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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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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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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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용미리에서 만납시다 1

DUMMY

용미리에서 만납시다

(My Funny Valentine)





알람도 없는데 떠지는 눈.

손목시계 시침이 6시를 방금 지났다.


‘이런 젠장. 더 자자. 일요일이라고.’


그러나 다시 못 버티고 눈을 뜬다.

속에서, 시립고 거북한 맥주 바람이 분다.

그 시려움 안에 자신이라는 차가운 공백.


“정말로 전쟁이 날 수도 있는 거야?”

“... 안 나요. 말처럼 쉬운 게 아녜요.”

“텔레비전 보면 원 가슴이 떨려서 어쩌니...”

입으로 국물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눈이 감긴다.

“전쟁이 나면 너희는 뭐하니? 북으로 가?”


된장국... 좋다. 역시 군대 된장은 싸. 아니야. 이게 된장국이지. 내가 좋아하는 감자와 호박이 거의 떡이 되기 직전까지 푹 끓인 된장국. 정말 먹고 싶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거 누가 알겠나. 어머니가 아시지. 여동생은 또 이런 거 싫어한다. 이럴 때 어머니는 그런다.


“간 줄 알았는데 어쩌면 입맛도 아빠와 똑같니.”


장조림과 외가에서 보낸 푹 익은 김치. 젓가락으로 집자마자 마음으로 녹는다. 지역 특색으로 넣은 젓갈인지 뭔지 워매 청초한 맛이다. 맛은 좋은데 숙취가 ‘거북해!’ 그만 넣으라고 인상을 찡그린다. 외할머니께 전화는 드렸지만 귀가 멀어서 자꾸 큰 소리로 말하시고 내 이름도 크게 몇 번을 해야 알아듣는다. 난 또 갓난애가 되어 외할미의 함무라비 법전 충고. 차 조심, 밥 많이, 여자 조심, 빠따 안 때리니? 할미는 건강하고 끄떡없다. 걱정 말아라. 왜 안 내려와. 나 안 보고 싶니? 나이가 더욱 차니 전에 없던 ‘보고 싶다’가 늘어 가신다. 어려서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다. 강한 분인데, 늙으면서 좀 감상적으로 변하신다... 아무리 숙취라도 맛은 보자. 파전.


“넌 걱정 안 돼? 군인 가진 엄마들 난리도 아냐. 울고불고. 게다가 요즘 부대 카페와 SNS들이 부대에서 일부러 글을 줄이고 차단하는 기분이 들어 엄마들이 많이 의심하고 불안해.”


역시 집은 1식 4찬. 네 번째 반찬은 잔소리.

“물 좀.”

“넌 엄마 말하는데 그 따위야. 물이 뭐야.”

“전쟁은 무슨 전쟁. 6.25예요? 안에는 무사태평인데 밖에서 더 난리야.”

“이느무 자식이. 너 똑바루 말하는 거야?”

“아 진짜라니까요.”


영내가 어수선한 가운데 오랜만에 사복 입고 부대를 나왔다. 토요일 하룻밤 자고 가는데, 참 나도 뭐하는 짓인지 때는 이때다... 친구들 불러서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입대 전의 내 방은 그대로인데, 제길, 남의 자취방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벽에 붙은 쪽팔린 브로마이드들을 다 떼버린다 어쩐다 항상 그대로. 술 많이 먹으면 다음날 아무 것도 안 먹는 게 내 패턴인데, 이른 아침부터 문밖에서 달그락 달그락 보글보글 압력밥솥에 김이 솟는 소리, 저 밥을 안 먹으면 오까상이 대대장으로 변한다.


“변변찮은 군대 밥 먹으면서 왜 남겨.”

“아버지 면회 가던 시절 군대로 아세요?”


“엄마들이 군인 간 아들 말을 믿을 거 같니. 얘기해 보면 엄마들마다 받은 내용이 똑같아. 잘 먹고 잘 잔다. 걱정 마라. 안 갈군다. 안 때린다. 기합 구타 꿈도 못 꾸는 군대다. 어쩜 그래 다 똑같니. 터지는 큰 사고처럼 다 쫄아서 입 다무는 것처럼 보여.”


목을 우두둑 꺾는다. 시계 보니 체력단련시간. 이런 네미랄.


괜히 왔나. 거리로 나오니 착잡하기만 하다. 어머니가 세탁한 내의와 양말 때문에 몸은 산뜻하다. 어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말아먹을 가게를 수색 정찰 타격하자.


흐린 하늘을 힐끗 보고 맛폰을 꺼내, 상부 주의사항을 어기고 은밀히 만든 우리 지역대 SNS계정을 누르면서 혹 new가 점멸하는지 긴장. 없다. 내용도 특이사항도 없다. 새 글 알람까지 켜 놨는데도 이렇게 두근거리네.


‘가까우니까 보내주는 거야. 매 30분 지역대 SNS 두 가지 다 확인하고, 영외자 위치확인이나 번개통신 발령하면 잽싸게 전화해서 부대 앞이라고 해. 행보관이 벼르는 분위기야. 조금 늦으면 내가 훈련용품 사오라 한 걸로 하고. 오후 4시까지는 부대 인근으로 붙어.’


