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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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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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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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8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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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해의 그림자 128

DUMMY

최석정이 김석하를 데리고 자신의 초가 앞에 이르니, 안채에선 불빛이 아직도 장지문을 환히 비추는 참이었다. 아내는 물론 자식들까지 여태 눈을 붙이지도 않고 최석정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최석정은 한숨을 나직이 내쉬며 사립문을 삐걱 열었다.


"누구세요?"


살짝 겁을 지어먹은 아내의 음성이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아내의 반가운 얼굴에 최석정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요."


딸깍하니 문고리를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문틈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아내의 턱 밑으로 그의 열두살 딸도 어여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아부지!"

"이소야!"


최석정은 등뒤의 김석하가 더럭 신경쓰여 얼른 한발 내딛으며 김석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밀어냈다. 아내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건지, 딸의 얼굴을 못보게 하려는 건지, 김석하의 시선을 황급히 치우는 모습이었다.


"웬 손님을..."


경주이씨는 난감한 기색으로 최석정의 어깨너머를 쳐다보았다. 중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여, 중궁은 아이를 잃고, 자신은 이제 입덧을 벗어나서 슬슬 안정기에 접어드는 참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매사 조심을 해야 복중태아를 지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지아비가 하필이면 손님을 데려 왔으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이 친구가 배멀미를 하여 내 청단령에 토했지 뭐요?"

"네에? 당신의 청단령에요? 며칠이나 입었다고."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김석하에게 닿는 경주이씨의 눈길이 더욱 뾰족해졌다.


지아비를 따라 박태보와 오도일이 찾아들었을 때, 저들이 입은 청단령에 얼마나 속이 시큰하였던가. 출중한 실력을 지니고도 대과에서 겨우 급제만 한 탓에 녹단령만 겨우 입는 지아비의 신세가 늘상 아쉬웠다. 이제야 지아비도 청단령을 입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푸릇푸릇한 청단령에 토악질을 해대다니.


"그러니 말이오. 그래서 내가 한바탕 퍼부었소. 임신한 몸으로 당신이 토묻은 청단령을 빨아주기도 힘든데."

"..."

"하여 이 친구가 직접 빨아주러 따라왔소. 괜찮으오?"


최석정의 말에 경주이씨는 깜짝 놀란 눈을 깜빡이곤 다시 어깨너머의 거무스름한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방안이야 훤하지만, 지아비가 서 있는 사립문 쪽은 고작 달빛만 어슴푸레 어둠을 흐릴 뿐이었다. 그리 어두운 밤공기 속에선 손님의 얼굴 윤곽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부지 청단령을 빨아주러요? 그건 소녀도 할 수 있사온데..."


최석정의 어깨 뒤로 밀려난 김석하는 힐끗 고개를 돌려 계집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고작 열두살, 이제 열세살이 되는 계집아해라니. 아무래도 최석정이 꽁꽁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으려는 쪽은 그 처가 아니라 딸 쪽인 것 같았다. 저 아이의 이름이 이소라고 했던가. 최이소...?


"설마, 굴원의 이소는 아니겠지요? 떠날이離, 근심할소騷..뜻이 좋진 않은데."

"보지 말라니까!"


최석정은 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이었다. 아예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김석하의 두눈을 가리기까지 하였다. 김석하로선 어이가 없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더니, 이제 열두살, 저 어린 계집애에게 무슨 딴맘을 품을까봐서 전전긍긍이라니.


"울타리리籬, 맑은대쑥소蕭일세."


딸의 얼굴을 보지 말라면서도, 최석정은 불길한 말을 듣고 싶진 않았는지, 이름은 순순히 가르쳐주었다. 울타리의 맑은대쑥이란 이름에 김석하는 입가에 여릿한 웃음을 띠었다.


"울타리의 맑은 대쑥이라...좋은 이름이군요."

"담아두지 말게."

"어린애한텐 취미 없습니다만."


김석하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마시는 최석정을 흘겨보며 딱 잘라 말하였다. 얼핏 한눈에 봐도 여태 초경도 안 치른 아이를, 유난스런 자부심으로 싸고 도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졸지에 어린애라고 무시당한 이소가 김석하를 쏘아보며 받아쳤다.


"이래뵈도 주역도 거의 익혔사옵니다?"

"이소야."


경주이씨는 타이르듯 말하고선 방안 구석에 놓아둔 은주병 한동이를 들고 일어서서 툇마루로 나왔다.


"잠시만요. 중전마마께서, 홍로주 한병을 보내셨습니다."

"뭐? 중전마마께서?"

"예, 산증에 좋다 합니다. 모쪼록 건강을 챙겨서 전하를 잘 보필하라 하셨답니다."


