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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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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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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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7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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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볼록과 볼록(1)

DUMMY

"그래서 어떻게 됐냐며어어언이이익....!"


야우라는 막대로 통 속을 휘저으며 이를 악물었다.

신음인지 괴성인지 이상한 소리도 함께다.


열심히 하는 거야 좋은데 꼭 저렇게 뭐 싸는 소리를 내야하는 걸까. 지가 맨날 말하던 신비롭고 아름다운 엘프 방랑 검사는 대체 어디다가 팔아먹은 건지, 이젠 얼굴에 허여물그런 달걀물 묻힌 아줌마밖에 안 남았다.


숨 꾹 참고 이마 끝까지 피가 올라 뻘겋게 될만큼 속도를 붙여서 덜컥덜컥 하는 게 보는 내가 다 불안하다. 팔에 감아 안고 있는 통이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았다.

어제 이야기 하다말고 갑자기 불 붙어서 난리다.


나는 혹시 모를 대폭발에 대비해 엉덩이를 뒤로 밀어 멀리 떨어졌다.


전생의 원수를 찌르라고 해도 저렇게는 안 할 것이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팔이 정말 세 번은 움직였고 엎드리듯이 고개를 숙인 탓에 앞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징그러운 괴물처럼 구불거렸다.


각 각 각 각 각 각.

아무리 들어도 달걀 젓는 소리가 아니다.


갈수록 속도를 더해가던 야우라는 어느 순간 멈춰서는 고개를 번쩍 들고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푸하앗! 후앗...!"


그리고는 연거푸 헐떡이며 통 안을 보았다.

생각대로 되었을까.


"이제 네가 해."


아닌가 보다.

야우라는 냉큼 통과 막대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비틀어 그 통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작하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이젠 이게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의심마저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한들 이미 시작한 일이다. 되돌릴 수 없었고 지금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것은 덜떨어진 놈이나 하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통을 잡고 함께 건네받은 막대를 빠르게 젓기 시작했다.


속도가 중요하다, 클로에는 빠르게 저어야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얼마나 빨라야하냐고 물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해야한다나. 그러니까 야우라도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악을 쓴 것이다.


달걀물이 바닥에 고이지도 않고 가생이로 밀려나도록 세차게 저어야한다. 언제까지? 거품이 생길 때까지.


"좋아! 잘 한다! 빨리, 더 빨리!"


야우라는 금새 회복해 내 양어깨에 손을 올려두고 별 도움 안 되는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빨리빨리빨리! 더 세게!"


게다가 한 마디 한 마디 말 할 때마다 뛰어오르며 꾹꾹 눌러대는 탓에 방해만 됐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숨까지 참고 빠져라 어깨를 움직였고, 돌아가라 손목을 돌렸다. 입 딱 다물고 숨이 마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까지 들무렵, 결국 막대를 놓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시에 가슴 속에 가둬놨던 숨이 팍 터져나왔다.

야우라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겠네.


"됐냐?!"


야우라는 어깨 너머로 불쑥 머리를 들이밀어 통 안을 들여다봤다. 다 좋으니까 제발 머리카락만 안에 넣지 말아라. 사실 별로 다 좋은 것도 아니니까.

다행히 야우라는 금방 머리를 뒤로 물렀다. 하지만 어깨를 온 몸으로 짓누르는 건 여전했다.


"안 됐네. 다시, 다시다시다시!"


염치없는 재촉이 귓구멍을 찌른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순서길래, 너 한 번 나 한 번이 아니라 나 한 번 너 두 번이야.


"에고, 잠깐만 기다려봐..."


뭐든지 회복엔 시간이 필요한 것이기에 난 잠시 쉬기를 청했다.


"안 돼. 클로에가 쉬지 말고 하랬단 말이야."


"그럼 네가 하던가."


뻔뻔하기 그지 없는 소리에 나는 야우라에게 통을 들이밀었다.


"아악...! 팔이...! 예전에 아이힐데른 출신의 레이크 아이힐데른한테 맞았던 팔이...!"


그걸 또 어떻게 벗어나 보겠다고, 그 애는 어깨를 부여잡고 가짜 신음을 흘렸다.


거 이젠 기억도 안 나는 일을 가지고선 엄살을 피우는 걸 보니 진짜 힘들긴 한가보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의욕만 너무 앞섰다.


