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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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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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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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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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P.S 향과 색을 쫓아

DUMMY

Palm.Script


위대한 탐험가 페리도트는 말했다. 모든 것엔 그들만의 여정이 있다고.


모든 것에는 사람, 동물, 식물 뭐든 가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물며 물건조차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녀가 말한 모든 것은 의미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여정. 목적지로 향하는 길고 긴 길.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아드리안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도시에서 알아주는 구두장이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일을 배웠고 그도 그렇게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곤 하나 신발을 만들고 고치는 것만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기엔 쉽지 않았기에 그는 가죽을 사용한 것이라면 뭐든 봐주는 일을 겸하기도 했다.


아드리안의 가게는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층은 그가 노쇠한 아버지를 모시며 사는 집이었고 아래는 구둣방이었다.

그는 심각한 늦둥이이기도 했다.


가게는 늦은 아침에 열었다. 꼭두새벽부터 신발에 구멍을 내는 녀석은 얼간이라고 그의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아드리안은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물을 끓였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약해져 버렸다.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아드리안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남은 가죽을 기워 만든 누더기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가게를 열기 전엔 다 만들거나 수선을 끝마쳐 돌려줘야하는 신발들을 확인하고, 꺼내놓은 뒤 가게의 문을 열었다.


구둣방은 대체로 한가한 편이었다. 수선할 것이라고는 작은 구멍을 메우는 간단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제작을 의뢰받는 경우는 어떤 행사나 의례가 아니라면 좀처럼 없었다.


가게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닫았다. 만약 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을 이미 받았다면 더 일찍 닫기도 했다.


그 후에는 장을 봐왔다. 다음 날 먹을 빵과 얇게 저민 고기, 그리고 날짜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들을 더 샀다.


어두워지기 전부터는 수주 받은 일거리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아버지의 방에 불을 켜고, 자기 작업장에도 불을 켜 남은 일을 계속 했다.

이게 나의 여정인가?

아드리안은 하루를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는 일주일 중 이틀은 가게를 열지 않았다. 쉬는 날에도 할 일이 있다면 미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밖까지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산책을 하며 신발과는 관계없는 여러가지 것들을 상상하곤 했다.


그럼 혹시 이게 나의 여정일까?

그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드리안은 외출 하면 무언가를 보러 간다거나, 누구를 만난다거나 하는 특별한 목표를 두지는 않았다.

그저 가끔은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인들의 충고를 착실히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달랐다.

모든 골칫거리가 그러하듯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그가 사는 마을은 남쪽 부근에 작은 냇가가 흘렀다.

아주 얕은 곳이기에 그냥 들어가도 무릎정도밖에 되지 않는 깊이였지만 바퀴가 빠지기엔 충분했다.

마차나 말이 쉽게 오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곳에 아치교를 만들었다.


아드리안은 누군가에게 말한 적 없지만 내심 그 다리를 좋아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쓸데 없이 거창한 다리의 생김새도 그렇고 다리 위를 지나다 우연히 강의 작은 물고기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날도 돌아오는 길에 잠깐 구경이나 하잔 생각이었던 그는 다리 위에서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한 여자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 아니 그보다 어려보이는 젊은 여자.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고, 옷차림에서 마을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겨졌다.


그녀는 다리에 쌓은 벽에 몸을 기대서는 저 아래의 냇가를 보고 있었다. 단지 망연히 들여다본다기보다 꽤나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드리안이 다가오자 힐끗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냇가를 보았다.


뭔가 떨어져 빠지기라도 한 걸까, 얕아서 그냥 주우면 될텐데. 아드리안은 묻지 않고 그냥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물고기를 보고 오는 걸 깜빡 했다는 사실을, 아드리안은 작업용 대바늘의 상태를 점검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며칠 뒤, 아드리안은 평소와 같이 가게를 열었다.

내내 한가하다가 점심시간이 되기 전, 이웃집 카밀라 부인이 가게로 찾아와 헌 구두를 내밀었다.