경주이씨의 설명을 들은 최석정은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질 않았다. 그는 성큼 다가들어 달빛에, 또 문틈의 불빛에 은주병을 살피고, 또 뚜껑을 열어 안의 붉은 술색깔에 빠져들고, 코를 갖다대어 냄새를 킁킁 맡아보며 감격해했다.


"이런 광영이 있나. 중전마마께서!"


김석하는 놀란 눈으로 은주병을 쳐다보았다. 왕은 물론 왕비까지 각별하게 최석정을 챙기는 모양이었다. 산증에 좋다고 따로 홍로주까지 챙겨보내다니.


"홍로주면, 내의원에서 특별히 빚은 약술이 아닙니까?"

"마셔보았는가?"

"병판대감 덕분에요."

"..."


최석정은 잠시 침묵했다. 이제 보니 김석하는 입이 고급이었다. 내의원에서 빚은 홍로주까지 마셔본 입이라니. 그는 떨떠름한 경계의 눈초리로 김석하를 쳐다보았다.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공복을 벗어서 석하의 손에 내밀었다.


"깨끗이 빨게나."

"예."


김석하도 청단령을 받아들며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단으로 지은 공복은 꼭 찬물로 세탁을 해야만 한다. 이 엄동설한에.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엄연히 멀쩡한 공복에, 역한 토물을 묻혀놓았으니 기필코 책임을 져야 했다.


"우물가가 어디..."


김석하는 한복을 받아들고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말을 잇기도 전에 최석정이 손가락으로 우물쪽을 대충 가리켰다.


"끝나면 한잔 하세."

"네?"

"산증에도 효험이 있는 술이니 멀미에도 효험이 있겠지."

"그럼요."


핏기 하나 없던 김석하의 얼굴에 겨우 화색이 돌았다. 왕비가 하사한 귀한 술을 자신에게 나눠줄 모양이었다. 비록 손가락 마디마디 얼어붙는 고통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석하는 최석정의 청단령을 팔뚝에 걸쳐들고 우물가로 다가갔다. 자칫 아이들이 빠질세라 유독 운두를 높인 우물이라 한눈에도 두레박이 제법 깊게 드리워진 형태였다. 그저 아낙 혼자 걸터앉을 만큼 펑퍼짐한 바위 하나만 덜렁 놓인데다, 그 앞에도 항아리 뚜껑처럼 넓찍한 자배기 하나만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김석하는 자배기 뒤에 놓인 바위에 가만히 청단령을 놓아두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자배기에 부었다. 그리고 자배기 앞으로 가서 가만히 바위에 걸터앉고 조두가루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그의 눈앞으로 조막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헉!"


귀신이라도 튀어나온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김석하가 몸의 중심을 잃고 그만 뒤로 나자빠지는 순간이었다. 얼른 손바닥으로 바위를 짚고 눈앞을 보니 웬 어린 소녀가 조족등을 턱밑에 들고 놀래키듯 서 있었다. 조족등 불빛에 아이의 얼굴이 괴상망측한 도깨비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킥..."

"뭐야 너!"


한번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요란스레 날뛰었다. 아이는 키득거리면서 김석하의 놀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서웠어요 그렇게?"

"그냥 놀란 것이다."


김석하가 두눈에 힘을 팍 주고 쏘아보자, 아이는 조족등을 살짝 옆으로 치우고선 조막손을 김석하의 눈앞으로 다시 뻗었다.


"이거요. 조두요."


김석하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냥 앳띤 얼굴로 희붉은 녹두가루를 콧잔등에 묻히고서 아이는 두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거렸다.


"여기다 풀까요?"


제법 야무지게 말하는 아이를 보고 김석하는 어이가 없어서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장이라도 최석정이 부지깽이라도 들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왜요? 또 뭐 필요해요?"

"아니. 장중보옥掌中寶玉이 여기 와 있으니, 네 아버지가 날 가만두시겠나 싶어서."

"피..."


이소는 자배기에 휙 조두를 뿌려버렸다. 희붉은 가루가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자배기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돌았다. 석하는 얼른 휘저어 물속에 녹이려고 한손을 담갔다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엄청난 한기에 헛숨을 들이켰다. 이가 저절로 딱딱 마주칠 정도로 살인적인 한기였다.


"물이 많이 차죠. 그래도 비단은 찬물로 빨아야 해요. 안 그러면 막 울어서 쪼글쪼글해진대요."


애써 신음을 참아내면서도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곱송그리는 순간에 옆에서 종알종알 당연한 소리를 하는 계집아이가 미워서 김석하는 눈을 흘겼다.


"꼬마...아가씨는 이만 가보시오."

"아저씨가 잘 빠는지 지켜볼 건데요?"

"아저씨?"


석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계집아이를 쏘아보았다. 약관도 안된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는 아이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해본 터였다.


"아저씨나 아가씨나."

"..."


석하는 한숨이 목울대로 치받는 것을 느끼며 이소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밤중에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얄미웠다.


