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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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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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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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3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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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연꽃이 자라는 곳(3)

DUMMY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거뭇거뭇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평범한 우물이었다.


지름은 레샤의 키만할까, 레샤를 바르게 세워서 던지면 아슬아슬하게 머리와 발이 걸쳐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그것보단 좀 더 작을 거 같기도 하고.

이마와 무릎 부근이면 맞으려나.


"...뭡니까?"


너무 노골적이었나. 자기를 관찰하는 시선을 눈치챈 레샤는 언짢게 말했다.


"아니 그냥. 적당하다 싶어서."


길이 가늠용으로 말이다.


"전 안 적당할 거예요..."


"응?"


무슨 소리인가 싶다.


"어마어마해질 거라고요...!"


"아아, 알았어 알았어..."


한 번 더 물으면 와서 때리기라도 할 기세에 나는 얼른 수긍해드렸다.

내가 했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간에 어마어마해지시겠단다.

꿈은 크게 가지는 편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레샤도 어마어마해질 수 있는게 좋겠지.


어쨌거나 우리는 시뻘건 물을 뱉는다는 우물을 보러온 것이었다.

원인을 알아봐준다거나. 투명한 물이 나올 수 있도록 해결해준다거나 하는 건방진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고, 그냥 구경 삼은 것뿐이다.


"기이이잎네에에!"


야우라는 우물의 깊이만큼이나 기일게 늘여 말했다.

둥근 돌담에 배를 대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 혹시 떨어지지는 않을까 괜히 신경 쓰였다.


나는 그 옆에 가서 힐끗 우물 안을 보았다.

그 말대로 꽤 깊은 우물이었다. 정오가 되어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바닥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정오가 되어도 못 볼 수도 있겠지.


"한 번 떠볼까?"


아슬아슬 매달린 체로 야우라가 말했다.


"뭐하러?"


나는 그런 야우라의 뒷깃을 잡아 당겼다.

저번처럼 신발에 넣을 것도 아닐테고 굳이 떠 볼 이유가 없었다.


"그냥. 궁금하잖아."


야우라는 얌전히 뒤로 끌리면서도 우물 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말이 그래서 그렇지 집착은 아닐 것이다. 단지 호기심을 참지 못 하는 것이지.


"그 옆에 들통을 쓰면 될 거야."


목소리가 들린 건 뒤편이었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새치 가득한 위병, 후란 아저씨가 와있었다.


아까 맥주마실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눈 이후 또 보는 거였다.


"이거?"


야우라가 우물 뒤편에서 밧줄이 달린 나무통을 들어보였다.


"아, 아. 그거."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우라는 곧장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들통을 우물 안으로 던져넣었다. 밧줄은 호로록 빨려들어갔고 거의 동시에 철퍽하고 들통이 수면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매인 밧줄을 좌우로 몇 번 흔들어보던 야우라는 이내 밧줄을 팔에 감아 통을 끌어올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물이 찬 들통이 무거운지 한 동안 낑낑대다가 꺼낸 나무통 안에는 생각없이 물이 가득 차있었다. 이만큼씩이나 필요 없는데...


그건 그렇고 들었던대로 정말 물이 시뻘겋다.

염색하겠다고 꽃물을 들인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됐다. 게다가 단순히 빨간 것도 아니고 갈색과 초록색이 흙탕물처럼 섞여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났다. 실제로 악취 같은 것도 조금 났고.


"그래. 그거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해주러 온 거거든."


후란 아저씨가 말했다.


"아니 누가 이런 걸 먹어보려고 해요!"


사람을 바보취급하는 처사에 나는 화 비슷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나도 안 먹어!"


그건 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걔는 세상 누구보다 무시 당하는 걸 싫어했다.


손에 닿는 거라면 이것저것 다 입에 넣고 보는 어린 아기라도 이런 물은 가까이도 가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는 갈 수도 있겠지 그래도 먹지는 않는다.


후란 아저씨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 옆을 가리켰다.


"...먹잖아, 쟤."


그 말대로 레샤가 무명지 끝에 혀를 데고 있었다. 찍어바른듯 더러운 물이 묻은 손가락을 말이다.

걔는 우리가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눈을 휘둥그레 떠서는 눈동자만 움직여 모두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는 손가락을 혀로부터 떨었드렸다.


"야! 그걸 왜 먹어!"


나는 아까보다도 더 크게 소리쳤다.


"으갸악! 레샤아!"