아드리안은 부인이 말하기도 전부터 구두의 문제점을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수선이나 개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달라는 거였다.


"웬일이세요?"


아드리안은 안부를 물었다.

부인은 얼마 전에 신발을 고친 바가 있었다.

고친지 얼마 안 된 신발을 버렸을 리도 없고 이건 그 때와 다른 물건이었으며 좀 낡았을 뿐 망가진 것 같지도 않으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딸이 곧 시집가잖아. 보내기 전에 가는 길 편하라고 새 신 정도는 해줘야지."


카밀라 부인은 먼 길 힘들까, 걱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신발은 부인의 것이 아니라 그 딸인 쉐릴의 것인 것이다.


아드리안은 분명 한두 번은 만났을 부인의 딸을 기억하지 못했다. 여자들은 구둣방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구둣방이 퀴퀴한 냄새가 나고 뜬 먼지가 가득한 텁텁한 공간이라는 건 그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아드리안은 카밀라 부인의 딸을 한 번 상상해보았다.

신발은 그 사람에게 맞게 만들어져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구두장이 같은 직업은 세상에 필요 없었다.

예쁘고 편할 필요가 없다면, 다들 가죽 주머니를 발목에 묶고 다닐 것이다.


아드리안은 가능하면 카밀라 부인의 딸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새 신부란 원래 바쁘고 정신없는 법이라 일부러 부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방령의 여인이라.

아드리안은 문득 저번에 다리 위에서 본 여자가 생각났다.

그 사람은 어떤 신발을 신고 있었더라.

기억날 리 없었다.


"쉐릴은 날 닮아서 머리색이 좀 밝으니까 구두는 어두운 게 좋을까?"


카밀라 부인은 의견을 구하듯 물었다.

그 동안 이상하게도 아드리안은 계속 다리 위의 여자를 생각했다.


밝은 머리색이라.

그 여자는 머리색이 어두운 편이었다. 검은색으로 보일 수도 있는 갈색 머리칼을 한 쪽은 그대로 놔두고 한 쪽은 귀 뒤로 넘겨 수정이 박힌 작은 머리핀들로 고정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게 내가 식 전엔 덜 먹어서라도 관리를 하라고 했더니 울상이잖아."


다리 위의 여자는 오히려 약간 마른 듯 보였었다. 빨간색 한 벌 치마 위에 걸친 가운 같은 외투의 소매가 넓은 탓도 있을 테지만 그녀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가늘었다. 특히 손가락이.


"그 사위가 좀 된 사람이더라고. 금을 녹여 바른 반지라니. 내 딸이지만 정말 복 받았어."


스쳐보았던 그녀의 눈동자를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얘! 아드리안!"


카밀라 부인이 떽 소리쳤을 때 아드리안은 손끝을 불에 덴 것처럼 놀랐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내가 그만큼 특별한 물건이니까 아드리안을 찾아온 거라고 말하고 있잖아."


부인은 의심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드리안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아 물론이죠, 카밀라 부인. 빠짐없이 들었어요. 감사해요. 구두는 걱정 마세요. 따님이 떠나기 전까지 꼭 완성해 놓을게요."


그 날 아드리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 후로 아드리안은 늘 새 구두에 대해 생각했다.

식사를 할 때나 가죽을 손보다 말고 잠시 햇볕을 쬘 때나 심지어 잠들기 전에 누운 자리에서도.

비록 그 구두가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선물이고 그 자신은 쉐릴과 아무런 친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막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헌 신발에서 치수를 재 틀을 만드는 것은 금방 했지만 그 위부터는 약간의 막막함을 느꼈다.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얻은 답은 산책이라도 해보냐는 게 어떻냐는 거였다.

그건 그가 매번 하는 거였다.


아드리안은 산책하는 시간을 늘렸다.

가게 문을 약간 더 일찍 닫고 비는 시간에 마을 주변을 돌았다. 평소에 산책과는 달리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편편한 돌을 묻어 만든 도로.