"안 자고 뭐 하냐?"

"아저씨가 아부지 관복 깨끗이 빠는 거 확인하고 잘 거예요."

"가라."

"도와드리려고 왔는데."

"지켜보러 왔다며."

"그게 그거죠."


이소는 아예 김석하의 옆에 걸터앉아버렸다. 김석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틀어 이소를 쳐다보았다. 제 부모를 닮아서 얼굴은 이쁘장한 것이 맹랑하기 짝이 없다. 석하는 이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물어보았다.


"너, 위로는 언니 없냐?"

"왜요?"

"그냥."

"없어요."


김석하의 얼굴에 실망스런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 그럼 근화가지 괜히 드렸나."

"네?"

"아니, 됐어."


이소의 아랫입술이 뾰로퉁히 튀어나왔다. 이소는 입술을 움츠리고 어슴푸레한 달빛에 비친 김석하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쩐지 섭섭해서 쳐다보았는데, 이상했다. 얼굴에 꼭 아교라도 칠해놓았는지, 이소의 시선이 왠지 그대로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예."

"뭐가?"


김석하는 혹시나 싶어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매만져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아까 재산루 앞 개울에서 일부러 그 얼음장 같은 물로 세안을 했었다. 물벼락을 내리듯이 얼굴에 끼얹고 또 끼얹어서 멀미가 가실 때까지. 그런데도 혹여 실수로 얼굴에 토물을 묻혔던가. 이상해서 이소를 쳐다보니 이소는 키득 웃었다.


"제 눈길이 묻었어요."

"너..."

"손길이 묻듯 눈길도 묻는 거래요. 자꾸자꾸 보면."

"그럼 보지 마."


김석하가 시큰둥히 대꾸하는데도 아이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계속해서 물어왔다.


"근데요. 아저씨가 근화가지 주신 분이에요?"

"..."

"맞아요?"

"..."

"맞냐구요?"

"내 근화가지 잘 있어?"

"네. 저기요."


이소가 사립문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담장 아래에 볼품없게 심어놓아 앙상한 줄기가 한자 남짓한 높이로 자라는 참이었다. 이 혹독한 겨울날씨에 얼어죽기 십상이었다.


다만, 햇살 한줌이라도 근화가지로 뿌려져서 환하고도 따스하게 비추면, 생기를 잃지 않을 것만 같았다. 봄이 오면 푸릇푸릇한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이 오면 새하얀 꽃봉오리를 내밀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 향기까지 나진 않을 거고, 나서도 안되겠지만.


"제가 심었어요. 제일 햇볕 잘드는 명당으로요.."

"..."


김석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다시 근화가지를 쳐다보았다. 밤중이라 햇볕이 잘 드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얼어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도 신기한 일이었다. 직접 심었다니 그 심은 손도 신기하게 느껴져서 그는 이소의 손을 쳐다보았다.


제법 섬세한 손인가?


하지만 이소는 푸른 청단령을 무지막지하게 자배기에 푹 담가버렸다. 그 바람에 조두가루가 동동 뜬 윗물이 넘쳐났다.


"앗!"


이소가 두손으로 조두가루를 주워담아서 도로 자배기에 풀어넣었다. 김석하는 그런 이소를 흘낏 보곤 얼른 청단령을 빨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끝이 닿자마자 아려오며 심장까지 서늘해질 정도로 물의 냉기가 대단했다.


김석하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계속해서 토묻은 옷자락을 치대었다. 특히 아까 최석정이 백학이 홍학이 되었다고 푸념한 흉배를 중점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울분을 담아서.


"아흐..."


참다 못해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 시려요?"

"..."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소는 그런 석하 옆에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갔다. 석하는 이소가 가버렸나 싶어서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청단령을 빨았자. 순식간에 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서는 후들후들 떨면서 자배기 물속에서 빼내었다가는, 좀 견딜만 하면 다시 손을 담그기를 무려 대여섯번 하고 나니, 이제는 손가락 뼈가 뒤틀리는 듯한 동통에 턱이 떨릴 지경이었다.


"여기요."


이소가 흰 김이 모락모락나는 또 다른 자배기를 김석하의 눈앞에 내밀었다.


"손 담궈 가면서 하세요."

"..."

"고맙죠?"

"그래"


김석하는 이소의 마음씀씀이에 살짝 감동했지만, 생색내듯 물으니 살짝 배알이 뒤틀렸다. 고맙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어린애와 뭐하고 있는지도 어처구니 없었다.


"몇살이냐?"

"열둘이요. 곧 열셋이 되어요."

"..."


무려 일곱살이나 어리다니. 김석하는 가만히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무려 일곱 손가락이 펼쳐진 채였다. 한숨이 나왔다.


"왜요?"

"..."

"왜 한숨을 쉬어요?"