"왜, 다신 안 아프게 뽑아드려?"


물론 그게 말이 곱게 나와줄 이유는 못 되었다.

그게 즉효약이 되어 쓰러져 골골대던 야우라를 단 번에 일으켜 앉혔다.


"뭐어?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 너. 어어? 너 그렇게 말이야. 어? 그렇게 막, 어?!"


"뭐어, 뭐. 말을 해."


"나 아까 어깨에서 진짜로 뿌득 소리 났단 말이야아."


"아이고, 알았어요. 알았어."


저런 소리까지 하니 나는 별 수 없이 막대를 잡고 계란 흰자를 젓기 시작했다.

대충대충, 휘휘.

속도가 모자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좀처럼 힘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힘이 빠진 게 아니라 아니꼬운 게 있으니 그런 거다.


"...그러면서 무슨 검사를 하겠녜, 뭐를 하겠녜..."


딱히 누구를 지칭하지 않은 한탄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누군가는 나의 설움을 들어줄 것이다. 들어줘서 그 행동가지를 고쳐줄지도 모르지.

말 몇 마디로 바뀔 녀석이었다면 일찌감치 바뀌었을테지만 그래도 누구나 소망은 가지는 편이니까.

그러니까 난 소망했다.


과연 나의 소원을 들어주실지 나는 고개를 살짝 틀어 어깨 너머로 야우라를 살펴보았다. 그 애는 못마땅한 눈으로 날 째려보고 있었다.


상황이 그다지 좋게 흘러갈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고?"


하여 넌지시 말을 돌렸다.


"뭐가?"


야우라는 내 말 뜻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까. 얘기하다 말았잖아."


"어... 기억 안 나. 뭐였지? 까먹었다."


참나.


"레샤가 뭐 어쩌고 했잖아."


"아아! 맞다. 그거."


그제야 하던 이야기가 기억이 났는지 야우라는 속시원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 레아가 레샤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트리마켓에 가가지고..."


거기 가가지고, 이후의 이러저러한 속사정을 이제 좀 듣나 싶었는데 막 시작된 야우라의 이야기는 금방 다른 소란에 묻혀 끊어지게 되었다.


"아잇, 싫다니까요...!"


바로 그 레샤의 비명이었다.

비명이라고 하기엔 조금 약소한 그런 외침. 레샤는 계단을 내려와 도망치고 있었다. 그 뒤엔 그 애의 엄마인 레아 아주머니가 뒤따랐다. 양 손엔 웬 하얀색 드레스 옷을 든 체였다.

아, 그러니까. 레아가 레샤의 옷이 마음에 안들어서 몇 개 골라 샀다는 거지?


"한 번만 입어보자니까, 응?!"


"안 입어도 되니까 사기만 하자면서요...!"


"에이, 그럼 아깝잖아아."


"엄마는 맨날 거짓말이야...!"


"그럼 치수만 확인해보자, 치수만. 응?"


"그것도 거짓말...!"


"아유, 우리 레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할까? 거기 안 서!?"


글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설 것도 안 서지 않을까.

그런 소소한 의견 한 번 내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밖으로 달려나갔다.


"저렇게 됐다고."


야우라는 보란듯이 손가락으로 문쪽을 가리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던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알기쉬운 예시가 제 발로 지나갔다.

쫓는 사람이나, 쫓기는 사람이나. 참 고생이 많다.


또, 그런 소란이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 발짝 늦게, 클로에가 주방에서 나와 식당 안 쪽을 살폈다. 소리는 났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 애 입장에선 귀신 곡할 노릇이요.

그런 묘연한 일이 있었으니 자연스레 우릴 보았다.


"방금 뭐였어?"


클로에가 물었다.

방금 그게 뭐였는지 딱 잘라 말하라는 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뭐라 그래야 돼 그걸?"


그러니 나는 야우라에게 떠넘겼다.

문제는 정작 걔도 그닥 떠오르는 건 없는 것 같았다는 거다.


"어... 인형놀이?"


그것 참 역동적인 인형놀이네.


"뭐래는 거니?"


당연히 클로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건 그렇고."


하며 그 애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하라는 건 다 했어?"


"아니. 하고 있는데..."


사람이 아직 다 못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훌쩍 통을 빼앗아 가지고 갔다.

사실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자 앞에 선 강아지처럼 무력감에 빠졌을 뿐.