귀가 바짝 설 정도로 놀란 야우라도 냉큼 달려들어 레샤의 더러워진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에반젤린에게 끌고갔다.


"사제님! 이거 봐 봐! 이거! 손가락 썩었어?!"


"네...?"


에반젤린이 당황하는 사이 나도 그쪽에 붙었다.


"그게 왜 썩그으이익...!"


손가락만 멀쩡한 걸수도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변명하는 레샤의 뺨을 눌러 입을 벌렸다.


"입 안은? 이거 먹으면 탈나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에반젤린은 손가락에 이어 레샤의 입안도 보았다.


"어...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요? 조금 더 경과를 지켜보시는 게..."


에반젤린은 차분히 말했지만 우린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어쩌면 이걸 빌미로 괴롭히는 게 재밌었던 걸수도 있고.


그러게 왜 평소답지 않게 수상한 거 주워먹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둘이서 강제로 붙잡아버리자 레샤는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허공을 허우적대던 레샤의 팔이 대뜸 내 머리를 잡았다. 이어 그 애는 뿌리라도 뽑을 듯이 내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아! 아아! 아! 아! 아파! 아프다고!"


나는 엄살없이 있는 그대로 질렀다.


"아 왜에! 걱정해주는 거잖아아아앍 ...!"


그건 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랑 똑같이 뒤통수를 잡혔다.


나는 내 머리를 잡은 레샤의 손을 잡았다. 뒤통수는 좀 나아졌지만 어느샌가 뺨을 눌렀던 손이 틀어져 입안으로 들어가 깨물리고 있었다.


"야, 야야야! 진짜 아퍼! 진짜!"



인고의 시간을 거쳐-


한심한 추태를 전부 내보인 우리는 저마다 바닥에 엎드려 각자의 숨을 골랐다.


"이잇...!"


특히 괴롭힘 당한거나 다름없었던 레샤는 못마땅한 잇소리를 내었다.


장난이라도 조금 지나쳤나 싶었던지라 나는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이...! 갑자기 그런 걸 먹으니까..."


"그게 먹은 거예요...?! 확인해본거잖아요...!"


레샤의 말에 따르면 그건 그 물이 대충 어떤 걸로 만들어진 건지 확인해보고자 먹은 거라고 했다.

아니 그러니까 평소에는 시켜도 안 하던 짓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지 혼자 하냐고.


"그래서..."


야우라는 왠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맛이었어?"


눈치를 보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화난 레샤가 무서워서 못 물어본 거 같았다. 그래도 끝내 물어보더니 그 용기가 가상하다.

잔뜩 날이 선 레샤의 눈동자를 보니 그 용기는 더욱 가상했다.


"모, 릅, 니, 다...!"


하다하다 말투까지 딱딱하게 바뀌자 야우라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얌전히 수그러들었다.


약이 잔뜩 오른 레샤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결국 에반젤린 뿐이었다.


"손가락이 따끔거리나 배가 아프지는 않으세요?"


에반젤린이 레샤에게 물었다.


"예? 아,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까지는 신경써보죠."


"네, 네..."


그 온순하고 평화로운 광경을 보자 나는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똑같이 걱정을 해줘도 누구는 손가락에 이빨 자국만 남는데 누구는...

아니 똑같이 걱정해준 건 아닌가.


"너희들 괜찮냐?"


그 때까지 말 한 마디 않고 조용히 있던 후란 아저씨가 말했다.

그건 신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이정도 쯤이야... 별 것도 아니죠..."


나는 괜히 허세를 부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냐? 어... 그럼 난 이만 가보마."


후란 아저씨는 더 묻지 않고. 아니, 더 묻지도 못하고 자기가 지켜야할 자리인 망루로 돌아갔다. 하긴 그런 꼴을 봤다면 더 상관하고 싶지 않은게 평범한 사람의 생각이리라.


그건 그렇고 참 안 됐다. 어쩌다가 마을 우물에서 해괴망측한 물이 나오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귀찮은 일을 만들어낼 것이다.


물 긷는 것도, 새로운 수원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우물을 파낸다고 해서 그 물은 깨끗하리란 보장을 할 수 없다. 물은 윗선에서부터 잘 관리해야하는 법이라고 헤세는 누누히 말했지. 걔가 하는 일이란 건 결국 그런 거였다.


들통에 떠놨던 물을 도로 우물 안에 부어버리고난 후, 야우라는 다시 우물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데 쟤는 뭔가 보이나 싶다. 아니면 계속 쳐다보다보면 달라질 것이라 믿는 걸 수도 있고.