"아니...내가 지금 어린애랑 뭐하나 싶어서."

"빨래하잖아요."

"..."

"보세요. 홍학이 도로 백학이 됐네요."

"..."


아무 대꾸도 않고 김석하는 옆에 앉은 이소를 가만히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비친 아이 얼굴이 마냥 앙증맞았다. 아비가 천재인데 딸도 천재일까.


더는 아이한테 말려들지 말고 어서 청단령을 빨고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석하는 이내 빨래에 박차를 가했다. 소맷부리와 아랫단 구석구석을 살펴서 희붉은 토물을 찾아가며 빨고 또 빨았다. 그나마 이소가 가져온 더운물이 제법 도움이 되었다. 손이 시뻘겋게 퉁퉁 부을 때쯤 더운물에 살짝 담가주면 냉기를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손가락 끝에 아무런 감각이 없을 때쯤, 최석정의 청단령은 어느새 희붉은 얼룩이 깨끗이 지워졌다. 이제 되었나 싶어서 김석하가 입안 가득 바람을 채웠다가 한숨을 토해내는 순간, 이소의 작은 손가락이 옆구리를 가리켰다.


"여기도요."

"뭐?"

"보세요."

"..."


귀신같이 잡아내는 이소의 손가락 끝에 김석하는 그녀를 돌아보는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하필이면 다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얄미운 손가락을 깨물어버리고 싶다는 유치한 충동까지 들 지경이었다.


"이건 제가 할래요."

"뭐?"


김석하의 눈앞에서 이소는 야무지게 청단령을 뺏아다가 옆구리 부분을 치대었다. 하지만 기세좋게 치대다가 한순간에 손가락을 깨문 듯한 엄청난 냉기에 이가 덜덜 떨렸다. 이소는 신기한 눈빛으로 김석하를 돌아보았다.


"와, 아저씬 어떻게 참았어요?"

"..."

"대단하다."

"..."


이소는 더는 참지 못하고 얼른 찬물에서 두손을 빼어 더운물에 담갔다.


"그럼 그렇지."


김석하는 고개를 가로젓곤 이내 청단령을 자신 앞으로 홱 끌어다가 옆구리 부분을 비벼 문질렀다. 다행히도 얼룩이 흐린 탓에 금세 지워졌다.


"다 됐다."


이소를 돌아보니, 하필이면 아직도 더운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어린 탓인지, 아니면 양갓집 여식이라선지, 그 잠깐 찬물에 손을 담그고도 한참을 더운물에 미적대다니.


"비켜."


석하 역시 더는 두손의 시린 냉기를 참을 수가 없었던 탓에 이소의 두팔을 잡아빼고 자신의 두손을 더운물에 집어넣었다. 처음엔 따끈따끈했던 더운물은 이미 흰김이 사그러들고 손가락끝에 닿는 수온도 이제는 미지근했다. 그래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는 것을 막아줄 만큼은 되었다.


"나두요..."


김석하가 두손을 담그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더운물 속에 이소가 얼른 두손을 담갔다. 같은 자배기에 손을 마주담그고 있자니, 이소의 새끼손가락 끝이 김석하의 손등에 살짝 닿았다.


어어?


김석하는 혹시라도 최석정이 나와볼까봐서 겁이 더럭 났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검술실력을 지닌 자신이지만, 그래도 딸사랑에 눈이 뒤집힌 아비는 무서운 법이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최석정의 모습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저씬 이름이 뭐예요?"

"..."

"아버지한테 여쭤보니 대답을 안해주셨어요. 이름이 뭐예요?"


하기야 최석정이 말해줄 리가 없었다. 김석하는 콧잔등을 찡그리곤 입맛을 쓰게 다셨다. 괜히 잘못 엮여서 코가 꿰이면 곤란했다. 최석정의 도끼눈에 찍혀 좋을 것이 없었다.


최석정만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 딸 자체로도 무서웠다. 자신은 이제 약관을 바라보는 나이이고, 남들은 약관이면 애가 둘은 생길 나이였다. 하지만 젖비린내 나는 어린 계집아이한테 덥썩 말려들었다간 자신은 앞으로 몇년간은 꼼짝없이 절간의 중마냥 독수공방을 해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알아서 뭐하게."

"그냥요."

"말 안해."

"예? 왜요?"

"난 말 해줄 수 없으니, 네 아버지한테 들어."

"울 아버진 안 알려주신단 말이에요."

"..."


이소가 계속해서 보챘지만, 김석하는 입을 굳게 닫은 채로 청단령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그대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청단령을 두손으로 꾹꾹 눌러서 물기를 뺐다.


"같이 해요."

"손 떼."

"예? 그치만..."

"손 떼."

"..."


