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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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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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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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9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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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4)

DUMMY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물에는 항상 여자들이 모여있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 물을 뜨러 나와서는 우물에 도착하면 약속한 것처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수다를 떠는 것이다. 요점은 그 사람들이 약속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사제들도 똑같았다. 하얀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은 잡풀밭에 덩그러니 있어 유난히 튀어보였다. 성당에는 풀과 나무를 관리하는 소사인 랑그랑이 있었지만 이곳은 그 사람의 영역이 아닌 듯 보였다.


성당의 대부분은 잔디밭이었고 사람들이 많이 밟는 곳을 따라 단단한 흙이 드러나있었으며 그 위에 다시 하얗고 네모난 벽돌을 묻어 길을 만들었다. 의외로 발목 넘는 풀을 보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데 여긴 무릎만한 강아지풀이 잔뜩에 심은 것 같지 않은 나무들이 많아 보였다.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으니 굳이 뽑거나 잘라낼 거 없이, 그대로 놔두자, 인 거려나.

그래도 너무 이 근처만 잘 자란 거 아닌가 하는 새, 나는 그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우물에는 이미 두 명의 사제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여사제로, 심심했던 내 추측에 삼삼한 힘을 더 해주고 있었는데, 둘 중의 한 사람은 두건을 벗어 갈색 단발머리가 보이는 작은, 그 뭐랄까 참새 같은 사람이었고 또 한 명은 두건을 쓰고 상대적으로 키가 큰, 비둘기 같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물을 뜨러 왔다는 본래의 목적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떠놓기만 한 두레박을 우물 위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늘 조용하기만 할 것 같은 성당에서 대체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까. 참새와 비둘기는, 특히 참새는 열정적으로 움직여가며 무언가를 열변했다. 잘은 몰라도 뭔가 굉장했나보다. 그렇게 허리를 돌려 팔을 붕붕 휘두르다 그 팔꿈치로 두레박을 때려버렸다.

덜컥 흔들린 나무통은 여지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제님이 팔꿈치가 부딪치는 순간 놀라 잡으려고 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땅에 물을 저렇게 많이 주는데 잡초가 안 자라고 배겨? 아마 저쪽 애들은 랑그랑이 관리하는 곳과 비교하면 무진장 행복할 것이다.

원래 뒷일 생각 않고 덮어놓은 체 먹는 기분은 더 좋지않던가.


두레박을 구하기 위해 춤이라도 추듯 멋들어지게 회전한 그 사제는 우연히... 라고는 할 수 없을만큼 필연적으로 우릴 발견했다.


"하하... 하하하하, 하...!"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듣는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웃음도 잠시, 그 작은 사제님은 곧 자세를 바로 서서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차분히 말했다.


"으흠... 흠. 평안하세요?"


좀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조용하고 단아한 목소리였다. 그러니 내가 방금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저 참새 같은 사제님이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세상에, 그렇다고 하니 난 안 물어볼 수 없었다.


"혹시 에반젤린도 혼자 있을 땐 저래?"


"네? 아, 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에반젤린은 선듯 답하지 못하고 얼떨떨해 했다.


"저, 혼자 있지 않았거든요?!"


참새 사제님은 옆에 있는 사람도 잊지 말아달라고 양껏 소리쳤다.

들리라고 말한 건 아닌데 들렸나보다.


그리고 혼자 있든 아니든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서 없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잘 모르는 사람한테 풀어진 모습을 보인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누구 말마따나 사제님 괴롭히는 짓은 그만해야지.


"아니 가정한다는 얘기죠. 가정. 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에."


"어쨌든... 방금 그건 디아민 선도사님께는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바깥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지 그 디아민 선도사님이란 분은 사제들에겐 꽤나 엄하고 무서운가보다. 대체 얼마나 불안하면 처음보는 사람한테 소문내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걸까.

살다보면 물을 엎는 것 일쯤이야 파다하게 있는 거였다.


"그걸 꼭 비밀로까지 해야해요?"


내가 물었다.


"앗! 말씀하시려는 거군요. 이런 악마 같은...!"


진짜 엄청 무서운 사람인가보다.


"말 안 해요, 안 해! 그거 말해서 나한테 뭐가 좋다고?"


난 일단 그 사제님을 진정시켜보기로 했다. 그런 것치곤 말이 좀 막나가긴 했지만, 그건 이 사제님이 사람을 못 믿어서 그런 거였다.


"하아, 다행이다..."