옆에는 레샤가 있었는데 편하게 내려다보기엔 키가 조금 모자란지라 들통을 뒤집어 발을 딛고 보고 있었다.


그쯤되니 나도 내가 못 본 게 있나 싶어 다시 우물 밑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 물..."


한창 실망하는 와중에 레샤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어디서 오는 걸까요...?"


"내가 어떻게 아냐?"


나는 께름칙한 기분 대신 괜히 짜증을 내게 되었다.


"정령한테 물어봐."


우물의 어디에서 출발할까와 같은 자연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거라면 내가 아니라 좀 더 확실한 녀석에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레이크."


레샤가 타이르듯 말했다.


"레이크는 아직 모르겠지만... 계약관계란 원래 여러모로 복잡한 겁니다..."


얘가 가끔씩 어디 높은 위치의 사람인 것마냥 말하는 거, 정말 짜증난다.


그즈음 뚫어져라 우물 밑을 보던 야우라도 대뜸 말했다.


"레이크."


뭔가 결심한 듯 목소리.


"왜?"


그 목소리가 가지는 무게만큼이나 의미또한 무겁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는 설렁설렁 대꾸했다.


"이 물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야우라의 의문은 그랬다.


"넌 남의 말을 좀 들어라. 어?"


아까까지 했던 얘기는 어디다 팔아먹고 혼자 처음부터 다시하려고 하는 거야.


"궁금하지 않아?"


"아니."


"한 번 찾아볼까?"


"아니라고 방금 했잖아!"


저 놈의 귀는 거름망을 달아놓으려고 기다란 거냐고!


"레샤는 어떻게 생각해?"


나한테는 안 되겠다 생각한 것인지 야우라는 거절당한 즉시 레샤에게 들러붙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며 좋아할까 말까 웃을까 말까 미묘한 얼굴로 레샤의 어깨를 주물러댔다.


대체 몇 번을 가서 부딪쳐봐야 서로 성격이 안 맞는 걸 깨닫게...


"그럴까요?"


아. 방금 목소리는 야우라가 흉내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레샤의 입에서 그럴까요 같은 소리가 나올리 없지.

나는 야우라의 훌쩍 늘은 성대모사 실력에 새삼 감탄했다.


"레이크는 어때요?"


레샤가 나에게 다시 묻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절로 에반젤린을 보게 되었다.


"에반젤린! 그 물, 먹으면 이상해지나 본데?!"


"아... 아하, 네...?"


에반젤린도 레샤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혼란스러워 했다.


"혹시 막 미치고 그러는 건가?"


나는 에반젤린에게 말했다. 레샤에겐 들리지 않을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이게 미친 건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들렸나 보다.


"음... 괜찮지 않을까요?"


에반젤린도 조심스레 말했다.


"뭐가 괜찮아."


사람이 미쳐가는데.


"물이 오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이 마을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두 분의 호기심도 해결하고요."


"아니 그건 그런데..."


정말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하기 싫음 하지마라? 난 레샤랑 같이 갈거니까!"


제 편을 들어준 게 너무너무 기쁜지 야우라는 레샤를 끌어안고 뺨을 부벼댔다.


"그래. 난 안 갈래.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그렇다고 하니 나는 일찌감치 선을 그어놓고 손을 휘휘 저었다.


"에반젤린은 어떡할 거야?"


이후 계획을 위해 나는 에반젤린에게도 물었다. 에반젤린이 저 애들을 따라가도 나쁘지는 않을 성 싶었다. 야우라와 야우라에게 휘둘리는 레샤를 잡아줄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것이 좋을테고, 만족할만큼 찾아 보기 전까지는 돌아오지도 않을테니 그 때까지 간만에 혼자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뇨. 그래도 레이크 님을 혼자 둘 순 없죠."


에반젤린은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뭐든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일행이니 잠시 찢어지더라도 혼자 남는 경우는 없게 하자는 것이 에반젤린의 생각이었다.


외롭지 말라고 남아주겠다는 걸 굳이 등 떠밀어 보낼 수도 없고 결국은 둘씩 나뉘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야우라랑 레샤는 이 근처를 구경, 아니 물이 오염된 원인을 찾아보러 가기로 했고 나와 에반젤린은 말이 먹을 간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럼 갔다 올게!"


신나서 뛰어 가려는 야우라.

그리고 야우라를 잡으며 레샤가 나머지 말들을 이었다.