어둠 속에서 김석하의 두눈이 차갑게 반짝였다. 컴컴한 한밤중에도 그 눈동자에 다소 불그스름하니 광채가 도는 듯하였다. 이소는 흠칫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홍단딱정벌레..."

"뭐?"

"..."


이소의 입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태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이 사내랑 같이 있었다. 아비가 청단령을 빨라고 맡기고, 왕비가 내린 홍로주도 같이 먹자고 하는 걸 보고 안심하고 옆에 붙어있었는데, 이제 보니 무서웠다. 홍단딱정벌레처럼.


"홍단딱정벌레라면...낮에는 땅속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나무 위로 올라와서 나비 애벌레를 잡아먹는 놈 말이냐? 몸체는 구릿빛에 머리와 앞가슴은 홍단빛..."

"..."


꿀먹은 벙어리처럼 이소가 아무 말도 못하자, 김석하는 냉랭한 눈길로 흘겨보곤 그대로 성큼성큼 사랑채로 걸어갔다. 이소한테 청단령을 맡겼다간 같이 있었다고 최석정이 노발대발할 것이 뻔하였다.


그런데 어쩐지 가슴어림이 저릿했다. 여태 재잘거려놓고 한순간에 귀신 보듯 떨어져나가다니. 어이없고 허탈했다.


그렇게 김석하가 사랑채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이소는 멍청히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같이 있다 보면 으슬으슬 몸이 추웠다. 방금 김석하가 자신의 옆에서 사라지자 오한이 살짝 가시는 듯 하였다. 왜 아버지는 저런 사람하고 같이 다니는 걸까. 그리고 자신은 왜 여태 저런 사람한테 붙어있었던 걸까.


"자, 들게. 몸속에 더운 기운이 확확 돌 걸세."


최석정은 사랑채 자신의 방에서 김석하를 맞이하여 은주병을 기울여서 홍로주를 따라주었다. 홍로주는 은과 성질이 어울린다지만, 자신의 집엔 지금 은잔이 없었다. 그는 이 추운 날씨에 고생한 석하를 위해서 흰 도자기잔에 홍로주를 따라주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김석하는 두손으로 정중히 술을 받아들었다. 자신에게 술을 따라주는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기개와 절개의 표상인 대나무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공손하게 상체를 틀어서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는 최석정이 건네주는 술병을 받아들고 자신도 정중히 술을 따랐다.


"배에선 다른 얘기는 없었는가?"

"..."


최석정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서 한모금 마시고 넌지시 묻는 말에 김석하는 눈빛이 가라앉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최석정은 흠칫해서 헛기침을 하였다.


"하긴 나머지는 병판대감께 고하겠구먼?"

"아...잠시 생각을 하느라...송구합니다."

"생각?"

"..."

"나도 생각 좀 해봤는데 말일세. 음지와 양지란 말이 아무래도 걸리네."

"음지와 양지요?"


김석하가 의아히 되묻는 순간,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서른 중후반쯤 되는 사내의 음성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이보시게, 최수찬!"

"..."


최석정의 두눈이 움찔했다. 벌써 인정이 울리고 자정에 가까워진 시점이었다. 이 깊은 밤에 남의 집을 찾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결례였다. 하지만 통행금지까지 무릅쓰고 찾아올 정도라면 어지간히 긴한 용건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김석하를 쳐다보았다. 김석하 역시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 느꼈는지 최석정을 마주보았다.


"뉘시오?"


최석정이 긴장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간혹 술에 취해 자신의 집을 찾아와서 임금 팔아먹은 최명길의 손자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보이고 가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귀를 문가까이에 대고 문밖의 음성에 취기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날세!"

"..."

"나도 왔으이!"

"나도 왔네!"


최석정으로선 한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섰다. 그러자 섬돌 앞에 모여있던 다섯명의 선비들이 최석정을 보고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오랜...만일세."

"..."


최석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송동에서 자신을 두고 꺽정이라 부르면서 비웃던, 송시열의 제자들이었다. 이 늦은 시각에 왜들 한꺼번에 자신을 찾아와서 이리 친근한 척 불러대지만, 왜 갑자기 친한 척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달갑지 않은 일에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상대들이 하필이면 송시열의 제자들인 것만 봐도.


"왜 먼저 갔는가?"

"먼저 가다니요?"

"우리가 병판대감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하였더니, 우리가 왔을 땐 가고 없었으이."

"..."


최석정은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며 목구멍으로 치민 한숨을 코로 조용히 내쉬었다. 송동에서 자신을 꺽정이, 꺽정이 하며 괄시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친한 척, 아쉬운 척 하는 모습들이라니. 더군다나 이들이 찾아온 용건이 아무래도 썩 달갑지가 않았다. 그는 방안에 앉아있는 김석하를 핑계로 그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미안하지만 선객이..."

"가봐야겠습니다."