통을 들여다보는 클로에의 눈썹이 크게 한 번 꺾여 구부러졌다.


"망쳤네?"


첫 마디부터가 너무하다.


"아니, 망친 건 아니지. 멀쩡하잖아?"


나는 눈을 찔리면 깜빡이듯이 반문했다.


"안 돼. 이렇게 되면 못 써. 집에서 머랭 안 만들어봤어?"


"아니. 우리집에서도 이런 거 다 하거든? 나만 안 해본 거야."


"누가 뭐래니? 넌 안 해봤다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리고. 설탕 넣으랬더니, 설탕은?"


그랬나?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야우라를 보았다. 마침 야우라도 날 보고 있었다. 눈동자로 목소리가 들린다.

그랬나?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아유, 천상 다시 해야겠네."


한 숨 섞인 클로에의 말엔 심장이 뜨끔할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방금.... 뭐라고?


"다시 한다고? 처음부터?"


"그럼 처음부터 하지. 어떻게 중간부터 해?"


그 애는 별 걸 다 묻는다는 것처럼 날 뜯어봤다.


입에 침이 바짝 마른다.


벗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 도망가야 했다.

하고 싶지 않았다.

머랭인지 머랭이인지 수플레인지 수풀인지 이젠 먹는 거보단 내 어깨가 더 중요했다.


"저기. 나. 가야 돼."


우선은 생각나는대로 지껄였다.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이 위기만 넘기면 그만이다.


"갑자기 어딜?"


워낙 두서가 없었던터라 클로에가 의아하게 묻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그. 어디야... 아무튼, 그. 가야 돼. 원래 약속이 되어 있던 거라..."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며 클로에의 눈길이 야우라에게 갔을 때였다.


"나도 가야 돼!"


야우라 역시 소리쳤다.


이러면 안 된다. 자고로 도망가려면 몸이 가벼워야 한다고 하는데 주렁주렁 달린 게 많으면 꼬리를 밟히기 십상이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야우라까지 함께라면 얘기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

클로에의 태도부터 벌써 달라졌다. 내 경우와는 달리, 그 애는 의심으로 주름진 눈으로 야우라를 보았다.


"...어디를?"


그도 그럴게, 야우라의 일과는 거의 대부분 클로에에 의해 결정될텐데.


"그... 레이크 도와주러 가야 돼."


야우라는 쩔쩔매면서도 내 이름을 거론했다.

아니. 저게...!

끝까지 지저분하게 나오시겠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다시 클로에의 눈총은 내게로 향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스우렌우나가 없잖아. 그래서, 그, 빈자리를 체우는 그 비슷한... 좀 그래서... 그런, 그런 거."


아, 내 스스로도 뿌듯해지는 적절한 변명이었다.


"응. 맞아. 그런 거! 헤헤헤헤..."


야우라도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하면 돼지, 뭐. 괜찮아. 다녀와. 왜들 그래? 내가 못 가게 하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 그냥. 하다 말고 가니까 미안해서 그렇지..."


"아유, 웬일이래. 그런 생각을 다 해주고?"


"아니야. 우린 항상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며 나는 발목을 움직여 야우라의 발 옆치를 슬슬 찼다. 그 애는 내 속뜻을 알아채고 슬금슬금 옆으로 걸어나갔다.


"어어, 맞아. 헤헤."


어쨌거나 우린 슬금슬금 게처럼 걸어 하늘그림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에 향한 곳은 정말로 훈련소였다. 달리 갈 곳도 없고 괜히 쓸데 없이 돌아다니다가 여러군데 눈에 띄는 것보다는 아무도 안 올 곳에 박혀 있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게다가 미운 정이라는게 사람에게만 드는 게 아닌지 이제는 여기도 제법 편하다.


야우라에겐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처음엔 그 애도 성공적으로 도망쳐 나온 것을 기뻐했다.

팔 아파서 더는 못 할 거 같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난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할 게 없다며 칭얼거렸다.


언제나 여기에 오면 늘 하듯이, 야우라는 판자와 가구를 이용해 저만의 자리를 만들어서는 그 위에 드러누웠다.

지금은 나도 그것에 도움을 받아 슬슬 쌀쌀하게도 느껴지는 바람을 피했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천천히 흘러가는데, 이 놈의 방랑 검사님은 풍류라는 것을 몰랐다.


"...이제 뭐해?"