"어 그러니까... 점심 때나... 그 언저리에 맞춰 돌아오겠습니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후 걸음 속도 차이 탓에 반쯤 끌려가는 레샤에게 에반젤린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괜히 멀리 갔다가 길 잃지 말고."


나도 적당히 배웅해주었다.


하아.


딱 두 녀석 없어졌을 뿐인데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뭐할까. 그건 즐거운 고민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

적당한 나무 그늘 아래나 아니면 다시 그 여관에라도 돌아가서 시간이나 낭비하는 것이다.

요즘 느낀 건데,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다.


"그럼 저희도 이제 가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에반젤린이 말했다.

그러고보면 아직 수문장이 남아있었지.

그것도 가장 강한 녀석으로.


"걔네... 한참이나 있을텐데?"


나는 우선 반항부터 해보았다.


"음... 그게 왜요?"


"아니... 그... 걔네들은 한참이나 안 올 건데. 우리가 먼저 우리 할 일을 끝내버리면... 더 할 게 없어서 지루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굳이 미룰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에반젤린은 작게 웃으며 얼렀다.


"갑자기 질렸다면서 돌아오실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너무 맞는 말이라서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더니 여기 단 한 시간도 허락치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말 주제에 무슨 간식을 먹는다고..."


하여 나는 태초의 불만으로 돌아가게 중얼대게 되었다.


"후후, 오늘 또 왜 이러실까? 갑자기 이것저것 귀찮아지셨어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기분파 망나니 같잖아."


"그러며언..."


이어 에반젤린은 손가락을 턱과 입술에 대고 고민했다.


"간식 사는 김에 레이크 님 간식도 같이 사는 건 어떨까요? 원하는대로 한 다섯개쯤 고를 수 있게, 어때요?"


이어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펼쳐 보이며 웃었다.

그쯤되니 이젠 간다고 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지금 간다고 하면 간식 때문에 가는 것 같잖아.

뭐라고 둘러댈까 잠시 고민하는 동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제법 큰 짐마차였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두 세대. 마차의 행렬이다. 커다란 바퀴를 두개로 움직이는 그 바퀴의 크기만 해도 거의 내 키만했고 큰 품종인 말 두 마리가 끌었다. 이끄는 마부가 작아 보여 이질감이 들 정도다.


행여 치이기라도 할까 에반젤린과 나는 서둘러 길 한 쪽으로 비켜섰다.


공교롭게도 그 마차 또한 우물 근처의 공터에서 서기로 한 것인지 마차는 우리 옆에 멈추었다.


내가 다시금 그 마차의 크기에 놀라는 동안, 그 마차의 위에서 사람 한 명이 뚝 떨어졌다. 아니 뛰어내렸다.


위에 걸쳐 입은 망토와 거기에 달린 후드 모자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긴 치마라는 옷차리과 뛰어내릴 때 들렸던 흣차, 하는 목소리로 그 사람이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뒤이어 그 사람을 쫓기라도 하듯 마차 건너편에서부터 한 남자가 뛰어왔다. 턱이 두드러져 사각진 얼굴에 말끔하게 기른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멋들어지게 정리한 사내였다.

나이는 넉넉잡아 서른은 될까, 목에 걸린 굵직한 금 목걸이가 눈에 띄게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저 사람이 이 마차의 주인일 것이다.


"아니. 여긴 더 볼 일이 없다니까. 물이 없다잖아. 다른 곳으로 가자고."


남자는 작고 길쭉한 눈을 표나게 찡그리며 말했다.


"아인, 당신은 당신 갈 길을 가. 난 여기에 볼 일이 생겼어."


여자는 시원하리만큼 밝게 대꾸했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헤어지자고?"


남자는 납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여자는 여전히 태연했다.


"내, 내가 약속했잖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당신은 바쁜 사람이잖아? 나 때문에 시간 버릴 필요 없어. 게다가..."


조금씩 다가오는 남자를 피하듯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여자는 대뜸 나와 에반젤린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여기 오랜 지인을 만나서 말이야. 기회가 된다면 강이 끝나는 곳에서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글쎄, 난 이렇게 키 큰 누나랑 알고 지낸 적이 없는데.


"난 당신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 아인."


"레아!"


남자는 소리쳤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안녀엉."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우리를 끌고 다짜고짜 걸음을 옮겼다.


작가의말

비가 좀 온다 싶더니 그 다음은 폭염이네요.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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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2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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