최석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석하가 방안에서 뛰쳐나왔다. 속이 메슥거리는 듯이 입을 꾹 틀어막고서. 최석정은 기가 막혀서 홱 돌아보았다. 김석하는 귀한 홍로주가 도저히 속에 받지 않는 듯이 입을 가리고서 황망히 섬돌로 내려섰다.


"또 뵙겠습..."


입을 가린 채로 웅얼거리듯이 말하고는 그대로 뛰쳐나가는 김석하의 등짝을 향해 최석정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이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또 구토가 올라오는 듯이 내빼다니.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귀신같이 자신의 흑혜 좌우를 구분해서 신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영 눈에 거슬렸다.


"저,저..."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게나."


송시열의 제자들은 막무가내로 최석정의 어깨를 스치듯이 섬돌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떡하니 태사혜를 벗고 대청에 올라버렸다. 최석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고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어느사이 저들은 그대로 물밀듯이 한꺼번에 자신의 사랑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그것도 방금 전에 김석하가 나왔던 그 방으로.


"어후..."


최석정은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올 만큼 한숨을 푹푹 쉬었다. 속에서 열불이 치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하나!"


마치 주인이 손님을 찾듯이, 그렇게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최석정은 눈두덩이 늘어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고는 구부정히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 답답한 모습을 담벼락에 기댄 순라꾼들에게 바짝 붙어선 김석하가 은밀한 곁눈질로 엿보고는 피식 웃었다.


"형님께서 저자들을 보내신 겁니까?"

"예, 좀..."

"또 손 안대고 코 풀려고 하시네..."


김석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석정의 사랑채로 송시열의 제자들을 꾸역꾸역 밀어넣은 김석주의 속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의 외숙으로서, 송시열에 대한 왕의 분노만 생각하면 송시열의 제자들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석주는 앞으로는 왕의 손발이 되어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뒤로는 송시열의 제자들을 도와서 최석정을 압박한 셈이었다.


"자네도 서인이잖나!"

"서인이면 서인답게, 대로를 위해서 상소 한통만 쓰게!"

"상소가 힘들면 차자라도 올리게!"


최석정을 압박하는 음성들이 담벼락 너머로 흘러나왔다. 김석하는 미간을 찡그리곤 가만히 순라꾼의 팔을 꽉 잡았다.


"갑시다."

"응? 아니 난 저분들을 모셔다 드려야..."

"그래서, 이 밤중에 저 혼자 가라구요?"

"평소에도 잘 다녔지 않은가? 자넨 얼굴이 통행패잖나."

"속이 안좋아서요...도저히 혼자 못갈 것 같습니다."

"..."


순라꾼은 갈등이 되는 얼굴로 김석하를 쳐다보곤, 다시 사랑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김석하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가세.."

"고맙습니다."

"거 엄살은...에휴...나중에 나 문책당하면 그쪽이 책임지슈."

"그러죠."


김석하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송시열의 제자들을 위해 순라꾼이 모셔오고, 또 모셔다주는 것까지 참아줄 의향은 없었다.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겠거니 싶었다. 그는 짐짓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순라꾼의 부축을 받으면서 동촌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어쩌다 그 꼴이 된 게냐?"


김석주는 재산루 위층의 난간쪽에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김석하가 순라꾼의 부축을 받으며 재산루 아래에 당도한 터였다. 하필이면 송시열의 제자들을 호위하는 일을 맡긴 그 순라꾼이었다. 하지만 김석하 역시 몰골이 성하진 않았다. 다소 엄살은 심했을 지 몰라도 꾀병은 아니었다. 눈두덩도 다소 푸석푸석해 보였다.


"배멀미를 좀 했습니다."

"아...그 배멀미 때문에 이제야 날 찾은 게고?"

"어차피 체건이가 보고를 하였을텐데요."

"뭐..."


김석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체건이의 보고보다는 김석하의 입으로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체건이놈은 칼질도 잘하고 잠입도 잘하긴 해도, 막상 보고가 서투른 게 문제였다. 앞뒤 잘라먹고 제딴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얘기만 하더니, 막상 나중에 일이 터지고 보면 체건이가 덜 중요하게 생각해서 새까맣게 잊고 보고를 누락한 부분이었다.


"네가 말해봐라. 그놈은 보고를 영 건성으로 해서 말이다."

"..."


김석하는 갑자기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것처럼 괴롭게 두눈을 깜빡였다. 체건이 보고를 엉망으로 하는 건 김석하 자신도 알았다. 아이가 비오는 날에 투레질을 하듯 그는 입술새로 바람을 뿜어서 투루루 떨었다.


"..."


김석하는 다소 음울한 눈빛이 되어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김석주가 없었으면 자신은 지금도 포천의 지석묘 틈새에서 잠자고 먹고 하면서 생활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활이 좀더 풍요로워졌을지는 몰라도, 마음이 더 가난해진 느낌도 있었다. 재산루의 낮과 밤을 동시에 살아간다는 건, 행복하면서도 또 불행한 삶이었다.