다행이긴 개뿔이.

내가 보기에 이 사제님은 누군가 일러 바치는 걸 걱정하기 보다 먼저 쉽게 안심하고 풀어지는 행동가지부터 고쳐야했다.


"...근데 누구세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뒤늦게 기이함을 느낀 참새 사제님은 나라는 외부인을 매우 조심히 지켜보았다. 하긴 일부러 성당 안에 있는 우물을 쓰러 오는 사람이 있을리도 없을테고 날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보통이라면 말이지.

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에반젤린이 있었다.


놀라고 당황스러울진 몰라도 의심스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부조화는 참새 사제님도 금방 알아차렸다. 아니 아마 뒤에 비둘기 사제님이 어깨가의 옷자락을 당기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지 않았을까,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생각이 급한 사람이었다.


"아, 에반젤린 자매님도 계셨네요..."


참 빨리도 알아챈다.


"평안하세요...?"


내가 보기엔 저 인삿말도 그렇게 하라고 골백번은 시켜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거처럼 보였다.

그야 그럴게, 성당에서 나왔던 에반젤린이 성당으로 돌아온 것 뿐인데 새삼 평안과 안녕을 물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편하게 어쩐 일이냐고 물으면 그만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세실리 자매님?"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맞인사를 해주었다.

묘하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린 것 같은 건 기분탓이 아니겠지?


"비키 자매님도 안녕하세요?"


굳이 비둘기 사제님과도 인사를 나눈 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기다리지도 않던 차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근데, 진짜 누구세요?"


세실리 사제가 말했다.

일부러 그렇게 말을 한 건 아니겠지만, 꼭 내가 사제들끼리의 모임에 눈치없이 끼어들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성당의 우물을 빌리러 온 선량한 백성 중 한 사람인데요."


딱히 그것 때문에 대꾸를 삐딱하게 한 건 아니었다.


"아, 그러시군요. 얼마든지..."


세실리 사제는 종종 걸음으로 비켜나 우물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참, 이런 사제도 있는 걸보니 성당도 그렇게 재미없기만 한 건 아닌가 보다.


"그런데, 우물 물은 어디다 쓰시려고요?"


참 궁금한 것도 많다.

이제 막 한 걸음 내딛은 나는 허탈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가 쓰려는 건 아니고요. 여기, 에반젤린 사제님이 필요해서."


나는 순순히 그 목적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 사제님은 결국 순박한 거였다. 그러니까 본심이 쉽게 드러나서 겉으로 보기에 허술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럼 보이는 것이다.


"앗! 레이크님, 그...!"


에반젤린은 화들짝 놀라 얼굴을 가렸다.

말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하지만 이미 다 볼 건 본 게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같은 사제였으니, 어감이 좀 이상해도 말하자면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 아니던가.


"네? 에반젤린 자매님이 왜요?"


세실리 사제는 금방 그 앞에 서서 에반젤린을 살펴보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피하면 몸을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피하면 오른쪽으로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추궁했다.


자기 꼬리라도 쫓는 것처럼 빙글빙글 도는데, 저쯤되니 보려고 하는 쪽이 이상한 건지 안 보여주려고 하는 쪽이 이상한 건지 헷갈렸다.


"앗, 얼굴에 뭐가 묻으셨구나. 뭐에요? 진흙?"


결국 뭔지 알아내는데 성공한 세실리 사제가 그게 좋은 일이라도 되는양 크게 떠들었다.


"아니... 그... 점토에요..."


전부 들키고만 에반젤린은 이제 새삼 숨길 것도 없이 털어놓았다. 그래도 약간 가리는 듯 마주보지 않는 건 여전했다.


"점토? 점토를 왜...? 아니 그보단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세실리 사제는 말하다 말고 헐레벌떡 우물로 돌아갔다. 그리고 떨어뜨렸던 두레박을 주워들어서는 우물로 던져넣었다. 줄을 당겨 한 바가지 물을 퍼낸 세실리 사제는 다시 급하게 돌아와 에반젤린에게 그걸 내밀었다.


"자, 쓰세요."


꼭 써줬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아주 기대 넘치는 눈빛이었다. 에반젤린은 기꺼이 물을 받았다. 그리고 고맙게 쓰겠다는 말과 함께 물통을 받쳐줄 곳을 찾다가 결국 우물가로 갔다.

내부인들이 서로 마음 따뜻한 정을 주고 받을 때 외부인인 나는 뭔가 깨름칙한 눈빛을 받고 있었다.


