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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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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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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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8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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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연꽃이 자라는 곳(1)

DUMMY

검은 쇠로 만든 냄비 바닥이 불을 받아 주홍빛으로 번뜩였다. 국자를 들고 냄비를 노려보는 야우라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노란빛에 가까운 눈동자가 모닥불의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


그건 단순히 빛이 반사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야우라는 정말 잡아먹을 기세로 냄비를 보았다. 때가 되면 국자로 스프를 젓는게 아니라 냄비를 패 죽이려 할 기세다. 어쩌면 눈알이 먼저 또르르 굴러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러고 보면 맛있어지냐?"


난 감자 스프가 눈알 스프가 되어버리기 전에 말했다.


"지금 말 걸지마아? 집중해야 돼!"


야우라는 눈 한 번 떼지 않고 소리쳤다.


"적기! 알아? 딱 적절한 시기 말이야!"


스프를 젓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 줄 몰랐다. 그렇게 섬세한 작업인 줄도 몰랐고.


"레샤! 나무 좀 더 넣어줘!"


그렇게 화력이 세야하는 음식인 줄도 몰랐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레샤는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쉽사리 넣지 못했다.


"야우라... 이거 용광로가 아니잖아요..."


불이 세도 너무 센 것이다. 레샤는 땔감을 넣기는 커녕 넘실대는 불길에 주춤주춤 물러나기까지 했다.


"아니야. 고기도 구우면 생으로 먹는 거보다 더 맛있잖아 그걸 보면 뭐든지 뜨거우면 더 맛있어지는 게 아닐까? 더 뜨거우면 더 맛있어지는 거지."


"야우라는 탄 거도 주워 먹을 거예요...?"


"탄 거? 아 근데 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무슨 생각을 했다는 건지, 야우라는 국자 넣고 저으며 말을 이었다.


"탄거는 딱딱하잖아. 그리고 과자도 딱딱하잖아. 둘 다 불에 구워서 그렇게 된거고. 약간... 먼 친척 같은 거 아닐까?"


"아니라고요...!"


"다음에 확인해보지 뭐. 어쨌든 빨리. 불!"


겁먹은 눈으로 활활 타는 불길을 보던 레샤는 결국 야우라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던져 넣고는 후다닥 도망쳤다.


달 밝은 밤, 타오르는 불길, 번뜩이는 냄비와 매캐한 연기. 그리고 그걸 보며 신난듯이 국자를 젓는 한 사람.

왠지 모를 광기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위험한 실험 현장에서 도망친 레샤가 향한 곳은 에반젤린이 앉은 통나무 옆이었다.


"사제님이 뭐라고 말 좀 해줘요...!"


레샤가 에반젤린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치만, 요리사는 야우라 자매님인 걸요. 알아서 잘 하실 거예요. 하늘그림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배우는데."


레샤와는 받아들이는 온도부터 다른 에반젤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얼렀다.


"이러다 스프도 냄비도 숲도 다 태워버릴 거라고요...!"


"에이 설마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야우라가 하늘그림에서 클로에게 혼나가며 요리를 배운 것도 사실이고, 숲에서 불장난하다 큰 일 낼 뻔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행히 주변엔 불이 옮겨 붙을만한 것이 없었다. 정말 야우라가 불을 낼까봐 그런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우리가 선택한 자리는 냇가 옆의 자갈밭이었고 불로부터 안전한 곳이었다. 여기를 고른 이유는 별 다른게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나무가 여기 쓰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산 나무 같았는데, 참 고맙게 되었다.


믿어마다하지 않던 사제님에게 배신 당하자 레샤는 그 대안으로 날 찾았다.

괜히 야우라한테 불리기라도 할까, 레샤는 살금살금 에반젤린의 뒤편으로 숨어 건너편의 나한테까지 왔다.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레이크라도 뭐라고 좀 해줘요...!"


레샤는 내 팔을 흔들며 간절하게 말했다. 딱히 그런 애를 밀어내겠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쳤다고나 할까. 그와 반대로 이 분들의 체력은 끝을 모른다고나 할까. 아니면 대안책에 불과하다는 그 말투가 거슬린다고나 할까.


"우리 저녁만큼은 그냥 먹으면 안 될까?"


나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흔들리는 팔을 그대로 냅둔 체 말했다.


"그냥 먹으려면 지금 말려야 한다구요오...!"


"괜찮아. 엎지만 않으면 되겠지."