"올라가겠습니다."


체념하듯 두눈을 내리감았다가 뜨고 김석하는 터벅터벅 재산루의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는 김석주의 등뒤에서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희재가 연등에다 순치통보, 홍광통보, 영창통보, 대명통보, 영력통보, 흥조통보, 이용통보를 차례로 매달아서 비변사 수장들에게 선보인 일부터, 장희재가 주화를 발행하여 통행시키겠다고 나선 일을 그대로 전하였다.


덕분에 김석주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도, 손에 잡힐 듯이 당시의 상황을 눈에 그릴 수 있었다.


"양지와 음지라..."


김석주는 제법 구미가 당기듯이 혀로 낼름 입술새를 핥았다. 좀전에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고도 순식간에 허기가 졌다. 목젖이 출렁거릴 만큼 군침을 꼴깍 삼키고선 그는 김석하를 돌아보았다.


"장희재의 속셈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예. 저는..."

"따라 와라."


김석주는 가만히 돌아서서 계단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묵묵히 계단에 걸음을 내딛었다. 어찌된 것인지 올라올 때보다도 내려올 때 더 소리가 요란한 그였다. 밤중이라 더 발을 내딛을 때마다 쿵쿵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김석하는 김석주를 뒤따르면서, 계단에서 울려퍼지는 진동에 머리가 윙윙 울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도로 아래층에 도달하자, 김석주는 서가 하나를 옆으로 밀어넣고 그 안에 숨은 벽장을 찾아내었다. 그 문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김석주는 허리춤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곧바로 비밀벽장을 열어젖혔다. 김석하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만력통보, 순치통보, 조선통보 등 각종 구리로 된 주화들이 가죽끈에 꿰여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물량이었다. 어림잡아 3만개는 되어보였다.


"어떻게..."

"조부님의 꿈이셨지."


김석주의 흰자위에 붉은 실핏줄이 도드라지며 꺼먼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음성도 착 가라앉았다.


"이 돈들이? 대동법이...아니구요?"

"대동법으로 길을 닦고, 그 다음에 돈을 돌리고, 그 다음에 시장을 키우고...그 배부른 조선이 꿈이셨어."

"..."

"하지만 조부님은 실패하셨어. 조선통보, 저 돈을 만들었는데, 돈이 안 돌아가. 백성들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쳐먹지를 않는 백성들이 쓰질 않아서. 내놓지를 않아서."

"..."

"밑 빠진 독처럼...그렇게 틈새로 줄줄이 빠져버려서, 끝끝내 불굴의 김육이 두손 두발 다 드셨으이...하필이면 내 조부의 가장 몹쓸 천적이 바로 무지한 백성들이었으니..."


김석주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치를 떨었다. 몸서리가 처졌다. 배부른 조선...그 조부의 꿈을 짓밟은 자들이 하필이면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백성들이라니.


"생각해보면 조부님은 너무 정직해서 탈이었어.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어. 너무, 너무..."


너무 백성들을 사랑해서 탈이었어. 김석주는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해서 할 말을 삼켰다. 목구멍이 순식간에 얼얼해졌다.


"그래서 진 거야. 백성들한테 지고 또 져서."

"..."


김석주는 아랫입술을 물어뜯을 기세로 혼잣말처럼 말하였다. 그렇게 조부 김육이 백성들에게 패배해서 실패했다. 이게 다, 조부가 조선을, 백성을 너무 위한 탓이었다.


"음지와 양지라...흐, 흐흐..."


김석주는 가슴과 배가 출렁거릴 정도로 숨을 가쁘게 쉬었다. 장희재가 그토록 자신하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신물이 왈칵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랫입술이 덜덜 떨리는 기분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제 와서, 딴놈이 혼자 성공해내는 그꼴을 보라고? 배 아파서 못보지. 그꼴은 못보지.."


김석주는 가만히 이를 갈았다. 그의 머릿속은 석하가 전한 장희재의 발언들로 무섭게 충돌했다. 그 충격과 고통을 참느라고 그 붉은 눈에 실핏줄이 더욱 불거졌다.


"허면 어쩌실 겁니까?"


석하의 물음에 김석주는 팔을 뻗어 벽장에 걸린 구리엽전들을 어루만졌다. 그 눈은 온갖 감회와 탐욕으로 뒤섞여서 촉촉하게 번들거렸다.


"이리 와서 들어보거라. 만력통보 50문. 개당 1전 4푼짜리. "


다소 흥분을 가라앉힌 김석주가 동전꾸러미 하나를 들어서 석하의 왼손목에 걸어주었다. 한눈에도 50개씩 꿰인 꾸러미였다. 하지만 김석하의 왼손목에 걸린 순간 그 무게는 어쩐지 자신의 환도보다도 가벼웠다.