그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이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떠날 일이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팔 손님이 없어도 연습 삼아 손질해보던 구두가 갑자기 막막해지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아드리안은 어떤 두려움까지 느꼈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불었다.

해가 기울어 생긴 건물의 그림자가 도로를 음지와 양지로 양분했다.

아드린안은 음지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그는 곧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의 앞 그늘 길에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섰던 것이다.


혼자서 연주하는 류트 소리가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빠른 손북 연주가 사람들의 흥을 돋웠다.

못 해도 열 명은 되었기에 지나가려면 볕이 드는 쪽으로 가야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테지만 아드리안은 그 날, 이상하게도 그 옆에 서서 같이 구경했다.


그는 음악을 즐긴 적은 없었지만 그걸 시끄럽다고 여기는 괴팍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눈길을 사로 잡은 건 춤을 추는 여자였다.

다리 위의 여자.

여자는 악기를 다루지는 않았다. 대신 음악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긴 머리가 붓처럼 휘어지도록 빙글빙글 돌고 치마를 집고는 망토처럼 날리며 반대 방향으로 또 돌았다.

여자는 그런 것들이 아주 익숙한 것처럼 능숙하게 해냈다.

즐거운 듯이 웃고 박수를 원하고 추파 받는 것을 훈장처럼 여겼다.

아드리안은 멍하니 서서 정신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음악이 멈추고, 춤도 멈추었다. 공연이 끝나자 여자는 관객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아드리안의 앞에 섰다.

그녀는 아드리안의 모자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뒤집어 들어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말로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땀 흘리는 미소로 값을 요구했다.


아드리안은 당황스러웠다. 그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첫 번째로 요구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말문이 막히면 얼굴이 빨개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드리안은 대장간에 새 바늘을 의뢰할 대금을 거기에 넣고는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저녁, 그는 검은색 구두에 유리구슬을 박는 건 어떨까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그렇지만 그런 공예는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가죽위에 옅게 새겼던 그림을 문질러 지우며, 그는 모자를 깜빡했음을 깨달았다.


그 다음 날, 아드리안은 또 그 거리, 그 자리에 갔다. 그러나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는 하던 대로 거리를 돌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에도 아드리안은 산책에 나섰다.

늘 갔던 대로의 길을 걷고도 왠지 아쉬웠던 그는 좀 더 멀리까지 나가 크게 마을을 돌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대장간에 들러 새 바늘을 의뢰했다.


평소와는 달리 약간 늦은 시간, 노을이 흰 벽돌을 붉게 만들 때에 그는 가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게 옆을 지키고 있는 그 여자를 보았다.


아드리안은 약간 당황했다.

마주치려고 돌아다녔을 때는 흔적조차 볼 수 없었는데.

지금 무슨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벽에 기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드리안은 마음 굳게 먹고 그 앞을 지나갔다.

왜인지 그는 모른 체를 하게 되었다. 못 본 것처럼 저 사람과 나는 연관이 없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문 앞에 서서 주머니 안의 열쇠를 찾았다.


"거기."


여자가 목소리를 냈을 때 아드리안은 놀라 열쇠를 떨어뜨렸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열쇠를 주웠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그에겐 머리 위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책망처럼 들렸다.


"아, 아뇨. 그냥 조금..."


아드리안은 놀랐다는 말을 꾹 삼켜 참고는 열쇠를 구멍에 맞추어 넣었다.


"우리, 전에 본 적 있지?"


그녀가 말했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말하는 전이란 것이 다리 위에서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인지 생각했다.


그게 아무짝이 쓸모없는 고민이라는 건 그녀가 손가락에 그의 모자를 걸어 보여주었을 때 깨달았다.


"모자를 두고 가면 어떡해. 하마터면 도둑이 될 뻔 했잖아."


"아. 아, 아... 미안해요. 그리고 어... 고마워요."