"지금 엎을 기세라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는 모닥불 쪽을 힐끗 보았다. 엎지는 않을 것이다. 나무로 만든 지지대는 튼튼히 고정해 놓았고 냄비가 주체 못 할만큼 큰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덜컥 하며 허여물그런 스프가 냄비 밖으로 넘실거렸다.


음...


안 엎겠지.


"그걸 왜 나한테 그래."


귀찮아진 나는 대충 그렇게 말하며 팔을 뿌리쳤다.

저번에 어디서 보니까 목석 같은 남자가 되게 멋있던데 이참에 그렇게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잇...! 레이크가 길만 안 잃어버렸어도 이렇게 안 됐잖아요...!"


이어지는 기가막힌 소리에 오늘의 다짐은 또 다시 하자마자 깨지게 되었다.


"그게 왜 내 잘못이야?"


나는 나름대로 중립적인 느낌을 내보고자 꼿꼿이 세우고 버텼던 등을 저돌적으로 구부렸다.


내가 코앞까지 가까워지자 레샤는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하여간에 나한테는 용감무쌍이라니까.

두 주먹 꽉 쥐고 버티고 선 레샤는 입술을 말아물고 있다가 공기를 팍 뱉었다.


"레, 레, 레이크가 물어봤잖아요...!"


그 얘기다.

레샤의 말대로 나는 지나다가 마주친 행상인에게 길을 물었다. 등짐을 잔뜩 맨 중년의 아저씨였는데, 그 사람은 이 길을 쭉 따라가다보면 마을이 보일거라도 말했다.


우리는 그 행상인이 알려준 대로 흔적이 옅은 오솔길을 따라 쭉 걸었다. 그리고는 마을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게 다였다.


"그래서 내 잘못이라고?"


"그래요. 레이크 잘못이에요!"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참나 세상에 이런 억울한 판결이 있을 수 있나. 고만고만하게 사는 촌구석 우리 동네도 재판 이런 식으론 안 한다.

하지만 별 수 있는가. 그러시다는데.


"알았어."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아버렸다.

더 얘기할 것도 없다. 내 잘못이라고 치면 뭘 어떡하려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알았어요?"


도리어 내가 수긍하자 레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방금 난 내 잘못을 시인한 것이다.


"알았다니까."


아무래도 못 믿는 듯 싶어 다시 한 번 확언해주자 레샤는 당황했다. 그리고는 도리어 화를 내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마요...! 레이크 잘못이 아닌데 어떻게 알아요...!"


그건 또 무슨.


"넌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맨날 내 잘못이라더니 이제는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난 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우리 전직 정령술사이자 소극장의 작은별 레샤 레스트레이드 양이 원하는 바를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계속 노려보자 레샤의 눈동자가 좌측 아래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리고는 새침하게 내뱉듯이 말한다.


"...레이크 같은 백수에게 뭘 원하겠습니까...?"


하하. 난 속으로 웃었다.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백수는 내가 아니라 너지."


"이익..."


도망쳤던 레샤의 새카만 눈동자가 다시 돌아왔다.


아, 이 기분이었구나. 이래서 나한테 맨날 백수라고 놀렸던 거구나. 늘 하듯이 깊이 생각치 않고 백수라는 단어를 꺼냈던 레샤는 스스로 만든 구덩이에 빠져 이도저도 못하게 되었다. 잇새로 바람만 내보내는 게 그 애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이제 뭐라고 하나 한 번 들어볼까. 상대적으로 여유를 가지게된 나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말싸움의 재미있는 점은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대답하지 못하면 그건 곧 패배를 의미했다. 지기 싫으면 아무 말이나 해보던가.


하지만 레샤가 선택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제 삼의 길이었다. 에반젤린에게 돌아가버린 것이다.


레샤는 내가 저에게 아주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사제님 뒤에 숨어서 이를 갈고 꿍시렁 댔다.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을 하게 된다면 그 어떤 재판관이라도 백이면 백, 내 편을 들어줄 것이다. 남의 등 뒤에 숨어서 위세를 빌리려는 저 간악무도한 꼬맹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세상에,


"어머 레이크 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있네! 그것도 엄청 가까이에 있었다.

에반젤린은 뒤에 숨은 레샤를 앞으로 당겨서는 보호해주듯 옆에 앉혔다. 옆에 앉아 묻히듯 에반젤린을 안은 레샤는 평안을 찾은 얼굴로 나 같은 건 이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아니! 뭘 원하나 한 번 듣고 싶다는 거지."