“뭐가 있어요?”

중대장님이 어색할 때 버릇. 입을 쩝쩝 다신다.

“누구에게 말하지 마라... 있다. 뭐가 있어.”

“중댐이 어떻게 알아요.”

중댐이 출입문을 봤다가 고개를 돌린다.

“사령부에 있어....”’


디스퀴어 청바지에 돌체 추리닝, 스니커즈.

아메리카노를 들고 은행 24시간 부스로 들어간다.

‘잔액. 다 보내.’

어머니 계좌... 아 핸드폰 주소록.

어머니 입금 알람 안 해놨겠지? 전화할까 겁난다.


대로변 매장의 쿵쾅거리는 음악이 거리를 호령한다. 매장 앞에서 래퍼 저리가라 한 호흡에 20문장 말하며 호객을 하는 아가씨들. 눈이 미쳤다. 안 예쁜 여자가 없다. 여단에 근무하는 특전여군은 고참들과 실 대검 카라브마가가 필요하다. 지나치는 가르마 곱게 탄 아가씨, 떠난 여자가 생각난다. 고참들이 말했지. 면회 올 때 잘하라고. 불현 듯! 어제 또 갸한테 이상한 톡 날린 거 아니지??? 자니 뭐하니 보고 싶다 기다린다 전형적인 개쪽 백태클 레드카드. 카톡 아이콘을 연달아 누른다.


‘휴... 없다.’


Long cool woman in a black dress


막 코너를 도는데, 내가 가야할 칸에 여자가 서 있다. 나 밖에 없는 줄 알았다. 아무리 봐도 여기에 나와 저 여자 둘 밖에 없다. 이제 용미리는 꽉 차서 새로 전입오시는 분들이 드물다. 추모공원도 너무 많이 생겼고.


여자는 깜짝 놀라며 행동을 멈췄지만, 조용히 오열하고 있었다. 칸을 돌아들어갈 때까지 아무 소리 못 들었다. 여자의 무겁고 뜨거운 공기가 두 칸 사이를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엿본 사람이 되어 갑자기 미안하다. 누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됐나. 글쎄.., 여기서 사람 할 말은 아니지만 모습이 아름답다. 얼굴이 눈에 확 뜨이거나 그런 건 아니다.


평범한 얼굴? 쩝. 소설에 써 있는 평범한 얼굴이란 대체 어떤 거냐. 하여간 얼굴에 큰 특징은 없다. 키가 훤칠하고 어두운 옷에 파머머리.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짧고 굵은 호감을 느낀 건... 아마도 여기에 찾아온 목적이 같아서이지 않을까.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 안다. 초상집에서 보는 여성은 다 아름답다 하지 않는가. 알지.


‘당연히 알지. 저거 어떤 맘인지. 왜 모르겠어, 휴...’


오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여자는 5열 횡대로 쌓여 있는 칸의 맨 마지막, 창문 유리와 만나는 코너에 등을 대고 선 채로 웅크려 흐느끼고 있었다. 손으로 입을 막고 있어 못 듣고 꺾었다. 이 5열 종대 망자 분들 중에서 하나. 누가 돌아가셨는가. 아버지? 어머니? 오빠나 동생 언니? 여자는 어디 갔다 오다 들른 것 같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양장 차림으로 행사나 모임에 갔다 오셨나.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한 손은 손수건을 쥐고 떨면서 한 영정사진을 짚고 있었다. 짚은 손을 보니 감정을 주체 못 할 정도로 전율한다.


갑자기 들어가 미안하다. 뭐라 말을 건네기도 무안하다. 추모원에서 먼저 간 사람이 그리워 눈물이 나는데 그게 뭐 이상한가.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저 여자에게 진한 감정을 남긴 누군가가 여기 있다.


여자는 몸을 창 쪽으로 돌려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따각 따각 힐로 대리석 바닥을 찍으며 밖으로 나간다. 1m도 안 되는 거리로 날 지나쳤다. 눈인사나 목례라도 나눌 분위기 아니다. 떠나는 발걸음도 사뿐히...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나까지 급히 울적한 마음으로 아버지 사진 앞에 선다. 상이 났을 때, 어머니가 우겨서 아주 오래 전 것을 영정사진으로 썼다. 대학 졸업할 때 찍은 학사모 사진. 지나보니 나쁘지 않다. 아버지는 힘들고 찌든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곧 내 앞에 존나 이따만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란 젊은이의 단단한 자부심으로 눈웃음을 짓고 있다.


‘왜 왔냐.’

글쎄요. 그냥 와보고 싶었습니다.


상 치르고 처음 왔다. 입대하고 많은 것이 멀어졌다. 난 거기서 살아야 하고 그게 내 일상이며 인생이다. 하사 때 어쩌다 나오면 일요일에 다니던 교회도 어머니와 갔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앞에서 떠드는 게 나에게 심드렁하다. 교회 안에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일요일에 영내 교회 가는 것도 귀찮았다. 내 방도 집도 아버지도 참 멀어 보인다. 내가 못돼 먹은 놈인가 보지.