아드리안은 열쇠를 먼저 열까 모자를 먼저 받을까 어영부영 굴다가 모자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손가락을 구부려 모자를 움켜잡아 그의 손을 피했다.


"거기다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듣기로는 성실한 사람이라던데 쌩 놀러다니기만 하잖아."


"아, 아. 미안해요. 오늘 대장간에 들르느라."


아드리안은 또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오늘따라 좀처럼 맞질 않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어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어, 어... 그러니까... 들어오실래요? 모자값, 드릴게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드리안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 또한 피식 웃는 것이 그는 자신의 어눌한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반쯤은 도망치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의외로 여자는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석양이 들지 않는 집이기에 아드리안은 등잔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거스름을 하기 위해 선반에 넣어두었던 돈을 찾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정도 값으로 괜찮을지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는 금방 판단이 서지 않아 우뚝 멈춰 서버리고 말았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여자는 우두커니 선 그를 보고 말했다.


"당신 바보야?"


하며 그녀는 또 한 번 그를 비웃었다.


"내가 가져갔던 물건을 내가 돌려주러 온 건데 돈을 왜 줘? 누구를 강도로 만들려고."


그것도 그런가?

아드리안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아... 미안해요. 저는 그러려는 게 아니라... 그럼... 여기는 왜...?"


"왜긴. 오래 기다린 김에 물이라도 한 잔 얻어먹을까 싶어서 들어온 거지. 한 잔 줘봐."


"아... 잠깐만요."


이상하게 당당한 여자의 태도에 아드리안은 주눅이 들어 안쪽의 들통에서 보관해뒀던 물을 한 컵 떠서 돌아왔다.

그 동안 여자는 공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죽을 꿰맬 때 쓰는 큰 바늘의 끝을 만지며 날카로움을 느껴보기도 하고 밑창의 모양을 본 떠 만든 나무판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여기요."


아드리안은 여자에게 물을 내밀었다.

그녀는 컵을 받아 안을 보더니 픽 웃고는 그걸 마셨다.


안에 뭐가 들어있었나? 아드리안은 자신이 실수를 한 건 아닌지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그냥 마신 걸 보면 무언가 중대한 것은 아니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앉지 그래. 불편하게."


여자가 말했다.

아드리안은 마치 저가 손님인 것처럼 그 말에 따라 작업대 앞의 의자에 앉았다.

정작 그녀는 앉지 않고 서서 돌아다니며 선반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아드리안이 물었다.


"거기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봤어. 그랬더니 다들 알더라고. 당신, 신발 만드는 사람이라며."


"네, 아버지 때부터..."


아버지.

그 순간 아드리안은 자신이 아버지를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차마 비명을 지르지는 못하고, 아드리안은 손님에게 잠시 만요, 라는 말만을 남긴 채 얼른 위로 올라가 아버지의 방에도 불을 켰다.


그리고 원래 먹기로 정해두었던 딱딱한 빵과 저민 고기를 물과 함께 침대 옆 선반에 올려두고는 다시 작업대 앞으로 돌아왔다.


그가 꽤 오랫동안 우당탕탕 위아래로 돌아다녔음에도 여자는 달리 불평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하는 얼빠진 짓을 비웃을 뿐이었다.


"재밌어?"


그녀는 갑자기 말했다.

아드리안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뭐가 재미있냐는 걸까, 얼빠진 놈처럼 뛰어다닌 게 재밌냐는 걸까.

잠시 후 그녀는 처음부터 찬찬히 말했다.


"신발 만드는 거, 재미있냐고."


"아, 신발이요? 재미요?"


아드리안은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신발 만드는 것의 재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해왔던 것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걸 생각해보면 재미는 없는 게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재미는... 없을지도 몰라요."


"그럼 왜 하는 거야?"


"어릴 때부터 계속 했던 일이니까요."


"으음, 그렇구나."


흥미는 그것으로 끝. 그녀는 금방 주변을 둘러보다가 벽에 걸려 있던 담뱃대를 집어 들었다.


"나, 이거 써도 돼?"