나는 그 몹쓸 상판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백수 얘기를 떠나서 원래 하고 있던 이야기는 그거였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면 어쩌라는 거냐고. 한 번쯤은 그려둔 그 이상적인 결말이라는 것을 들어보고 싶었다.


"어?! 내가 여기 누워서 돌이라도 맞기를 바래? 그거냐고."


"에이, 설마 그러셨을라고요."


심문은 레샤에게 하는데 대답은 에반젤린이 하니 이건 원하는 대꾸를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에."


그에 더불어 야우라까지 끼어들었다. 스프가 뚝뚝 떨어지는 국자를 빙빙 흔들어대는 것이 꼭 좋은 말 해주는 것처럼 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 쟁취해야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의외로 진짜 좋은 말이었다. 좋은 말이긴 한데.


"지금 그 얘기 하는 거 아니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니야?"


"그래."


"아님 뭐 어때."


야우라는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원하는 게 있지. 나도 원하는 게 있어. 지금은 이 스프가 무진장 맛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너한테 먹어보라고 할려고."


하며 그 애는 나에게 작은 스프 그릇을 내밀었다. 컵 같기도 하고 그릇 같기도한,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만든 애매한 모양의 것이었다.


"자, 사제 님이랑. 레샤도."


이어 야우라는 스프를 떠놓은 그릇을 모두에게 하나씩 돌렸다.


좋은 재료를 쓴 건 아니기 때문에 스프는 묽고 건더기도 별 다른 게 없었다. 챙겨온 감자며 얻어둔 건고기를 조금 찢어 넣은 것 뿐이다.


실력이 좋은 요리사라면 어디서 향기롭다는 풀이라도 뜯어다 더 넣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야우라가 만든 스프는 담백하고 고소했다. 그것뿐이었고 그거면 되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바라면 염치가 없는거라고나 할까.

약간의 흠이라면 너무 뜨거웠다. 입천장을 데일 정도로.


"...어쩐지 불을 그렇게 지르더라니."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호로록 마셔 넘겼다.


"뭐어?"


그게 또 들린 것인지 야우라는 도끼눈이 되서는 날 째려봤다.


"아니, 맛있게 먹었다고."


나는 다 먹은 그릇의 안쪽을 보이며 잘 먹었음을 시위했다.

다른 말을 하는 건 수고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대꾸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야우라는 눈으로 웃으며 기뻐했다.


"그래에. 원하는 걸 얻으려면 이렇게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째려보는 건 적극적인 걸 넘어서 협박이 아니냐고 물으려고 했던 난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볼 여지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참에 우리 서로에게 원하는 걸 좀 얘기 해볼까?"


그런데 야우라는 내가 손해볼 것만 같은 그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으음..."


아무도 동의한적 없는데 야우라는 혼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허리춤에 손을 걸치고는 진지하게 이마를 찌푸린다. 한참이나 굵은 신음을 흘리던 야우라는 대뜸 나에게 말했다.


"나는 레이크가 나한테 좀 더 친절했으면 좋겠어."


긴 시간 고민한 것치고는 평소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애가 항상 원했던 거고 난 항상 이해하지 못했던 거.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원하는 거야 있겠지. 나도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네가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어."


이런 아주 작은 소망도 있었다.

야우라가 입만 다문다면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최상의 친절을 배풀 수 있다.


말만 안 하면 딱 좋잖아. 입밖으로 내뱉었다가는 큰일 나겠지만 야우라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외모가 화려했다. 화장이나 장신구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화려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 쉽게 드러날만큼 큰 눈과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긴 속눈썹을 보면 그것밖에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내가 봐온 대부분의 사람과는 달리 햇빛을 받는 것에 따라 머리색이 연두색과 노란색, 두가지로 보인다는 것도 그렇고, 눈동자의 색도 그랬다.

붉게 건강한 저 입술이 틈 없이 딱 다물어져 있기만 하면 좋을텐데.


하지만 싱클레르 여신께서는 야우라를 만들 때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게 자기 작품에 취하지 말고 끝까지 신경 좀 쓰시지.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입좀 다물라고 한 것이 그리도 기분이 상하는지 야우라는 내게 삿대질을 해가며 에반젤린과 레샤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달리 에반젤린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후후, 저는 레이크 님이 지금도 충분히 친절하시다고 생각해요. "


"그게 아니라 부탁을 들어줘도 꼭 화를 낸다니까? 아으 됐어. 내가 나중에 레이크의 만행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알려줄게."


참나.

그 뻔뻔함에 나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외에도 야우라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에반젤린도 맨날 그럴 게 아니라 확실히 말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해줄 수가 없으니까. 에반젤린은 레이크한테 뭐 바라는 거 없어?"