아버지... 하여간 이 몸과 피와 고질적인 병폐 고집불통을 주셔서 감사하다. 아버지는 한 때 잘 나갔다. 자동차 하청공장을 운영하며 15년 가까이 잘 돌아갔다. 그 위 두 단계 원청 기업이 꼬장을 부려 무너지기 전까지. 마지막에는 직원 다 내보내고 부질없는 단가를 맞추려 혼자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하셨다. 주말에 나도 가서 20시간을 연짱 찍혀 나오는 부품을 정리하곤 했다. 그마저도 완전히 털렸고, 아버지는 겸허하고 인자한 면면이 붕괴했으며... 난 군대로 도피했다...?


아버지는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존경하고 싶다. 한 때 많이 미웠고, 군대에서 지내다보니 외려 기억이 안 나고 떠올려지지 않아 미안하기까지 했다. 아들이 자식이 이래도 되나. 하지만 쇼는 없다. 머리가 큰 이후로 부친과 속내를 나눈 대화는 몇 문장 없다. 나 역시 누구를 사귀고 임신하고 자식 놈을 봐야 저 학사모 쓴 남자의 마음을 이해할 테지. 그래 놓고도 이해가 안 되면 어쩌나. 후후. 그냥 그런 놈이지 뭐.


오랜만에 학사모 쓴 아버지를 위해 손 모으고 기도를 올린다. 오, 하느님. 저승이 존재하는지 어쩐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걸 아시고 명제하는 분이시니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 옳겠죠? 이 못난 자식은 제 아비를 위해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올리려 합니다. 저승에 있다면 보살펴주시고 이승에서 못 다한 행복과 기쁨의 여분을 꼭 나누어주시길 이 못난 자식 구부려 간청드리옵나이다. 기도 형식이나 내용이 하도 오랜만이라 형편없어도 이해를 부탁드리며, 이 모든 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며, 감사와 은혜와 성심을 담아 우러러 보며 말하옵나이다. 이렇게 가족과 부모형제에게 차갑고 시큰둥한 놈의 죄를 꼭 저승길 갈 때 값을 쳐주십시오.


난 쿨하지 못하다. 거짓말이다.

전염인가... 나도 오열하네.

‘에이 씨, 뭐 이렇게 일찍 가! 자식 군대 가는 건 보고 죽어야지.’


죄책감. 더러운 것. 그래,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아버지의 죽음은 나도 연관이 있다. 난 방치했고 보살피지 않았고 냉담했으며, 그렇게 관에 뉘고 태우고 뇌하수체가 잊어간다. 아무도 모르겠지.


‘전쟁? 무섭지. 허나 나에게 올 것이 있으면 오는 것.’

아, 손수건이 없다. 요즘 누가 그 여자처럼 손수건 들고 다니나.


구강과 비강에 잔뜩 낀 것을 훅 공기를 들여 마셔 한 움큼 모았으나, 뱉을 곳이 없다. 화장실에 가던가 나가서 뱉어야 한다. 휴지통도 휴지도 없다.


문득 그 여자가 손으로 짚었던 칸으로 눈이 간다.

‘어?......‘


군인? 젊다. 나보다 어리다. 계급은 모르겠다. 육군 전투복. 왜 저런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썼지? 하다못해 고등학교 졸업사진이라도 쓰지. 순직인가? 작전 중 사고라던가 하여 부대 근처에서 상을 치러 저 사진인지 모르겠다. 이 친구는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에이 못난 사람, 젊어서 왜 죽어.


나오자마자 잔디밭 끝 고랑창에 잔뜩 모은 것을 헉 돼! 뱉었다.


여자가 출입구 바로 옆의 나무를 짚고 서 있다. 무겁다. 나까지 긴장한다. 고개를 푹 숙여 파머머리가 미역줄기처럼 내려와 얼굴이 안 보인다. 하느님, 죄송하지만 참 예쁘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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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복수불반 2 +4 20.11.12 379 23 11쪽
135 복수불반 1 20.11.11 449 25 12쪽
134 용미리에서 만납시다 2 20.11.10 451 21 12쪽
» 용미리에서 만납시다 1 20.11.09 449 18 13쪽
132 너희가 총력전을 아느냐 5 20.11.08 406 25 15쪽
131 너희가 총력전을 아느냐 4 20.11.07 420 18 12쪽
130 너희가 총력전을 아느냐 3 20.11.06 448 18 12쪽
129 너희가 총력전을 아느냐 2 +1 20.11.05 445 18 12쪽
128 너희가 총력전을 아느냐 1 20.11.04 546 21 11쪽
127 나의 투쟁 2 20.11.03 392 18 15쪽
126 나의 투쟁 1 20.11.02 479 17 16쪽
125 불신의 벌판 6 20.11.01 371 19 12쪽
124 불신의 벌판 5 20.10.31 371 19 12쪽
123 불신의 벌판 4 20.10.30 377 20 12쪽
122 불신의 벌판 3 20.10.29 390 21 12쪽
121 불신의 벌판 2 20.10.28 400 2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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