그녀가 물었다.


그건 아드리안의 아버지의 물건으로 폼으로 샀던 아주 긴 담뱃대였다. 원래도 가끔씩 밖에 피지 않았지만 몸이 약해진 후로는 아예 관둬버린 탓에 골동품처럼 전시되게 되었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담뱃대에 묻은 먼지를 가운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아, 근데 담배는 없어요."


아드리안은 뒤늦게 말했다.


"괜찮아. 원래 쓰던 게 부러져서 그런 거니까."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디선가 말려 뭉친 잎가루를 꺼내 담뱃대 끝에 넣고는 길게 빨아들였다가 저 먼 천장에 연기를 훅 뱉었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불을 붙이는 것을 본적이 없었지만 그걸 따로 묻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모든 시야와 기억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담뱃대의 끝, 연기가 피어오르는 부분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여자는 담배를 물다 말고 작게 깔깔 거렸다.


"저건 뭐야? 새로 만드는 거? 저렇게 많이 만들어?"


그녀는 담뱃대의 끝으로 호리병 비슷한 모양의 가죽들을 가리켰다.


"아. 저건... 밑창이에요. 신발의 모양이란 게 원래 거기서 거기니까. 당장 쓸 일이 없어도 많이 만들어두는 편이거든요."


"으음. 그럼 저건?"


이번엔 신발 같이 생긴 나무를 가리켜 물었다.


"저건, 기본 모양을 잡을 때 쓰죠."


"음. 잘 모르겠네. 그냥 발에 감싸서 만들 순 없는 거야? 그럼 딱 맞는 신발이 나오지 않아?"


"바늘에 찔릴지도 모를 텐데요?"


자신이 어릴 적 아버지에게 했던 질문을 받게 되자 그는 아버지가 해줬던 대답과 똑같이 답해주게 되었다.


"하하하하하! 맞네. 그러네! 나도 바보 같아!"


여자는 크게 웃었다.


이후 그녀는 계속 연기를 빨고 뿜으며 가끔은 물을 마시기도 했다.


아드리안은 문득 밖을 보았다. 이미 땅거미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한 여름이라 시간은 더 남았을 테지만 그는 그녀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저기..."


아드리안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응?"


여자는 고개를 살짝 틀어 곁눈질로 그를 보았다.


"이제 가셔야할 것 같아서요. 어두워지니까..."


"응? 아. 미안해. 시간을 너무 오래 뺐었네. 이게 참, 담배에 불을 붙이면 나도 모르게 꼭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니까? "


그녀는 마찬가지로 어두워지려는 바깥을 보며 놀랐다.

그리고는 담뱃대를 뒤집어 가죽 자투리를 모아둔 통에 남은 재를 떨어뜨려 버렸다.


"아뇨... 전 괜찮아요."


아드리안이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담뱃대를 원래의 자리에 걸어두고 가운 같은 옷을 매무새를 다시 여몄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서다가 문득, 뒤로 획 돌아섰다.


"담뱃대 고마웠어."


무슨 말을 들을지 긴장하고 있었던 아드리안은 처음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작게, 여자가 눈치채지 못할만큼 말이다.


"그건 아버지 물건..."


아드리안이 말했다.

감사를 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 거라고.


그게 실수였던 건지 여자는 웃는듯 마는듯 한심스런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 바보야? 지금 그런 말을 할 때냐고. 이름은 뭔지, 다음에 만날 수 있을지, 그런 걸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제야 아드리안은 통성명조차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는 돌아온 내내 너무 멍청이처럼 굳어 있었다.


"아, 그렇죠. 이름. 저는... 아드리안이라고 해요..."


"아하, 아드리안?"


여자는 웃었다.

그것만으로 아드리안은 자기 이름이 우스운 편이었는지 되새기게 되었다.


"담뱃대 고마웠어, 아드리안?"


여자는 마지막 작별인 것처럼 문밖으로 나섰다.

