눌러보였다.


"나머지는 다 이조와 병조에서 올린 수망 그대로 권점하였는데 뭐가 문제인가. 수찬 하나 왕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소 최석정이 학식과 문장이 누구보다 출중하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알아서 내가 정한 것이다."

"..."

"과인에게 권해주는 서책들이 과인에게 크게 유익했던 바, 수찬직엔 최석정 만한 적임자도 없을 터. 그리들 알라."


숙종은 입안 가득 무언가를 씹는 기분으로 단호하고 낭랑하게 못박았다. 욕심 많은 남인들이 문관 직을 죄다 차지하고도 최석정마저 밀어내지 못해서 안달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궁이 태아를 잃은 지금, 자신이 결사적으로, 또 필사적으로 지켜줘야 하는 건 최석정이었다. 이것 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숙종은 공처럼 꾹꾹 구겨놓은 종이뭉치를 쓰레기 던지듯이 툭 내던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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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4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9.04 14:47
    No. 1

    후아. 진홍이의 질투.. 보기 좋습니다^^
    숙종과의 달콤한 키스 장면은 뚜둣 뚜~♥♬ 뚜뚯 뚜~♬
    마치 개콘의 두근두근에 나오는 배경음악이 들리는 듯. ㅋ

    녹피화를 벗기는 달인의 모습인 두광이도
    옆애서 바람을 잡는 건지 부는 건지 모를 중궁전 상궁들의 말도 ㅋ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06 14:23
    No. 2

    개콘을 보지 못해서..ㅎㅎ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진홍이도 사람이라...아마 짧은 시간동안 가장 많이 변해갈 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9.04 16:46
    No. 3

    지아비가 지어미에게 저렇게 잘해주는데, 저렇게 천생연분인데
    에휴... ㅜㅠ
    문득 든 생각인데, 희빈 장씨가 중궁 생전, 악역을 독톡히 해줘서
    나중에 숙종이 숙빈 최씨에게 그나마 잘해주게 만드는 기반을 다진게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듭니다.
    (말이 좀 이상합니다 -_-;;)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06 14:25
    No. 4

    희빈장씨를 악역으로만 그릴 생각은 없는데, 제가 천지인에서 설정한 캐릭터보다 나쁘게 그릴 생각은 없는데도, 인경왕후 시점으로 그리다 보니 좀 밉살맞아지네요. 나중에 인현왕후 시각으로 그리면 오히려 또 변할지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9.05 07:15
    No. 5

    종이를 둥글둥글 뭉치는 숙종 모습이 어쩐지 귀엽네요. 우리 집 앞을 돌아다니는 성질 더러운 다람쥐가 떠오르는 듯.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06 14:26
    No. 6

    성질 더러운 다람쥐...ㅎㅎ; 일화환님은 물 맑고 공기좋은 전원에 살고 계신가 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3.09.05 08:13
    No. 7

    본격 품계 맘데로 오르 내리기가 발동하는건가요 ㅎㅎ...
    최석정은 이래나 저래나 고생의 문으로...

    달달한 진홍이 오랜만이라 보기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06 14:26
    No. 8

    최석정 고생문 입문입니다. 앞으로 저 캐릭터들 다들 빡세게 고생한다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jk******
    작성일
    13.09.05 08:34
    No. 9

    뺄 사람을 빼야지요.... 하나 받고 하나 주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06 14:27
    No. 10

    조금 있으면 와장창...일대 일 계산이 안되지요. 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9 하늘하늘시
    작성일
    13.09.05 22:24
    No. 11

    추천이요~
    올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06 14:27
    No. 12

    아니, 옆동네에서 왜 여기로 건너오셨...그냥 옆동네에서만 추천 눌러주세요. (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9.10 11:42
    No. 13

    진홍이와
    최석정...

    그냥 가슴 졸이면서 한편 한편을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12 20:16
    No. 14

    슬슬 휘몰아칠 때가 됐지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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