왜 내가 뭘 해줘야하는 것 같은 흐름이 되었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저녁정도는 그냥 먹자니까...


공을 넘겨받은 것이 뜻밖인지 에반젤린은 조금 당황한 듯 웃었다. 그 애의 고민은 아주 짧았고 금방 자신의 소망을 말했다.


"음, 저는 레이크 님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고... 또... 즐겁게 지내신다면 더할나위..."


"그런 거 말고!"


다소 상투적인 이야기에 야우라가 팔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레이크가 에반젤린한테 해줬으면 하는 거 말이야."


"아, 레이크 님이 저에게요...?"


"응응 그거."


"음..."


에반젤린이 다시 고민의 시간에 빠지자 레샤와 야우라는 주의 깊게 그 시간을 기다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제와서 방 청소를 해준 것에 대해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은 그렇다보니 더 뭘 말할지 모를 애여서 걱정되었다.

걱정된다고? 왜? 그럴 것까지야.

하여간엔 이것도 결국 쓸데 없는 얘기를 꺼낸 야우라 탓이었다.


"아, 그럼..."


얼마나 지났을까, 에반젤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그..."


답지 않게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투였다.


"음..."


이따금씩은 나와 눈을 맞추다가 다시 피하기도 했다. 그만큼 말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대체 뭘까. 대체 뭐길래 저렇게 조심스러운걸까. 나는 괜한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전에 무슨 짓을 했던가. 무슨 말을 했던가. 아니면 하지 않아서 문제인가.

지난 날들을 빠르게 돌이켜봤지만 좀처럼 짚이는 게 없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검지 손톱을 깨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 에반젤린은 말했다.


"그럼... 그... 레이크 님이 절 먼저 안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나는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목이 매인다.


"흠, 크흠. 네헼?"


나는 헛기침을 하고서야 겨우 되물을 수 있었다.


먼저 안아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안는 거요. 포옹."


에반젤린은 팔을 둥글게 감아 포옹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다른 두 분에게는 자주 받는 편인데, 레이크 님에게는 별로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 안 될까요...?"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는 게 민망한지 에반젤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

이런 걸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별 거 아니다. 포옹이란 인사에 불과했다. 항상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드물지도 않다. 특히나 플라나에선 용서와 관행의 행동으로서 포옹을 한다. 그밖에 여러가지 의미를 담을 수도 있었다. 사실 하는 사람 마음대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근데.


"여기서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나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나 할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하하... 싫으시면 뭐... 안 해주셔도..."


그 미소는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싫으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그 사람이 가진 여러가지 마음과 상황과 성격과 가진 재산이라던가 그 날의 운수라던가, 해와 달의 위치라던가 아무튼 기타등등 세상 모든 것들에 의해 라고나 할까...

모르겠다.


"그럼, 해주시는 건가요?"


내가 부정을 부정하자 에반젤린은 반색을 표했다.


"뭐.... 그... 저기... 못 할 거야 없지?"


그야 말로 못 할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 안녕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네, 안녕하셨어요? 라고 답해주는 게 사람들간의 일이니까. 그런 거니까.


나는 에반젤린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막상 어떻게 해야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쟤가 오는 건지 아님 내가 가야하는 건지부터 해서 무슨 말을 해줘야하는 건지까지. 여태 에반젤린이 어떻게 해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뭐해. 그냥 하면 되지."


그 와중에 야우라가 옆에서 잡음을 넣었다.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


누가 안 한다고 했던가.

나는, 한 마디 한 것 가지고 더럽게 뭐라 그런다고 꿍시렁대는 야우라의 불만을 머리속에서 지우고 다시 에반젤린을 보았다.

사제님은 팔을 살짝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별 것 아닌데. 가끔 성당에 가면 형제자매들과도 하고 엄마랑도 어렵지 않게 했던 것들인데 상대가 에반젤린이라서 그런 것인지 좀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시간을 끌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에반젤린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 기다렸다.


누나가 말했었지, 백금발은 사람을 고귀해 보이게 만든다고. 정말 부럽다고.

나는 가볍게 굴곡져 하늘하늘하게 늘어진 에반젤린의 긴 머리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금발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은푸른색에 가까웠다.


둥글둥글한 눈웃음도 이가 드러나는 미소도 영락없는 성자의 도래인데.


그래 질질 끄니까 더 이상해지는 거였다.