발 한 걸음이 딱 바깥에 닿았을 때 그녀는 또 다시 획 돌아섰다.


아드리안은 그 째려보는 기세에 놀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정말 내 이름 안 물어봐?"


"아아, 아..."


이 사람은 날 놀리는 걸까?

아드리안은 땀이 뻘뻘 흐르는 것 같았다.

여자는 사람을 쩔쩔매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실실 웃었다.


"내 이름은 레아야. 뭐... 운명이 닿으면 또 만나자고, 아드리안?"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이후 그녀가 처음처럼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아주 가버린 것처럼 어딘가 홀가분한 뒷모습이었다.


갑작스런 폭풍을 겪은 후, 그는 우선 하던대로 작업대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일감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레아.

결국은 묻지 못했는데도 제멋대로 알려주고 가버렸다.

아드리안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결국 그는 일어나 방의 침대에 누웠다. 일은 조금 생각해보자 그리고 내일은 카밀라 부인의 딸을 직접 만나 새구두에 대해 물어보자 아드리안은 그렇게 마음 먹었다.


작가의말

본 작품은 라이트노벨풍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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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3) 20.01.14 147 4 15쪽
270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2) +2 20.01.10 137 4 17쪽
269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1) +2 20.01.08 150 4 18쪽
268 P.S 색과 향을 쫓아 20.01.04 137 4 24쪽
267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5) +2 20.01.01 135 4 32쪽
266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4) 19.12.27 140 4 17쪽
265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3) +2 19.12.23 141 4 19쪽
264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2) 19.12.18 127 3 20쪽
263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1) +2 19.12.13 128 4 19쪽
» P.S 향과 색을 쫓아 19.12.09 111 3 21쪽
261 45. 처음엔 두 칸이지(2) 19.12.05 97 5 14쪽
260 45. 처음엔 두 칸이지(1) 19.12.03 88 4 16쪽
259 44. 따뜻하고 매정한(7) 19.12.01 118 4 24쪽
258 44. 따뜻하고 매정한(6) 19.11.17 91 4 17쪽
257 44. 따뜻하고 매정한(5) 19.11.08 91 4 21쪽
256 44. 따뜻하고 매정한(4) 19.11.04 95 4 17쪽
255 44. 따뜻하고 매정한(3) 19.10.30 71 4 15쪽
254 44. 따뜻하고 매정한(2) 19.10.26 73 5 22쪽
253 44. 따뜻하고 매정한(1) 19.10.22 72 4 20쪽
252 43. 쌀쌀하고 살가운(5) 19.10.18 60 5 19쪽
251 43. 쌀쌀하고 살가운(4) +2 19.10.15 67 4 16쪽
250 43. 쌀쌀하고 살가운(3) 19.10.13 55 4 16쪽
249 43. 쌀쌀하고 살가운(2) 19.10.11 56 4 14쪽
248 43. 쌀쌀하고 살가운(1) +2 19.10.08 71 3 19쪽
247 42. 그러니까 이건(9) 19.10.06 62 5 17쪽
246 42. 그러니까 이건(8) 19.10.06 56 4 21쪽
245 42. 그러니까 이건(7) 19.10.02 150 4 21쪽
244 42. 그러니까 이건(6) 19.09.30 83 4 16쪽
243 42. 그러니까 이건(5) 19.09.26 80 5 22쪽
242 42. 그러니까 이건(4) +4 19.09.22 86 4 19쪽
241 42. 그러니까 이건(3) +2 19.09.18 78 4 17쪽
240 42. 그러니까 이건(2) 19.09.17 91 4 21쪽
239 42. 그러니까 이건(1) 19.09.11 101 4 21쪽
238 41. 그것뿐이야(6) 19.09.05 105 5 25쪽
237 41. 그것뿐이야(5) 19.09.01 100 4 26쪽
236 41. 그것뿐이야(4) 19.08.27 83 4 18쪽
235 41. 그것뿐이야(3) 19.08.25 83 4 16쪽
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2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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