야우라가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심해서 말 못 해주겠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나 관사로 가봐도 돼?"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 애는 다시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한테 가잔 소리만 하지말고."


뭘 해야할지에 대해선 답해줄 것이 없어도 해도 되겠냐는 것에 관해선 난 나름대로의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

별 도움은 안 될 것이지만.


"가면 먹을 거 있나?"


야우라는 의심이라도 하듯 물었다.


"있지."


부는 바람이 스쳐지나가듯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크."


그런데 또 궁금한게 있나보다.


"응?"


"여기서 불 피워도 돼?"


"왜, 추워서?"


"아니 그냥. 혹시 감자 같은 게 있으면 구워 먹으면 맛있지 않을까?"


일하는 건 그렇게 싫어하면서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는 못하는구나.

야우라의 담대한 계획에 대해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불이라면... 괜찮아."


난 그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땅이라도 조금 파서 붙이면 안전할 것이다.


"아싸. 그럼 찾아올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그게 그렇게 꼭 하고 싶을까.

야우라가 관사로 가고, 나는 원래 그 애가 꿰차고 있던 자리에 대신 드러누웠다.


관사에 감자처럼 간단히 구워먹을만한 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게 있든 없든 금방 오지는 않겠지. 적어도 야우라는 자신만의 보물찾기가 끝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전까지 땅이라도 파놓을까?

아니 또 뭘 가져올지 모르니 미리 해놓을 필요는 없었다. 저래놓고서 무슨 이따시만한 호박이라도 가져올지 누가 안다고.


나는 머리를 괴고 누워서 잠시 눈을 감았다.

잠들어도 좋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지 못 했다.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발소리. 야우라의 것이 아니다. 이건 더 무거웠고 촐싹대지도 않았으며, 이거 보라고 자랑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무엇보다 너무 일렀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판자 아래로 다리를 걸쳐 앉자,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돌아나왔다.


매우 특이한 행색의 남자였다.

사실 그렇게 특이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말끔한 복장에 반들거리는 회색 머리칼을 뒤로 빗어넘겼고. 작고 날카로워 깐깐해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눈을 겨우 담을만큼 아주 작은 안경까지.


경비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 외지의 기사 같지도 않은 행색.

그런 사람이 여기에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안경이라, 특이하다곤 못해도 흔한 물건 역시 아니었다.

옷도 학자처럼 셔츠 위에 어두운 색의 외투를 덮어 입은데다가 기다란 타이도 목에 매고 있는, 이 근처에선 보기 힘든 차림새가 맞았다.


그 남자는 날 보자 걸음을 멈춰서는 천천히 웃어보였다. 그야말로 천천히.


"여기서 사는 거니?"


남자의 목소리는 꽉 조여 말하는 것처럼 높고 얇게 들렸다.

보기보다 목소리가 젊었다.


"여기서 살진 않죠."


이런 쓰레기장에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구, 나는 반쯤 웃는 것처럼 말해버렸다.


"내가 길을 잃어서 말이다."


남자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더러 있는 일이었다.

어떤 이유든, 뭐 놀러왔든 궁금해서 와봤든, 나갈 길을 찾는 사람은 가끔씩 나타났다.


"나가시려면..."


"아니."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려고."


"그럼..."


"알고 있다면 안내를 부탁하마. 물론 거저 시키진 않겠다."


그 사람은 엄지를 튕겨 무언가를 내게 날렸다. 받고 보니 그건 쳬니 주화였다. 오백 쳬니.


"누가 간언한 건지는 몰라도... 화폐개혁이라는 게 정말 좋아. 누구든, 어디든, 동전을 고를 필요가 없잖아. 너도 그렇지? 흐후후흐흐..."


남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옆을 지나치며 고개를 까닥였다.

아무리 봐도 안내하라는 뜻이다.


아직 한다고 말도 안 했는데.


그치만 별 수 있나.

이 사람은 비셔스 경의 손님이 분명했다.

환영받을 손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보단 비셔스 경에게 내보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야우라는 뭐... 엇갈리지 않게 가서 만나면 되겠지.


작가의말

즐거운 설연휴 보내셨나요. 전 시골집에 내려갔다가 이제 올라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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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45. 처음엔 두 칸이지(2) 19.12.05 98 5 14쪽
260 45. 처음엔 두 칸이지(1) 19.12.03 88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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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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