비키라고 하던 그 사제님의 지긋한 눈길이었다. 눈치를 준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근데, 짙은 진청색이 가진 힘일까 한 마디도 안 하고 저러고 보고만 있으니까 좀 그렇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속을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잔잔하고, 또 평온하고. 분명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별 수 없이 그 시선을 견뎌내며 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경쓰지 않는 체 하며 못 본 것처럼 굴고, 일부러 먼 곳을 보고. 갑자기 괜히 단추는 제대로 붙어있나 확인하고.

실수로 고개를 돌렸다가는 눈이 마주치게 되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뜨거운 시선은 레샤가 뭐 잘못 먹었냐고 추궁하면서 훑어댈 때 이후로 오랜만인데.


"저기..."


결국 견디지 못한 내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비키의 말이 맞아요!"


세실리 사제가 우리의 숨막히는 시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소리쳤다.


"아니... 비키 자매님... 말이 맞아요..."


그것도 잠시 죄지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이 두 사람은 평소에 매우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뭐... 그것도 어디가서 흉보진 않을 테니까. 편하게 말하세요."


나는 그 어색한 말투와 몸짓이 안쓰러워 그렇게 말했다.


"아, 정말요? 고맙습니다. 좋으신 분이네요."


세실리 사제는 헤실헤실 웃었다.

고작 그 정도로 좋은 사람 소리 듣는다면 교환비가 나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조용하기만 했던 저 사제님이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그 말이 맞다는 걸까.


"그러니까 비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궁금한 건 그거란 말이죠?"


아무래도 세실리 사제는 말이 많은 사람 중에서도 서두가 긴 종류의 사람 같았다.


"대체 형제님은 누구세요?"


잔뜩 뜸들여서 한다는 질문이 그거였다. 그럼 결국 빙빙 돌아 원점 아닌가.

게다가 내가 말을 안 한 것도 아니다. 이 사람들이 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거다. 만약 나에게 기회가 돌아왔다면 나는 내 소개를 했을 것이다.

그게 별거라고.

딱히 없는 사람 취급해서 빈정상했다는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아니라는 거다.


"레이크라고 하는데요. 레이크, 아이힐데른."


어쨌거나 드디어 기회를 받았기에 나는 준비된 사람답게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세실리 사제의 눈이 정말 왕밤만하게 벌어졌다.


"레이크!?"


어째 이 사람도 내 이름을 모르지 않는 거 같은데.


"형제님이 바로 그 레이크였군요! 어머, 세상에!"


아니나 다를까 세실리 사제는 비키 사제의 옆에 달라붙어서는 저거 보라고 하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건 거의 떠는 수준이었다.


"왜요. 누가 저보고 뭐래요?"


캠벨과 호루의 전례가 있는지라, 나는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에반젤린 자매님 같이 훌륭한 사제님이 매일 같이 말씀하시는 분이니까. 너무 궁금해서..."


어째 말 끝을 흐리는 게, 너무 궁금했는데 막상 실물을 보니 그 기대에 차지 못 한다는 거 같았다.


"좀 더 기사님 같은 분일 줄 알았는데..."


뿐만 아니라 입밖으로 확실히 내뱉어 주시기까지 한다.


"거 미안하게 됐어요. 별로 기사님 같지 않아서."


나는 말이 곱게 나오진 않았다.

내 스스로 그런 기대에 걸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단 말을 들어서 기분이 좋을 이유도 없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 말은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곧잘 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똑똑하고, 멋진 사람은 대체 어떤 분일까 하고..."


거기까지 말하며, 도망쳤던 세실리 사제의 눈길이 다시 나에게 뻗어왔다.

들어보니 그 턱이 좀 높긴 하다.


"제가 잘못 했어요!"


나와 눈이 마주친 세실리 사제는 갑자기 기도라하듯 탁 소리 나게 손을 마주잡았다.


"제발 디아민 선도사님에게 만큼은...!"


이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사람이 농담처럼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니까 저렇게 고해를 하게 되는 거다.


"안 이른다니까요. 사람이 착각을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세실리 사제는 이미 스스로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좋은 분이라는 건 분명하네요.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확인 도장이라도 받는 것처럼 내 오른손을 양손으로 꾹 눌러 쥐었다.

근데 이 사람 왜 안 놓는거지.

나는 살살 힘을 주어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세실리 사제는 손을 더 세게 쥐어 빠지지 않게 하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궁금한게 남았나보다.