"..."

"가볍지?"

"좀..."

"허면 이것도 들어보아라.."


김석주는 석하의 왼손목에 여전히 50문을 걸어둔 채로 나머지 오른손목을 잡아들어 또 다른 동전꾸러미를 걸어주었다. 순간 김석하는 오른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한 엄청난 무게와 고통을 차례로 느꼈다. 당장 양쪽 손목에 나란히 동전꾸러미를 채웠는데도 오른손이 축축 늘어질 지경이었다.


"어흐..."

"어떠냐, 무거우냐?"

"..."


오른손목은 더 아래로 처졌다. 석하는 자신의 양손목을 내려다보며 이어지는 김석주의 음성에 귀를 의심했다.


"그것도 똑같이 조선통보 50문이다."

"네?"

"50문 맞다. 그것도 똑같이 1문의 중량이 1전 4푼.."

"그 말은..."


석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두눈을 깜빡였다. 둘다 똑같이 각각 중량이 1전 4푼이라니. 하지만 왼손목은 그대로인데 이미 오른손목은 더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진 채였다.


"조선통보 1문의 중량이 만력통보를 전본으로 해서 1전 4푼...쌀 반되의 가치였지만, 다들 중량이 무거운 건 빼돌리고 가벼운 것만 내돌렸지."

"..."

"알겠느냐? 만력통보는 쓰이고, 조선통보는 쓰이지 않은 이유를, 오랑캐들은 쓰고, 조선인들은 쓰지 않은 이유를, 가벼운 건 쓰이고, 무거운 건 쓰이지 않은 이유를. "


석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만히 조선통보 꾸러미를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허면 장희재의 복안이란 것은..."

"역으로, 중량을 더 깎고 속일 거다. 더 가벼워지고, 더 가벼워진 것만 뒤로 또 뒤로 이 시장에 돌아다닐테니. 이 일을 장현과 윤정석이 돕는다면, 청국놈들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들이니."


김석주는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었다. 백성을 등쳐먹어야 이길 수 있다면, 그래야 동전이란 놈을 굴릴 수 있다면, 그래야 조선의 시장을 불릴 수 있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었다.


"나는 그분하곤 다르니깐."


작가의말

원래는 20일에 올리려다가....한가위 즐겁게들 보내세요.

덧. 다음화는 22일 이후에 올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2

  • 작성자
    Lv.80 jk******
    작성일
    13.09.18 03:03
    No. 1

    무서운 심계네요. 천하를 놓고 한판 승부도 결할 수 있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18 03:26
    No. 2

    수정하는 사이에...ㅎㅎ; 한가위 잘 보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9.18 03:24
    No. 3

    한가위 특집이군요!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18 03:26
    No. 4

    역시 수정하는 사이에...ANU님도 한가위 잘 보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9.18 04:53
    No. 5

    추석 잘 보내고 오세요^^ 가사일로 바쁘실 듯?

    이소와 김석하.. 아기자기하게 보고 갑니다.ㅎㅎ
    어린 아이가 눈길이 묻었다고 할 때의 앙큼함과 오글거림.ㅎ

    김석주는 장희재의 생각을 어떻게 이용을 할지....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2 15:18
    No. 6

    이소와 김석하...ㅎㅎ 이소 캐릭터가 온전히 자리잡혀야 할텐데요. 김석주의 대처는 다음화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9.18 04:58
    No. 7

    음..ㅋ 그리고 이번 회는 웬지 개그콘서트가 생각이 많이 났네요.

    이소: 이 부분은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석하와 이소의 손이 맞닿을 때와 이소의 말: 제 눈길이 묻었어요. (뚜둣 뚜~♬ 하고 울리는 두근두근 소리)

    송시열의 제자들 : 자네도 서인이잖나! 상소 하나 쓰자나!

    그냥.. 잠시..그런 생각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2 15:20
    No. 8

    아무래도 제가 개콘을 봐야 할까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9.19 14:15
    No. 9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군요.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일반 백성이 강해야 하고, 일반 백성이 강해지려면 시장이 커야하는데, 백성들 자신이 시장을 키우고 돈을 유통시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2 15:21
    No. 10

    그쵸. 상평통보에 관해 조사해보다가 저 부분 때문에 머리가 아프더라구요. 조선시대에 누차 상평통보의 발행을 시도해 왔는데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로 백성들이 쓰지 않아서라고 손꼽히는 부분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9.20 16:30
    No. 11

    이소와 석하의 러브라인^^
    이 돈이란 게 편리하자고 만든 건데
    예나 지금이나...
    에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2 15:23
    No. 12

    저 러브라인에 관심갖는 분들이 좀 있네요. 이소 캐릭터 문제로 골치 좀 썩는 중인데...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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