나는 전에 에반젤린이 해주었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에반젤린을 끌어안았다. 평소와 조금 다른 게 있다면 항상 멍청하게 붕떠있던 팔을 이번엔 제대로 감아 에반젤린의 등을 두드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참 따뜻하구나. 흰 제의가 펑퍼짐해서 그렇지 에반젤린은 보기보다 체구가 작구나 그리고 깃털만큼 부드럽구나.


아니! 이어 나는 할 말을 골랐다.


"어...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돼?"


멍청하게도 난 그걸 에반젤린에게 물었다.


"하하. 아... 하하, 음..."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것이기에 에반젤린은 쿡쿡 웃으며 나 대신 격려문을 읊었다.


"이번 여행길은 별 탈 없이 끝날거예요. 앞으로의 길도 마찬가지고요."


따져보면 그리 대단한 말도 아닌데 필요할 땐 생각이 안 난단 말이야.


"거, 그거 하나 하는데 드럽게 오래 걸렸네. 뭘 어렵다고?"


야우라였다.

뒤이어 옆에서 격한 충돌이 일어났다. 야우라가 우리 둘을 동시에 안으며 밀쳐댄 것이다.


"야야야야야. 팔팔팔!"


갑작스런 공격에 나는, 그러니 우리 모두는 비틀대며 발을 다시 딛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어떻게 한건지 내 팔을 어거지로 들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오른쪽 어깨가 불필요하게 치켜 올라가고 말았다.


"어어어...!"


자세가 불안하기는 당연히 에반젤린도 마찬가지였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야우라는 머리 옆서 크게 소리를 냈다.


"레샤 너도 해! 빨리! 에반젤린이 원하는 거래잖아!"


"...전 아까 했는데요. 다음에 하겠습니다."


다행히 레샤는 이 이상한 행렬에 동참하고 싶진 않은 것인지 미래의 자신에게 그 일을 떠넘겼다.


"하하."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는지 에반젤린은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저희, 다음에도 꼭 이렇게 해요."


그게 에반젤린에겐 굉장히 기대되는 일일지 모르겠지만.


"아니요, 사제님. 난 팔이 아프다니까요."


난 힘들었다.


작가의말

비가 올 땐 시원한가 싶다가도 더운 날씨가 반복되네요. 다들 탈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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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45. 처음엔 두 칸이지(2) 19.12.05 99 5 14쪽
260 45. 처음엔 두 칸이지(1) 19.12.03 88 4 16쪽
259 44. 따뜻하고 매정한(7) 19.12.01 118 4 24쪽
258 44. 따뜻하고 매정한(6) 19.11.17 91 4 17쪽
257 44. 따뜻하고 매정한(5) 19.11.08 91 4 21쪽
256 44. 따뜻하고 매정한(4) 19.11.04 97 4 17쪽
255 44. 따뜻하고 매정한(3) 19.10.30 71 4 15쪽
254 44. 따뜻하고 매정한(2) 19.10.26 73 5 22쪽
253 44. 따뜻하고 매정한(1) 19.10.22 72 4 20쪽
252 43. 쌀쌀하고 살가운(5) 19.10.18 60 5 19쪽
251 43. 쌀쌀하고 살가운(4) +2 19.10.15 67 4 16쪽
250 43. 쌀쌀하고 살가운(3) 19.10.13 56 4 16쪽
249 43. 쌀쌀하고 살가운(2) 19.10.11 56 4 14쪽
248 43. 쌀쌀하고 살가운(1) +2 19.10.08 72 3 19쪽
247 42. 그러니까 이건(9) 19.10.06 62 5 17쪽
246 42. 그러니까 이건(8) 19.10.06 56 4 21쪽
245 42. 그러니까 이건(7) 19.10.02 150 4 21쪽
244 42. 그러니까 이건(6) 19.09.30 83 4 16쪽
243 42. 그러니까 이건(5) 19.09.26 80 5 22쪽
242 42. 그러니까 이건(4) +4 19.09.22 86 4 19쪽
241 42. 그러니까 이건(3) +2 19.09.18 78 4 17쪽
240 42. 그러니까 이건(2) 19.09.17 91 4 21쪽
239 42. 그러니까 이건(1) 19.09.11 102 4 21쪽
238 41. 그것뿐이야(6) 19.09.05 106 5 25쪽
237 41. 그것뿐이야(5) 19.09.01 100 4 26쪽
236 41. 그것뿐이야(4) 19.08.27 84 4 18쪽
235 41. 그것뿐이야(3) 19.08.25 83 4 16쪽
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3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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