내 생각에 이 사람은 분명 어릴적에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대체 왜 앞발을 핧고 있느냐고 묻기 위해!


"두 분은 무슨 관계세요?"


"관계요?"


뜬금없는 세실리 사제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정말 별 게 다 궁금하다 싶었던 거였다.


"보통 사제가 혼자서 나간다하면 치유사로서 가는 거 거든요. 그런데 형제님은 별로 아파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건강해 보이셔서."


아아 그런 의미에서?

즉 이건 에반젤린과 내 사이에 어떤 계약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친구죠."


"아아...! 친구...!"


그 단어에 그렇게 깊은 감명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세실리 사제가 참 풍부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 정말 좋아요. 저도 비키가 정말 좋거든요. 교우란 정말 멋진 거예요. 너도 그렇지 비키?"


그건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 비키 사제님은 처음으로 아주 눈에 띄는 행동, 세실리 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저쪽은 그냥 말할 줄 아는 애완동물처럼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


뭐,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니까. 하하.


"다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즐겁게들 나누고 계세요?"


가끔은 사람이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왜 그렇게 깜짝 놀라는 걸까.


"으왓! 선도사님! 그게 아니라 지금 막 가려고...!"


세실리 사제에겐 그보다도 더 강한 무언가가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몸 전체가 머리털이 된 것처럼 삐쭉 곤두섰던 세실리 사제는 뒤로 다가온 것이 디아민 선도사가 아니라 에반젤린이라는 것을 알자 다시 뱀허물처럼 비키 사제에게 기댔다.


"아, 물은 감사히 잘 썼어요. 세실리 자매님."


오점 없이 얼굴을 말끔히 닦은 에반젤린은 이제 똑바로 눈을 마주보고 인사했다.


"아, 아뇨... 자매님의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그걸로..."


아니란 건 알았어도 가슴은 아직 벌렁벌렁한가 보다.


"제가 약소하게나마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지금 시간 어떠세요?"


그 물 하나 떠줬다고 에반젤린은 세실리 사제에게 무언가 해주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세실리 사제는 거의 아까 놀란 것만큼 또 놀랐다.


"정말요?"


몸의 대부분을 비키 사제에게 의존하고 있던 세실리 사제가 벌떡 일어났다.

개구리도 저거보단 빠르게 못 튀어오를 것이다.


"에반젤린 자매님이, 저랑?"


"네. 음, 왜 그러세요?"


"아뇨... 비키랑 같이 가도 되죠?"


"물론이죠. 함께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비키 자매님?"


비키 사제는 고개를 꾸벅이듯 끄덕였다.


그 다음, 에반젤린을 날 보았다.

날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왜?"


알면서도 묻는 것이다.


"아니 근데 지금 누가봐도 사제들끼리 친목회하는 거잖아. 거기에, 그 뭐 이상한 놈이 왜 껴?"


"레이크님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사제 셋 사이에서 쓴 물 먹는 거 별로 달갑지 않은데, 진짜 쓴 물 먹는 거 같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사제님 셋과 티타임을 가지러 가게 되었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벽돌을 밟으며.

아치 장식이된 지붕아래를 지나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대체 사제님 셋이랑은 무슨 얘기를 해야하는 거지.

그것도 두 명은 처음보는데 그 중 한 명은 말이 하나도 없고.

혹시 나도 가만히 있어도 되나.

근데 에반젤린이 가만 안 놔둘거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가게 같은 거 본다고 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내 입으로 본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

복수할 테다, 클로에 뢴느.

복수할 거야.

반드시.

꼭.


내가 복수를 결심하는 동안, 에반젤린이 비키 사제와 함께 앞서걷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슨 대화가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계속 말했듯이 속내를 모를 사람이었으니 나는 모를 섬세한 방법으로 나름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난 자연히 세실리 사제와 함께 걷게 되었는데 그게 세실리 사제가 날 잡아 당겨서 그렇게 된 거라는 건 방금 알았다.

딴 생각을 너무 깊게 했다.


"혹시, 레이크 형제님은 이런 걸 매일 하시나요?"


세실리 사제는 아주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게 뭔데요?"


워낙 밑도 끝도 없는지라 나는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에반젤린 자매님과 티타임 하는 거요."


"매일... 하진 않는 거 같은데, 왜요?"


오히려 가끔인 거 같은데.


"부러워서요."


그 때의 세실리 사제의 눈빛은 정말 허기진 것 같았다.

저랑 바꾸실래요, 라고 물어보면 실례일까.


"에반젤린 자매님. 정말 멋지잖아요. 예쁘고, 단아하고, 정숙하고, 규칙도 잘 지키고. 저처럼 웃는 연습도 따로 필요 없으신 거 같고. 새벽이나 아침 미사에도 늦으신 걸 본적이 없는 거 같아요."


어째 듣자하니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사님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거 같은데.


"저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좀 처럼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냥, 말 걸면 다 들어줬을 텐데요."


여태까지 에반젤린이 사람을 가리는 건 못 본 거 같았다.


"아, 네. 그렇기야 하지만..."


세실리 사제도 안 그래 본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뭐랄까. 조금 다가가기 어렵다고 할까. 에반젤린 자매님,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자기 얘기는 잘 안 하시잖아요?"


듣고보니 그건 그랬다.

에반젤린이 남 얘기를 듣는 것은 익숙한 기억이었지만 그 애가 스스로 자기 얘기를 꺼내는 건 본 적이 없는 것도 같았다.

오늘처럼 함께 외출하고 싶다 같은 그런 기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공통 관심사나 취미 같은 걸 알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말하며 세실리 사제는 내 눈치를 엄청 봤다. 보아하니 이제 진짜 속내를 드러낼 모양인가 보다.

한참 전에 다 들통났지만 말이다.


"레이크 형제님은 성당 밖에서 자매님을 보시니까 혹시 좀 알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나는 내가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 맞다. 레이크 형제님."


그러다말고, 세실리 사제는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형제님은 그, 차에 뭐 같이 드시는 걸 좋아하세요?"


갑자기?

난 정말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딱히 그런 걸 생각해본 적도 없고, 주는 대로 받아 먹는 입장이라 여러가지를 고려해본 적도 없었다.


"저기, 사제님."


그래서 난 대답하는 대신에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개한테 꼬리를 왜 흔드냐고 물어보신 적 있으세요?"


"네? 아하, 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세실리 사제는 당차게 대답했다.


"여섯 살 때 물어본 적 있는데, 대답 안 해주더라고요. 하하하."


세실리 사제는 아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뭐... 잘은 몰라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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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45. 처음엔 두 칸이지(1) 19.12.03 88 4 16쪽
259 44. 따뜻하고 매정한(7) 19.12.01 118 4 24쪽
258 44. 따뜻하고 매정한(6) 19.11.17 91 4 17쪽
257 44. 따뜻하고 매정한(5) 19.11.08 91 4 21쪽
256 44. 따뜻하고 매정한(4) 19.11.04 95 4 17쪽
255 44. 따뜻하고 매정한(3) 19.10.30 71 4 15쪽
254 44. 따뜻하고 매정한(2) 19.10.26 73 5 22쪽
253 44. 따뜻하고 매정한(1) 19.10.22 72 4 20쪽
252 43. 쌀쌀하고 살가운(5) 19.10.18 60 5 19쪽
251 43. 쌀쌀하고 살가운(4) +2 19.10.15 67 4 16쪽
250 43. 쌀쌀하고 살가운(3) 19.10.13 54 4 16쪽
249 43. 쌀쌀하고 살가운(2) 19.10.11 56 4 14쪽
248 43. 쌀쌀하고 살가운(1) +2 19.10.08 71 3 19쪽
247 42. 그러니까 이건(9) 19.10.06 62 5 17쪽
246 42. 그러니까 이건(8) 19.10.06 56 4 21쪽
245 42. 그러니까 이건(7) 19.10.02 150 4 21쪽
244 42. 그러니까 이건(6) 19.09.30 83 4 16쪽
243 42. 그러니까 이건(5) 19.09.26 80 5 22쪽
242 42. 그러니까 이건(4) +4 19.09.22 86 4 19쪽
241 42. 그러니까 이건(3) +2 19.09.18 78 4 17쪽
240 42. 그러니까 이건(2) 19.09.17 91 4 21쪽
239 42. 그러니까 이건(1) 19.09.11 101 4 21쪽
238 41. 그것뿐이야(6) 19.09.05 104 5 25쪽
237 41. 그것뿐이야(5) 19.09.01 100 4 26쪽
236 41. 그것뿐이야(4) 19.08.27 83 4 18쪽
235 41. 그것뿐이야(3) 19.08.25 83 4 16쪽
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2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1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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